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혐오를 읽다 - 종교, 차별, 여성, 법으로 살펴본 혐오 이야기 철수와 영희를 위한 사회 읽기 시리즈 2
김진호 외 지음, 인권연대 기획 / 철수와영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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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사회에서의 배제, 권리·자유의 제한, 명백한 증오나 차별의식, 폭력을 부추기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표현 활동”

 

일본 오사카시는 2016년 제정한 조례에서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특정 민족 등에 대한 혐오표현)’를 이렇게 정의했다. 오사카시는 조례에 따라 헤이트 스피치를 행한 인물의 신상을 공개할 수 있도록 했고, 실제 ‘조선인이 없는 일본을 지향하는 모임’ 등 극우 사이트 관련 인사들의 신상을 공개한 바 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중국은 물론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당장 뚜렷한 백신이 없는 상황에서 전염에 대한 두려움이 급속도로 확산된다. 일단 최대한 야생동물과의 접촉을 자제하고 청결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게다가 미국에서는 독감으로 1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오고 있다. 2020년 벽두부터 예상치 못한 바이러스의 침공으로 모든 현안과 이슈가 묻히고 있다. 압도적이다.

 

인류는 탄생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질병에 맞서 싸우며 살아왔다. 콜레라, 결핵, 에볼라, 말라리아, 페스트, 이질, 장티푸스, 천연두, 사스, 메르스 등 무수히 많은 질병과 싸워온 시간 자체가 곧 인류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손 쓸 수도 없이 목숨을 빼앗아 갔던 전염병들이 과학의 발전에 따라 차츰 정복 가능한 것으로 바뀌기도 했다. 이제 또 우리는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나게 되었고, 길고 긴 전투가 다시 시작된 셈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전염병이 발생하고 확산됨에 따라 또 하나의 바이러스가 함께 창궐하고 있다. 어찌 보면 더 무섭고 치명적인 바이러스다. 이것이야말로 백신이나 치료법이 전무해 보인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바이러스의 이름은 바로 혐오와 배제이다.

 

중국인들의 오랜 식문화로부터 전염병이 비롯되었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예전 다른 국가에서 촬영했던 박쥐를 먹는 영상이 급속도로 퍼지며, 비위생적이고, 이른 바 무엇이든 다 먹는(!) 중국의 식문화가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중국인들의 식문화가 과거 수많은 기근(중국 공산당의 농업 정책 실패로 인한 엄청난 기근을 포함해)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은 간과한 채, 이른 바 ‘쇼킹 아시아’ 급으로, 유독 중국인들은 비위생적이고 야만하다는 인식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프랑스에서 새끼 원숭이의 골수를 산 채로 즐겨 먹었던 것이나, 그밖에 우리 시선으로 보면 기겁할 만한 식문화가 서구에도 엄연히 존재함에도, 또한 우리 역시 개고기를 즐겨먹었던 과거(물론 지금도 개고기를 즐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음성화되었을 뿐)가 있음을 기억한다면, 중국에 대한 무차별 혐오는 적절치 않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일단 중국인들은 혐오의 대상일 뿐이다.

 

우리 언론도 여기에 한 몫 하고 있다. 어떤 언론은 재중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대림동을 탐방하고 쓴 기사를 통해 마치 조선족 동포들을 위생 관념이라곤 하나도 없는 야만인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여기에 동감을 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에서의 혐오 현상은 지금의 코로나처럼 ‘신종’은 결코 아니다. 2018년 우리 사회를 흔들었던 제주 예멘 난민 문제도 그랬고, 빈곤층, 여성, 장애인, 탈북민, 외국인 노동자, 성소수자 등 우리 사회의 혐오 현상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계층과 연령에 따른 차별과 혐오 문제도 가볍게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혐오의 측면에서 그들은 함께 살아야 할 이웃이 아니라 배척하고 박멸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참혹한 모습이 매일 매일 일어난다.

 

차별과 혐오는 구분 짓기에서 비롯되고, ‘우리’가 아닌 ‘적과 아군’을 만들게 된다. 서로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자연스럽게 증오를 낳게 되고, 결국 공동체를 무너뜨리게 된다. 대화와 협의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기 보다는 상대를 굴복시켜야 할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그런 사회에 미래가 있을까.

 

지난 조국 사태를 겪으며 느낀 것은 우리 사회의 갈등 수준이 누가 옳고 그르냐의 문제를 이미 넘어섰다는 것이었다. 광화문과 서초동에 모인 이들이 서로 다른 나라의 시민들이 아닐 텐데, 상대방을 용납할 수 없는 적이나 없애버려야 대상으로 낙인찍고 일방적으로 비난했다. 검찰개혁이라는 중요한 시대적 과제를 위한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말하기엔 그 상처가 너무 컸다고 생각했다. 그 감정의 골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힘들게 만들 것이다. 그것이 무엇보다 아쉽고 안타까웠다.

