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로 하여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
편혜영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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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쇄락이 삼켜버린 것들, 그 자리에 폐허처럼 남겨진 사람들!

배반된 신념, 순응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마는 자본주의 논리의 비정함에 이내 숨이 막힌다!

 

 

 

   무주는 이석에게 거듭 묻는다. 병원이 왜 좋으냐고. 병원에 오면 다 아픈 사람인데 나는 아픈 데 없이 멀쩡하니 좋고, 남들은 병원에 돈 쓰러 오는데 나는 돈 벌러 오니까 좋고, 가끔 빈 침대에서 낮잠도 잘 수 있고 아프면 공짜로 약도 주니 좋고……. 그러다 이석이 “병원이 좋은 게 아니고 집이 싫다”고 헤벌쭉 웃는 것으로 이 쓸데없어 보이는 듯한 문답을 끝낸다. 누구보다 빨리 병원으로 출근해 회진하는 의사보다 더 자주 병동을 돌며 환자와 인사하고, 간호사나 동료에게 자주 농담을 걸고 허튼소리도 하지만 업무에 있어서는 성실하고 늘 철저한 사람, 이석은 선도병원 내에서 가장 평판이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비록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를 끄는 소리가 묘하게 신경이 거슬리고, 한번 당한 일은 잊지 않고 손해 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부당한 일을 겪으면 반드시 되갚아주는 섬뜩한 면모도 지니고 있지만, 작은 월급으로 아픈 아이의 병원비를 감당해야 하는 가장이라는 점은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하다. 무엇보다 무주로서는 서울에서 낯선 이인시로 내려와 선도 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을 때 막역한 우정과 베풀어준 이석에게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가, 그런 이석의 비리를 고발해야만 하는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렇게 소설 『죽은 자로 하여금』은 지방의 한 종합병원을 배경으로, 철저한 자본주의의 논리 안에서 윤리적인 인간으로서 고뇌하는 한 남자의 비애로부터 출발한다.

 

 

 

정의와 공존, 그 불완전성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신과 율법을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자부했으나 예수는 그들을 ‘위선자들’이라 꾸짖었다. 무주는 자신이 꼭 바리새인이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예수를 죽임으로써 더 높고 훌륭한 인간이 되려 했던 바리새인처럼, 스스로 ‘어떤 공명심과 정의감에 홀린 건지 무지의 장막 아래에서 싸구려 도덕심에 고취’되어 이석을 고발한 것에 대해 수시로 저항감을 느낀다. 거의 모든 구매 건에서 이석의 리베이트를 찾아낸 무주는 한때 자신이 태연히 저질렀던 비리와 관행으로 인해 지방 병원으로 내쳐진 과거의 자신과 완전히 결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겼던 게 분명하다. 이제 아내의 뱃속에서 자라날 아이를 생각하면 떳떳한 아빠이고 싶고, 이석을 감싸느라 알고도 모른 체하면 공모자 취급을 받거나 부주의하고 태만하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테니 선택의 여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의 병원비 때문에 이석이 어쩔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게 아닐까, 고작해야 몇 개월 감봉이나 경고 조치가 내려질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이석이 사직 처리되자 그만 자책감이 들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무주는 완벽하게 좌우대칭이 맞는 세계, 균형이 잡힌 세계란 없다고 생각해왔다. 모든 것은 비뚤어져 있고 기울어져 있기 마련이라고. 그런 점에서 세계는 애초 구나 정육면체처럼 정확하고 완벽한 형상이 아니라 오히려 트램펄린 같은 것이었다. 똑바로 서면 균형을 잃는 곳, 균형을 유지하려면 비틀거리거나 한쪽 발을 구부리고 팔을 뻗어야 하는 곳, 뒤뚱거려야만 가까스로 설 수 있는 곳 말이다. 그런 세계이므로 균형을 잃은 태도를 오히려 균형 잡힌 태도로 여겼다. / 40p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무주는 자신이 이석을 고발한 사실이 병원 내에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음을 알게 된다. 직원들은 이석이 저지른 비리 내용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이석이 아닌 무주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제 원칙주의자라는 그간의 평을 오히려 비아냥거리로 삼거나 조롱하고 경멸하는 눈빛을 숨기지 않는다. 상황이 이쯤 되고 보니 무주는 더 이상 이석을 향한 미안한 마음은커녕 이석을 대신해 자신이 비난을 받는 상황이 도무지 참기 힘들어 충동적으로 사무장이 지시한 일이라 말해버리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석의 아이가 죽었다는 소문까지 겹쳐져 직원들은 더욱 냉랭한 태도를 취할 뿐이다. 결국 이 일을 계기로 무주는 야간 근무자로 보직에서 밀려나고, 아이마저 유산이 되어 아내와의 관계 또한 멀어지게 된다. 그렇게 스스로 믿음직한 남편이자 아빠 그리고 성실한 직원으로 인정받고자 했던 무주의 바람은 상명하복의 질서와 경쟁주의로 점철된 자본주의의 조직 문화 속에서 철저히 매도된다. 때문에 개원 예정인 요양시설의 본부장으로 복귀하게 된 이석이 무주와의 대화 속에서 『나태복음』 8장의 구절을 인용하는 장면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마태복음』 8장에 이런 구절이 있어.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서 계속 곱씹었어. 예수는 인자하고 자비롭다면서 죽은 사람한테 왜 이러나, 사람이 죽었는지 이렇게 야박해도 되나…… 이해할 수 없었지. 한참 새기니까 조금 알 것도 같더라고.”

