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원더 아르테 오리지널 14
엠마 도노휴 지음, 박혜진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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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첫 작품 <룸>을 아주 재밌게 읽었다. 이전 글을 찾아보니 12년 전이다.

그 당시도 피곤한 상태에서 읽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연말의 바쁜 일정과 욕심이 뒤섞였다.

작가 이름 하나만 믿고 선택했는데 올바른 선택이었다.

뛰어난 가독성과 뒤틀린 신앙과 신념이 어떤 일을 불러오는지 잘 보여준다.

많은 공간이나 다수의 등장인물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가지 않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전작처럼 닫힌 공간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물론 그때보다 공간적으로 훨씬 넓다.


1850년 아일랜의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마을의 한 소녀가 몇 개월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생존하고 있다고 소문이 난다.

기독교 신자에게 기적의 상징이다. 이 소녀의 기적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리고 기자들이 찾아온다.

실제 이 소녀가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을 위원회에서는 관찰할 간호사를 찾는다.

그 간호사가 나이팅게일의 제자이자 노련한 영국 간호사인 리브다.

2주 동안 환자를 돌보면서 건강 상태를 체크해달라는 요청이다. 여기에 음식 섭취 확인도 같이.

그녀가 하루 종일 볼 수 없어 수녀원의 수녀도 한 명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리브는 과학적으로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먹지 않고 어떻게 몇 개월을 버틸 수 있을까.

금식 소녀 애나와 동거 가족들은 아이가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리브는 애나의 몸 상태를 매일 확인하고, 어딘가에서 음식을 먹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찾아본다.

하지만 아이는 물은 한 숟가락 먹고, 우유도 먹지 않는다. 발이 부었지만 다른 이상은 현재 없다.

아이의 기적을 보기 위해 이 집을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있고, 그들은 돌아가면서 기부함에 돈을 넣는다.

부모가 이 돈을 노리고 아이가 먹지 않는 것처럼 꾸미는 것일까?

그럼 음식은 수녀가 함께 할 때 먹이는 것일까? 아니다. 수녀도 아이가 음식 먹는 것을 보지 못했다.

쉽게 생각하면 수녀도 짜고 먹지 않은 것처럼 꾸밀 수 있다. 하지만 아니다.


리브의 과거, 전쟁의 기억, 나이팅게일의 제자. 점점 허약해지는 아이에 대한 연민.

과학적이지 못한 현실에 대한 의문. 신앙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사와 신부.

이 아이의 사건을 파헤쳐 사실을 보도하려는 신문기자. 조심할 수밖에 없는 말과 행동.

애나를 관찰하면서 점점 가까워지는 둘의 관계. 친밀해지면서 하나씩 밝혀지는 사실들.

종교적 맹신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사실. 아이의 죽음을 그냥 두고 보는 부모.

어른들의 거대한 공모와 아이의 자발적 의지가 뭉쳐 만들어낸 거대한 사기극.

이런 사실들이 읽으면서 천천히 하나씩 드러나고, 마지막에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까지 이어진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일까? 왜 그들은 이런 공모를 벌이는 것일까?


작가의 말에 의하면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많은 서구 국가에서 소녀들이 먹지 않음으로써 유명인이 된 것이 그 소녀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한다.

실제 1869년 간소들의 감시를 받다가 죽은 어린 소녀의 비극적인 이야기도 있다.

이 글을 보면서 조선 시대 열녀문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성의 비극사다.

신앙과 믿음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 읽으면서 곳곳에 심어 둔 그 시대 그 나라의 감정들.

예를 들면 아일랜드인들의 체념. 어떤 비극이 계속되었기에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리고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최소 수십 만에서 수백 만의 인구가 죽었던 역사적 사실과 그 원인.

단순히 감자 병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 황당한 죽음에 가슴이 너무 답답하다.


결코 가볍지 않은 소설이다. 하지만 아주 뛰어난 가독성과 생각할 거리를 잔뜩 던져준다.

리브의 선택과 행동, 애나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또 엄마의 편법.

