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늙은 농부에 미치지 못하네 - 귀농 전도사 이병철의 녹색 에세이
이병철 지음 / 이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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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씨앗은 힘이 세다”라는 책을 읽은 적 있다. 초보 농사꾼 강분석 부부의 귀농 일기였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함께 아름다운 삶을 일구어 가는 부부의 모습이 너무 부럽고 존경스러웠던 기억이다.

“나는 늙은 농부에 미치지 못하네”

과연 이 시대에 늙은 농부에 미칠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 스스로도 궁금하다. 천하의 근본인 농사를 우습게 여기고, 하늘을 다스리는 일을 맡은 농부들을 무시하는 세상. 이런 세상이 온전히 돌아갈 수 없음은 당연하고, 그야말로 미친 세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민주화 투쟁과 투옥, 다시 농민 운동과 환경 운동. 그리고 이후 저자는 이 땅의 진정한 귀농을 위해, 그리고 생태와 환경의 온전한 이어짐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분이다. 귀농이 단순히 도시에서 농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본디 사람이 태어났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저자는 오랫동안 강조해왔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저자는 “불임의 잿빛 도시”라 표현한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풍요와 편리라는 신기루를 쫓다 결국 우리 스스로를 잃어버린 도시. 자연과의 조화를 위한 생산이 아닌 온통 생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무수한 상품만을 쏟아내는 도시. 우리는 그 곳에 살고 있고, 벗어날 희망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때문에 귀농은 단순한 직업의 전환에서 벗어나 “뿌리 뽑힌 삶에서 뿌리내리는 삶으로, 자연을 거스르는 삶에서 자연과 조화로운 상생 순환의 삶으로,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삶에서 생산적이고 살리는 삶으로, 의존적인 삶에서 자립적인 삶으로 돌아가자”는 뜻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신자유주의의 망령이 이 땅을 어지럽게 하기 전부터 우리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하나로 너무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희생해 왔다. 그 중 어떤 것들은 이제 돈으로도 다시 얻을 수 없고, 다시는 만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발전이라 말한다. 도대체 무엇이 발전된 것일까.

스코트 니어링은 “더 많이 소유하는 삶 대신에 더 많이 존재하는 삶”을 말해왔다. 당장 삶의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무엇을 소유하기 위해 소중한 우리의 삶을 낭비하는 모습. 그것처럼 어리석고 답답한 모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하찮은 소유 때문에 자신의 삶 자체를 하찮게 만들고 있다. 이제 사람은 사람으로 평가되지 않고, 소비의 주체, 즉 얼마나 많은 것들을 사 모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를 기준으로 평가된다. 아끼는 삶이 아닌 쓰고 버리는 삶을 위해 평생을 노예처럼 일하는 것이다.

귀농이란 “더욱 삶에서 가난하고 생각에서 풍요로울 수 있”도록 우리들을 이끈다. 소유와 집착에 고통스러워하기보다는 나눔과 땀의 결실을 안겨준다. 어머니 자연의 위대함에 두 손 모으게 되고, 인간의 하찮은 오만과 방종에서 벗어나 소박함과 진정한 아름다움을 얻도록 해준다.

물론 지금 우리 농촌의 현실은 한없이 무참하기만 하다. 생명의 키우고, 만들어내는 농업을 또 다른 산업으로 규정하고, ‘경쟁력’을 운운한 그 순간부터 이미 우리 농업은 생명을 잃어가고 있다. 감히 쌀을 돈과 비교하려 하다니. 자동차와 비교하다니. 우리는 차가 없으면 걸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농업을 죽여 자동차를 팔아먹겠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부였고, 현 정부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엄중한 현실 속에 귀농을 마치 모든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인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위험한 것일 테다. 하지만 농촌이 이렇게 죽어갈수록, 그 죽어가는 땅에 돌아가 다시 생명을 가꾸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저자가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죽어가는 농촌, 이 땅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땅이 죽고, 농촌이 죽으면 우리 역시 살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책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나누어 우리들에게 잔잔하고 부드럽게, 때로는 단호하게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지금 이 땅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전하고 있다. 이제 귀농을 준비하시는 분들, 혹은 언젠가 불임의 도시를 떠나 어머니의 땅으로 돌아갈 꿈을 꾸고 있는 분들에게 좋은 마음의 다독거림이 되리라 생각한다.