 

갈등과 혐오를 생산하는 이들은 당연히 목적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된다고 생각하기에 갈등을 생산한다. 책은 우리사회의 차별과 혐오가 1997년 IMF 사태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분석한다. 자살률은 항상 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했고, 불특정 대상을 상대로 한 폭력과 살인도 증가하고 있다. 결국 사람들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갈수록 차별과 혐오 현상이 증가한다는 설명이다.

 

우리는 어느 새 일상적으로 무언가 분노할 대상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대상은 주로 사회적 약자들이다. 일부 정치세력이나 이익집단들은 이런 혐오를 부추겨 자신들의 이익을 챙긴다. 언론도 여기에 함께 춤춘다. 그들도 결국 이익집단에 불과하다.

 

누군가를, 특정 대상을 혐오하고 차별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찾거나 두려움을 해소할 수는 없다. 우리는 나치를 혐오한다. 이는 정당하다. 나치가 가졌던 차별과 배제의 논리는 인류에 끔찍한 상처를 남겼다. 우리는 일본에서 살아가는 우리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과 억압에 늘 분노한다. 하지만 스스로 거울을 쳐다보지 않고 있다. 우리 스스로 그들과 닮아가는 것은 아닌지 큰 성찰이 필요하다.

 

혐오와 차별 속에 평화가 깃들 공간은 없다. 시간이 갈수록 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 사회의 혐북(북한을 혐오하는 현상)이 우려스러운 이유이다. 북한을 제거해야 하고 박멸해야 할 적으로만 본다면, 이 땅의 평화는 영원히 기대할 수 없다. 타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는 통합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공존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70년을 맞는 지금, 우리는 과연 북한과의 공존을 원하고 있는지, 그 준비는 하고 있는지 다시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가난하다고 차별하고, 나와 생김새가 다르다고 배제하고, 나와 생각과 문화가 다르다고 배척하는 것은 공동체의 기반을 흔들게 되고, 결국 무너뜨린다. 다양한 생각과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그 다양성만큼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이 곧 미래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거대한 우주이다. 혐오는 타인의 우주를 파괴하는 행위다. 오사카 시민들만큼의 상식을 기대하는 게 그리 큰 욕심일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무리 무서워도 끝내 인류는 이를 극복해낼 것이다. 그 과정이 부디 너무 길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증오와 배제, 차별과 혐오는 시간이 간다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끊임없는 성찰과 이해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무한경쟁의 늪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람답게 살고 있다는 자존감을 느낄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자본을 설득할 수는 없지만, 자본을 통제하려는 노력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 자본이 인간을 배제하고 차별을 생산하는 비정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 자신을 돌아본다. 나도 모르게 타인에 대한 차별의식을 가지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차별과 혐오에 대한 애써 눈감으며 외면했던 것은 아닌지, 모든 이들을 내 마음을 다해 섬겼는지, 무거운 반성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 안의 차별, 혐오, 배제의 감정을 없애버리고, 다시 공동체를 꿈꾸는 데 책은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모든 것은 우리의 의지에 달렸다. 우리는 영원할 수 없지만, 영원한 공동체를 매일 매일 꿈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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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 변경 르포, 1300
신창섭 지음 / 책밭(늘품플러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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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전국이, 아니 전 세계가 비상이다. 코로나192020년 상반기를 점령했다. 덩달아 국내는 신천지로 인해 대구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고, 전국적으로 신천지 색출(!)작업이 한창이다. 그들이 기존 종교계에서 봤을 때 영락없는 이단이라고는 하나, 단지 신천지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격렬한 증오와 박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혐오는 순식간에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지난해부터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남북교류협력사업도 난관에 부딪쳤다. 북측 역시 코로나19로 비상이 걸렸으니, 모든 것이 중단된 것이다. 2월 예정되었던 중국에서의 만남도, 그와 관련한 협력사업도 일단 정지 상태다. 천재지변이나 마찬가지니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지난해부터 준비해왔던 노력들이 생각나 아쉬울 따름이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부족했던 것은 보완하고, 달라진 상황에 맞는 사업 형태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현재 북측이 처한 상황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남북교류협력사업은 당연히 상대방이 있는 사업이다. 우리의 목적대로만, 우리의 의도대로만 사업을 진행할 수 없다. 상대방이 원하는, 상대방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업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그들의 뜻대로만 진행하는 것도 부적절하지만, 우리 고집만을 피울 수도 없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코로나19가 처음 발병한 중국은 어느 정도 소강국면에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물론 현재 정보 공개가 투명하게 이뤄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최악의 상황은 지난 것이 아닌가 싶다. 오히려 우리 국민들을 따로 격리하고 경계하고 있다니, 애매한 감정이 든다. 암튼 중국이나 우리나 어서 빨리 안정 국면에 접어들기를 바랄 뿐이다.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터지기 보름 전인 1월 초 중국 연길에 다녀왔다. 당시는 우한에서 폐렴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한 때였다. 당연히 연길은 평온했다. 다만 매서운 추위로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을 뿐. 함께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조선족 관계자에게 연길은 문제없냐고 물었을 때도, ‘아무 문제없다고 그가 답했을 때에도, 보름 후의 사태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아슬아슬하게 다녀온 셈인가.