“무슨 뜻인데요?”

“영혼이 죽은 자는 내게 필요 없다, 불신자는 불신자에게 가고 믿는 자들은 나를 따르라. 그러니까 나를 따르는 건 믿는 자로 충분하다는 뜻이려나.” / 140p

 

 

 

 

 

  잘못된 관행과 집단 이기주의가 만연한 조직일지라도 조직에 성실하고 순응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비정한 논리. 양심의 가책보다 조직에서 배제되는 것이 더욱 공포스러운 현실 앞에서 무주가 병원의 영업 방식에 순응하며 끝내 병원비가 체납된 환자를 병실 밖으로 끌어내는 장면은 우리가 얼마나 이 완고한 논리 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기어코 확인하게 한다. 어쩌면 그것은 소설의 배경인 병원이라는 공간의 특수성 때문에 더욱 도드라져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 생명의 보존이라는 숭고한 가치마저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내쳐질 수도 있는 이분법적인 공간, 환자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자본주의의 생존적 논리 앞에서 공존이란 의미는 그저 공허하게 느껴질 뿐이다.

 

 

 

이 일로 무주는 병원이 걱정하는 게 환자는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병원이 바라는 건 병상이 비지 않는 것이지, 환자의 완치가 아니었다. / 69p

 

관행만큼 편하고 안전한 건 없었다. 문제가 불거지면 ‘관행’이 비난받을 것이었다. 자신 말고도 그렇게 한 선배와 지시를 내린 과장이 곁에 있다고 생각하면 다소 편해졌다. 장부에서 부풀린 수많은 돈 중 자신이 직접 주머니에 챙겨 넣은 돈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더욱 마음을 놓았다. / 75p

 

 

“그렇지만 거미줄이라고 해도 두 마리, 세 마리가 함께 있으면 안 됩니까? 왜 있잖아요, 공존. 여기서는 안 됩니까?”

“거미줄 하나에 거미 두 마리가 함께 있는 게 공존이 아니야. 그건 자연계를 무시한 처사지. 한 거미줄에 한 마리씩의 거미가 여러 개 늘어서 잇는 것, 그게 공존이야. 다른 거미줄을 넘보지 않는 상태가 공존인 거라고.” / 134p

 

 

 

 

 

 

   배반된 신념, 배제에 대한 불안, 순응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마는 자본주의 논리의 비정함을 이토록 잘 묘사한 작품이 또 있을까.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나는 병원, 이인시, 서울 그 어디에도 완전히 소속되지 못하고 떠도는 무주를 보며, 이것이야말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느끼는 가장 근원적인 공포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때문에 “병원에 영안실이 있으니까 귀신이 있다느니 어떻다느니 떠들어대지만 정작 무서운 건 귀신도 시체도 아닙니다. 사람이죠.”라던 효의 말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파고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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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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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큼 우리를 더욱 성숙하게 하는 게 또 있을까!

사랑이라는 성장통을 겪는 동안 우리는 또 한 뼘 자라난다!

 

 

 

   『프리즘』은 네 번의 계절이 지나는 사이에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과해온 네 남녀의 성장통 같은 이야기다. 손원평 작가는 책의 말미에 ‘이들은 사랑이라는 흔하고도 특별한 감정을 통과하며 자신을 확장해가고 세상을 향해 손을 내민다. 그것이 내가 그리고 싶던 사랑의 본질과 효과’라며 네 남녀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를 정리한다. 아름다워도 상처받아도, 아파서 후회해도 사랑이란 건 멈춰지지 않기에, 원하든 원치 않든 사랑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기에 다만 침잠하지 않고 확장되어 갈 수 있기를. 다양한 빛의 스펙트럼을 지닌 저 프리즘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이 일으키는 무수한 결들 속에서 끝끝내는 찬란히 빛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덕분에 ‘나는 누구와 연결되어 있을까’ ‘사랑이 나를 성숙하게 한다면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를 생각한다. 참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사랑만큼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건 없기에.

 

 

 

다만 열심히 사랑할 수 있기를

 

 

 

이 거리에는 사람이 많다. 참 많다. 너무 많다. / 9p

 

 

 

  좁은 냇물처럼 나 있는 거리를 매일같이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평생 단 한 번 마주치기도 어려운 이 복잡한 거리 속에서도 누군가는 있다. 내가 있고, 그리고 그가 있다. 예진은 오늘도 번잡한 효고동 길목의 작은 은신처에서 커피를 마시며 도원을 떠올린다. 자신만의 공간이라 여겼던 곳에서 몇 번이나 마주치곤 했던 도원을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건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예진은 적당히 친근하고 적당히 거리감 있는 이 단정한 남자를 매일 기다리게 된다. 도원 역시 이 관계가 어떻게든 발전할 수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예진은 계산하지 않고 웃는 얼굴이 시원시원한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매력적인 여자다. 하지만 도원은 딱 지금만큼의 간격을 유지하고 싶다. 사랑은 그에게 늘 상처였기에,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누구도 자신의 공간에 들이고 싶지 않다.