내가 소개글로 예상한 것과 다른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그곳을 짓누르는 무거움에 속이 답답하다.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기 위한 최선을 길을 찾는 리브. 혼자만의 힘을 가능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믿는 종교와 믿음을 몸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소녀, 그 이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작가는 곳곳에 단서를 깔아 놓고, 신앙과 공포를 엮어 그 시대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의 우리가 믿지 못할 일이라고 하지만 지금도 이것과 비슷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룸>의 그것과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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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분석관K : 미래범죄 수사일지
소현수 지음, 이미솔 기획 / EBS BOOKS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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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이력을 가진 소설이다. 2021년 3부작으로 EBS 공상 토크쇼 ‘공상가들’을 소설화한 것이다.

이 ‘공상가들’은 이미솔 피디가 기획했고, 소현수 작가가 원고를 썼다. 이미솔 피디 이름이 올라간 이유다.

작가는 방송 원고를 쓸 때 소설로의 확장을 염두에 두었고, 줄기가 다른 오리지널 스토리라고 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보다 훨씬 탄탄한 구성과 전개를 보고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보통의 청소년 소설이 구성이나 문자에 조금 덜 신경 쓰는 것과 비교되었다.

사건분석관이란 캐릭터와 악당 역할을 하는 소년 범죄자의 대결 구도도 단순하지만 재밌다


2094년이란 미래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구의 마지막 전쟁으로 인구 절반이 사라지고, 그 직후 대지진으로 또 그 절반이 사라졌다.

이보다 더 문제는 삶의 터전 대부분이 파괴된 것이다.

이런 암담한 현실을 구원한 것은 과학 기술이다. 거대 도시를 중심으로 세계가 재편된다.

초고층 건물이 밀집한 거대도시는 수천 만에서 억에 달하는 사람들이 살아간다.

과학이 인류 멸종의 위기를 구했지만 범죄까지는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

발생률이 아주 낮다고 전제하고, 안드로이드 경찰이 존재하면서 치안을 담당한다.

특수 강도나 살인 같은 강력 범죄를 담당하는 직책이 별개로 존재하는 데 바로 사건분석관이다.


사건분석관은 각각의 담당 구역이 있다. 코드네임이 K라 사건분석관K로 불린다.

일반인들에게 K는 뱀파이어로 불린다. 그들의 특별한 신체가 그런 이미지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인드 업로딩이다. 인공 두뇌에 의식을 이전해 영원히 살 수 있다.

물론 인공 두뇌가 완전히 파괴되면 죽는다.  이 설정을 보고 <공각기동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첫 에피소드 <2094 연쇄살인 사건>은 인공 두뇌를 가진 더미 인간의 살인 사건을 다룬다.

누가, 왜 이런 살인 사건을 일으키는 것일까? 솔직히 이 설정은 쉽게 범인 추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세계관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화성 폭동 사건>은 사건분석관K의 숙적 아서와 프리드리히가 처음 만난 사건을 보여준다.

아직 십대 초반의 소년이 인간의 의식을 업로딩하는 곳을 해킹해서 죽게 만든 사건이다.

인간이 더미 인간이 되어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한 반발로 포장했는데 실제 내용은 그냥 재미다.

강력한 사이코패스의 모습인데 아주 뛰어난 해킹 실력과 말솜씨로 상대로 이리저리 농락한다.

이 소년이 성장하면서 다양한 사건을 불러오는데 이것들은 다른 에피소드에 녹아 있다.

이 이야기에서 나의 시선을 끈 것 중 하나는 화성을 감옥으로 만들어 범죄자들을 보낸 것이다.

과거 영국이 호주에 범죄자들을 보낸 역사가 겹쳐졌다.


<안드로이드 해방 전선>은 이 세계에서 안드로이드 해킹은 불가능하다는 가설을 깨트린다.

완벽한 보안 시스템은 어디에도 없다. 서로가 막고 뚫는 싸움의 연속일 뿐이다.

인간의 욕망이 자본과 반려 안드로이드로 갈라진 후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

저렴하고 같은 외모의 남녀 안드로이드를 양산해서 판매하는 회사와 이 안드로이드에 마음이 빼앗긴 사람.

그리고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화성의 특별 감옥에서 탈출한 최악의 소년.

이 이야기는 소년이 사건분석관K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하다.

“분석관님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세요?” 이 질문이 사건분석관K를 혼란에 빠트린다.


<리플레이 살인 사건>은 사건분석관D가 저지른 살인 사건을 수사하면서 생긴 에피소드다.