 

그때 그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을 방문했다. 일종의 경제특구라 해야 할까. 다양한 업체들이 한 건물에서 함께 일하고 있었고, 그러한 건물이 여럿 모여 있었다. 그의 사무실은 4층에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네이버사무실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불쑥 ‘6층에 올라가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무엇이 있느냐 물었더니, 일단 올라가 보자며 나를 이끌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우선 눈에 뜨인 것은 복도 양옆에 전시되어 있는 수많은 그림들이었다. 그리고 한 눈에 그것이 북측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가움과 신기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왜 여기에 북측 미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걸까.

 

여기 6층 사무실에서 북측이 미술작품을 판매합니다. 주문 제작 형식인데, 원하는 그림의 내용을 설명해주면 북측이 적정가를 제시하고, 거래가 성사되면 북측 미술가들이 직접 그림을 그려 판매합니다. 가끔 중국인들이 터무니없는 가격을 저에게 제시해 거래를 성사시켜 달라고 할 때가 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얼마나 많은 수고가 필요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주지 않는다면, 그런 거래는 필요 없지요. 저도 같은 민족으로서 기분이 영 나빠요.”

 

국제사회의 전방위적인 제재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의 상황에서 이러한 미술품 판매가 과연 어느 정도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우선 먼저 든 생각은 이것 역시 제재에 걸리는 위법 사항일까하는 걱정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나의 이 글 역시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아닌가.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물어, 반가움은 곧 걱정으로 바뀌어갔다. 착잡한 생각으로 그곳을 떠났다.

 

지난 두 보수 정권 시기, 남북관계는 누구나 기억하다시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북측 역시 현명한 대처를 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지만, 무엇보다 우리 정부의 강경한 태도가 제일 큰 문제였다. 그리고 5·24조치에 이어, 개성공단 폐쇄라는 최악의 사태마저 초래했다. 역사가 두고두고 기억할 참사였다.

 

때문에 남북 간 직접 교류협력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고, 남북교류협력사업을 추진해 온 주체들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다고 해서 마냥 할 수 없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때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중국 동북3성이었다. 연길을 비롯해 단둥, 심양 등은 멈춰진 남북교류를 이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특히 이 책의 저자는 단둥에 주목하고 있다.

 

랴오닝성 단둥은 중국 전체로 볼 때는 변방에 불과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북중 국경의 관점에서 보면 압록강 하류에서부터 백두산을 거쳐 두만강으로 가는 출발점이다. 신의주와 압록강을 두고 마주보고 있는 북한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것이다. 그 중요성은 중국 정부도 이미 오래 전부터 인식하고 있다. 때문에 단둥은 해마다 발전을 거듭해왔다.

 

나의 발걸음은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탐사하는 대장정에 나섰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북한과 중국 간 국경은 강으로 형성되어 있다. 1,300km의 강으로 형성된 국경은 이례적이다. 백두산을 정점으로 서해로 흘러드는 강이 압록강이고 동해로 나가는 강이 두만강이다. 압록강이 두만강보다 더 길다. 또한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중국 땅은 랴오닝성과 지린성이다.”

 

저자는 북중 접경지역을 탐사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남북교류협력의 미래, 통일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당시 정부의 통일준비위원회를 여러 차례 비판한다. 탁상공론으로 뜬 구름 잡는 이야기들만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동북 3성 지역, 특히 단둥의 가치를 인식하고 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엄중한 국제정세로 인해 다소 위축된 것이 사실이지만, 여전히 단둥은 한족, 조선족, 북측, 남측이 어울려 삶을 영위하고 있는 역동적인 지역이다. 북측 식당에서 남측 사람을 보는 것이나, 남측의 식당에서 북측 사람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이 여기에선 이미 신기한 풍경이 아니다. 이는 연길도 마찬가지이다. 경계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찾을 수 없다. 그저 치열하게 함께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남북교류협력사업이라는 거창한 명분으로 그동안 참 많이 연길을 찾았다. 단둥과 심양, 대련도 나에겐 더 이상 먼 곳이 아니다. 오히려 연길에 가면 이상한 편안함마저 느껴진다. 중국어라고는 그저 감사합니다밖에 할 줄 모르는 녀석이지만, 두렵다기보다 친숙함이 먼저 든다. 오늘도 치열하게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역동성, 간절함 그리고 얼핏 얼핏 나타나는 동포애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차츰 사회적 불안으로 부상할 때, 어느 언론에서는 대림동을 탐방하고 그들의 비위생적 모습을 르포라는 형식으로 고발(!)한 바 있다. 어처구니없는 혐오의 발현이었다. 정작 대림동에서는 확진자가 1명도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단지 조선족 동포들이 밀집해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바이러스처럼 취급했다. 그 언론사가 사과를 했다는 소식은 아직도 들리지 않는다.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 동포사회의 역사를 따라가면 힘없고 가난했던 근대사가 자연스레 함께 한다. 자발적으로 국경을 넘어 척박한 중국 땅에 정착한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그야말로 살기 위해 국경을 넘었던 이들의 후손들이 이제 중국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며, 이제는 남북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도 든든히 해내고 있다.