 

 

 

“다시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있죠. 오래전 연락이 끊겼지만 가끔씩 생각나고 정말 보고 싶은 사람. 다들 하나쯤 있지 않나요.”

그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문장을 맺고 나서야 자신이 누군가를 떠올렸기에 나온 말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글쎄요. 전 제가 보고 싶은 사람들은 늘 만나고 있어서요.”

예진이 화사하게 답했다. 그 티 없는 밝음은 도원을 웃게 했지만, 동시에 그의 마음을 두 발짝쯤 물러서게 했다. / 58p

 

 

예진은 이 상태가 싫지 않다. 아직 ‘연애 중’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는 없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설레는 날들. 이런 날들만 계속된다면 매일이 재미날 텐데. 그 많고 많은 시작의 직전들 중, 연애의 시작 전보다 달콤한 게 있을까. 아쉽게도 이 시간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건 예진도 알고 있다. 취한 뒤의 갑작스런 입맞춤, 예기치 못한 한 방처럼 불시에 듣게 되는 상대의 속마음, 혹은 자신으로부터 터져나오는 암시적인 고백. 그런 찰나의 지점 후에 관계는 성큼, 어느 단계로 진입한다. / 63p

 

 

 

 

 

 

   호계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베이커리를 채우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 냄새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뭐랄까, 이해가 되는 냄새라고나 할까. 하지만 호계는 이 냄새가 진실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하고 마냥 병아릿빛 같은, 그래서, 그러므로 가짜라고 여긴다. 이것이 오랫동안 애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으로부터 배제되어왔던 호계가 대략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한편, 호계가 일하고 있는 베이커리의 사장인 재인은 헤어진 남편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지 못하고 내내 만남을 유지하며 지내고 있다. 달에 두세 번 정도 만나 식사를 하고 잠자리도 가지지만 서로 간에 오가는 말은 별로 없다. 그녀는 이 의미 없어 보이는 관계를 쉬이 끊어내지 못하는 이유를 궁금해 하면서도 여전히 그를 만난다.

 

 

스스로가 사랑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사랑이란 건 줏대도 없이 좇는 유행이라고 생각했었고 모두들 그 흔해 빠진 유행에 휩쓸려 살아간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실은 그렇게 생각해야 버틸 수 있었다. 그래야 자신이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당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 124p

 

나는 왜 이토록 행복한 결말에 대해 관대한 걸가. 정작 그런 걸 별로 경험해본 적도 없으면서. 의문했던 적도 있다.

시간이 지나자 그 의문 자체에 답이 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누군가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도 그런 호사를 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재인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겪지 못한 행복, 충만하고도 영원한 사랑이 타인을 통해 어디선가 실현되기를 바란다. / 82p

 

 

 

 

  접점이 없을 것 같았던 네 사람의 우연한 만남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린다. 도원은 자신이 음악을 하던 시절에 짧게 만났던 재인과의 재회에 다시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낀다. 무언가가 회복되는 느낌, 치유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이 되살아나고 아물어 가는 느낌을 받으며 그녀와 이대로 함께 한다면 마지막은 어떨지 상상한다. 그건 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도원에게 아직 할 수 없는 말들이 너무도 많다. 그렇게 시작된 이 관계가 온전할 수 있을까. 불안하고 급하게 다시 쌓아올려진 이 관계에 문제는 없는 걸까. 그 사이 도원과 재인이 가까워지는 것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예진은 깊은 상실감에 빠진다. 때때로 자신이 도원을 좋아한 게 맞을까, 사실은 이별과 상실을 잊고 그저 ‘새로운 설렘’이라는 감정에 빠져 있는 게 즐거웠던 건 아닐까 뼈아픈 의심에 빠져들기도 한다. 때문에 이번만큼은 자신을 좋아해주는 남자를 만나겠다는 예진을 바라보며 호계는 끊임없이 새로운 누군가와 시작하곤 하는 그녀에게 화가 치민다. 예진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바라봐주지 않는 그녀에게 할 수 있는 것은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그녀의 사랑을 비난하는 것뿐이다.

 

 

 

재인은 입을 닫았고 호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이렇게 자신의 얘기를 여기저기 한 조각씩 흘리고 다녀도 되는 걸까. 진열대에 늘어선 비닐 안의 쿠키들을 볼 때면 가끔 불안해진다. 나도 저런 모습이 아닐까. 잘 포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속이 뻔히 들여다보인다는 점에서는. 그러다가 언젠가, 소소한 비밀이라고 여겼던 모든 일들이 전부 알려진다면? 그런 그림을 그리면 등 아래쪽에서부터 한기가 서려온다. / 47p

 

 

시작과 동시에 도원은 늘 끝을 생각했다. 설레야 할 때도, 절정이어야 할 때도, 극복해야 할 때도 끝이 그려졌다. 사랑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연상시켰다. 그 무수한 과정을 거쳐 도원은 마침내 사랑과 죽음은 등가라는 공식에 다다랐다. 부정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는 한 번도 먼저 이별을 입에 담은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농담으로라도 끝을 얘기하는 연인에겐 단번에 마음이 식었다. 수민과의 이별이 어렵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끝을 연상시키는 관계를 그는 용인하지 않았다. 그렇게 도원의 결론은 점점 굳어져갔다. 사랑이 뒤틀린 시간을 만나면 죽음이 되는 거라고. / 196p

