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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ㅣ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13
메리 셸리 지음, 이인규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7년 4월
평점 :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수많은 오해 가운데도, 압권은 얼굴에 꽂힌 나사못이 아닐까 싶다. 적지 않은 이들이 괴물의 이름을 프랑켄슈타인으로 알고 있기도 하겠다. 그리고 더 심각한 오해는 이 책이 처음부터 3류 호러영화로 세상에 나왔을 거라고 생각하는 점이다.
이 책은 그런 오해와는 달리 계몽주의의 이성과 과학에 대한 맹신을 비웃는 낭만주의 계열의 고전소설이다. 작가인 메리 셸리는 저 유명한 퍼시 비시 셸리의 아내로도 유명하다. 이 책의 저술은 바이런이나 셸리가 주도한 낭만주의 운동의 연장선이기도 했겠지만, 그녀와 셸리의 사랑이 셸리의 전 부인의 자살을 부른 점이나, 어린 세 자녀의 잇따른 죽음, 남편 셸리가 서른 살에 먼저 세상을 뜬 것 등 작가의 인생에는 깊은 굴곡이 있었고, 그것이 어쩌면 이처럼 어두운 소설을 쓰게 된 배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젊은 과학도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죽은 개구리에게 전기가 통하자 근육이 움직이는 것, 생명활동이 수많은 화학작용의 결과라는 것 등을 기반으로 마치 연금술에 매료되듯, 생명창조에 매달린다. 그는 이 연구가 인류에게 큰 선물이 되리라 확신한다. 이윽고 온갖 화학약품이 담긴 물탱크에 자신의 허벅살을 잘라 넣고 번개의 전기를 통하게 한 결과, 정말로 기적처럼 생명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배양 시간을 조절하지 못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몸집이 크고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게 생긴 괴물이 생겨나자 빅터는 혐오감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버린다.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결국 빅터는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의 끔찍한 죽음, 그리고 그 자신의 죽음으로 대가를 치른다.
그 누구와도 섞일 수 없는 혐오스러운 괴물(빅터는 괴물이 너무 혐오스러워 이름을 붙여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과 깊은 슬픔을 나눌 배우자를 원했으나 빅터는 마지막 순간에 배양 중인 새로운 생명을 파괴하여 그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괴물은 영원히 종적을 감춘다.
솔직히, 종교는 없으나 무신론자는 아니며 인간이 접근하지 말아야 할 최후의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내게 이 책의 결말은 너무 온건하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이름 없는’ 괴물의 복수가 너무 쉽게 막을 내렸다는 생각이다. 지나치게 뛰쳐나가 버린 과학의 결과는 몇 사람의 죽음보다도 훨씬 더 참담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핵폭탄이나 유전자 변형 식품, 생명 복제 등은 이미 무서운 결과를 초래했거나 진행 중이다.
이 책이 쓰인 시대에 생명 복제란 개념이 존재했을 리 만무하지만, 상상력마저 지금보다 덜 발전한 것은 아니었기에 이미 메리는 인간의 과학이 가지는 맹목성, 위선 내지 그 말로를 예견할 수 있었지 싶다. 인류를 위한 연구라는 명분으로 너무 나아간 과학은 늘 인간에게 심각한 부작용으로 답한다. 불치병 내지 난치병 환자들에게 희망의 빛으로 여겨져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줄기세포 연구는 그 과학적 성과는 차치하고, 과정에서부터 수많은 부작용을 낳지 않았던가.
그러니 과학 발전을 이루지 말자고 할 수도 없고, 옛날 식으로 살기를 고집하는 것도 아니고. 비전문가 입장에서는 딱히 어떻게 하자고 할 수는 없는 문제이나 제동장치 없는 수레가 비탈을 굴러내려가는 걸 보는 듯한, 혹은 그 수레에 탄 느낌인 것을 어찌해야 하나!
그런 의미로 <프랑켄슈타인>은 경고의 책이다. 삶이 그렇듯이 과학도 중간 중간 되돌아보기가 필요하다고 하는 속도 조절의 권유이다. 그렇다. 처음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우리에게 허락된 최선일 수 있다. 빅터가 괴물의 요구에 따라 가엾은 여인 저스틴의 복제를 만들다 중지한 것처럼, 시작했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보자는 것이 아니라 잘못 들어선 길은 되돌아 나와 다시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너무, 정말 너무 멀리와 버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