 

아울러 우리 사회는 이미 예전부터 중국 조선족 동포를 빼고서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우리 사회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늘 2등 국민이라는 모멸감과 차별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이제 무엇을 나누며 무엇을 함께 고민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책은 저자의 북중 접경지역 답사기이자, 그가 생각하는 통일의 미래를 우리와 함께 고민하고자 하는 제안서이기도 하다. 아울러 실향민이었던 부친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지금보다 더 엄혹했던 시기(책은 2016년 발간되었다), 정부의 통일 대박론을 비판하며, 진정한 통일의 대박을 위해 이제 동북 3성에 주목하자고 했던 그의 용기와 혜안이 잘 담겨 있는 책이다. 물론 그의 통일론을 모두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다양한 생각을 함께 나누고자 했던 마음은 백 번 이해하고 동의한다.

 

어서 빨리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다시 연길국제공항에 내렸을 때, 반가운 그 목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북측의 벗들과도 하루 빨리 반갑게 만나기를 바란다.

 

부장 선생, 우선 식사부터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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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소녀 나나
초이 지음 / 스틱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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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개봉되었던 영화 <공공의 적>에서 악역 이성재의 극중 대사 중 여전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좀 살벌한 대사였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아마 이 비슷한 대사였을 것이다. 이 대사가 여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왜일까. 인정하긴 싫지만,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은 때로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는가. 지금도 매일 들려오는 끔찍한 소식들은 인간이 애초부터 여타 동물과 다름이 없음을, 아니 더 잔인한 생물임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때문에 필자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사랑이 애틋하다. 어떤 작가의 말처럼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타인을 죽이는 사건만큼 인간의 원초적 감정과 생각들이 솔직하고 선명하게 나타나는 상황은 없다(단이리)’면, 사랑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인간은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르는 동시에 때로 사랑을 위해 목숨을 던진다. 감히 필자가 판단하거나 해석할 수도 없거니와, 사랑은 인간이 인간임을 말해주는 유일한 그 무엇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싶다.

 

여기 국적과 나이를 뛰어넘어 사랑을 키워가고 있는 연인이 있다. 서른여섯 한국 남자와 스물 셋 베트남 여자, 아이 같은 아저씨와 어른 같은 소녀의 사랑이야기.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던 남자는 우연히 국가 프로젝트를 맡아 베트남에서 6개월 동안 근무하게 된다. 그리고 운명처럼 한 소녀를 만난다. 소녀의 이름은 남자의 귀로는 도저히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그냥 ‘나나’로 부르기로 한다. 자주 찾던 커피숍에서 일하던 나나에게 차츰 관심을 가지게 된 남자는 결국 사랑에 빠지고 만다.

 

얼핏 흔하디흔한 사랑 이야기로 비쳐질 수 있다. 사실 그리 특별한 이야기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애틋하고 따뜻하다. 그리고 조금은 짠하다. 과연 이 지구상에 사랑이 남아있기는 한 것일까, 문득 돌아보곤 하는 지금, 이들의 조그만 사랑은 조마조마하다. 그리고 빤한 로맨틱 코미디마냥 그저 해피 엔딩이 되기를 바라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사랑이 사랑으로 보이지 않고, 그저 계산과 투자로만 보여지는 지금, 온전한 사랑을 이제 막 키워나가기 시작한 이들을 어찌 응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저 사랑인데 말이다.