 

 

 

   이렇듯 『프리즘』은 서로 다른 네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마음의 여러 지점들을 잔잔한 문체와 감각적인 문장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사랑이 찾아오는 순간의 설렘, 사랑하는 순간에 나누게 되는 약속들, 서로에게 솔직해지지 못했을 때 끝끝내 누설되고 마는 오해와 흠집들, 내내 보고 싶지 않아서 회피했던 것들까지. 소설은 우리가 사랑을 하는 순간에 마주하게 되는 감정과 그것이 가져온 변화들 그리고 그 사랑이 내게 남긴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과정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감정을 느끼고 읽는 뇌 기능이 고장 난 탓에 공감 능력 장애를 지고 살아가는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아몬드』, 견디며 사는 삶에 익숙해진 청춘들에게 반격을 고하는 『서른의 반격』이 그러했듯 말이다.

 

 

예진의 말대로 세상은 위험한 곳이었다. 과거 호계가 생각한 세상은 색이 한 가지였고 그 빛깔과 모양은 구겨진 회색 종이와 비슷했다. 아득했다. 이토록 많은 색을 무시하고 한 톤으로 세상을 규정했던 시간들이. 이제 그는 나아갈 것이다. 수많은 색과 무늬를 가진 곳으로. / 240p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에 아쉬움이 더 크게 남는다.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한 과잉된 자의식, 네 명의 등장인물이 저마다 다른 고유의 색채를 지닌 듯하지만 결국엔 하나의 색처럼 느껴지는 단조로움, 이 때문에 등장인물 그 누구에게도 특별한 매력을 느낀다거나 이입되지 못한 채 마지막까지 그저 흘러가고야마는 이야기. 이제는 책 소개글 따윈 필요 없이 ‘손원평’이라는 이름 하나만 보고 작품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작가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지만, 어느 덧 그 이상을 기대하게 되는 독자의 바람을 이렇게나마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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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만지다 - 삶이 물리학을 만나는 순간들
권재술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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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속에 삶이 있고 삶 속에 우주가 있다!

물리학자이자 시인의 시선으로 아득한 우주의 세계를 아름답게 어루만지는 물리학 에세이!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별을 본 건 처음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지도부원을 포함해 학생회 부원들과 함께 산으로 수련회를 갔다가 나는 눈앞에서 와르르, 쏟아질 것 같은 별들에 그만 그 자리에서 누워버렸다. 그렇게 나는 친구와 함께 돗자리 하나를 깔아놓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밤새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건 너무나 동화 같은, 비현실적인 현실이었다. 이따금씩 나타나 이쪽 하늘에서 저쪽 하늘로 사라지는 별똥별들, 아낌없이 반짝여주었던 별빛들, 고요하지만 찬란했던 별무더기들. 나는 그날 하늘이, 아니 온 우주가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이라 믿는다. 그것도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우주를 만지다』를 읽고 있으면 가장 경이롭고 순수한 감동을 느꼈던 그 날 밤이 떠오른다. 저 별은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아득한 옛날에 사람들이 밤길을 걸으며 의지했다던 별자리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별자리와 같은 것인지 어느 것 하나 분명히 아는 게 없지만, 우주는 아득히 먼 허공이 아니라 내가 존재하는 곳이자 나를 둘러싼 이 세상 전체가 우주라는 것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던 바로 그 날 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우리가 우주 안에 있듯, 우리 안에 우주가 있다”던 맥스 테그마크의 말과 꼭 닮았다. 우리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원자 단위의 미시세계부터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우주 너머의 거시세계까지, ‘과학’이라는 영역 속에 가둬두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을 물리학자이자 시인은 ‘어른 아이 다 같이 우주를 듣고 우주를 보고 우주를 만지고 우주와 춤을 추자’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부디 이 책을 이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받아들일 것을 권한다. 책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우주 속에 삶이 있고 삶 속에 우주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테니 말이다.

 

 

 

 

 

 

이 아름다운 우주에 태어나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 세상 아무 것에다 작은 바늘 하나를 세우고 하늘에서 아주 작은 밀씨 하나를 뿌렸을 때, 그게 바늘에 꽂힐 확률…… 그 계산도 안 되는 확률로 만나는 게 인연이다” 우리의 인연은 바로 이 어마어마한 말도 안 되는 확률로 이루어진 관계이기에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다. 『우주를 만지다』에서도 저 아득한 우주의 수많은 별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밤하늘에 보이는 무수한 별들은 대부분 은하수 은하라고 하는 우리 은하에 속해 있는데, 이 은하는 지름이 약 10만 광년이나 되고 그 안에 별이 약 1,000억 개가 있다고 말이다. 우리가 별을 보는 것은 별에서 나온 빛이 우리 눈에 들어오기 때문인데, 어떤 별빛은 10년, 어떤 별빛은 1만 년, 어떤 것은 10만 년 전에 출발한 것이라고 한다. 10만 년 전의 별이라니, 10만 년 전이라면 인류에게는 구석기 시대로 우리는 그때 출발한 빛을 지금 보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이 별은 지금쯤이면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이 어마어마한 별들 중에서, 또 어마어마한 확률로 생명이 살 수 있는 별에서 태어나 그보다 더 어마어마한 확률로 내 옆의 인연을 만난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새삼 당신과 나, 우리의 만남이 세상 그 무엇보다 경이롭게 느껴진다.

