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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고향옥 옮김 / 양철북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졸업. 참 식상한 느낌의 어휘다,하고 책을 받아들면서 생각했다. 졸업식에 눈물이 없어진 날부터 이 말은 그저 그런 느낌이 되어 버렸다. 인생에서 한 고비를 넘길 때마다 그때를 졸업이라고 표현하는 것, 역시 식상하다. 표지 그림도 의미심장해 보이나, 한때 유행했던 스타일이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예상 외의 호감이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솟아올랐다.
이야기가 매우 새로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너무 익숙해서이다. 식상할 만큼 익숙해서. 딱 나이 마흔이면 느낄 인생의 그런 것들이 딱 알맞게 책에 농축되어 있고, 그것이 마흔 나이에 슬하에 둔 자녀들의 인생과, 또 짧거나 길게 죽음을 앞둔 마흔 나이 사람들의 부모들의 인생과 마침맞게 어울려 개개의 삶, 그리고 삶들의 고리에 대해 마침맞게 펼쳐져 있다.
아마 작가 나이 마흔에 썼던 (혹은 마흔에 기획했던) 솔직한 자전적 단편소설들이리라 그렇게 여겨졌다. 그만큼 솔직하고 감정에 군더더기 없다. 마흔이란 나이는 자녀가 청소년기에 접어들고, 삶의 굴곡이 깊어지고, 부모가 암 따위로 세상을 떠나는 나이다. 그 자신 기존에 매달려 왔던 삶에서 떨려나거나 스스로 멀어지기 십상인 나이이고, 앞으로 살아갈 젊지 않은 날의 무게가 양 어깨에 턱하니 내려앉는 나이다.
이 책에는 그 나이의 삶에 닥치는 네 가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첫째 이야기 '졸업'은 전형적 일본식 어투가 거슬리는 가운데도 자살한 남자와 그 남겨진 임신한 아내, 태어난 아이, 가장 친하다 여겨졌던 친구(나이 마흔), 임신한 아내의 새 남편이자 아이의 새아버지인 남자의 삶을 보여주며, 마흔이 사회에서 겪게 되는 낙마라든가 청소년의 왕따 문제도 건드리는 노련함이 돋보인다. 삶과 죽음에 대한 관찰기록이랄까. 그러나 제목, 역시 식상하다.
두 번째 이야기 '행진곡'은 마흔 살의 비교적 잘 나가는 직장인이 격조했던 홀어머니의 임종을 앞두고, 여동생과 더불어 병실을 지키면서 풀어나가는 과거, 현재의 이야기다. 노골적이면서도 함축적인 가족에 대한 성찰이 독자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우리 주변에 편재하는 사람 사이의 불통, 인생유전. 그런 것들을 느끼게 한다.
세 번째 이야기 '아버지의 마지막 수업'은 엄격한 선생님이자 아버지였던 암 환자의 아들, 그 역시 선생님인 마흔 살 남자가 화자로 등장해 또 다른 색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과 더 깊은 생각을 들려준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같은 느낌이 있지만 훨씬 정서적으로 우리와 가깝다. 툭하면 암에 걸려 고통 속에 마지막 나날을 보내는 수많은 우리 부모들 모두가 선생님이었을 거라는 동질성을 느끼게 한다.
네 번째 이야기는 어릴 적 젊은 나이에 자궁암으로 죽어간 어머니의 일기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주인공이 새엄마로 대표되는 다른 세상과 어떻게 불통의 나날을 살아가다 화해에 이르는가를 담담히 엮어간 '추신'이다. 역시 마흔 살.
참 공감가는 이야기들이다. 주인공 연배인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마치 일기를 읽듯이 차분하고 저릿하게 읽힌다. 남 이야기기 같지 않다. 대단한 해법을 제시하지 않지만 일기가 그렇듯 써내려가는 것 자체로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주니까 할 말 해버린 느낌이 후련하다. 오히려 책 소개에서 두드러져 보이던 청소년이란 부분은, 물론 매 작품에서 건드리고 있으나 그다지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그저 모두 뭉뚱그러져 사람살이를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어떤 나이이든 자기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을 듯하다.
마흔 살 주인공들의 이야기. 아마 화자가 자살을 꿈꾸는 청소년이 되었다가, 남편 잃고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가 되었다가, 죽음을 기다리는 할아버지가 되었다가, 이렇게 종횡무진했더라면 공감의 폭이 많이 줄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마흔 나이의 남자가 마흔 만큼의 이야기를 하고, 그 눈으로 살아왔던 날, 살아갈 날을 이야기하니까 청소년 이야기도 되고, 노년의 이야기도 되는 것 아닐까 싶다.
다시 강조하는 공감. 자기 이야기만 해도, 모두의 이야기가 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청소년보다도 오히려 마흔 나이에 처했거나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권하는 우리들의 자서전 혹은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