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엄마 메타포 2
클라라 비달 지음, 이효숙 옮김 / 메타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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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쁜 엄마라... 내 이야기군. 이런 느낌이다. 내가 아주 악질 엄마는 아닐까? 이런 생각을 이따금 해 보는 건 나뿐일까? 갖가지 생각을 새삼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특히, 첫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스스로 자제하지 못하고 아이를 상대로 포악하게 굴었던 기억이 여러 차례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볼 때는 처음으로 주어진 여러 자리, 며느리, 아내, 엄마라는 자리가 힘들고 버거울 때 그만 약한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던 것이 아닐까 싶지만, 그땐 그랬던 것 같다.

    그러고도 미진한 부분. 아이를 혼낼 때, 따끔하게 해서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핑계로 지나치게 냉혹하게 하면서, 되지도 않는 완전함을 요구하고, 그러면서 뭔가 가학적 쾌감을 느낀 적은 없었나 하는 것이다. 절대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도대체, 왜 그렇게 되는 걸까? 내 살과 피 같은 아이에 대해. 어쩌면 그건 자식을 그야말로 분신으로 여겨, 자신의 삶을 투영시키는 잘못된 관념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으려니... 그런 혼란을 둘째 낳으면서 많이 극복했다. 자식을 떼어놓고 그 아이만의 삶을 따로 들여다보는 여유를 가지게 된 것도 둘째를 기르면서였다. 성숙하지 못한 엄마 슬하에서 자란 큰아이에게는 이래저래 미안한 마음.

  <나쁜 엄마>는 그런 것들을 확대해 돋보기로 들여다보여 주는 책이다. 미성숙된 인간으로서의 엄마에 대한 해부학이다. 어찌나 날카로운지 마치 칼날 위에 선 기분이고, 소설보다는 정신분석학 사례처럼 읽히기도 한다. 제목만 보고 재미있겠다고 달려들었던 5학년 둘째는 첫 부분에서 손을 들었지만, 그래도 공감한단다. 분홍 엄마와 검은 엄마의 존재에 대해. 가슴이 서늘해진다. "너도 분홍 딸일 때가 있고, 검은 딸일 때가 있단다. 사람은 모두 두 가지 면이 있지 않니?"하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핵심은 정도의 문제이고 자제력의 문제일 것이다. 그저 예뻐라하기만 한 것 같은 둘째의 반응이 저렇다면, 큰아이에게는 읽히고 싶지 않다. 

  갑자기 두 아이를 차례로 불러 살짝 물어보았다. "행복해?"
  아이들은 "응!"이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돌려주었다.
  "엄마는 어떤 엄마니?"
  "친구 같을 때도 있고, 무서울 때도 있고."
  "그게 싫어? 늘 친구 같았으면 좋겠니?"
  "그렇지는 않아. 에이, 엄마 나쁜 엄마 읽고서 찔리는 구나."
  "책, 처음만 조금 읽고서 아는 척하기는."

  때 아니게 이런 대화까지 주고받았다. 엄마는 얼마나 아이를 이해하며 살아갈까? 하루 중 아이의 진정한 바람을 충족시켜 주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엄마도 인간이라, 때로 비겁하고 두려워하고, 나약하며 극도로 이기적일 때가 있다는 걸 아이가 충분히 이해하기 전까지 어떻게 하면 좋은 엄마의 모습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쉬운 노릇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작정해 본다. 검정보다 더 나쁜 건 분홍과 검정을 오가는 양극화일 수 있으니, 나는 연하늘색으로 주욱 가 보는 연습을 하자고. 기복 많은 삶을 자식에게 그대로 드러내는 우를 범하지 말자고. 아, 고해성사를 강제하는 이런 소설을 읽으면 더 어렵게 느껴진다. 좋은 엄마 노릇. 좋은 엄마이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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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오르간 마음이 자라는 나무 15
유모토 가즈미 지음, 양억관 옮김 / 푸른숲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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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온통 봄 아지랑이 같은 이미지로 가득 찬 책이다. 모호하고, 햇살 눈부시며, 차분히 가라앉지 못하고 땅에서 몇 센티미터쯤 떠다니는 느낌. 뭔가 가슴 아프고, 불안하고, 뜻 모를 눈물이 시시때때로 나오고. 세상이 저만치 떨어져 존재하는 느낌. 바로 인생의 봄이었던 내 중학교 시절, 그 때의 이미지. 그때는 나도 간단없이 죽음을 생각하고, 가족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그랬던 것 같다. 그 시절, 일기장에 온갖 감정을 써놓았던 그 시절엔 세상이 참으로 낯설었다. 그랬다. 웬 꿈이 그토록 잦고 많았던지. 매일 잠 들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마치 아지랑이처럼 산산이 흩어져 이리저리 떠도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그 모든 느낌이 어제처럼 되살아왔다.
 