더미 인간들은 더미 블루란 우울증을 앓고 있다. 사건분석관들도 마찬가지다.

더미 블루를 치료하기 위한 시설도 있다. 이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 K는 권투를 연습한다.

그의 특별한 신체 기능은 사실 이런 연습이 없어도 일반 사람이나 보통의 안드로이드가 당할 수 없다.

이 사건분석관의 능력 중 하나를 보여주는 장면이 싸움과 D가 맨손으로 빌딩을 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건분석관들이 특정 게임 프로그램에 접속해서 경험하는 일은 다른 것이다.

사건분석관D가 저지른 살인 사건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처리하려는 경찰 수뇌부의 모습도 낯익다.

그리고 D가 남긴 말의 의미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음 이야기가 나와 풀어주어야 할 것들이 많다.

생각보다 재밌게 읽었고, 장편으로 전자책만 나온 <괴물>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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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월 고서점 요괴 수사록 YA! 11
제리안 지음 / 이지북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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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 시리즈 열한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 중 읽은 책은 이번 책을 제외하면 딱 한 권이다. <감염인간, 낸즈>다.

이전 소설도 그랬지만 이번 소설도 완성도 측면에서는 떨어진다.

세부적인 장면이나 전체적인 구성 등에서 내 취향과 조금 떨어져 있다.

하지만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 하나가 있다. 바로 드라마로 만들면 좋겠다는 것이다.

캐릭터나 아이디어 등이 드라마로 만들면 매력적으로 보일 것 같다.

다양한 한국 요괴들이 등장하고, 이들과 싸우는 사방신의 액션이 강하게 다가왔다

원작에서 자세하게 다루지 않은 부분은 드라마로 만들면 확장성이 더 커지지 않을까?


카카오페이지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이 플랫폼에 연재된 후 책으로 나오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때 연재본과 출간본 사이에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은 어떤 지 모르겠다.

다 읽은 후 아쉬운 점 중 하나는 외전 연재가 책에서는 빠졌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일까?

작가가 등장인물과 설정 등에서 깔아 둔 것들이 많아 더 많은 에피소드가 나올 것 같다.

용돈벌이를 위해 집 근처 화월 고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고2 지유의 활약을 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부모가 여고생을 밤에 하는 아르바이트에 그렇게 쉽게 보낼까? 살짝 의문이 들었다.


처음 사방신이 등장했을 때 바로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현재 활동하면서 부르는 백연, 청류, 현담, 주아 등의 이름이 너무 백호, 청룡, 현무, 주작과 닮았다.

각각 신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원귀 등을 잡을 때 너무 힘을 쓴다.

힘의 밸런스가 조금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냥 넘어가자.

아직 그 힘을 완전히 다 개방하지 않은 것으로. 그 힘이 완전히 드러나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쇠를 먹는 괴물 불가살, 혹은 불가사리가 등장했을 때 도시가 파괴된다.

그들이 이것을 막으려면 더 큰 파괴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하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유인한다.

여기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완전히 풀어놓지 않는다.


지유란 여고생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귀신이나 영혼을 볼 수 있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알게 되는 것도 능력의 일부를 봉인한 물건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능력은 사방신이 찾던 ‘견자(見者)’의 능력이다.

사방신이 수없이 잡아 둔 원혼의 책자를 보고 그 원을 풀어줄 수 있는 능력자다.

그 첫 번째 일이 동창의 살인 사건이란 부분은 조금 자극적이다. 시체 처리 방법은 더욱.

이 보는 능력이 일상 생활에서는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 않고, 요괴들이 꼬이게 한다.

무술 실력이 뛰어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육체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소소한 에피소드와 큰 에피소드가 공존하고 있다.

요괴나 원귀들이 인간들 속에서 그 힘을 발휘하고, 이 뒤틀림을 사방신이 바로잡는다.

그런데 이 뒤틀린 시간을 되돌리는 힘을 백호가 가지고 있어 사람들의 기억을 수정한다.

부서진 건물을 다시 되돌리는 장면을 보면서 판타지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물리학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불가능하겠지만 판타지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이 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우리가 알고 있거나, 어딘가에서 본 듯한 요괴 등이 나온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 판타지에서 전래 동화 속 괴물이나 요괴 등이 등장하는 소설이 많아졌는데 반가운 일이다.