 

 

 

10억 분의 3초, 0.003초, 이런 시간은 너무나 짧아서 그냥 현재로 우겨도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밤하늘의 별을 볼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가 보는 밤하늘의 달은 지금의 달이 아니다. 1.3초 전의 달이다. 우리가 보는 태양은 8분 전의 태양이다. 태양계의 가장자리라고 하는 오르트 구름대는 1년 전의 모습,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 프록시마 센타우리는 4년 전의 모습, 북극성은 400년 전의 모습, 안드로메다 은하는 230만 년 전의 모습이다. / 28p

 

 

지구는 작은 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생명이 존재하는 푸른 점이다. 아직도 우주의 어디에 다른 생명이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주에 다른 생명이 있건 없건 지구의 생명은 소중하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비록 우주에 다른 생명이 무수히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지구의 생명은 그 생명과 매우 다른, 독특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구의 생명은 이 우주에서 매우 독특하고 소중한 존재이다. / 51p

 

 

 

 

  과학자들은 흔히 원자 수준의 세계인 미시세계와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거시세계로 세상을 구분한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밀리, 마이크로, 나누, 피코, 펨토, 아토, 젭토, 욕토로 구분되는 저 작은 원자의 세계는 놀라울 정도다. 책에 따르면 거기세계와 미시세계를 구분하는 숫자를 ‘아보가드로수’라고 하는데, 아보가드로수는 물질 1몰에 들어 있는 원자의 수로 무려 600,000,000,000,000,000,000,000개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즉, 원자가 이만큼 모여야 우리가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거시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아보가드로수는 ‘너와 나를 우리로 만드는 마법의 수’라고 말하는 저자의 말은 세상을 좀 더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게 한다. ‘오늘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서 한 아이가 눈 오줌에 있던 물 분자가, 한 달 뒤 내가 마시는 한 컵의 물 속에 들어 있다’는 말처럼, 내 허파에 들어갔던 공기가 1초 후에 너의 허파 속으로 들어가고, 1분 후에 너의 핏속에 들어가고, 1시간 후에 너의 살 속에 들어가며 나의 피와 살이 너의 피와 살이 된다는 것. 우리가 모르고 있지만 모든 생명체는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저 아보가드로수의 위대함을 잊지 않기를.

 

 

 

색도, 질감도, 온도도 없는 원자. 여러분은 그런 원자가 궁금하지 않은가? 만져보고 싶지 않은가? 과학자들은 이런 원자를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가고 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서 온다. 보이는 것은 허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 실상이다. 보이지 않는 원자, 하지만 모든 보이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원자다. / 107p

 

 

뉴턴은 이러한 인력이 태양, 지구, 달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천체들 사이는 물론, 돌멩이와 지구 사이에도 있고, 돌멩이와 돌멩이 사이에도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중력을 ‘만유 인력’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물질 사이의 인연은 가히 우주적이라고 할 수 있다. / 166p

 

생각해보자. 우리가 보는 우주의 배경복사는 138억 년 전의 전파다. 우리가 보는 우주의 가장자리는 지금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138억 년 전의 가장자리다. 지금의 우주 가장자리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과거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우주의 ‘지금’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하지만 세상만사가 다 그런 것이다. 현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이 과거의 것들이다. / 298p

 

 

 

 

 

 

   이렇듯 『우주를 만지다』는 물리학자이자 시인의 시선으로 아득한 우주의 세계를 아름답게 어루만지는 물리학 에세이다. 엔트로피, 빅뱅, 양자역학, 차원, 상대성 이론 등 물리학의 여러 이론들을 통해 나를 둘러싼 세계의 엄정한 질서를 이해하면서 광활한 우주의 신비로움이 전하는 경이로움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경험을 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물리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겠다는 마음으로 읽기보다는 감각적으로 이 책을 받아들일 것을 추천 드린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마음의 너비가 분명 이전보다 넓어진 것을 느끼게 될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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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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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자연의 운명 앞에서 연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졸렬한 희망이란!