도모미에게, 이유야 많았을 것이다. 할머니의 죽음, 할아버지에 대한 이질감, 부모의 불화로 인한 가족 해체, 땅을 둘러싼 이웃집과의 다툼, 정신지체인 동생에 대한 부담감 등등...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어쩌면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그 아이는 삶의 한 단계를 넘어서는 데 따르는 아픔을 겪고 있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 시절 그랬던 것처럼. 제 속에 무슨 괴물이 들어 있다고 느껴, 과거의 나와 괴물을 품은 나, 남들 눈에 비치는 나 사이의 괴리를 고통스러워하는 모든 사춘기 아이들이 그런 것처럼.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하는 괴로움을 앓는 모든 청소년이 그런 것처럼.
 
그리고 도모미 뿐 아니라 도모미의 가족 모두는 삶의 한 단계를 넘어가기 위한 감기를 앓고 있었다. 도모미의 엄마를 예로 들면, 친정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남편은 집을 떠났으며, 공부 잘 하던 큰아이는 중학교에 떨어지고, 둘째 아이는 정신지체를 앓고 있어서 괴롭다. 어릴 적 좋은 마음으로 담을 세운 친정아버지의 행동 덕분에 이웃집에 땅을 빼앗긴 것도 억울하고, 그 아버지가 옛날 물건에 집착하는 것도 보기 싫다. 그런 식이다. 도모미의 엄마는 아마, 여름을 넘기고 있을지 모르겠다.
 
봄을 넘기기.
그러기 위해 이 책의 이야기는 자못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도모미의 삶은 심한 감기 끝에 미열만 남기고 기어이 일어서는 회복같은 화해로 마무리하며, 이어 긴 여름으로 향한다.

여름으로 향하기.
 
삶은 그런 것이다. 여름이 스러지는 날이 곧 오고, 조락으로 들어서고, 모든 잎을 떨구고 땅으로 떨어져 내리겠지만, 그 모든 것이 금방이겠지만, 그래도 봄은 길고 아프고, 들뜬다. 그러나 그조차 가을로 들어서는 내겐 부러움이다. 봄 속에 서서 봄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아 가슴앓이하는 모든 아이들에게 축복의 박수를 보낸다. 너희들의 봄이 그래도 아름답단다, 하면서. 봄맞이를 하고 있는 우리 큰아이는 이 책에서 무엇을 느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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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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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재미있을 수가.

첫 몇 장을 읽다가 책을 탁 덮었다. '이제 넌 꼼짝 마라.'다. 이 정도면 웬만한 책에는 눈도 까딱 않는 우리집 첫째놈도 반하지 않을 재주가 없으렷다. 이런 생각으로 혼자 읽기가 너무 아까워 책(가제본)을 닫아버린 것이다. 첫째가 하교하기를 기다려 첫 장을 읽어주었더니, 과연 난리가 났다. 읽는 나도 간만에 육두문자를 버젓이 써 가며 맛갈 나게 낭독을 했더니 속이 다 후련했다.
악, 재미있다!!

