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이 끝나는 곳 (양장)
셸 실버스타인 글. 그림, 이순미 옮김 / 보물창고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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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쉘 실버스타인의 시집 <다락방의 불빛>을 접한 뒤, 다시 그의 시를 만났다. <골목길이 끝나는 곳>. 그때도,  지금도, 제목이 주는 여운이 길다. 골목길 끝에 서서 다락방에 불빛이 새어나오는 걸 쳐다보고 선 느낌이 된다. 그러나 막상 시집을 펼쳐 읽으면, 우리가 기대하던 서정적인 느낌의 문장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시인 듯도 하고, 짧은 우화인 듯도 하고, 때로는 폐부를 찌르는 잠언같은 글들이 작가 자신의 그림과 어울려 얼핏 보면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그로테스크란 낱말이 떠오르기도 하는 그런 시들, 그림들. 작가는 이 책에서 상상의 끝까지 다가간다. 현실이 팍팍할수록 더 멀리 가는 그런 상상이다. 그래서 더욱, 먼 상상 뒤에는 생생한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첫 번째 시는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초대장이다. <초대합니다>에서 작가는 꿈꾸는 사람, 몽상가, 소망가, 거짓말쟁이, 희망하고 기도하고 마법의 콩을 사는 사람들에게 오라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라고 부른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 중의 한 명이다. 나는 초대에 응해 책 제목이 되는 <골목길이 끝나는 곳>이란 시를 찾아본다. 찾아보기는 맨 뒤에 있지만 그냥 넘겨 62쪽으로 찾아간다. 작가에게 골목길이 끝나는 곳은, 부드럽고 뽀얀 풀이 자라고, 진홍빛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박하 향내 나는 바람이 서늘한 달밤에 새가 날개를 고이 접고 쉬는 곳이었다. 또 하얀 분필로 그린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이었다. 잠깐 눈을 감고 골목길이 끝나는 곳을 떠올려 본다. 음, 느껴진다. 나도 어릴 적 자주 갔던 그곳이다. 

<골목길이 끝나는 곳> 옆에는 <눈사람>이란 시가 있다. 눈사람은 7월이 보고 싶지만,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봄이 시작되면 녹기 시작하는 눈사람이 7월을 보기 위해 태양을 견디고 서 있는 모습으로 시는 끝을 맺는다. 갑자기 슬프다. 눈사람이 7월을 만났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된다. 나도 언젠가 본 듯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어떤 계절을 그리워하므로. 

나는 이 시집을 두 번 읽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고, 재미없다 느껴지는 부분도 있고. 그래서 죽 읽어내린 다음, 다시 한 번 찬찬히 보았다. 그러자 참 많은 것들이 다가왔다. 그저, 상상해보는 일로 시작하여 삶의 깊은 부분, 그립고 그리운 부분을 건드리기도 하고, 그리 살지 말라고 뒤통수를 때리기도 하는, 혹은 그냥 재미있기만 하기도 한 시들이 차차 다가오기 시작하더라는 거다. <가난뱅이 앵거스>가 울고 싶을 정도로 배가 고플 때나, 바람 불어도 입을 옷이 없을 때 느끼지 못했던 가난을 캐서린이 황무지를 떠나자 딱 한 번 느낀다는 이야기도 새롭게 다가왔다. 