섬뜩한 광기, 자기 파괴적인 사랑, 재앙이 되어버린 집, ‘죽음’이 ‘삶’처럼 떠돌며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공포를 경험케 하는 단편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목 잘린 닭」은 마시니, 베르타 부부의 백치 아이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들 부부에게는 네 명 아이들이 있었는데 이들 모두 백치라는 운명 앞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아이들은 입을 헤벌리고 혀를 내민 채 초점 없는 멍한 시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이따금 그들이 노는 벽돌담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흉내 내는 것을 제외하면 종일 무기력하고 멍한 어둠에 세계에 빠져 지내곤 했다. 물론 이 네 백치 아이도 한때는 부모의 인생에 커다란 기쁨이었던 적이 있었으나, 어느 새 부부는 짐승 같은 자식 넷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사라지자 서로를 헐뜯고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고통스러운 나날이 계속되던 중, 다른 형제들과 달리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딸아이가 태어났다. 이미 백치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식은 지 오래인 부부는 하녀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딸 베르티타에게 온갖 사랑과 애착을 쏟아 부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이유에서인지 백치 아이들은 하루 종일 머물러 있던 벽돌담 앞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침 부엌에서는 하녀가 닭의 목을 자르고 피를 뽑아내고 있었다. 시뻘게…… 시뻘게…… 아이들은 닭의 목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나오는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고,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하녀가 아이들을 부엌에서 내쫓았다. 점심을 먹은 후, 산책을 하러 나간 부부가 잠시 이웃집 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베르티타는 형제들이 놀고 있는 붉은 담벼락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어린 여동생이 끈덕지게 담벼락을 오르는 광경을 백치의 아이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찌된 영문인지 초점 없이 멍하던 아이들의 시선에 활기가 살아났다. 마치 오랜만에 먹이를 찾은 짐승처럼 그들의 얼굴은 탐욕스럽게 실룩거렸고, 급기야 여덟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베르티타를 향해 손을 뻗기 시작했다. 백치가 되어버린 아이들의 삶이 곧 공포였던 부부에게 닥친 비극은 그렇게 베르티타를 겨냥한다.

 

 

 

   이렇듯 「목 잘린 닭」은 순수한 광기, 죽음의 공포, 집요한 욕망, 인간의 어리석은 희망을 집약한 소설로, 짧지만 강렬한 충격과 섬뜩한 여운을 남긴다. 근대 단편소설의 거장이자 라틴아메리카 환상문학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오라시오 키로가의 대표작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열여덟 편에 이르는 작품을 수록한 단편소설집이지만, 수록작 「목 잘린 닭」처럼 어느 하나 빠짐없이 놀랍도록 인상적이다. 흥미롭게도 이들 작품은 모두 공통된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이다.

 

 

 

낭만적 사랑이라는 거짓에 대하여

 

 

 

   낭만적 사랑이라는 것은 환상이라는 관념 속에서만 오롯이 존재하는 것일까. 낭만적 사랑의 거짓된 허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몽상에 빠져있는 이들은 ‘사랑에 놀아난 바보’가 되고, 현실 감각을 지닌 교활한 속물들은 끊임없이 대상을 욕망하거나 서로를 좀먹으면서 불화할 뿐이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속에는 아름다운 외모를 내세워 신분상승을 꿈꾸거나(「사랑의 계절」, 「이졸데의 죽음」), 사치스럽고 속물적이며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고 히스테리를 부리다 남편의 손에 비극을 맞이하는 여인(「엘 솔리타리오」)이 등장한다. 진실된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사랑을 쏟아 부었던 부부는 자신들이 낳은 아이들이 온전치 못하자 서로의 탓이라 몰아붙인다(「목 잘린 닭」). 순수한 사랑을 꿈꾸었던 연인들은 현실이라는 속물적 근성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내리고 (「사랑의 계절」, 「이졸데의 죽음」), 착란 증세에 빠졌을 때에야 비로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연인(「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게 사랑은 그저 환영에 가깝다.

 

 

 

환상이라는 지독한 광기, 그것이 아니면 도무지 버틸 수 없는 현실

 

 

 

   환상과 광기의 텍스트. 키로가의 단편 속 인물들은 어느 누구 하나 온전히 사유하지 못하고 환상이라는 지독한 광기 사이에서 떠돈다.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배 안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바닷속으로 몸을 던지는 선원들(「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 신혼의 단꿈이 사라지자 이내 환영을 보거나 착란 상태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여인(「깃털 베개」), 마약에 빠진 묘지기와 죽은 지 8년째가 되어서도 여전히 마약을 갈구하는 해골의 대화를 담은 이야기(「내 손으로 만든 지옥」), 광견병에 걸린 개가 마을 전체를 공포로 몰아가는 기이한 광경(「광견병에 걸린 개)」)까지. 이들은 모두 현실과 화해되지 못한 채, 환상 혹은 지독한 광기에 물리거나 자신을 몰아가지 않으면 도무지 버틸 수 없는 비참한 현실의 말로를 보여준다. 죽은 뒤 땅에 묻혀 온전한 육신마저 사라진 순간에도 코카인 한 방울이라고 얻을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저 해골을 본 이상, 우리는 죽어서도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는 지난한 삶의 굴레에 절규할 수밖에 없다.

 

 

 

황량한 삶과 나란히 선 죽음이라는 공포

 

 

 

   결국 사랑과 광기는 현실과 분절되지 못한 채 죽음으로 나아간다. 코카인이라는 지옥에 빠져든 스스로에게 내릴 수 있는 단죄는 죽음뿐이며(「내 손으로 만든 지옥」), 베개 속에 기생해 살던 괴물에 의해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피를 빨리고 만다(「깃털 베개」). 뱀에 물린 뒤 빠르게 흘러가는 강 위에서 표류하다 죽음을 맞이하고(「표류」), 강한 마취 성분이 있는 천연 꿀을 마셨다가 식인 개미떼에게 잡아먹히며(「천연 꿀」), 죽음의 사자를 발견했지만 끝내 농장 주인의 죽음을 막지 못하는 것을 보면(「일사병」) 죽음이라는 대자연의 질서 앞에서 인간은 그저 나약한 존재일 뿐임을 실감하게 한다. 이처럼 ‘죽음’이 ‘삶’처럼 짙게 깔려 있는 키로가 문학의 그로테스크한 광경은 매우 비현실적인 듯하지만 또한 무섭도록 익숙한 풍경이라 독자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다.