책 읽으며 이처럼 눈물나게 웃어 본 기억이 언제였던가 싶은.
눈물난다는 말을 나는 두 가지 의미로 썼다. 재미있고 우스워서, 그리고 마음 짠해서.
사실 이 작품의 골격은 흔히 들어오고 봐왔던 스토리라인 위에 있다.
장애와 소외, 슬픈 사연을 지닌 다문화가정, 선생님 우리들의 선생님 류의 의분에 찬 스타 선생님, 재수 없을 법한 전교 1등 소녀와 우수에 찬 소년의 가시밭길 사랑 등등.

그런데 왜 이 책이 이처럼 특별히 재미있는가 하면,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말맛과 슬쩍 숨기고 슬쩍 드러내는 기법에 있다. 다 알다시피 '슬픈 눈망울의 소녀가 살았어요.' 류의 이야기는 하나도 슬프지 않다. 오히려 이처럼 웃기는 이야기 속에서 은근히 드러나는 슬픔이 진짜로 슬프다. 그래서 더러, 눈물을 글썽거리며 책을 읽었다.
참, 재미있다.

딱 한 대목만 소개한다. 완득이 아버지가 카바레에서 일자리를 잃고, 5일장마다 중국산 손톱깎기 세트 등을 팔러다니기 위해 산 빨간색 티코. 19만 킬로미터를 뛴 이 작은 차에 앞집 사는 아저씨가 날카로운 무엇인가로 낙서를 한 바람에 완득이가 아저씨를 때린 사건. 결국 완득이의 담임인 똥주가 나서서 법 전공 사회선생님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무마하고 난 뒤의 상황이다.

'우리는 치료비를 주지 않았고, 앞집 아저씨도 티코 도색 비용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티코에는 여전히 씨불놈이라고 써 있다. 그나마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 건 빨간색 네임펜으로 글씨를 덧씌웠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종종 해야 할 것 같다. 앞집 아저씨는 똥주만 보면 뻑큐를 날린다. 똥주는 앞집 아저씨만 보면 입모양으로 '좆까'라고 한다. 낙서 사건으로 똥주가 학교 선생님인 게 동네에 알져져 체면상 소리까지는 내지 못했다.'

씨불놈이라는 단어의 사연을 앞에서부터 읽어온 독자로서는 눈물 나게 웃기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실로, 내가 '나비처럼 우아하게 날 때 상대가 벌처럼 쏘'는 세상에서 살맛나는 이야기 한 자락이다. 마당놀이 한 편 신명나게 구경하고 난 기분. 완득이는 교회에 가서 똥주 좀 죽여 달라고 빌다가 어느새 똥주와 예수님의 얼굴이 겹쳐보이게 됐다는데, 나도 만나 보고 싶다. 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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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아, 평화를 믿어라 - 엄마의 전쟁 일기 33일, Reading Asia
림 하다드 지음, 박민희 옮김 / 아시아네트워크(asia network)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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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이 뭔가에 대해, 그것이 지역의 이름인지, 민족의 이름인지, 혹은 종교적 공동체의 이름인지에 대해서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 채로 그저 막연한 상식만 가지고 있던 내게 최근 <유대인>, <이슬람>, <팔레스타인>에 관한 책을 한꺼번에 읽을 기회가 생겼다. 이 책을 받아 하루만에 읽고도 선뜻 리뷰 쓰기 버튼을 누르지 못한 것은 나머지 세 권의 책이 충분히 읽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 <아이들아, 평화를 믿어라>까지 네 권의 관련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내 머릿속은 부옇다. 명확한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그간 숱한 책에서 이유 없이 끔찍한 살육의 대상이 되어온 저 안네의 민족, 유대인은 이 책 <아이들아~>에서는 잔인한 살인자로 묘사된다.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레바논을 자신들의 욕심만 위해 공격해대는 반인도주의적 집단으로 묘사된다. 저자는 마지막에 가서야 평화를 운운하지만,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차 있다. 그건, 그들이 자본과 무력을 앞세워 몸밖에 가진 것이 없는 아랍인들을 탄압하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들이 그 전에 당했던 것처럼.