쉘 실버스타인에게 그냥 사물은 없는가 보았다. 그에게는 세상 모든 것들이, 날아다니는 먼지 한 알조차 다른 의미로, 다른 음률로, 다른 색깔로 다가가는가 보았다. 참 독특한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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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 액션! 우리 같이 영화 찍자
김경화 지음, 정우열 그림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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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천국'이 단지 영화 제목만이 아님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누구나 한때 시네마키드 시절을 거치며, 시네마 천국에 몸을 의탁해 꿈을 꾸고 우주를 날아다니고 더러 힘든 현실을 잊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란다. 한때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지 않은 이가 한 명이라도 있을까? 그러나 영화는 현실에서 멀다. 마치 현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내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존재한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어떻게 할까. 영화를 만들어 볼 수 있다면? 누구라도 "야호~"를 외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영화에의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실용서이다. 먼 영화를 가깝게 끌어당겨 차근차근 들어 보여주며, <영화 너를 만들어 주마>라는 활동책을 부록으로 제공하여 아이들의 의욕에 불을 당긴다. 나같은 어른은 이 책을 보고서도, 그럼에도 영화를 만들지 못할 수십 가지 이유와 제약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분명히 실제로 해보는 녀석들 한 둘은 나올 것만 같다. 그 녀석들 중 한 둘이 또한 영화를 먹고, 영화에 누워 사는 사람이 된다면 이 책의 의의는 충분하지 않겠나 싶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레디, 우리들이 알고 싶은 영화 이야기'에서는 영화의 탄생과 원리, 역사 등을 다루고 있고, '액션! 흥미진진 우리들의 영화 만들기'에서는 실제로 영화 한 편을 만드는 느낌으로 조목조목 만들기의 실제를 안내하고 있다. 그야말로 이론에서 실제까지 꿰고 있는 셈인데, 무척 간단명료하면서도 고루고루 빠짐없이 다루어지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아마 아동학과 졸업, 영화연출 공부, 단편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쓰고 연출한 경험이 그 누구보다 눈높이와 실용성, 재미를 고루 갖춘 책의 저자로서 힘을 발휘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앞 부분에 중간 중간 실제로 움직이는 그림이나 환등기 등을 만들어 볼 수 있게 된 부분도 그렇고, 뒷부분에서 영화의 편집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게 실례를 든 것 등은 매우 매력적이다. 영화 편집을 하는 김현이란 분을 아주 오래 전에 무슨 일로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이해하지 못했던 편집의 역할과 중요성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어제 텔레비전을 이리저리 돌리다 인도의 영화산업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잠깐 보았다. 볼리우드라고 했던가. 그곳에는 영화를 하기 위해 전 인도에서 모여든 온갖 사연의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인도 사람들은 현실이 팍팍할수록 영화에 매달린다고 했다. 가난한 그들이 하루 번 일당을 아낌없이 영화 관람에 쓴다고 했다. 영화배우가 꿈인 소녀를 위해 오빠는 매일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일을 한다고 했다. 영화는, 그런 것이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모든 것이 거기에는 들어 있다. 누구나 영화 속에서는 행복한 사람일 수 있다.

  부디 이 책을 접한 어느 아이가 영화가 왜 아름다운 작업인지를 깊이 이해하고 영화인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그런 아이가 꼭 나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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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4-15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아주 멋진 책이군요. 영화 매니아라면 필히 읽어봐야 할 책 같군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하며 보관함으로~ ^^

파란흙 2008-04-16 14:10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여기서 뵈니 반갑습니다.^^ 제가 워낙 알라딘에 낯이 설어 리뷰만 올려옿고 얼른 나가곤 해서, 누가 계시는지도 모르고 그렇습니다. 이 책, 창비 어린이책 기획 대상인가, 받았다고 해요. 영화 좋아하는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레이디 롤리팝, 말괄량이 길들이기 보림어린이문고
딕 킹 스미스 글, 질 바튼 그림, 김영선 옮김 / 보림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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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롤리팝, 이름도 달콤한 이 귀부인은 그러니까, 돼지이다. 조지 스키너라는, 태어나 한 번도 제대로 목욕해 본 적이 없는 가난한 소년의, 돼지답지 않게 말랐던 돼지. 그러나 영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남다른 돼지. 

 이들이 못말리는 응석꾸러기 공주, 페넬로페의 생일 선물로 낙점되어 궁전의 헛간으로 들어갔다가 급기야 궁전 안으로 들어가 살게 되는 이야기. 그리고 소년 조지 스키너는 공작이 되고 롤리팝은 레이디가 되는 이야기이다. 

 공주가 못말릴수록, 이야기는 더 드라마틱해지고. 공작이 된 소년과 착해진 공주의 사이좋은 모습은 뭔가 그 다음 이야기까지도 기대하게 하는 설렘이 있다. 

