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간 2008년 5월 24일~5월 27일 / 독서번호 952
정혜신 외 / 한겨레출판 펴냄 (2006년)
제가 모호한 여러 가지 관점들을 얘기했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에 대해서는 모호함을 참고 이리저리 열어놓고 생각하자는 거예요. 사람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모호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사람들을 보면서 깨달은, 완벽하게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전제를 여러분들한테 말씀드릴께요.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건 오류가 전혀 없다든지 이건 100퍼센트 확신한다고 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 이 말만은 제가 자신 있게 할 수 있어요. “모든 인간은 완벽하게 불완전한 존재다.” 그러니까 쫄지 말자. 열어놓고 보자. 완벽하게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것 하나가 저는 이 명제라고 생각해요.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열고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생각한다면, 거짓을 좀 더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 드리고 싶네요.
- 정혜신, 38p
결국 과학을 한 측면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이해하고, 그렇게 해서 찾아낸 중요성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제기하는 것이 과학사회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반드시 과학사회학자나 그와 연관된 학문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이제는 과학과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 김동광, 63p
우리 사회에서 과학주의가 반성되지 않는 것도 큰 문제지만, 한편으로 생명에 대한 인식이 너무 기계화되고 분절화되어 있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생명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분절화되어 있다는 말은 생명이라는 것을 오로지 개체 중심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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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살아가면서 하루에 의존하는 생물들의 수가 수만 종에 이른다는 분석이 생태학자들에 의해서 나오기도 하는데, 그처럼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거대한 생태계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죠.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자신을, 또 사회와 자연 같은 부분들을 쉽게 분리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 김동광, 77p
그렇지만 줄기세포 연구처럼 국가의 미래가 달려 있는 중요한 주제들에 대해서는 일반 시민들까지 참여시켜서 사회적 합의를 얻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만 다시 똑같은 실수가 되풀이되지 않겠지요. 저는 지금 상태에서 그냥 지나간다면 또 다른 제2, 제3의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지금 아무도 반성하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어떤 제도도 만들지 않고 있는데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또 한 번 왁자하게 떠들다 끝나버리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로서는 그런 부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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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생물학적인 부분들이 너무 과장돼 있다고도 보는 것이죠. 지금은 마치 분자적 관점을 통해서만 생명을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이지만, 그건 하나의 패러다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까 얘기한 생명에 대한 조작적 관점이라든가 등등 많은 것들을 통해서, 그건 하나의 패러다임일 뿐이지 결코 그것이 다른 접근들에 비해서 훨씬 우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 김동광, 95p
백범 말씀 중에 “천길 벼랑에 올라가는 거야 장부라고 할 수 있느냐. 거기서 자기를 내던지는 게 장부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 자기가 믿던 가치를 버리지 않으면 죽게 생겼으니까 그것을 바꿔나가는 과정은 훌륭한 것이라고 봅니다. 즉 모든 역사적인 부분에는 진보적인 성격과 한계가 함께 있을 수 있는데, 그 사람이 가진 진짜 진보성이라는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성찰하고 그럼으로써 어떻게 변화시켜 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 한홍구, 128p
원래 인간이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존재고, 때로는 자기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을 남이 모를 뿐만 아니라 자신조차 모를 때가 많은 존재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속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가 거짓말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자기도 모를 때가 많지요. - 김두식, 170~171p
