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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평점 :

거대한 자연의 운명 앞에서 연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졸렬한 희망이란!
섬뜩한 광기, 자기 파괴적인 사랑, 재앙이 되어버린 집, ‘죽음’이 ‘삶’처럼 떠돌며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공포를 경험케 하는 단편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목 잘린 닭」은 마시니, 베르타 부부의 백치 아이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들 부부에게는 네 명 아이들이 있었는데 이들 모두 백치라는 운명 앞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아이들은 입을 헤벌리고 혀를 내민 채 초점 없는 멍한 시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이따금 그들이 노는 벽돌담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흉내 내는 것을 제외하면 종일 무기력하고 멍한 어둠에 세계에 빠져 지내곤 했다. 물론 이 네 백치 아이도 한때는 부모의 인생에 커다란 기쁨이었던 적이 있었으나, 어느 새 부부는 짐승 같은 자식 넷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사라지자 서로를 헐뜯고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고통스러운 나날이 계속되던 중, 다른 형제들과 달리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딸아이가 태어났다. 이미 백치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식은 지 오래인 부부는 하녀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딸 베르티타에게 온갖 사랑과 애착을 쏟아 부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이유에서인지 백치 아이들은 하루 종일 머물러 있던 벽돌담 앞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침 부엌에서는 하녀가 닭의 목을 자르고 피를 뽑아내고 있었다. 시뻘게…… 시뻘게…… 아이들은 닭의 목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나오는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고,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하녀가 아이들을 부엌에서 내쫓았다. 점심을 먹은 후, 산책을 하러 나간 부부가 잠시 이웃집 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베르티타는 형제들이 놀고 있는 붉은 담벼락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어린 여동생이 끈덕지게 담벼락을 오르는 광경을 백치의 아이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찌된 영문인지 초점 없이 멍하던 아이들의 시선에 활기가 살아났다. 마치 오랜만에 먹이를 찾은 짐승처럼 그들의 얼굴은 탐욕스럽게 실룩거렸고, 급기야 여덟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베르티타를 향해 손을 뻗기 시작했다. 백치가 되어버린 아이들의 삶이 곧 공포였던 부부에게 닥친 비극은 그렇게 베르티타를 겨냥한다.
이렇듯 「목 잘린 닭」은 순수한 광기, 죽음의 공포, 집요한 욕망, 인간의 어리석은 희망을 집약한 소설로, 짧지만 강렬한 충격과 섬뜩한 여운을 남긴다. 근대 단편소설의 거장이자 라틴아메리카 환상문학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오라시오 키로가의 대표작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열여덟 편에 이르는 작품을 수록한 단편소설집이지만, 수록작 「목 잘린 닭」처럼 어느 하나 빠짐없이 놀랍도록 인상적이다. 흥미롭게도 이들 작품은 모두 공통된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이다.
낭만적 사랑이라는 거짓에 대하여
낭만적 사랑이라는 것은 환상이라는 관념 속에서만 오롯이 존재하는 것일까. 낭만적 사랑의 거짓된 허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몽상에 빠져있는 이들은 ‘사랑에 놀아난 바보’가 되고, 현실 감각을 지닌 교활한 속물들은 끊임없이 대상을 욕망하거나 서로를 좀먹으면서 불화할 뿐이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속에는 아름다운 외모를 내세워 신분상승을 꿈꾸거나(「사랑의 계절」, 「이졸데의 죽음」), 사치스럽고 속물적이며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고 히스테리를 부리다 남편의 손에 비극을 맞이하는 여인(「엘 솔리타리오」)이 등장한다. 진실된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사랑을 쏟아 부었던 부부는 자신들이 낳은 아이들이 온전치 못하자 서로의 탓이라 몰아붙인다(「목 잘린 닭」). 순수한 사랑을 꿈꾸었던 연인들은 현실이라는 속물적 근성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내리고 (「사랑의 계절」, 「이졸데의 죽음」), 착란 증세에 빠졌을 때에야 비로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연인(「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게 사랑은 그저 환영에 가깝다.
환상이라는 지독한 광기, 그것이 아니면 도무지 버틸 수 없는 현실
환상과 광기의 텍스트. 키로가의 단편 속 인물들은 어느 누구 하나 온전히 사유하지 못하고 환상이라는 지독한 광기 사이에서 떠돈다.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배 안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바닷속으로 몸을 던지는 선원들(「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 신혼의 단꿈이 사라지자 이내 환영을 보거나 착란 상태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여인(「깃털 베개」), 마약에 빠진 묘지기와 죽은 지 8년째가 되어서도 여전히 마약을 갈구하는 해골의 대화를 담은 이야기(「내 손으로 만든 지옥」), 광견병에 걸린 개가 마을 전체를 공포로 몰아가는 기이한 광경(「광견병에 걸린 개)」)까지. 이들은 모두 현실과 화해되지 못한 채, 환상 혹은 지독한 광기에 물리거나 자신을 몰아가지 않으면 도무지 버틸 수 없는 비참한 현실의 말로를 보여준다. 죽은 뒤 땅에 묻혀 온전한 육신마저 사라진 순간에도 코카인 한 방울이라고 얻을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저 해골을 본 이상, 우리는 죽어서도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는 지난한 삶의 굴레에 절규할 수밖에 없다.
황량한 삶과 나란히 선 죽음이라는 공포
결국 사랑과 광기는 현실과 분절되지 못한 채 죽음으로 나아간다. 코카인이라는 지옥에 빠져든 스스로에게 내릴 수 있는 단죄는 죽음뿐이며(「내 손으로 만든 지옥」), 베개 속에 기생해 살던 괴물에 의해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피를 빨리고 만다(「깃털 베개」). 뱀에 물린 뒤 빠르게 흘러가는 강 위에서 표류하다 죽음을 맞이하고(「표류」), 강한 마취 성분이 있는 천연 꿀을 마셨다가 식인 개미떼에게 잡아먹히며(「천연 꿀」), 죽음의 사자를 발견했지만 끝내 농장 주인의 죽음을 막지 못하는 것을 보면(「일사병」) 죽음이라는 대자연의 질서 앞에서 인간은 그저 나약한 존재일 뿐임을 실감하게 한다. 이처럼 ‘죽음’이 ‘삶’처럼 짙게 깔려 있는 키로가 문학의 그로테스크한 광경은 매우 비현실적인 듯하지만 또한 무섭도록 익숙한 풍경이라 독자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다.
키로가가 이토록 사랑, 광기, 죽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해설에 따르면 키로가의 삶은 죽음이 그림자처럼 들러붙어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유년 시절에 가족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가 오발 사고로 죽고, 의붓아버지마저 엽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을 눈으로 목격했으며, 친구와 아내까지 잃는 비극적인 사건을 경험했다고 한다. 훗날 자신에게 닥친 죽음의 그림자를 발견하기 전까지, 이 기구하고 처참한 운명 앞에서 문학을 위로로 삼고 그 속에서 고유의 문학적 성취까지 이루어냈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끈덕지게 달라붙던 죽음의 공포가 결국 글을 쓰게 만들었다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까. 글은 가장 가깝고 익숙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나는 키로가의 문학을 통해 좀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