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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체제 만들기
백낙청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평점 :
분명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는 아직 일 년 남짓 남아있다. 하지만 이미 정치권을 비롯한 시민사회, 나아가 국민들에게 이 대통령의 잔여 임기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2012년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너도나도 ‘2013년’을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금처럼 살 수 없다는 절박함, 분노와 맞물려 이미 ‘2013년체제’ 만들기는 진행형이다. 한편 2011년 처음 ‘2013년체제’라는 화두를 던졌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87년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평화체제, 복지국가, 공정·공평사회 등 중요한 시대적 과제들이 상호 맞물려 발전하고, 남북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체제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연 2013년체제는 무엇이고, 이는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을까.
노 학자가 새해 벽두 서둘러 작은 책을 펴냈다. 평소 그답지 않은 모습이다. 오랜 시간동안 “더러는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논의를 포함하여 제법 두툼한 책으로 묶어내는 것”이 습관이었던 그가 채 200면이 되지 않는 책을 서둘러 세상에 내놓은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를 이토록 절박하게 만들었을까. 《2013년체제 만들기》는 이런 백 교수의 고민과 간절함이 그대로 담겨 있다.
백 교수가 말하는 2013년체제는 “1987년 6월항쟁으로 한국사회가 일대 전환을 이룬 것을 ‘87년체제’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기도 하듯이, 2013년 이후의 세상 또한 별개의 ‘체제’라 일컬을 정도로 또 한 번 크게 바꿔보자는 것”이다.
87년체제가 직선제 개헌과 대선을 통해 군사독재 시대를 마감하고 민주화 시대로 이행한 것이었다면, 2013년을 시작으로 무한경쟁과 성장만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넘어 민주주의·복지·남북관계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는 새로운 체제를 만들자는 제안이다.
여기에 진보진영과 시민사회가 호응해 2011년 7월 야권통합의 촉매제 구실을 자임한 ‘희망 2013·승리 2103’ 원탁회의가 출범되는 등 구체적인 행동이 이어졌고, 여야·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저마다 2013년에 대한 구체적 비전 만들기에 정신 없는 모습이다. 백 교수의 주장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모두 2013년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공감하고 있는 셈이다.
2013년은 올해 치러질 총선과 대선을 통해 새로이 정치 지형이 바뀌는 원년이다. 이명박 정부 기간 동안 지칠 대로 지친 국민들에게 무언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희망을 제시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올해 양대 선거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을 수밖에 없다. 백 교수가 ‘2103년’을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2013년 이후에 대한 바람을 크게 세울 때에만 2012년 선거도 제대로 치를 수 있다고 말한다. 올해의 선택이 비록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선거에만 논의가 너무 집중됨으로써 우리가 목표하는 선거 이후의 삶에 관한 사고를 제약하고 때 이른 정치공학적 논의에 몰입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어차피 이명박 대통령은 2013년 2월에 물러난다. 후임이 설혹 한나라당(새누리당)에서 나오더라도 ‘포스트 MB’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게다가 야당이 다시 집권한다면 또 한 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단순히 ‘잃어버린 5년’을 건너뛰어 그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백 교수는 ‘2013년체제’론이 오늘의 혼란상이 모두 이명박 정부의 실정 때문이라는 입장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87년체제가 만들어낸 세 가지 동력, 즉 민주화·경제적 자유화·자주와 통일에 대한 요구가 원만히 결합해 지속성과 상승효과를 얻음으로서 너무 길지 않은 시간 내에 87년체제 자체의 한계를 돌파했어야 했는데, 그러한 시대적 과제를 현 정부가 제대로 수행하기는커녕 대대적으로 역행했다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소설가 황석영 역시 이러한 백 교수의 지적에 공감한다.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87년체제’가 한계에 달했다는 것이다. 그는 6월 항쟁의 결과인 87년체제가 “수구세력과 민주세력의 일종의 합의”였다고 지적하며, “혁명이 아닌 리모델링에 불과한 체제는 노무현 정부 때 끝장을 냈어야 했다”고 말한다. 민주화 세력이 그걸 해내지 못해 발생한 정치적·경제적 짐을 지금의 20∼40대가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금, 여기저기서 비리 사건이 봇물처럼 터지고 있다. 온갖 썩은 내가 진동한다. 역대 가장 도덕적인 정권이라 감히 떠들던 그들이 역대 가장 추악하고 더럽고 썩은 정권으로 기록될 것처럼 보인다.
백 교수의 지적처럼 이미 2013년체제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 하나를 잊어선 안 된다. 개혁과 변화는 정치권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국민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며 함께 참여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지난 5년 동안 얼마나 무너졌는지, 이 땅의 상식과 소통이 얼마나 무너졌는지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결코 올해를 그냥 넘길 수 없다.
투표는 기본이요, 감시와 감독은 필수과제다. 벌써부터 이름만 새누리로 바꾼 한나라당의 중진들이 공천에 굴복하지 않고 떼거리로 출마할 의사를 밝히고 있다. 정치 개혁, 국가와 사회를 위한 결단, 자기 당에 대한 존중 뭐 이 따위와는 어차피 상관없는 것들이긴 하지만, 역시 썩은 내가 진동한다. 그런 인간들이 다시 국회에 들어갈 수 없도록 국민의 무서운 눈이 필요할 것이다.
《2013년체제 만들기》. 두껍지 않은 분량이다. 하지만 그 어떤 책보다 강한 희망과 고뇌가 담겨 있다. 우리가 보내는 올해가 과연 어떤 해로 기억되느냐. 그 결과에 우리는 물론 후손의 운명이 달려있다. 빈 말이 아니다.
반드시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