팔레스타인은 땅을 중심으로 한 아랍 민족의 연합체이고, 지금은 살던 땅에서 쫓겨나 몇몇 지역에 나뉘어 존재하거나 인근의 나라들에서 난민 거주지를 형성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으며, 임시정부 형태로 대표기관(PLO)을 가졌다. 한 마디로 독립국가가 아니며, 이스라엘에 의해 음으로 양으로 지배당하는 삶을 산다. 따라서 마치 우리가 일제에 대해 그랬듯이 끊임없이 소규모 무력투쟁을 하거나 테러를 하는 집단들이 존재한다.

헤즈볼라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나라, 레바논의 정당 중 하나이며, 이슬람의 기치 아래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무장단체이기도 한데, 반 이스라엘 및 이슬람주의가 팔레스타인과 동질성을 형성하며, 이스라엘 레바논 침공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저자인 림 하다드는 레바논의 부유한 기독교도 집안에서 태어난 여성이다. 아버지가 의사여서 레바논이 이스라엘 침공 때문에 전쟁을 겪자 한 동안 미국으로 건너가 살며 교육받고, 다시 레바논에 돌아와 기자로 일한다. 그녀는 동료인 영국인 닉과 결혼해 두 아이를 데리고 살다가 다시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불바다로 변하는 베이루트를 떠나 산 속 저택을 빌려 3주간 피신해 살며 전쟁터를 누비는 남편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 33일간의 악몽을 이 책으로 펴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와 희생된 어린아이들 그리고 자식과 남편, 친척들을 잃은 피눈물 흘리는 어머니들의 모습이 이 책을 쓰게 한 동기이다. 전쟁이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하는지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다음 세대에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으로 이 책을 썼다.

나는 한 어미로서,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들은 성인으로서 이 책의 모든 내용에 참으로 공감한다. 그 어떤 이유도 무고한 생명의 살상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없음에 통감한다. 그러나 저자에 대해서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아니, 사실은 평화를 논하는 책의 저자에 대한 내 기대치가 너무 커서 그럴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읽히는 림은 그저 이기적이고 소시민적인 한 어머니, 아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누리는 자의 위치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는 무관심하다가, 피해자의 입장이 되니 흥분하는 모습. 미국을 통해 많은 것을 얻으며 미국 스타일로 살아가다가 가까이에서 대포 소리가 들리니까 그제서야 팔레스타인에 대해, 이스라엘과 그 뒷배가 되어 주는 미국에 대해 적개심을 불태우는 모습이 그랬다. 어쩌면 자신이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더 큰 의미의 용서를 보여주는 <내 이름은 임마꿀레> 같은 책에 너무 익숙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은 말하자면 '엄마의 전쟁일기'라고는 하지만 저자 자신이 '목격자'에 머물고 있으므로 솔직히 말하면 깊은 감동은 주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이 지역에 대한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면에서 매우 의미롭다. 그리고 어떤 명분이 폭력이나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폭력은 가하는 자나 당하는 자 모두를 차츰 무디어지게 한다. 폭력에 대한 갚음은 폭력밖에 없다고 여기게 만든다. 어린 아이들이 총을 들고 이스라엘로 몰려들게 만든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든다. 결국 모두에게 미래는 없다. 따지고 보면 지금 중동의 모든 비극적 상황도 유럽열강의 식민지 지배의 잔해들이다. 그리고 전쟁을 통해 성장한 신흥강국 미국의 욕심의 배설물이다. 이스라엘의 팽창주의를 막을 자는 그들이다.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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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의 아이
아마두 함파테 바 지음, 이희정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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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72쪽의 이 책을 읽는 매일밤 늦은 시간은, 일종의 평화가 찾아드는 시간이었다. 마치 기교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무성영화를 보는 듯, 귀나 눈의 성가신 자극 없이 편안하게 읽히는 책이었다.