 

 

 

   키로가가 이토록 사랑, 광기, 죽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해설에 따르면 키로가의 삶은 죽음이 그림자처럼 들러붙어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유년 시절에 가족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가 오발 사고로 죽고, 의붓아버지마저 엽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을 눈으로 목격했으며, 친구와 아내까지 잃는 비극적인 사건을 경험했다고 한다. 훗날 자신에게 닥친 죽음의 그림자를 발견하기 전까지, 이 기구하고 처참한 운명 앞에서 문학을 위로로 삼고 그 속에서 고유의 문학적 성취까지 이루어냈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끈덕지게 달라붙던 죽음의 공포가 결국 글을 쓰게 만들었다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까. 글은 가장 가깝고 익숙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나는 키로가의 문학을 통해 좀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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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살인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0
최제훈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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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 살인 속에 숨어든 모방 살인, 살의의 전이 그리고 악의의 진실!

차례차례 잘려나가는 손가락, 피의 퍼포먼스 속에 숨어든 비틀린 윤리!

 

 

  사람이 둘 이상만 모이면 어김없이 손가락, 연쇄살인, 사이코패스 같은 단어가 흘러나온다. ‘단지 살인마’는 연일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한다. 언론은 ‘단독’ ‘속보’를 앞세워 단지 살인마에 의해 벌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네 건의 살인사건을 시시콜콜 파헤치고, 경찰은 전방위적인 수사를 펼치지만 쓸 만한 단서를 포착하지 못한다. 범행 장소는 목포-대구-서울-원주, 범행 대상은 청년-여고생-노파-중년 남성. 그야말로 동서남북,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이 비정형적인 범행 행각에 대중은 서슬한 공포를 느낀다. 누구든 표적이 될 수 있으므로. 흉기-무차별 폭행-둔기-익사, 별개의 사건으로 보아도 무방한 네 건의 살인을 하나로 꿰는 표식은 차례차례 잘려나가는 손가락뿐이다.

 

 

 

살의로 일그러진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그린 블랙 코미디

 

 

 

   시작은 가벼운 호기심이었다. 단서 하나 남기지 않고 네 건의 살인을 저지르는 주도면밀한 악마에게도 어떤 패턴이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숫자와 차트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자기 절제와 매매 타이밍, 숨겨진 패턴을 투시하는 혜안을 지녔다고 자부하던 전업 투자자 장영민은 프라모델 대신 탐정놀이로 가볍게 시간을 때우는 것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사건에 접근하기 시작했다가 마침내 특별한 패턴 한 가지를 포착해내고야 만다. 시나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열 가지 계율, 그는 희생자들이 정확히 십계명의 순서에 따라 살해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또 다시 다섯 번째 희생자가 나온다. 사인은 질식사, 영어 학원 강사로 일하는 30대 남자 황성찬은 천안으로 들어가는 국도변 풀숲에 쓰러져 있었고 다섯 손가락이 모두 잘린 모습이었다고 한다. 조사 결과 황성찬은 어릴 적부터 소문난 사고뭉치에 빠듯한 형편에도 미국 유학을 가겠노라 떼를 썼다가 이내 마약 사건에 연루돼 부모를 곤경에 빠뜨린 일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율 역시 ‘부모를 공경하라’였다.

 

 

 

약간의 현대적 변용을 허용한다면, 희생자들은 정확히 십계명의 순서에 따라 살해되고 있었다.

1. 나 이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보스를 바꾼 조직원

2. 우상을 만들지 말라-아이돌 그룹의 사생팬

3.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친 노파

4.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주말로 없이 일을 시킨 공장 사장 / 28p

 

 

 

 

 

 

   장영민의 추측대로라면 이제 여섯 번째 계명 ‘살인을 하지 말라’에 따른 희생자가 나타날 차례다. 문득 고교 시절, 자신을 찹쌀모찌라고 불렀던 양승범을 떠올린다. 학교 폭력과 집단 따돌림, 모두가 외면하고 있는 가운데 버젓이 자행되었던 성폭력까지. 덕분에 사회불안장애자가 되어버린 자신의 비참한 현실 앞에서 그는 거듭 되뇐다. ‘살인을 하지 말라, 살인을 하지 말라, 살인을…… 꼭 심장을 멈추게 해야만 살인은 아니다. 열일곱 살 소년의 인격을 무참히 짓밟는 것도 살인이다. 지금 내 머릿속에 박힌 생각이 그 증거’라고 말이다. 장영민은 사이버 흥신소에 의뢰해 양승범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운명의 날, 여섯 번째 계명은 마침내 실행된다. 스스로 단지 살인마를 가장한 장영민에 의해 양승민의 손가락이 잘려나간다.

 

 

 

“사람 기억 중에서 말이야, 제일 질긴 게 쪽팔린 기억이더라.”

“응?”