지금은 한국 교회가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는 전통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만, 1938년에 우리나라 대표적인 교단인 장로교 총회에서 이런 결의를 했습니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며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 참배가 애국적인 국가의식임을 자각하여, 앞으로도 신사 참배를 열심히 하자.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자.” 신사 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니라 애국심을 표현하는 한 방법일 뿐이라고 장로교 총회에서 결의하자, 그 뒤를 위어서 감리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기독교 종파들이 모두 신사 참배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냥 참여한 정도가 아니라 일본까지 가서 신사 참배를 하기도 하고, 안 하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권유해서 함께 하기도 했어요. 여러분들도 다 아시는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한 아주 소수의 기독교 지도자들만이 당시에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했습니다. - 김두식, 172p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사람들이에요. 거짓말도 많이 하죠. 사회 시스템 전체가 거짓말을 권하는 그런 면도 있어요. 다 같이 거짓말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그런 면이 있는데, 그런 불완전성 속에서 불확실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늘 마음 한편이 불안하다는 거죠. - 김두식, 185p
서구 지성사회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우슈비츠와 굴락 얘기를 계속 해요. 그 이유는 그게 무슨 자랑스러운 역사라서가 아니라,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는 거죠. 따라서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복원한다고 해서 누구를 다시 감옥에 집어넣고 그런 방법만 있는 게 아닙니다. 잘못된 역사, 잘못된 기억에 대해서는 계속 애기해야 합니다. 계속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겁니다. - 김두식, 188p
북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북에 대해서 다 비판적이지 않아요. 저는 북쪽과 화해하고 용서함으로써 교류를 강화하는 것이 통합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북에 대한 환상 또한 안 가졌으면 좋겠어요. 사실 북은 모순투성이인 사회이면서 좋은 사회이기도 합니다. 남한도 비인간적인 사회이면서 또 좋은 사회이기도 하죠. 양면이 다 있어요. 따라서 같이 고민하고 같이 노력해서 공존을 모색하는 게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형덕, 220~221p
우리가 새롭게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안다는 것은 ‘알게 된 새로운 자기 몸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알기 이전의 몸이 있고 알고 난 뒤의 몸이 있는데, 몸이 변했기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비가 알로 돌아가지 못하듯이……. - 정희진, 266p
저는 모든 언어는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언어는 말해지는 순간, 이미 번역됩니다. 화자와 청자가 말하는 의미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완벽한 의사소통은 군대에서나 가능합니다. 그러나 결코 바람직하지 않지요. 대화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에, 전달될 때는 이미 다른 의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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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떤 면에서 우리가 하는 영어를 미국 사람이 못 알아들을 때, 저항이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번역 불가능성이 바로 저항의 가능성입니다. 다시 말해, 저는 모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즉 권력관계의 전제는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은 무지를 통과하지 못합니다. 의사소통이 돼야 권력이 작동하죠. - 정희진, 268~269p
사람들이 짝퉁을 모방이라고 보는데, 그것은 위계적인 발상입니다. 원래 원본, 기원, 순종, 본질 같은 건 없어요. 원본이 있는 게 아니라, 원본을 지향하는 욕망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원본이나 짝퉁 모두가 지향하는 바를 모방하는 거죠. - 정희진, 270p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포스터 중에, ‘인권은 배려입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것이 있어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권은 배려가 아니라 경합하는 가치예요. 각축하고 투쟁하는 가치입니다. 누가 누구를 배려합니까? 흑인이 백인을 배려해야 돼요? 배려하는 말에는 이미 주체와 대상, 주체와 타자라는 구분이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을 ‘배려’한다 또는 ‘보호’한다는 것도 이상한 말이잖아요. 가정폭력을 보세요. 여자들은 맞으면서 보호받고 있잖아요.(청중 웃음) 보호라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굉장히 문제적인 말이에요. - 정희진, 273p
