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일본 소설에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 툭하면 무릎을 꿇거나, 울거나, 나이 많은 사람들이 별 것 아닌 일에 쉽게 고개를 숙이는 그들의 문화에 적잖은 거부감을 지녔기 때문이고, 어릴 때부터 일본 소설에서 보아 온 특유의 화법이 거슬리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은 최근 요시모토 바나나나 츠치 히토나리를 읽으면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뭔가 불편한 낯섦.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런 반감을 느낄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섬세하다 못해 선병질적인 예민한 감성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보통 남과 맺고 사는 인연에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보통을 뛰어넘는 특별한 인연에는 그런 섬세함이 바탕이 된 깊은 소통이 필요할 수 있겠구나 싶은 느낌이 처음으로 들었다.

  옛날에 수학박사였다던 꾀죄죄한 작은 노인. 그는 교통사고로 1975년에 멈춘 채 80분간만 기억이 유지되는 장애를 앓고 있다. 미망인인 형수가 별채를 내주고, 파출부를 고용해 주어 생계를 유지하지만 예상대로 파출부는 쉴 새 없이 바뀐다.

  얼핏 보면 그는 필요도 없는 수식에만 매달려 하루를 보내는 정신 이상한 노인네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돈 받고 정해진 일만 하면 되는 파출부라고 해도 다음 날 완전히 새로운 기억회로로 갈아 끼우고 똑같은 질문을 해대거나 자기 세계에 빠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일삼는 지저분한 노인네를 상대하는 일에는 익숙해지기 어려울 것이다. 소통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에게는 소통이라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파출부이거나 기억이 정지된 노인네라고 하더라도. 또 파출부 엄마와 둘이서만 살아가는 소년에게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파출부와 소년은 결국 박사와 친구가 된다. 어떤 의미로 그들은 이미 가족이다. 소년의 손이 베이자 너무 슬퍼하며 패닉 상태에 빠지고, 소년에게 날아오는 파울 볼을 그 약한 몸으로 대신 막아내는 박사는 소년의 멘토이기도 하고, 빈자리를 채워주는 아버지이기도 하다. 소년에게 스며있는 마이너스 1을 채워주는 1과 같은 사랑이었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람에 대한 애정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므로. 파출부와 소년은 스스로 수식의 아름다움에 동화됨으로써 박사와 기억의 한계를 뛰어넘는 연결의 통로를 지니게 된다. 박사에게 수식이 영원불변의 진리이자 아름다움이듯, 그리하여 사랑할 수 없는 형수를 사랑한 마음만 깊이 품고 생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듯 파출부와 소년 루트에게도 진실은 진실이었다.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자기 앞의 생>의 에밀 아자르는 말했다. 박사도 사랑하는 대상을 지녔으므로 그 반복되며 끊어져 결코 되살아나지 않는 일상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사랑한 것은 내보일 수 없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진실, 마치 수학공식과도 같이 불가해한 질서를 통해 아름답게 레이스를 그리며 존재하는 진실이었을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해도 결코 변하지 않을 단 하나, 오가와 요코는 수식이라는 단어 뒤에 진실이라는 단어를 숨겨놓았을 것 같다. 

  박사의 말 한 마디가 가슴에 남는다.

  “종이에 진정한 의미의 직선을 그리기란 불가능하다. 진정한 직선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여기에밖에 없어.” 그가 가리킨 곳은 자기 가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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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킬러 2007-10-30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대문에서 우연히 들어와봤는데.. 리뷰가 단정하면서도 잘 읽히고.. 책의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는듯해서 좋네요..
영화는 보고 책은 못본 상태인데.. 궁금해지는 책이에요..

파란흙 2007-10-31 08: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일독을 권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