“이건 시간이 흘러도 당최 사라지거나 희미해지지가 않아. 다른 기억들은 적당히 퇴색되고 나한테 유리하게 왜곡되기도 하던데, 얘는 안 그래. 오히려 갈수록 과장되고 비비 꼬이면서 어떻게든 나를 괴롭히려고 안달이지.” / 64p

 

 

사후 세계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 누전차단기 떨어지듯 암흑 속에 묻히고 끝나는 거라고. 하지만 갓 생겨난 주검을 마주하고 있자니 뭐라도 있기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저게 내가 아등바등 살아온 세상이구나, 하고 돌아볼 수 있는 초월적인 무언가가. / 71p

 

 

 

 

  소설을 읽고 있으면 불현듯 이런 의심이 든다. 단지 살인마를 가장했던 장영민처럼, 어쩌면 수많은 모방범들이 악명 높은 연쇄살인사건의 이름을 빌려 버젓이 살인을 하고 우리 주변에 숨어들어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때문에 단지 살인마가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는 행위를 ‘현대문명에 대한 완강한 거부를 상징’하는 동시에 ‘인간성 상실에 대한 경고를 점층법적 절단 의식에 담은 것’이라고 분석하는 저 의미심장하고 진지한 해석 따위는 이내 우스워지고 만다. 그렇게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는 행위가 한낱 퍼포먼스로 전락하는 사이, 독자들은 ‘살인자’는 누구도 아닌, 나를 비롯해 어느 누구도 될 수 있다는 평범성에 전율하게 된다. 다시 말해, 살의와 악의는 어느 소수의 광신자나 반사회성 인격 장애자에게서만 보이는 특이 행동이 아니라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품고 있는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섬뜩해지고 마는 것이다.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번 사건 역시 모방 범죄일지 모른다는. 이전 다섯 건의 사건들 또한 단독범의 소행이 아닐지 모른다는. 이 만만찮은 가능성을 애써 무시한 이유는, 만일 범인이 서로 알지 못하는 다수라면 십계명에 따른 전개가 신비의 영역으로 넘어가버리기 때문이었다. 그쪽까지 헤아릴 여력은 없었다. 일곱 번째 계명이 어사무사했지만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난 그만 손 털었으니 알아서들 하라지. / 87p

 

 

“우린 선택을 한 거예요. 평생을 괴로움 속에서 사느니 목숨 걸고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기로. 그렇죠?”

손동식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한 짓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잖아요. 우리야말로 피해자고,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그러니까 말하자면…… 전쟁. 그래요, 작은 전쟁을 치른 거죠.” / 138p

 

 

 

   영화 <살인의 추억>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지난 해 세상에 드러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진범 이춘재는 이미 자신의 처제를 성폭행 및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그런데 이춘재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 이미 연쇄살인범 유영철은 “범인은 다른 사건으로 오래 전부터 수감돼 있거나 죽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살인행각을 멈추지 못할 것”이라 주장한 바가 있다. 경찰이 이춘재의 심리를 분석한 결과에서도 “성범죄와 살인을 계속하면서도 죄책감 등의 감정 변화를 느끼지 못하게 되자 감정 상태에 따라 살해하면서 연쇄살인으로 이어지고, 수법도 점차 가학적인 형태로 진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소설 속 장영민에게서도 유사한 형태로 드러난다.

 

 

 

   단지 살인마에 의한 희생자인지 모를, 일곱 번째 희생자가 또 다시 나타나고 그러는 동안에 장영민은 ‘잠시 성찰할 틈도 없이 계속되는 자기복제’ 속에서 점점 범죄에 무감각해지고 스스로도 ‘한없이 가벼워져 휘발되는’ 듯한 ‘윤리적인 소멸’을 느낀다. 잠시 무감각해져 있었던 투자 타이밍에 대한 감각도 돌아오고, 여행지에서 버킷리스트를 즐길 계획까지 세우는 등 점차 자신이 저지른 범죄와 분리되는 과정으로 이행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우편함에 꽂힌 편지에서 ‘단지 살인마, 전화 요망. 010-XXXX-XXXX’이란 메시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제 장영민은 자의에 의해 선택한 살인을 타의에 의해 멈출 수 없는 복잡한 시험대에 오른다. 그는 살인을 멈출 수 있을까. 이미 가속도가 붙어버린 그의 범죄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을까.

 

 

 

 

 

 

   소설 『단지 살인마』는 차례차례 잘려나가는 손가락, 피의 퍼포먼스 속에 숨어든 개인과 사회 전체의 비틀린 윤리를 냉정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한 평범한 소시민이 연쇄살인의 형식을 빌려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과정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범죄가 작동하는 방식과 모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살인과 관련되어 있는 어두운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울러 손가락을 자르는 연쇄살인범의 살인 패턴, 완전범죄를 꿈꾸는 모방 살인, 또 다른 살인자와의 공모에 이르기까지, 추리소설의 특성과 철저히 살인자의 시선에서 그의 심리를 따라가는 전개 방식은 마지막까지 몰입도를 높인다.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예비 독자분들이라면 망설임 없이 질주하는 작가의 역량을 유감없이 즐기면서 그 속에 들어있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함께 숙고해보시기를 추천 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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