정부는 경제 상황을 핑계로 기어이 이 땅의 강들을 파헤칠 모양이다. 당장 잠깐의 발전을 위해 후손들의 권리와 몫까지 전부 가져가고 있다. 우리가 진정 그럴 권리가 있을까.

암담한 현실에 이 책은 자그마한, 그러나 한 없이 따뜻한 위로가 될 듯하다.

정말 나는 감히 “늙은 농부”에 미칠 수 없다.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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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삐용의 책읽기 - 김광일의 책 읽어주는 남자, 하나
김광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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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볼만해” 혹은 “이 책 한 번 읽어봐”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하는 편이 아니다. 스스로의 수준(?)을 그리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것도 있지만, 섣불리 추천한다는 것이 그리 맘에 든든하지 않았다.

반면 이 책 “빠삐용의 책읽기”의 저자는 “무인도에 들어가는 빠삐용이 책을 10권만 사다 달라고 저에게 부탁한다면 그때 골라주고 싶은 책들”이라며, 많은 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꽤나 자신 있는 추천이다. 어느 부분에는 책이 재미없다면 책값을 돌려주겠다는 말까지 한다.

저자가 자칭 타칭 국내 최고의 언론사라 자부하고 있는(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쓰레기다) 무슨 일보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그의 역량 혹은 내공이 보통이 아닌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왠지 그의 자신 있는 추천이 100% 신뢰가 가지 않았다. 이는 어쩔 수 없는 나의 선입견 때문일까.   

저자처럼 많은 책을 읽지도 못했을 뿐더러, 스스로도 가슴이 무너지는 감동을 얻었던 책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책을 소개하는 책들의 미덕이 그러하듯이, 읽고 싶다고 느끼게 만든 책들이 여럿 눈에 보였고, 어떤 책들은 벌써 구해 방 한구석에 자리를 주었다. 이 책들도 언젠가는 읽게 될 것이다.

저자의 책 소개 중 사랑을 주제로 한 책들을 소개한 부분이 있다. 사랑은 참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누구라도 쉽게 정의내릴 수 없고, 또한 심판할 수 없다. 불륜이든, 근친이든, 그 보다 더한 극단적인 모습을 가졌던지, 사랑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의미한다.

한편 사랑은 정말 유치하다. 3류 신파극처럼 보일 때도 있고, 유행가 가사에 가슴이 무너지기도 한다. 평소 피식거리게 만들던 가사가, 구절이, 문장이 어느 날 문득 머릿속에서 살아나더니 떠날 줄 모른다. 난감하다. 그리고 지독히도 아프다.  


저자가 소개한 책 중에 사랑에 관한 책들을 주문했다. 타고난 게으름과 무식, 그리고 주변의 눈치에 민감한 나이기에, 소개된 책들이 얼마나 유명한지,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저자가 느낀 감동, 재미, 허탈 그리고 비웃음의 단 4분의 1이라도 느끼고 싶다. 그래서 서둘러 책들을 구했다. 칼날 위에 서 있는 사랑이라는 문구가 치사하게 아프다.

앞서도 말했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또한 남들이 그렇게 이야기해주기도 하는 쓰레기 신문사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의 책 소개. 저자의 배경을 떠나 책을 읽어야 난 비로소 읽을 수 있었다. 내 편견이다. 고쳐야 할 나쁜 습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가수가 사생활이 문란해도 노래만 잘 하면 된다”와 거대 언론사의 문화부장이라는 직함과 책 내용을 전혀 무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분명 다르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60권이 넘는 책들을 소개하고 있는 저자, 그의 박식함과 소양에 박수를 보낸다. 덕분에 읽고 싶은 책들 적당히 메모해 두었다. 하지만 세상의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 가난한 이들의 따뜻한 이야기들은 소개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고, 또한 당연하게 여겨져 더욱 아쉽다. 저자가 이와 같은 책들을 이어 낼 생각이라면 그때는 많은 흩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전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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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란의 다카포
호란 지음, 밥장 그림 / 마음산책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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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테두리 밖으로 벗어나지 않고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주장할 수 있는 세상이 나는 훨씬 탐난다”

호란의 생각 혹은 주장이다.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 때론 세상의 거친 끝자락까지 가야만 온전히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때가 있는 법이다. 더구나 지금과 같은 어두운 시기에는 말이다.