 

마치 삼촌과 조카처럼, 때론 친구처럼 조금씩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던 철없는 연인은, 남자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예정된 이별을 맞게 된다. 소녀는 자신이 상상하지 못했던 사랑과 또 예견된 이별 앞에 태연하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아픔에 안절부절 못하고, 남자 역시 빤한 이별을 알면서도 맥없이 사랑에 빠진 자신을 자책하며, 소녀에 대한 미안함만 쌓인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쉽지 않은 길을 택한다. 아니 어쩌면 어쩔 수 없는 단 하나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사랑하는 것. 그저 감정이 움직이는 곳을 따라 사랑하는 것, 살아가는 것. 두 연인은 감정과 생각이 흘러감을 멈추지 않고, 애써 막지 않고 사랑을 따라 가기로 결심한다.

 

귀국 후 주위의 걱정과 위로, 때로 상처가 되는 이야기들까지 안아가며, 나나와의 사랑을 이어가던 남자는 어느 날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게 된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맥없는 이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자는 사랑을 믿기로 한다. 자신의 감정을 믿고 끝까지 사랑을 믿기로 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다시 베트남 출장의 기회를 얻게 되고, 나나를 찾아 하노이로 떠난다.

 

이제 시작한 이 연인들이 앞으로 어떤 사랑을 만들어갈지 혹은 이 책이 나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어쩔 수 없는 혹은 서로의 감정에 따라 헤어지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책은 다시 하노이를 찾은 남자와 나나와의 재회에서 끝을 맺는다. 부디 해피 엔딩을 바랄 수밖에.

 

어느 새 마흔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 다시 사랑을 떠올린다. 적지 않은 인연들이 내 곁을 스쳐갔고, 내 마음에 남아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아내와 딸아이를 지키고 있다. 내 삶을 함께 했던 사랑들은 모두 안녕할까. 지금은 어디에서 어떤 이와 사랑을 만들고 있을까, 모두들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을까. 알 수는 없지만, 그저 바람이다. 행복하기를.

 

누구나 한 때는 그랬듯, 사랑을 믿었다. 오직 사랑이라면 그 어떤 고난과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녀만 있으면 세상 그 무엇도 부러울 것이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은 그 무엇보다 냉정하고 잔인한 스승이 아닌가. 맥없이 이젠 가슴 속 기억으로, 그때의 뜨거움으로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믿고 싶다. 이 세상엔 무모하고 대책 없는 사랑으로, 어처구니없고 끔찍한 오늘을 견뎌내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존재할 것임을. 그들은 지금껏 인류가 그래왔듯, 무모한 희망으로, 낙관으로, 긍정으로 서로를 지켜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한없이 행복할 것이다. 그 사랑이 아직 멸종되지 않았음을 난 기어이 믿는다.

 

여전히 사랑하는 이들이 많기를, 사랑할 수 있는 이들이 많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 역시 사랑을 믿는 이로 남고 싶다. 그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사랑으로 가슴 벅찼던 시간을 떠올리며 그렇게 철없이 죽어가고 싶다. 행복하게.

 

오해와 편견이 쌓여 증오와 배제가 되고 그것이 쌓여 적대와 무자비한 폭력을 낳는다. 올림픽이란 축제를 맞아 이를 축하하기 위해 북녘에서 손님들이 오고 있다. 손님을 맞이하는 따뜻함이, 굳이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미움과 적대로 되돌려주는 몰인정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남북은 그동안 참 오랫동안 오해와 편견을 쌓아왔고, 증오와 배제를 일삼아 왔다. 그리고 적대와 무자비한 폭력을 주고받았다. 이젠 서로에게 조금 더 다가가 사랑을 이야기해도 될 때이다. 너무 늦었다.

 

늦은 밤, 옛사랑을 떠올리며 피식 웃을 수 있는, 그런 날이 가끔은 그리워지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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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정치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남태현 지음 / 창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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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진보, 문명의 진보는 우리에게 축복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지겹도록 떠들어대는 4차 산업혁명시대를 앞두고, 조금은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문득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최첨단 과학의 시대, 인간의 평균 수명이 곧 100세를 넘을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가득한 시대에, 정작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던 미세먼지로 고통받고, 온갖 기상이변으로 많은 이들이 죽어간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인류는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세계 곳곳엔 참혹한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한반도는 냉전의 마지막 상징으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과거에 비해 진보했다고,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 없다.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이나마 인류의 진보는 이뤄지고 있다는 믿음은 허망하다. 지금도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매일 발생하고, 인류는 뒷걸음질 친다. 물론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지만, 그 희망은 자주 우릴 배신한다.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로힝야족을 향한 인종청소 앞에서 국제사회는 침묵한다. 아직도 세계엔 굶주림과, 충분히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이 많지만, 그들의 고통을 근원적으로 없애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국가는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왜 인류는 진보와 퇴보를 반복할까. 무엇이 인류를 변화시키고 움직이게 할까. 그 동력은 무엇일까. 돈일까, 무기일까, 종교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의 합일까. 생각하다보면 더더욱 회의감만 든다. 언뜻 세상은 나날이 나아져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세계를 움직이는 핵심 기제로 정치 이데올로기에 주목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문제 뿐 아니라 전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올바른 자리 찾아주기를 시도한다. 저자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정치 이데올로기는 거룩한 것이 아니다. 정치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도구지만 이는 도구일 뿐 내 삶과 사회의 목표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복잡한 사회현상을 생각할 때 이용하는, 좋은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여 사고와 토론을 돕는 도구로서 적극 활용하면 된다. 그 뿐이다.’

