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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레이몬드 카버 지음, 정영문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2월
평점 :
십년 전 대학 도서관에서 순전히 ‘제목’만 보고 집어든 책이 바로 카버의 “제발 조용히 좀 해요”였다. 미니멀리즘의 대가라는 수식어가 책과 함께 했던 기억이 난다. 뭔지는 몰라도 상당히 소박한 것을 좋아하나보다 생각했었다. 아름다운 무식이었다.
십년 이 지난 후 다시 카버의 소설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도 제목의 영향이 컸다. 역시 제목 선정은 뛰어난 내공이 필요한 일임을 느끼게 된다. 물론 제목 하나만 보고 책을 고르는 일은 역시 무모한 일임에 틀림없다. 단지 주연 배우 혹은 감독만 믿고 영화를 냉큼 보는 것과 같은 위험이다.
하지만 카버의 소설은 얄팍한 사기를 치지 않는다. 딱 제목만큼의 여운과 사소한 감동을 준달까. 하지만 사소한 감동이라고 하찮게 여길 순 없다. 그 사소함이 때론 적지 않은 위안을 주곤 한다. 그게 사람이기도 하다. 누구나 사소하게 감동받고 싶고, 상처도 딱 사소할 정도로만 받았으면 한다.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이 언뜻 우리들이 보기에는 하찮은 일상사다. 누구에게나 흔히 생길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들이 카버 소설의 배경이다. 극적인 반전이나 소름이 돋는 감동은 솔직히 찾을 수 없다. 적어도 난 그랬다. 하지만 카버의 소설들은 독자들에게 여백을 남겨준다. 그 여백을 채워나가는 것이 독자의 몫으로 남겨지고, 그 과정에서 사소한 슬픔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아주 잠시 동안 그 사소한 슬픔의 근원이 어디인지 어리둥절해진다. 카버는 짧은 이야기 하나에 결코 적지 않은 여백들을 남겨두곤 한다. 그 여백으로 우리는 위안을 얻고, 슬픔을 느끼고,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세상은 살벌하게 빠르다. 변화를 따라잡겠다는 의욕 넘치는 이들을 제외하고, 적어도 뒤처지지는 않겠다는 이들도 숨이 가쁘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항상 변함없는, 적어도 아주 느리게 변화하는 것들이 있다. 마치 주위 배경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가운데 정작 주인공의 성장은 너무나 느린 것과 같다. 자신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고 느끼겠지만, 사실 언제나 제자리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주위에 생경함에 무참함을 느끼게 된다.
카버의 글은 나에게 생경함과 무참함을 전해 주었다. 하지만 따뜻한 동질감 역시 함께 전해 준다. ‘아, 나만 이렇게 어리버리한 건 아니구나. 다른 이들도 이처럼 사소한 것에 상처받고, 행복해하며 살아가고 있구나. 결국은 모두 그렇게 죽어가고 있구나.’
그리 기분 나쁜 경험은 아니다. 때론 아주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 무서운 세상에서도 변하지 않으려 끝내 버티고 있는 사소함들이 위안을 전해준다. 거대하고 고귀한 담론들이 무지막지하게 섞여, 정작 독자에겐 소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설보다, 그래서 카버의 소설은 알뜰하다.
십년 만에 읽은 그의 소설은 다시 그 생경함과 무참함을 전해준다. 하지만 십년 전과는 다르다. 이것이 카버 소설의 또 다른 미덕이구나 싶다. 나의 사소함이 십년 전과 다르듯이 나의 행복도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그의 책을 읽을 때는 모든 감정의 방어막을 풀어헤치고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야 상처도 행복도 그리고 사소함도 온전히 전달될 듯하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