잠시 영상으로 만들면 어떤 배우가 좋을지 잠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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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 1~3 세트 - 전3권 에세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심민화.최권행 옮김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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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몽테뉴의 <수상록>이란 문고판을 읽은 적이 있다.

워낙 유명하고, 후대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해서 읽었었다. 어려웠다.

고전에 대한 환상을 지금보다 훨씬 많이 가지고 있던 시절이라 도전했었다.

솔직히 말해 실패였다.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그럼 지금은 어떤가? 역시 실패라고 말하고 싶다.

너무 방대한 분량과 고전을 인용해서 풀어낸 글들이 역시 쉽지 않다.

거의 2000쪽에 달하는 분량에, 세월에 의해 덧붙여진 내용들이 단숨에 읽는 것을 방해한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나의 독서법과 잘 맞지 않고, 그가 풀어낸 주장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책을 읽기 전 ‘옮긴이의 말’은 꼭 읽어라고 말하고 싶다.

그냥 <수상록>으로 한 권 정도의 책으로만 알고 있던 나 같은 독자에게 이 책이 어떤 책이 살짝 알려준다.

‘10년의 번역, 5년의 검수’란 소개가 거짓이 아니란 것을 일기 시작하자 마자 알게 된다.

보르도본과 A, B, C 표식에 관한 것도 오랜 세월에 걸친 수정의 결과다.

당연히 이런 부분을 모두 실었는데 덕분에 나 같은 독자는 더 어렵게 읽을 수밖에 없다.

그냥 한 번에 읽으면 되는데 이런 표식이 있으면 괜히 지엽적이 것들에 눈길이 간다.

그리고 왜 제목을 익숙한 <수상록>이나 ‘에세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는지 말한다. 공감한다.

하지만 지금도 검색하면 <몽테뉴의 수상록>이란 제목으로 번역된 책들이 보인다.


어마어마한 분량에 다양한 저자의 생각들은 피상적인 에세이의 이미지를 단숨에 박살낸다.

얼마나 풍부한 자료가 이 글들 속에 담겼는지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역사와 고전 등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내용을 찾아내어 글 속에 풀어놓는다.

대부분 낯선 이름과 역사들이다. 그 시절 역사와 고대사를 모르면 다가가는 것이 쉽지 않다.

각 글들의 분량은 또 어떤가? 모두 제작각이다.

짧은 글은 2쪽으로 끝나고, 긴 글은 거의 300쪽에 가까운 분량이다.

이런 분량에 대한 정보를 모른 책 읽다 보면 글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가 많다.

지루하거나 전혀 이해되지 않는 내용일 때 더욱 그렇다.


처음에 책의 목차 순서대로 읽었다. 습관적이고, 조금 안이한 접근법이었다.

1권을 3분의 1정도 읽었을 때 역자들의 말이 떠올랐다.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다는 그 말.

관심이 가는 제목에 우선 눈길을 주었다.

<말의 공허함에 관하여>에서 수사학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과 “로마에서 웅변술이 번성한 것은 사태가 최악이었던 때, 내전의 폭풍이 나라를 뒤흔들었던 때였다.”란 문장이 생각에 잠기게 한다.

<고대인의 검소함에 관하여>에 나오는 나의 상식을 살짝 깨트렸다.


<주벽에 관하여>를 읽으면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솔직히 말하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책에 관하여>을 읽다가 “이 에세들은 나의 변덕스러운 생각이요, 그것들을 통해 내가 하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해 알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문구에 고개를 끄덕였다.

“읽다가 어려운 부분을 만나도 나는 손톱을 물어뜯지 않는다. 두세 번 공략해 보다 내버려 두고 간다.”라고 할 땐 나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두세 번의 공략이란 것이다.

<레몽 스봉을 위한 변명>은 가장 긴 장이자 몽테뉴 사상적 변전의 중심축이라고 하는데 잘 모르겠다.

몽테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병법에 관한 고찰>에서 카이사르를 ‘군사술의 진정한 최고 수호 성자’라고

말한다.” 낯선 표현이다.