 

그동안 우리는 정치 이데올로기 과잉 시대를 살아왔다. 지금도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사회주의라는 이념이 조롱이나 억압의 기제가 되는 비정상적인 시간을 너무 오래 살아왔다. 미국에도, 일본에도 존재하는 공산당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금기이자 저주의 단어로 작동한다. 이제는 그것이 비정상인 것조차 희미하다.

 

이 책이 더 반가운 이유다. 저자는 도구로서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함께 대표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들을 소개한다. 우리 역시 자유로울 수 없는 민족주의는 중국과 티베트의 관계를 통해 설명한다. 아울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립 등을 통해 시오니즘과 종교에 대한 조명도 시도한다.

 

아울러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스웨덴과 베네수엘라의 다른 실험 결과를 통해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회의 전체 합의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설명하고 있다. 우고 차베스라는 걸출한 지도자의 리더십으로 인해 베네수엘라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혁신과 변화를 이뤄냈지만, 사회 전체적 합의가 아닌 개인의 추진력으로 이뤄진 사회주의 실험은 결국 미완의 과제를 남겼다.

 

또한 저자는 한국과 미국의 보수주의가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미국의 보수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하지만 태생부터 기형적이었던 한국의 보수주의는 반북·경제성장·친미로 고착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진정한 보수주의라 부르기도 민망한 한국 보수층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다.

 

사실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진정한 보수정권이었다면 당시와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미국을 향한 굴종과 북한을 향한 증오와 적대감을 무한 확장시킨 정책은 남북관계의 파국과 북핵의 고도화만을 이끌어냈을 뿐이다. 더구나 박근혜 정권은 스스로 정부의 정당성을 상실한 채 탄핵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불러왔다. 이것이 우리 시대 보수의 모습이다.

 

한편 저자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사회에 전파되고 유지되는 지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먼저 대중매체를 들 수 있다. 소위 ‘기레기’라는 말이 흔하게 사용되는 지금, 우리는 언론이 권력의 나팔수가 되어 민중을 선동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목격한 바 있다. 양심 있는 언론인 소수가 진실을 밝혀도 이내 묻히고 심지어 탄압까지 받는다.

 

저자의 말처럼 1994년 르완다 대학살과 9·11테러 후 부시 정부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침공에는 대중매체가 큰 역할을 했다. 르완다의 권력집단은 라디오를 이용해 학살을 독려했고, 부시 정부는 근거 없는 주장을 반복해 국민들이 이라크 침공의 부당성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었다. 즉 언론이 부당한 학살이나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에 복무한 셈이다.

 

또 조직화도 빠뜨릴 수 없는 요소다. 미국 내 친이스라엘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배경에는 막강한 이스라엘 로비가 숨어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 그리고 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의 강력함은 조직력에서 나온다. 그리고 대중매체와 조직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본이다. 재벌이 국가의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우리 현실에서 자본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익히 알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저자는 교육제도와 선거제도 역시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비단 우리 뿐 아닐 것이다. 자본의 힘으로 평등의 원칙이 무너진 현실은 만국이 같아만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맥없이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일부 기득권이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도구를 이용해 대중을 선동하며 자신들의 원하는 방향으로 정치를 움직이는 것에 대해 우리 역시 같은 방법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의 정비와 매일 매일의 각성이 필요하다.

 

저자는 선거제도의 개선을 주장한다. 단순다수제 선거제도는 우리 정치사에 양당체제가 수십 년 간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일부 정치 이데올로기가 독점적 지위를 누리게 만들었고, 국민들이 다양한 정치적 선택지를 갖지 못하게 했다. 정치 이데올로기 사이의 정당한 경쟁과 발전을 막아 결과적으로 우리 정치의 성장을 막아온 것이다.

 

저자는 때문에 비례대표제 정착을 주장한다. 비례대표 의석수가 대폭 늘어나야 유권자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소신껏 투표할 수 있고, 소수 정당이 국회에서 더 많은 의석을 차치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 내에서 지금보다 더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할 때 비로소 국민 위에 군림하던 거대 정당들이 제정신을 차릴 것이다.

