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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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큼 우리를 더욱 성숙하게 하는 게 또 있을까!

사랑이라는 성장통을 겪는 동안 우리는 또 한 뼘 자라난다!

 

 

 

   『프리즘』은 네 번의 계절이 지나는 사이에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과해온 네 남녀의 성장통 같은 이야기다. 손원평 작가는 책의 말미에 ‘이들은 사랑이라는 흔하고도 특별한 감정을 통과하며 자신을 확장해가고 세상을 향해 손을 내민다. 그것이 내가 그리고 싶던 사랑의 본질과 효과’라며 네 남녀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를 정리한다. 아름다워도 상처받아도, 아파서 후회해도 사랑이란 건 멈춰지지 않기에, 원하든 원치 않든 사랑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기에 다만 침잠하지 않고 확장되어 갈 수 있기를. 다양한 빛의 스펙트럼을 지닌 저 프리즘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이 일으키는 무수한 결들 속에서 끝끝내는 찬란히 빛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덕분에 ‘나는 누구와 연결되어 있을까’ ‘사랑이 나를 성숙하게 한다면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를 생각한다. 참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사랑만큼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건 없기에.

 

 

 

다만 열심히 사랑할 수 있기를

 

 

 

이 거리에는 사람이 많다. 참 많다. 너무 많다. / 9p

 

 

 

  좁은 냇물처럼 나 있는 거리를 매일같이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평생 단 한 번 마주치기도 어려운 이 복잡한 거리 속에서도 누군가는 있다. 내가 있고, 그리고 그가 있다. 예진은 오늘도 번잡한 효고동 길목의 작은 은신처에서 커피를 마시며 도원을 떠올린다. 자신만의 공간이라 여겼던 곳에서 몇 번이나 마주치곤 했던 도원을 언제부터 좋아하게 된 건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예진은 적당히 친근하고 적당히 거리감 있는 이 단정한 남자를 매일 기다리게 된다. 도원 역시 이 관계가 어떻게든 발전할 수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예진은 계산하지 않고 웃는 얼굴이 시원시원한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매력적인 여자다. 하지만 도원은 딱 지금만큼의 간격을 유지하고 싶다. 사랑은 그에게 늘 상처였기에,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누구도 자신의 공간에 들이고 싶지 않다.

 

 

 

“다시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있죠. 오래전 연락이 끊겼지만 가끔씩 생각나고 정말 보고 싶은 사람. 다들 하나쯤 있지 않나요.”

그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문장을 맺고 나서야 자신이 누군가를 떠올렸기에 나온 말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글쎄요. 전 제가 보고 싶은 사람들은 늘 만나고 있어서요.”

예진이 화사하게 답했다. 그 티 없는 밝음은 도원을 웃게 했지만, 동시에 그의 마음을 두 발짝쯤 물러서게 했다. / 58p

 

 

예진은 이 상태가 싫지 않다. 아직 ‘연애 중’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는 없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 설레는 날들. 이런 날들만 계속된다면 매일이 재미날 텐데. 그 많고 많은 시작의 직전들 중, 연애의 시작 전보다 달콤한 게 있을까. 아쉽게도 이 시간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건 예진도 알고 있다. 취한 뒤의 갑작스런 입맞춤, 예기치 못한 한 방처럼 불시에 듣게 되는 상대의 속마음, 혹은 자신으로부터 터져나오는 암시적인 고백. 그런 찰나의 지점 후에 관계는 성큼, 어느 단계로 진입한다. / 63p

 

 

 

 

 

 

   호계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베이커리를 채우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 냄새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뭐랄까, 이해가 되는 냄새라고나 할까. 하지만 호계는 이 냄새가 진실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하고 마냥 병아릿빛 같은, 그래서, 그러므로 가짜라고 여긴다. 이것이 오랫동안 애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으로부터 배제되어왔던 호계가 대략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한편, 호계가 일하고 있는 베이커리의 사장인 재인은 헤어진 남편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지 못하고 내내 만남을 유지하며 지내고 있다. 달에 두세 번 정도 만나 식사를 하고 잠자리도 가지지만 서로 간에 오가는 말은 별로 없다. 그녀는 이 의미 없어 보이는 관계를 쉬이 끊어내지 못하는 이유를 궁금해 하면서도 여전히 그를 만난다.

 

 

스스로가 사랑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사랑이란 건 줏대도 없이 좇는 유행이라고 생각했었고 모두들 그 흔해 빠진 유행에 휩쓸려 살아간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실은 그렇게 생각해야 버틸 수 있었다. 그래야 자신이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당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 124p

 

나는 왜 이토록 행복한 결말에 대해 관대한 걸가. 정작 그런 걸 별로 경험해본 적도 없으면서. 의문했던 적도 있다.