이 책에 대한 극찬들을 읽다 보면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글들이 보인다. 왜일까?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글에 대한 이해도 차이일 것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시 몇 구절에 관하여>는 베르길리우스의 시들보다 다른 시들이 더 많이 인용된다.

개인적으로 ‘철학’에 대해 쓴 글들이 더 나의 시선을 끈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글도 보인다.

<헛됨에 관하여>에서는 “헛됨에 고나해 이렇게 헛된 글을 쓴 일보다 더 확실하게 헛된 것은 아마도 없으리라.”라고 적었지만 분량이 100쪽이 넘는다. 뭐지?

<외모에 관하여>에서 자신을 “호감을 주는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사진을 보면서 잠시 고민한다.

이 글을 쓰면서 과연 내가 이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냥 대충 훑었다고 말하고 싶다.

오랜 시간 조금씩, 한 장씩, 혹은 이해되지 않는 내용은 내버려둔 결과다.

언제 다시 조금씩 읽으면서 기억과 지식을 새롭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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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에센셜 어니스트 헤밍웨이 (무선 보급판) 디 에센셜 에디션 4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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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헤밍웨이의 소설을 읽었다.

그의 단편은 대학 시절 산 단편집 이후 처음이다.

그때 읽었던 단편 중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지만 <킬로만자로의 눈>은 확실히 생각난다.

아마 조용필의 <킬로만자로의 표범>이란 노래 때문일 것이다.

다시 읽은 느낌은 그때와 확연히 다르다. 다른 부분에 더 눈길이 간다.

죽음 앞에 선 화자의 감정 변화와 그를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 등이 특히 그렇다.


가장 흥미롭고 재밌게 읽은 이야기는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다.

아프리카 사냥을 기본으로 서로 얽히고설킨 관계와 복잡한 감정이 예상하지 못한 결말로 이어진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사냥과 현실에서 마주한 사냥이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보여준다.

사자가 자신을 향해 달려올 때 그 공포를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부자와 미녀 아내, 아내의 불륜, 떠나지 못하고, 떠날 수 없는 관계. 현실적이다.

사자 사냥의 실패 이후 다른 사냥의 성공으로 매코머는 아주 행복한 시간을 가진다.

하지만 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는 또 다른 공포가 만들어낸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인디언 부락>은 짧은 이야기인데 그 시대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에 일어난 사건은 나의 이해를 넘어섰다. 그냥 그대로 볼 뿐이다.

<깨끗하고 밝은 곳>은 늦은 밤 카페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 풍경이 낯설다.

<빗속의 고양이>는 여행 온 부부와 고양이에 관심을 둔 아내의 심정을 간결하게 보여준다.

아내의 말을 듣지 않고 책을 보는 남편, 문을 두드리는 호텔 직원과 고양이 한 마리.

<때늦은 계절>은 여행객의 강 낚시 가는 풍경과 심리를 간단하게 묘사했다.

불법 낚시로 경찰에 잡힐 수 있다는 불안감, 놓고 온 도구, 안도감. 이 감정 표현이 좋다.


헤밍웨이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노인과 바다>는 다른 곳에서 읽었고, 너무나도 유명해 생략.

에세이 <F. 스콧 피츠제럴드와 함께 떠난 리옹 여행>은 미국 현대 문학의 두 거장이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흥미를 자극한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나이가 더 많고, 문학의 선배란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어떻게 이 두 사람이 리옹으로 여행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생긴 일들이 무엇인지 등을 보여준다.

결코 평탄하다고 할 수 없는 여행 도정에 생긴 일들은 소설보다 더한 장면들도 많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외모에 대한 찬사와 마지막에 나오는 <위대한 캐츠비>의 감상은 아주 강렬하다.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여전히 단편은 읽고 난 후 이해가 되지 않고 낯설다.

하지만 다 읽고 난 후 글을 쓰면서 돌아보니 그 장면들과 감정 묘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래 전 기억 하나가 늘 헤밍웨이 소설에 따라다닌다.

바로 그 간단한 문체다. 만연체에 길들여져 있던 나에게 이 문장은 얼마나 낯설고 힘들었던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이제 그 문장과 문체는 익숙해졌다. 나도 그 문장을 따라 하려고 한다.

다시 읽은 헤밍웨이의 단편은 분명히 이전과 달랐고, 다른 단편으로 관심을 확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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