 

책은 어렵게만 보이던 정치와 국제관계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정치의 맥락을 세계 각국의 사정을 통해 풀어내는 솜씨가 대단하다. 덕분에 여러 국가 사이의 존재하고 있는 갈등과 문제점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저자의 노력으로 손쉽게 세계 정치를 살펴볼 수 있었다.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여러 가지 잡음이 이어지고 있다. 공정성의 문제, 정의의 문제가 평창을 흔든다. 누구의 주장이 틀렸다고 일방적으로 비판하기에도 애매한 문제다. 단일팀과 단일기를 둘러싼 논쟁은 국민의 합의나 여론을 의식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할 때 어떠한 일들이 발생하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남북단일팀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그것이 향후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이나 새로운 그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역할 등을 한 번만 더 생각한다면, 조금은 너그러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 당장의 공정성을 문제 삼아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거부하는 듯한(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모습은 씁쓸하다.

 

정치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몇몇 수준 이하의 인간들은 연일 세대 갈등과 반북 정서를 조장하며 평창올림픽의 실패 나아가 현 정부의 실패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정부 역시 야당 눈치를 보느라,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북측이 올림픽에 참가하고 협조하는 게 신기할 정도다. 내가 김정은 위원장이라면 과연 이런 상황에서 협조할 수 있을까. 물론 북측 역시 나름의 철저한 계산을 하고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리 유쾌할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우리의 국군의 날 행사를 다른 나라에서 취소해라 마라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정치 이데올로기로 남북이 경쟁하던 시기는 이미 끝났다. 이제는 평화와 공존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가 가장 중요한 과제다. 그 과제를 풀어감에 있어 평창올림픽은 너무나 소중한 기회다. 이 기회를 통해 부디 한반도의 평화가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아울러 덜 떨어지고 수준 이하의 정치인들은 제발 이번 지자체 선거나 향후 총선 등을 통해 사라지길 기원한다. 구역질도 아까운 인간들이다.

 

오늘(2월 2일)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생일이다. 어제 광화문에서는 그의 지지자들 200여 명이 모여 박근혜의 생일파티를 하고 “사랑한다!”고 외쳤다. 그리고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했다고 한다. 문득 전 주한 미 대사 리퍼트의 피습 사건 이후 한 기독교 단체가 벌였던 쾌유 기원 퍼포먼스가 떠오른다. 그들은 부채춤을 추며 리퍼트 대사의 쾌유를 간절히 바랐고, 어떤 이들은 쾌유를 비는 단식에 나서기도 했다.

 

자신이 노예임을 깨닫지 못하면,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들의 행복이 애처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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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시선으로 분단을 보다 - 남북관계사 20장면 어린이어깨동무 교양시리즈 1
정영철.정창현 지음 / 유니스토리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새해 들어 한반도에 따뜻한 바람이 불고 있다. 비록 미세먼지는 살벌하지만.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고, 북의 표현으로, ‘평창겨울철올림픽경기대회’에서 가슴 벅찬 장면을 실로 오랜만에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가능성도 높아졌다. 드디어 남북관계에, 한반도에 다시금 봄이 올 것인지, 많은 이들이 기대하고 있다. 나 역시 그 중 하나다.

참 많은 일들이 이 땅에서 이뤄졌다. 타의에 의한 분단이었건만, 시간이 갈수록 내적인 증오와 반감을 키워온 남북은 어느 새 분단이라는 비정상적 상황을 잊고, 각자의 길을 걸어왔다. 남이든 북이든 서로를 이용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생각만 했다. 부끄럽고 가슴 아픈 시간들이었다.

물론 가슴 뜨거웠던 시간들도 있었다. 남북이 만나 통일을 이야기하고, 교류와 협력을 이어가며 서로를 알아가는 소중한 시간들도 있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기에 오해도 많았고, 상대에 대한 무지로 인해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그 자체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었다. 언젠가 돌아올 통일의 그날을 준비하는 연습의 시간이었다.

아직 속단하긴 이르지만, 여전히 대내외의 어려움도 많지만, 이제 남과 북은 과거 10여 년의 단절과 반목을 끝내고, 다시금 조심스럽게 대화와 협력에 나서게 되지 않을까 싶다. 양측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고, 양측 국민 모두가 전쟁이 아닌 평화를 절실히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핵 문제가 여전히 발목을 잡겠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우직하게 갈 길을 갔으면 좋겠다. 평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다시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기, 시의 적절하게 이 책이 나왔다. 반가울 따름이다. 한국전쟁 이후, 아니 그 이전 분단의 시작부터 최근까지 남북관계사의 주요한 장면, 혹은 사건들을 스무 가지 꼽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의와 교훈을 짚으며, 과연 어떠한 내일을 만들어가야 할지 되묻고 있다. 남북관계 및 한반도 현대사에 깊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저자들이기에, 술술 읽히면서도 또한 날카롭게 가슴을 찌른다.

