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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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라국 오구대왕의 일곱째 딸은, 딸이라는 이유로 버림받았다. 그 이름은 바리데기다. 버려진 아이라는 이름을 달고 인생을 시작한 아이. 신데렐라가 재 투성이라는 뜻이고, 올리버 트위스트가 못 먹어 말라서 배배 꼬인 몸을 하고 있는 아이라는 뜻이라는 걸 알았을 때처럼 눈물 나는 이름이다.


설화 속 바리데기는 무쇠 옷, 무쇠 신발, 무쇠 지팡이 차림으로 그것들이 다 닳을 때까지 고된 여정을 겪으며 서천서역국으로 자신을 버린 부모님을 구할 생명수를 구하러 떠난다. 그녀는 심지어 생명수 지킴이인 동수자의 아이 셋을 낳아주며 긴 세월을 보낸 후, 기어이 생명수를 구한다. 그녀는 그 와중에 만난 저승 가는 혼들의 아픔에 눈물짓다 모든 아픈 넋들을 위로하는 신이 된다.


나는 바리 설화를 읽으며,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한 꺼풀 벗는 안도감을 느꼈다. 누군가 내 죽음 뒤의 아픔을 위로해 주는 이가 있구나 하는! 어릴 적 읽은 영국 동화에는 이 세상사람 중 누구라도 죽으면 슬프게 울어주는 요정 이야기가 있었다. 늘 누군가가 죽어갔기 때문에 그녀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고, 그녀의 긴 백발에 감춰진 눈은 차마 쳐다볼 수 없이 짓물러 보는 이를 기함하게 했으며, 길 가다 마주치는 모든 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아무도 울어주지 않는 죽음만큼 슬픈 건 없다고 느꼈던 것 같다. 바리는 그런 존재이다. 사람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응어리를 씻어내려 주며 영혼을 깨끗이 씻어 편안한 휴식을 주는 치유.


황석영 작가의 <바리데기>에 나오는 바리 역시, 딸이라는 이유로 버림받았다가 할머니에 의해 구원된 후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인물이다. 그녀의 출생지는 북한이다. 북한을 온통 뒤덮었던 굶주림의 시절 바리는 가족을 잃고 중국으로, 영국으로 옮겨가며 지난한 삶을 살아간다. 그녀가 산 삶은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이 있었고, 그녀가 디디는 땅은 늘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죽음이 결코 멀리 있지 않고, 지옥은 늘 이곳에 있다는 걸 바리의 삶은 처절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마치 설화 속 동수자를 닮은 아랍인 알리와 결혼하고, 아이를 배고, 마사지를 통해 상대 영혼의 아픔을 치유하는 신통력으로 영국 사회 속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알리와 기약 없는 이별을 하고, 갓난아이를 잃는다. 그래도 그녀는 사람들의 아픔을 치유한다. 그녀는 더 깊이 사람들의 속으로 스며들어 고통을 씻어 내린다. 바리에게 사람의 고통은 결코 남의 것이 될 수 없고, 거기에는 국적이나 민족이나 인종, 혹은 부유함과 가난함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조그만 몸은 세상 모든 아픈 이들을 향해 뻗는 구원의 손이다. 너와 나, 이쪽과 저쪽이 아니라 우리이며, 세상은 흐르는 한 줄기 물과 같아서 고통 속에서 혼자 빠져나오기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작가는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작가는 아마 온갖 이름으로 편 가르기, 잘라내기에 광분하는 사람들에게 바리라는, 자신의 살을 싹둑싹둑 잘라내어 사람들의 배고픔 해소해 주는 고단하고 조그만 여인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치려 한 것일지 모르겠다.


긴 기다림 끝에 알리와 재회하고, 스스로 상처를 감싸 안으며 두 번째 아이를 잉태한 바리는 조그만 행복감에 젖는다. 그런 바리 바로 앞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난다. 여전히 세상은 생지옥이다. 가녀린 북한 소녀 바리의 구원의 몸짓, 해원의 간절한 바람은 늘 세상의 폭력과 광기 때문에 멈칫거린다. 바리는 하염없이 눈물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아가야, 미안하다.”
책장을 덮으며, 눈물 어린 눈으로 나도 조그맣게 중얼거린다. “이런 세상,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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