 말간 눈 속을 보면 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하는 돼지 롤리팝은 우리가 돼지에 대해 가졌던 온갖 구질구질한 생각을 싹 버리게 한다. 누군들 처음부터 더러웠을까 싶은. 그리고 조지 스키너의 태도에는 참, 사람 부끄럽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열렸으되, 호들갑스럽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읽어 그를 기분좋게 하는 대화를 이끌어내며, 차분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고 급기야 가장 친한 친구가 되는 법을 조지는 가르쳐 준다. 

  내 이야기만 하고 싶어 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조지는 페넬로페 공주와 돼지 길들이기를 이야기하고, 딸과 아내 문제로 골치 아픈 왕에게 해법을 제시해 주고, 장미를 좋아하는 왕비와는 장미 이야기를 한다. 그건,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내 이야기만 하려는 나쁜 습관만 버린다면 말이다. 

  아무튼 돼지임에도 응가를 가려 하고, 정원에서 궁전으로 들어올 때는 발을 닦는 습관을 들인 롤리팝, 최고이다. 아니, 그처럼 고집불통에서 타인과 소통할 줄 아는 부드러운 소녀가 된 페넬로페가 최고일까? 아니다. 이혼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던 자신의 모습을 성찰한 왕비? 아니면 새벽에 잠옷 바람으로 돼지와 돼지 조련사를 찾아가 의논할 줄 알았던 왕? 다들 멋진 사람들이다. 

  <꼬마 돼지 베이브>의 원작자가 썼다는 이 길지 않은 동화를 잠들기 전에 읽으니 이처럼 유쾌할 수가 없다. <어린 왕자>의 길들이기 이야기도 생각나고, 많은 것들이 들어 있으나 그저 재미있게 읽기만 해도 좋으려니 싶고. 다음 이야기가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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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6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흙 2008-04-16 14:11   좋아요 0 | URL
옙^^
 
동백꽃 지다 - 강요배가 그린 제주 4.3
강요배 지음, 김종민 증언 정리 / 보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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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학고재에서 나왔던 책이 새롭게 보리에서 선보였다. 부제는 <강요배가 그린 제주 4.3>.  

언제부턴가 4.3을 제주와 함께 떠올려 보지 않았다. 요즘처럼 봄꽃이 만개한 철, 제주는 그야말로 이국적인 풍광에 밝은 햇살이 마음을 간질이는 계절 속에 있겠다, 그런 이미지로만 제주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으로 정통으로 뒤통수를 얻어맞고 말았다. 핏빛 제주. 

국민학교 때던가, 중학교 때던가. 4.3이란 단어가 수업시간에 스쳐 지나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교실마다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고, 아이들이 흡사 도깨비처럼 생긴 빨갱이를 그려대던 그 시절. 그때 이해하기로는 북으로 넘어가지 않은 빨갱이 잔당들이 제주도에서 난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혔고, 그 중 아직도 전향하지 않은 죄수들이 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4.3은 별로 언급되지 않았다. 어디에서도. 그래서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갔던 것이다. 

대학 시절 기숙사 같은 방에 고 씨 성을 가진 제주도 후배가 살았다. "고와요~"라는 말을 자주 썼던 그 후배가 내가 만난 첫 제주도 사람이고, 다시금 4.3을 떠올렸다. 그러나 우리는 4.3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지금 간혹 만나는 오 씨 성의 어떤 청년도 제주도 사람이다. 그러나 그와도 4.3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4.3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아니 그랬을 것 같다. 다만 선뜻 꺼내지 못했으리라 지금에야 속을 짐작해 본다. 겪어보지 못한 젊은 그들에게조차 4.3은 눈 감으면 선연히 떠오르는 풍경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그 오랜 고난의 역사, 마치 거대한 감옥처럼도 느껴지는 섬이 당해온 수탈의 역사, 그리고 지난한 항쟁의 역사. 제주도.  

남로당이 주동 역할을 하기는 했으나,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 대다수는 그저 '살기 좋은 세상'을,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제주도'를 원했던 것 뿐이었을 것이다. 그 수많은 남과 여, 노와 소가 달리 무엇을 바랐을까! 찢기고 베이고 밟히며 그처럼 간절히 바랐던 것이 뭐 다른 것이었을까! 그 고립된 곳에서 민초들이 겪었을 공포와 아픔이 강요배의 그림 속으로 녹아들었다. 