클래지콰이의 음악을 들어본 경험이 없다. 지인들이 그들의 음악을 “괜찮은”것으로 평가하기에 그런가보다 했다. 당연히 호란이란 가수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내가 호란을 알게 된 것은 우습게도 음악이 아닌 개그 프로와 그녀의 독서 편력 때문이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멋들어진 서평은 부러움과 동시에 자그마한 축복이다. 물론 서평이란 것은 온전히 읽은 이 자신 만의 몫이 분명하지만, 그 기쁨과 설레임을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재능이자, 선물이다.

호란의 책을 덮고 오래된 자료 더미를 찾아 예전 뮤지션들에게 받았던 사인을 찾았다. 그리고 혼자 키득키득 웃어버렸다. ‘She's Gone’으로 국내에도 많은 팬을 거느렸던 스틸 하트의 보컬과 베이시스트가 왔을 때 받았던 사인과 전설의 그룹 헬로윈의 보컬의 사인이 있었다. 그리고! 나의 음악적 스승 중 하나인 메틀리카의 내한공연 때 무수히 많은 락앤롤 정키들을 제쳐가며 받았던 베이시스트 제이슨 뉴스테드의 피크~! 아 그 감동을 무어라 표현할까.

하지만 정작 내가 웃은 이유는 한 때 뭇 남성들을 설레게 했던 미국 여가수 데비 깁슨의 사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Stay Cool!”이라고 적혀있는 그녀의 사인. 내가 언제, 그리고 왜 이 여가수의 사인을 받았는지, 순간 난 메멘토였다.

호란은 우선 뮤지션이다. 유감스럽게도 난 클래지콰이의 음악을 제대로 들어본 기억이 없다. 아는 지인들이 꽤 괜찮다고 하니 괜찮은가보다 생각할 뿐이다. 정작 내가 호란이란 음악인을 알게 된 것은 그녀를 패러디한 개그프로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단순한 요즘 시대의 가수가 아니라, 꽤 심각할 줄 아는 독서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관심이 갔다.

사실 난 이런 종류의 책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장정일의 독서일기와 같은 어떤 형식과 치열한 고민, 정성이 깃들어져 있는 책들은 제외겠지만, 대부분 이름 좀 알려졌다고 하는 이들의 서평 모음이나 잡다한 일상사와 자신의 아름다운 소개가 담긴 에세이들은 나로 하여금 감동 보다는 “So What?”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호란의 책에서도 그리 큰 감동은 기대하지 않았고, 기대한 것이 없으니 실망도 크지 않았다. 책은 그냥 호란의 서평, 자신이 즐겨 듣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삶에 대한 소개 등등이다. 그녀 자신 역시 비꼬았던 저자에 대한 과도한 찬사 등이 그녀 책에서도 역시 옥의 티처럼 드러나는 것이 어떤 블랙 코미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호란의 책이 가치를 가진 것은, 그녀의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 때문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재능과 위치와 재력 등등 모든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그야말로 단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온전히 불태우려 한다. 그것이 그녀에게서 내가 배우고 싶었던 부분이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면서도 옛것에 대한 건방을 떨지 않는 자세. 음악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소양이다. 호란은 정말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요새 것들”답지 않은 능청스러운 프로 정신이 있는 뮤지션이다. 그 점이 나에게 책을 읽은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준다.  


그녀의 그 단단한 야무짐과 따뜻한 순수함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그녀가 소개한 책들, 음악을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즐거운 책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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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가는 시내버스
안건모 지음 / 보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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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날 입을 호호 불어가며 몇 십분 씩 기다린 버스가 정류장에 서지도 않고, 냅다 지나가버린 경험. 그 때의 분노와 허탈감. 느껴 본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입에선 육두문자와 저주가 터지고, 인내심이 부족한 이들은 택시를 타고 그 버스를 추격하기도 한다. 믿지 못하겠지만, 가끔 뉴스에 나왔다.