어떤 문장에선 스스로 읽는 이를 부끄럽게 하고, 어떤 문장에선 울컥할 수밖에 없다. 힘과 지혜가 부족했던 민족이 겪어야 했던 수치와 아픔이 여전히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지금, 두 저자의 작지만 강렬한 울림은 고스란히 분단 조국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질문을 던지게 한다. “우리는 어떠한 삶을 꿈꾸고, 또한 만들어가야 할까.” 무지하게 어려운 질문이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분단을 자연스럽게 여기며 살아온 지난 세월 속, 서로를 증오하고 박멸해야 할 존재로 여기며 살아온 세월을 딛고, 이제 우리는 어떻게 다시 평화와 통일의 꿈을 꿀 수 있을까.

이산가족상봉을 이야기하며, 김연철 교수의 『냉전의 추억』을 인용하는 장면에서, 어쩔 수 없이 코끝이 아려왔다. “아버지의 두 뺨에도 눈물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곁에 있던 기자들도, 안내원도, 음식을 나르는 호텔 종업원들도 함께 울었다. 연신 플래시를 터뜨리는 사진기자들의 뺨에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분단으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겪어야 했던 그 아픔을, 지금도 매일 매일 가슴이 무너지는 이들의 눈물을, 우리는 언제쯤 닦아줄 수 있을까. 이 지긋지긋한 아픔을 언제쯤 끝장낼 수 있을까.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에 대한 글에서도 안타까움이 절로 터져 나온다. ‘평화로 가는 여권’이었던 금강산 관광, 남북 경제공동체 모델이자, 작은 통일의 연습장이었던 개성공단은 지금, 적막에 싸여있다. 이러한 작은 통일공간마저 닫아버리고 그 무슨 통일을 떠들고 대박을 떠들었을까. 부끄러움이 온몸을 후벼댄다. 분노가 가슴을 때린다. 남북문제와 통일을 단지 정권의 권력 수단으로만 여겼던 수많은 이들의 어리석음이 여전히 이 땅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지금,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의 고요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민족주의를 경계하며 살아간다. 민족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역사적 죄악을 익히 알기에, 하나의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민족주의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잘 알기에, 민족이란 이름을 신봉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통일을 이야기할 때, 편협한 민족주의에 갇혀있을 필요가 없다. 통일된 한반도, 그 한반도가 뻗어나갈 대륙의 꿈을, 민족주의로만 설명할 수 없다. 그동안 분단에 갇혀 꿈마저 반쪽이 되어버린 우리를 되돌아보고, 다시금 평화와 번영, 공존과 화해의 꿈을 꾸자는 것이다. 더 이상 철책 선으로 막혀버린 갇힌 나라가 아니라 대륙으로, 바다로 뻗어갈 수 있는 열린 나라가 되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 민족이라면 지극이 합당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꿈을 다시 꾸자는 것이 저자들의 마지막 호소다. 많은 사람들이 꿈을 꿀수록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고 했다. ‘한반도의 분단이 남겨놓은 반쪽짜리 꿈이 아니라 온전한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 철길과 땅 길의 연결은 남북의 화해와 협력, 신뢰와 연대를 의미한다. 나아가 한반도가 중심이 되어 동북아 국가, 세계인 모두에게 평화와 연대와 협력의 가치를 전파하는 것이 된다.’

1997년, 고려대학교 북한학과에 입학한 뒤 지금까지 왔다.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통일문제 언저리에서 서성댔다. 지금 돌이켜보자면,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한 점 후회나 부끄러움은 없다. 물론 얼치기로 살아온 삶은 후회되지만, 적어도 이 분야에서 일을 해온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없다는 소리다. 앞으로도 여건이 도와준다면(!) 계속 이 분야에서 작은 역할이나마 하고 싶다. 어찌 될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

개인적 문제로 서평을 부지런히 쓰지 못했다. 제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가 단 한 분뿐이라 해도, 송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 철이 덜 들고, 어리석은 녀석이기에, 이리 흔들리고 상처받고 사는 것이 아닐까 싶다. 부덕의 소치이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고, 앞으로도 많은 꾸짖음 주시기 바란다. 언젠가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그런 믿음으로 오늘도 꾸역꾸역 살아낸다. 항상 많이 감사하고 또 감사함을 잊지 않고 산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모처럼 조성된 이 평화무드가 부디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그래서 언젠가 빠른 시간 내에 금강산이나 평양에서 모두 앉아 소주 한 잔 기울이게 되기를 바라본다. 개성공단에서 의류를 생산하는 일을 하던 내 친구 녀석이 다시 개성을 왔다 갔다 하며 바쁘게 살았으면 좋겠다. 서로의 날선 공격과 반목보다는 따뜻한 안부 인사가 오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그래야 살맛이 비로소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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