시간이 지나자 그 의문 자체에 답이 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누군가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도 그런 호사를 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재인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겪지 못한 행복, 충만하고도 영원한 사랑이 타인을 통해 어디선가 실현되기를 바란다. / 82p

 

 

 

 

  접점이 없을 것 같았던 네 사람의 우연한 만남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린다. 도원은 자신이 음악을 하던 시절에 짧게 만났던 재인과의 재회에 다시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낀다. 무언가가 회복되는 느낌, 치유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이 되살아나고 아물어 가는 느낌을 받으며 그녀와 이대로 함께 한다면 마지막은 어떨지 상상한다. 그건 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도원에게 아직 할 수 없는 말들이 너무도 많다. 그렇게 시작된 이 관계가 온전할 수 있을까. 불안하고 급하게 다시 쌓아올려진 이 관계에 문제는 없는 걸까. 그 사이 도원과 재인이 가까워지는 것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예진은 깊은 상실감에 빠진다. 때때로 자신이 도원을 좋아한 게 맞을까, 사실은 이별과 상실을 잊고 그저 ‘새로운 설렘’이라는 감정에 빠져 있는 게 즐거웠던 건 아닐까 뼈아픈 의심에 빠져들기도 한다. 때문에 이번만큼은 자신을 좋아해주는 남자를 만나겠다는 예진을 바라보며 호계는 끊임없이 새로운 누군가와 시작하곤 하는 그녀에게 화가 치민다. 예진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바라봐주지 않는 그녀에게 할 수 있는 것은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그녀의 사랑을 비난하는 것뿐이다.

 

 

 

재인은 입을 닫았고 호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이렇게 자신의 얘기를 여기저기 한 조각씩 흘리고 다녀도 되는 걸까. 진열대에 늘어선 비닐 안의 쿠키들을 볼 때면 가끔 불안해진다. 나도 저런 모습이 아닐까. 잘 포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속이 뻔히 들여다보인다는 점에서는. 그러다가 언젠가, 소소한 비밀이라고 여겼던 모든 일들이 전부 알려진다면? 그런 그림을 그리면 등 아래쪽에서부터 한기가 서려온다. / 47p

 

 

시작과 동시에 도원은 늘 끝을 생각했다. 설레야 할 때도, 절정이어야 할 때도, 극복해야 할 때도 끝이 그려졌다. 사랑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연상시켰다. 그 무수한 과정을 거쳐 도원은 마침내 사랑과 죽음은 등가라는 공식에 다다랐다. 부정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는 한 번도 먼저 이별을 입에 담은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농담으로라도 끝을 얘기하는 연인에겐 단번에 마음이 식었다. 수민과의 이별이 어렵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끝을 연상시키는 관계를 그는 용인하지 않았다. 그렇게 도원의 결론은 점점 굳어져갔다. 사랑이 뒤틀린 시간을 만나면 죽음이 되는 거라고. / 196p

 

 

 

   이렇듯 『프리즘』은 서로 다른 네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마음의 여러 지점들을 잔잔한 문체와 감각적인 문장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사랑이 찾아오는 순간의 설렘, 사랑하는 순간에 나누게 되는 약속들, 서로에게 솔직해지지 못했을 때 끝끝내 누설되고 마는 오해와 흠집들, 내내 보고 싶지 않아서 회피했던 것들까지. 소설은 우리가 사랑을 하는 순간에 마주하게 되는 감정과 그것이 가져온 변화들 그리고 그 사랑이 내게 남긴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과정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감정을 느끼고 읽는 뇌 기능이 고장 난 탓에 공감 능력 장애를 지고 살아가는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아몬드』, 견디며 사는 삶에 익숙해진 청춘들에게 반격을 고하는 『서른의 반격』이 그러했듯 말이다.

 

 

예진의 말대로 세상은 위험한 곳이었다. 과거 호계가 생각한 세상은 색이 한 가지였고 그 빛깔과 모양은 구겨진 회색 종이와 비슷했다. 아득했다. 이토록 많은 색을 무시하고 한 톤으로 세상을 규정했던 시간들이. 이제 그는 나아갈 것이다. 수많은 색과 무늬를 가진 곳으로. / 240p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에 아쉬움이 더 크게 남는다.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한 과잉된 자의식, 네 명의 등장인물이 저마다 다른 고유의 색채를 지닌 듯하지만 결국엔 하나의 색처럼 느껴지는 단조로움, 이 때문에 등장인물 그 누구에게도 특별한 매력을 느낀다거나 이입되지 못한 채 마지막까지 그저 흘러가고야마는 이야기. 이제는 책 소개글 따윈 필요 없이 ‘손원평’이라는 이름 하나만 보고 작품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작가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지만, 어느 덧 그 이상을 기대하게 되는 독자의 바람을 이렇게나마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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