왜 버스 기사들은 그렇게 정류장을 지나쳤을까. 귀찮아서? 심심해서?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고, 또 절실하다.   


바로 살기 위해서다. 정해진 시간보다 5분이라도 빨리 한탕(한 코스를 도는 것)을 뛰어야 오줌 눌 시간이라도 벌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과거에 비해 버스 기사 분들의 노동 환경이 많이 개선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도 역시 그들은 엄청난 노동 강도와 열악한 근무 조건 속에서 서민들의 발이 되어주고 있다. 현대의 정몽준이 언젠가 현재 버스요금을 “몇 십 원”으로 말했다 비난 받은 적 있다. 하기야 그네들과 같은 귀족들이 시내버스를 탔을 리 만무하지만, 십년도 전 버스요금을 기억하고 있는 정몽준의 무성의가 짜증나긴 했다. 아무리 볼만 차는 국회의원이라지만 적어도 서민 교통수단의 운임 정도는 알아두었어야 하지 않을까.

책의 저자는 20년 동안 서울에서 시내버스와 좌석버스를 몰았던 노동자다. 그리고 지금은 진보 월간지 “작은 책”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일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생활 글쓰기’에 노력하고 있다.

그는 열심히 일만 하는 노동자에서 삶의 어긋남과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로 변화해갔다. 노동자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싸웠고,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발이 되어 주었다. 납치와 테러 등 생명을 잃을 뻔한 경험도 하며, 그는 끝끝내 자본의 개가 되기를 거부한 노동자였다.

만약 이 책이 비장한 노동자의 투쟁기로 일관했다면 그 열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감동은 덜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책은 우리네 삶이 소중하게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민들의 삶, 우리들의 아픔이 잔잔히 묻어난다. 노동자 문학이 가지고 있는 솔직함과 투박함이 그대로 전해지는 귀한 글이다.

노동자들의 글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이 책 역시 쓸데없는 미사여구나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는 미덕이 있다. 아울러 억지로 감동을 주려는 불온하고 애처로운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런 점을 나는 노동문학의 장점이자, 약점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억지 감동, 잘난 척이 난무하는 활자 공해들 보다는 백만 배 낫다고 믿는다.

다음과 같은 글은 그냥 덤덤히 말하고 있는데도, 묵직한 여운과 아픔을 준다. 그와 함께 모진 고생을 함께 해온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이 그대로 전해진다.

마누라가 둘째 아기를 뱄다. 벌써 다섯 달이 되었다고 하는데 두말없이 지우라고 했다. 키울 자신도 없고 아기가 좋은 줄도 몰랐다. 병원에 가니 나중에 후회한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했다. 마누라는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았다. 뭐 생각할 거 있느냐고 하며 아기를 지우라고 했다. 병원에서 표현한 대로 ‘아기를 죽여서’ 돌려 낳고 병원을 나왔다. 마누라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원망했다. “괘씸아, 많이 아팠어.”

비단 버스 운전만 특별히 힘들다고 할 순 없다. 택시 운전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기가 막히고 화물차 운전, 건설 현장 장비 운전하시는 분들도 모두 전설과 같은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다.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노동은 그것이 무엇이든 살아있고, 적어도 떳떳하다. 하지만 그러한 노동의 가치는 지금 이 시대에 어느 정도의 대접을 받고 있을까. 자신도 5년 계약직이면서 이명박은 대한민국 비정규직을 모두 죽이려 하고 있고, 정규직 역시 여차하면 비정규직으로 떨어뜨린다며 공갈을 일삼고 있다. 노동자 안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불신하고 증오하게 부추긴다. 일제가 사용했던 방법 그대로이다.