첫 번째로 대화를 나누는 사회적 구성원들, 곧 청자와 화자는 계급이라든가 성별, 인종, 나이, 성적 정체성 등 다양한 사회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둘 사이에 완벽히 번역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항의 차원에서 다양한 말을 생산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언어는 서구 백인 이성애자 젊은 남성에 의해서 구성된 말이지, 다양한 위치의 사람들 입장에서 만들어진 말이 아니라는 거죠. 동성애자 시각에서 하는 말과 여성 시각에서 하는 말, 장애인 시각에서 하는 말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릅니다. - 정희진, 275p
현실과 갈등하지 않거나, 투쟁하지 않거나, 문제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자기를 일치시키기 때문에 의견이 없을 수밖에 없고, 감정적이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정적’이라는 말과 ‘정치의식이 있다’는 말을 같은 뜻으로 씁니다. 현실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무슨 감정을 느끼겠어요? 저는 ‘쿨한’ 사람하고는 말을 안 섞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감정적으로 세련된 사람을 싫어합니다. - 정희진, 277p
저항은 소통과 협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너의 타자성을 사랑한다’, ‘너의 결핍을 사랑한다’라는 말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사회적 약자들 중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깨달은 사람들은 고통당하고 억압받아왔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굉장히 섹시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여성주의자나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 지역 차별이나 학력 차별에 분노하는 사람에게는 보입니다. 1인치를 더 본다는 텔레비전 광고처럼요. 다시 말해, 너의 결핍이 나의 대안이라거나, 너의 고통이 내게 지혜와 통찰을 준다거나, 너보다 내가 더 희생자라는 식으로 불행을 경쟁하는 소통방식, 즉 결핍을 부정하고 메우려는 생각보다는, 너의 결핍과 나의 결핍을 우리 자신의 일부로 긍정하고, 서로의 타자성과 연대하고 소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자 또는 다른 언어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 정희진, 283p
어차피 현재의 제도교육에서는 99.9퍼센트가 ‘실패’합니다. 제도교육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0.1 퍼센트 밖에 안 돼요. 그리고 0.1퍼센트로 성공해서 이른바 ‘명문 대학’에 갔다고 칩시다. 거기서 극소수만이 대기업에 취업합니다. 하지만 대기업에 들어가 봤자 10년 후면 명퇴 소리가 나옵니다. 지금은 영원한 정규직이 없습니다. 저는 진로를 고민하는 대학생들한테 “그렇게 살고 싶으세요?”라고 묻습니다. 다른 삶의 양식을 모색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방식과 기준으로 사는 사회에서는 개인도 사회도 불행합니다. 지금 교육제도에서는, ‘성공’한 극소수도 ‘실패’한 사람도 모두 불행합니다. 제 주변에 흔히 말하는 학벌 좋고 출세한 사람 많거든요. 그런데 행복한 사람 하나도 없어요. 다 죽을 만큼 바쁘거나 스트레스 최고인 상태예요. 행복이 성적순이라는 것은, 그것을 욕망하는 사람이나 그게 전부인 사람의 관점일 뿐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권력이나 출세에 인생 저당 잡힐 필요가 없다. 그래 봤자다, 다르게 살아야 한다, 궤도 밖으로 탈출하자, 그래서 왕따 당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사회를 왕따 시키자. - 정희진, 295p
인도 어린아이들의 47퍼센트가 평균 체중에 미달합니다. 또 가임 연령대에 속하는 여성들의 48퍼센트가 평균 체중에 미달하거나 심각한 빈혈에 시달려서 아이들을 낳더라도 제대로 영양을 공급할 수가 없습니다. 이 수치는 수년 동안의 내전과 인종 갈등, 가뭄에 시달리던 아프리카 사하라 지역보다도 더 심각한 수치입니다. - 프라폴 비드와이, 315p
기본적으로 프랑스와 한국, 인도, 남미, 미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본질은 기업이 주도한 세계화라는 것입니다. 기업이 주도한 세계화가 각 국가들의 우선순위를 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국의 정치인들은 자신들을 뽑아준 국민들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용률은 내려가고 각종 공공요금들은 올라가며, 어느 나라에서나 동일하게 지역간 그리고 계급간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 프라폴 비드와이, 325p
민주주의라는 것이 사람들이 그저 몇 년에 한 번씩 투표장에 가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뽑힌 사람들이 자신들을 뽑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게 하는 참여의 메커니즘으로 계속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서 실제로 그들이 말하는 세계화보다 더 현실적인 대안적 정책을 도출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 프라폴 비드와이, 32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