강요배는 소위 뭔지 모르게 아름답지만 솔직히는 난해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그림은 아플 정도로 직설적이다. <始原>에서 할머니와 어린아이는 뒤쪽에 선 나무와 구별되지 않게 닮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다. 태어남과 죽음의 슬픔, 그러나 그 끈의 간단없음에 대한 경외감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죽 넘기면 검은 그림 속으로 핏빛이 스며있음이 절절히 다가온다. 하나하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얼마나 숨죽여 살아왔는가가 아우성으로 흔들린다.

모든 집단학살은 철저히 정치적이다. 이데올로기라는 것,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의 빛좋은 개살구이고, 민초들은 그저 아이들 크는 것 바라보며 평화로이 살고자 할 뿐이다.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울컥거릴 때 많은 나이가 되고 보니, 그 숱한 원통한 넋들과 살아남은 제주도 사람들의 깊은 아픔을 그저 녹진녹진 어루만져주고 싶은 마음 뿐이다. 4.3. 우리 모두에게서 잊히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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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부랑 할머니
권정생 글, 강우근 그림 / 한울림어린이(한울림)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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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미상의 해학적인 민화(民畵)를 구수한 옛이야기를 곁들여 감상하는 느낌의 책. 권정생 선생이 다듬은 짧은 노래에 한바탕 재미있는 그림이 얹혀 그야말로 맛깔스러운 그림책이 되었다. 

꼬부랑 할머니가 /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 꼬부랑 길로 가다가 / 꼬부랑 고래를 넘어 / 꼬부랑 나무에 올라가 / 꼬부랑 똥을 누니까 / 꼬부랑 개가 와서 / 꼬부랑 똥을 주워 먹었지. / 꼬부랑 할머니가 / 꼬부랑 지팡이로 / 꼬부랑 개를 때리니까 / 꼬부랑 깨갱 / 꼬부랑 깨갱 / 할머니 똥 먹고 천 년 살까 / 할머니 똥 먹고 만 년 살까 / 그러더래.

굳이 전문을 써보고 싶었던 것은, 아마 입 속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권쟁생 선생 말마따나 “꼬부랑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들이 입과 입으로 전해 준 전설이며 고향”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책 뒷부분에 선생이 직접 쓰신 ‘꼬부랑 할머니 읽기에 앞서’라는 글이 선생의 필체 그대로 게재되어 있어, 읽다보면 잠깐 눈물이 난다. 기운 빼고 날려 쓰는 듯하지만 섬세하고 예쁜, 띄어쓰기가 정확한 선생의 글. 아이들을 지극히 사랑한 한 동화작가의 따뜻함이 고스란히 전해져서다. 

꼬부랑 할머니는 그야말로 꼬부랑거리며, 살랑살랑 동네를 다니시고, 길에서 만나는 온갖 것들과 해찰하시고, 꼬부랑 길이며 꼬부랑 언덕이며, 꼬부랑 나무를 꼬부랑 올라간다. 세상 바쁠 것도 없고, 하릴없이 내달리다 누구와 부딪힐 일도 없고, 그저 얼굴에는 웃음이 한 가득이다. 천 년, 만 년 사는 사람이 없으니 우리 인생이 이처럼 공평하지 아니한가, 하는 그런 표정. 

아마 꼬부랑 할머니여서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발레리나처럼 등을 곧게 펴고, 목을 뻣뻣이해서야 어떻게 꼬부랑 길을 그처럼 유연하게 올라갈 수 있으랴. 꼬부랑한 세상을 꼬부랑 몸을 낮춰 살고, 먹은 대로 똥 누고, 내 똥 더럽다 하지 않고 먹어주는 꼬부랑 개에게 슬쩍 ‘예끼놈’하면서 살아가면 그뿐이다. 부릅뜬 두 눈으로 세상아 나와 싸우자, 하다가 뻣뻣한 몸으로 어디선가 죽어갈 수많은 이들에게 들려주는 꼬부랑 할머니의 구수한 인생철학. 

꼬맹이들 보라고 그림책으로 나왔을 테지만 내게는 오만 가지 이야기로 읽힌다. 삶과 글이 일체였던 권정생 선생도 혼자 그립고, 그림도 마음에 쏙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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