환경 미화원, 버스 운전수, 택시 운전수 그리고 매일 매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노동자들. 적어도 그들이 여의도 패거리들이나, 또 하나의 가족 운운하는 재벌 패밀리, 철통 밥그릇 사수 관료 집단들보다 아름다운 노동자임을 확인하며, 가슴 아팠던 책이다. 그들의 끈질긴 사랑이 눈물겹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눈물겨운 사람들 덕분에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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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7-02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쓴 안건모입니다. 뒤늦게 리뷰를 쓴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책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지금은 월간 작은책 (www.sbook.co.kr)이라는 진보 월간지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노동운동에서 언론 운동, 문화운동으로 바꾼 셈이지요. 노동자들 소식을 전하는 책입니다. 사이트에도 들어 오셔서 구경하시고 구독 신청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레이몬드 카버 지음, 정영문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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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전 대학 도서관에서 순전히 ‘제목’만 보고 집어든 책이 바로 카버의 “제발 조용히 좀 해요”였다. 미니멀리즘의 대가라는 수식어가 책과 함께 했던 기억이 난다. 뭔지는 몰라도 상당히 소박한 것을 좋아하나보다 생각했었다. 아름다운 무식이었다.

십년 이 지난 후 다시 카버의 소설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도 제목의 영향이 컸다. 역시 제목 선정은 뛰어난 내공이 필요한 일임을 느끼게 된다. 물론 제목 하나만 보고 책을 고르는 일은 역시 무모한 일임에 틀림없다. 단지 주연 배우 혹은 감독만 믿고 영화를 냉큼 보는 것과 같은 위험이다.

하지만 카버의 소설은 얄팍한 사기를 치지 않는다. 딱 제목만큼의 여운과 사소한 감동을 준달까. 하지만 사소한 감동이라고 하찮게 여길 순 없다. 그 사소함이 때론 적지 않은 위안을 주곤 한다. 그게 사람이기도 하다. 누구나 사소하게 감동받고 싶고, 상처도 딱 사소할 정도로만 받았으면 한다.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이 언뜻 우리들이 보기에는 하찮은 일상사다. 누구에게나 흔히 생길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들이 카버 소설의 배경이다. 극적인 반전이나 소름이 돋는 감동은 솔직히 찾을 수 없다. 적어도 난 그랬다. 하지만 카버의 소설들은 독자들에게 여백을 남겨준다. 그 여백을 채워나가는 것이 독자의 몫으로 남겨지고, 그 과정에서 사소한 슬픔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아주 잠시 동안 그 사소한 슬픔의 근원이 어디인지 어리둥절해진다. 카버는 짧은 이야기 하나에 결코 적지 않은 여백들을 남겨두곤 한다. 그 여백으로 우리는 위안을 얻고, 슬픔을 느끼고,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세상은 살벌하게 빠르다. 변화를 따라잡겠다는 의욕 넘치는 이들을 제외하고, 적어도 뒤처지지는 않겠다는 이들도 숨이 가쁘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항상 변함없는, 적어도 아주 느리게 변화하는 것들이 있다. 마치 주위 배경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가운데 정작 주인공의 성장은 너무나 느린 것과 같다. 자신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고 느끼겠지만, 사실 언제나 제자리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주위에 생경함에 무참함을 느끼게 된다.

카버의 글은 나에게 생경함과 무참함을 전해 주었다. 하지만 따뜻한 동질감 역시 함께 전해 준다. ‘아, 나만 이렇게 어리버리한 건 아니구나. 다른 이들도 이처럼 사소한 것에 상처받고, 행복해하며 살아가고 있구나. 결국은 모두 그렇게 죽어가고 있구나.’

그리 기분 나쁜 경험은 아니다. 때론 아주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 무서운 세상에서도 변하지 않으려 끝내 버티고 있는 사소함들이 위안을 전해준다. 거대하고 고귀한 담론들이 무지막지하게 섞여, 정작 독자에겐 소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설보다, 그래서 카버의 소설은 알뜰하다.

십년 만에 읽은 그의 소설은 다시 그 생경함과 무참함을 전해준다. 하지만 십년 전과는 다르다. 이것이 카버 소설의 또 다른 미덕이구나 싶다. 나의 사소함이 십년 전과 다르듯이 나의 행복도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그의 책을 읽을 때는 모든 감정의 방어막을 풀어헤치고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야 상처도 행복도 그리고 사소함도 온전히 전달될 듯하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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