아마두 함파테 바는 1900년에 태어나 1991년에 죽었으니 요즘으로 견주어도 매우 장수한 인물이다. 그가 90년 넘는 세월 동안 지켜본 아프리카의 삶과 생각, 전통이 고스란히 이 책으로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참 의미롭다. 이 책을 읽기 전과 후의 아프리카에 대한 내 생각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독자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고.

아마두의 삶은 프랑스 식민지로서의 말리 인들의 삶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백인들은 똥조차도 남다른 별개의 종으로, 어떤 백인도 흑인을 향해 채찍을 휘두를 수 있던 시대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아마두 역시 차출되어 프랑스의 식민교육 대상자로서 프랑스어를 배워 흑백인, 즉 백인의 하수인으로서 토착민들에게 프랑스식 문화를 전수하는 중간자 역할을 했고, 그 일이 작가로서의 기반을 닦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들판의 아이>에 등장하는 작가를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은 여전히 아프리카의 전통을 목숨처럼 귀하게 여기는 자부심의 상징들이었다. 아무도, 조상과 자신들의 땅과, 이웃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자연과 동화되는 정신세계는 놀랄 만큼 고요했다. 그들은 그 흙먼지 요란한 길에서, 저녁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노래하는 공동체에서 더없이 행복했던 것이다.

그처럼 깊은 강물과도 같이 깊이 흐르는 정신세계를, 다른 문화에서는 어쭙잖은 잣대로 '야만'이라고 몰아부쳤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들이, 총과 대포를 앞세우고 증기선과 기차를 앞세워 한 구석으로 몰아넣은 아프리카인들은 다만 그런 기계에 일시적으로 주눅들었을 뿐이고, 틈만 나면 이 유서 깊은 종족들은 백인을 우습게 여겼다. 이들의 전통과 관습에 대한 이야기, 그 의미를 차근차근 읽고 나면 독자인 나도 백인들이 우스워졌다. 그 하얀 벽돌 집과 은식기가!'아프리카 사람들끼리 있을 때는 식민 당국의 어떤 명령도 통하지 않았다. 특히 조그만 선물이 오갈 땐 말할 것도 없었다.'(567p.)는 문장은 서구식 합리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가 자못 심장하다.

이 책에서는 한 마디도 누구를 비난하는 문장이 없다. 아마두는 아프리카의 지혜에서 비롯된, '누구에게도 한 조각 착한 마음은 남아 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기대를 결코 저버려선 안 된다는 사실'(453p.)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는 보이는 현상 뒤에 숨은 실낱같은 호의를 찾아내는 눈을 가졌고, 그럼에도 '상관을 받들되 신처럼 여기지는 말라.'(570p.)는 어머니의 충고를 한 시도 잊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의 많은 등장인물들은 조금씩의 결점을 지녔으나 한결같이 인간적이다. 그들 위로 어떤 역사가 지나가며 피를 부르고, 삶의 터전을 황폐화시켰든지, 그들은 훼손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아마두의 어머니 카디야의 삶은 마치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몸뻬 바지 하나로 사철을 나며, 부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식구들이 남은 음식을 맛나게 먹었던 우리네 어머니의 삶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면서도 곧은 정신 하나는 누구도 못 건드리게 했던 그 꼬장꼬장한 삶을. 그토록 잘 생겼고, 품위 있고, 강했으며, 동생을 사랑했던, 아마두의 형 함마둔이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그 어머니 카디야의 마음 속이 들여다보이는 느낌이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고 돌아설 줄 아는 강한 어머니의 마음을 나는 이제 안다.

이 책, 마치 어릴 적 내 삶의 일부와도 겹쳐지는 듯한 아마두의 어린 시절은 낯설면서도 친숙한 느낌이다. 한 번쯤, 지나치게 비장하거나, 끔찍하지 않은 그냥 아프리카 이야기를 듣고 싶은 모두에게 권한다. 눈꼽만큼 남은 우월의식 따위 집어던져 버릴 자세가 된 모든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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