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이해하는 중국문화 - 최신개정
김태만 외 지음 / 다락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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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일본의 이해>가 백과사전식 나열이라 지루했던 반면, 이 책은 중국 문화의 여러 측면들을 비교적 흥미롭고 깊이있게 잘 풀어쓴다.

여러 전공자들이 함께 쓴 책이라 그런지 분야별로 잘 요약이 되어 있고 특히 현대 중국의 역사와 문화 측면이 도움이 됐다.

중국의 명승지 소개하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가본 곳이라고는 북경 밖에 없지만 만리장성이나 만력제의 정릉 관람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중국 관광지에 대한 이미지가 좋게 남았다.

한반도의 44배 크기라고 하니, 과연 다양한 자연환경의 명승지가 존재하고, 5천년 역사가 어우러져 인문기행지로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



<인상깊은 구절>

47p

국민당은 중일전쟁이 본격화되었음에도 항일전쟁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다. 방대한 국토와 인구를 기반으로 장기전을 펼칠 경우 일본에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종전 후 공산당 섬멸을 위해 국민당군의 전력 보전에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51p

문화대혁명이라 불리게 된 연유가 바로 이러한 문화계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은 도시 청년들을 홍위병으로 조직하는 대중 동원의 방식을 취함으로써 문화대혁명의 폭발을 촉진했다. 홍위병은 당정기관과 공장을 습격하고 열차에서 무기를 약탈하여 무장 충돌을 일으켰다. 이는 민간에 뿌리박힌 마오쩌둥 개인숭배 사상과 사인방 세력과 결탁한 군부 린뱌오의 암묵적 지지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텐안먼 광장에 몰려든 수많은 홍위병의 연호 속에서 마오쩌둥은 다시 베이징에 입성할 수 있었다.

98p

안사의 난 이후에도 140년간 당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전란의 피해가 화북에 집중된 반면 강남 지역의 피해는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절도사 휘하의 사병화된 군사 집단의 횡포는 갈수록 심해져 이를 막기 위해 당제국은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국가재정이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절도사의 횡포와 더불어 조정에서는 환관의 전횡이 날로 극심하였다. 환관이 추밀사에 임명되면서 국가기밀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지방군을 감시하는 감군도 맡게 되었다. 그들은 안사의 난 이후 금병 통수권도 장악하여 그 세력이 더욱 막강해졌다. 마침내 더 이상 환관의 전횡을 참지 못한 조정에서는 환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또 다시 절도사의 도움을 얻어야 했다. 당 말기에 시행했던 소금 전매는 농민의 난을 자초하여 '황소의 난'을 야기시켰다. 그 이후 환관과 관료의 대립이 더욱 극심해지자 재상 최윤은 절도사 주전충으로 하여금 환관세력을 제압하게 하였으나, 907년 주전충은 당의 마지막 황제인 애제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여 후량을 세웠다.

121p

중국의 전통 수학은 실용에 중점을 두어 발전하였기에, 추상적인 이론 체계를 구축하는 것에 있어서는 많이 부족하였다. 다시 말해 천문학적 예측이나 상업 등의 실제 적용에 힘쓴 것이다.

138p

한대 이후 중국의 사상은 당대에 불교사상이 성행한 것을 제외하면, 청대까지 유가사상의 재해석이라는 사상의 흐름으로 일관되었다고 볼 수 있다.

139p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에 반대하여 인간의 본성이 악한 증거로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욕망을 지니고 있고, 이러한 욕망 때문에 사회혼란이 끊이지 않는다는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인간의 본성을 하늘의 일부로 여긴 맹자와는 달리 순자는 하늘을 '자연적인 하늘'로 파악하여 그것에는 아무런 도덕적 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인의 예로써 인간의 악한 본성을 바로 잡고 사회기강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유가사상의 큰 변화를 보여주었고, 이렇나 사상은 법가사상에도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141p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르면 호족이라는 새로운 지배세력이 출현하게 되는데, 호족의 등장으로 황제지배 체제가 약화되고 사회질서가 혼란해짐이 따라 생사의 초월적 세계나 사후세계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던 유가사상은 쇠퇴하고, 인간의 고뇌와 갈등을 해소해 준 노장사상과 불교가 발전하게 되었다.

147p

한대에는 학자가 곧 관리가 되었고, 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나면 고향에서 다시 학자로서 학문을 하는 것이 이상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중국인의 의식 속에는 '교육의 목적'이 관리가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즉, 유교 이념에 따른 교육은, 소인을 군자로 교육하는 것이고 군자가 되면 관료로서 입신양명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과거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당시 관학교육은 관료가 되는 과거 시험의 교육이 되었기에, 순수학문이나 진리탐구의 교육은 아니었던 것이다.

148p

송대의 학교 교육 역시 문신관료제의 발달로 인해 과거 시험의 합격에 중점을 두었기에, 일반교육이나 학문연구로서의 진리탐구는 어려웠다

 고대 관학교육은 조정에서 직접 관할하여 '사서'와 '오경'을 위주로 한 유가경전을 가르쳤고, 이를 통해 통치에 적합한 인재를 배양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유가사상을 기반으로 한 통치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발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가 학문연구를 할 만한 여건이 보편화되지 못한 이유로는, 종이가 발명하기 전이었으므로 책의 보급이 어려웠고, 또한 문자가 통일되지 않아 지역마다 차이가 있어서 지식 획득이 쉽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따라서 사학교육의 보급은 스승이 말하면 제자는 질문하는 형식이었는데, 바로 <논어>가 그 대표적인 강의 내용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학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도 스승의 절대적 권위가 확립될 수밖에 없었고, 스승의 학설을 무조건 순종하는 학풍이 지배했다. 이러한 사학의 영향은 중국에서 객관적인 학풍의 발전을 더디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76p

루쉰은 아큐를 통해 중국인이 수천 년 동안 살아오면서 버리지 못한 비열한 근성인 '정신승리법'을 들추어냈다. 아큐는 영원히 패배자의 지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사람들에게는 털끝만큼의 신뢰감도 주지 못하며 자기변명이나 거짓말로 일관하면서 살아간다. 

206p

송 왕조의 후예였던 그가 이민족이 세운 원나라에서 관리로 등용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인품을 중시하는 서법의 특성상 예전부터 조맹부의 글씨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313p

오늘날 중국에서 기공이 성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요인 중 첫째는 의료의 혜택이 미비한 상황에서 전통적인 건강 요법은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첩경이 된다는 점이다. 중국 사회의 획일적인 체제에서 벗어나 정신적 자유를 지향하기에 적합한 사상적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지 않으며 개인적인 성격이 강한 기공 수련은 자신의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적 위안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전히 활성화되어 있다.

322p

사회주의 국가에 속하는 중국은 대중의 건전한 오락을 유도하기 위해 비용이 많이 들지 않으며 쉽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와 놀이를 국가적 차원에서 적극 권장하였다. 중국에서 태극권이나 사교춤, 탁구와 배드민턴 같은 활동이 활성화되었던 것도 그러한 원인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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