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설공주 이야기 흑설공주
바바라 G. 워커 지음, 박혜란 옮김 / 뜨인돌 / 200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페미니즘 동화라는 것에 일단 시선이 갔다. 백설공주가 아닌 흑설공주라는 단어에 흑인을 연상하였지만 흑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기존의 동화를 작가가 페미니즘 시선으로 개작하였다는데 읽는 내내 즐거움보다 편하지 않는 감정에 쌓여있었다. 그리고 많은 생각이 교차하면서 안타까움과 자신에 대한 반성도 동시에 생겼다.  

 

 많은 이야기 중 한 편인 흑설공주에 대해 생각해보자. 흑설공주에 대한 묘사를 보다보면 하얀 피부에 칠흑같이 검은 머릿결이 나온다. 예상한 검은 피부가 없었다. 백인에 미녀인 그녀다. 작가는 이야기 앞에 사악한 계모에 대한 기존의 시각에서 두 가지 의미를 유추한다. 첫 째는 계모의 미모가 흑설공주보다 떨어지는 것에 분노한 것은 남성들에게 더 큰 관심사였지 여성은 경쟁하지 않고 수천가지 다양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과 두 번째로 여성의 영적능력의 마지막 보루인 마법이 교회의 마녀사냥 선포로 그 위상이 추락했다는 점이다.  

 

 두 가지 의미에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전개가 이루어지는데 첫 번째 외모에 대한 묘사다. 헌터경의 외모가 결코 뛰어나지 않음과 그 지위가 높지 않음을 이유로 흑설공주는 그를 거절한다. 여기서 작가 또한 외모에 대한 그녀의 바람을 그대로 노출한다. 더불어 왕자에 대한 환상까지 보여준다. 두 번째  헌터경이 복수를 준비한다는 것과 계모가 이를 막는다는 것인데 계모가 일곱 난장이에게 금은보화를 주어 이를 막는데 이 처리 또한 대화나 합리적인 방식이 아닌 폭력에 의한 것이다. 남성의 폭력에 대한 글을 이 이야기 속에 수없이 말하는 작가가 문제 해결 방식으로 보디가드의 외형을 가진 폭력에 기대는 모습은 여성이나 왕자 등의 외모를 아름답고 잘 생긴 것으로 그린 다른 이야기와 더불어 신뢰성을 잃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나의 예외인 못난이와 야수는 제외하고.  

 

 외모에 대한 이야기에서 예외인 못난이와 야수는 또 다른 편견이 있다. 야수의 외모를 사실에 충실하게 묘사하였다지만 왜 하필이면 두 사람 모두 외모가 부족한 커플이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여자가 못난이라도 야수는 충분히 여성의 아름다운 마음을 아는 멋진 왕자일 수 도 있는 것이 아닌가. 이야기 전체에서 외모가 뛰어난 사람은 뛰어난 사람끼리, 부족한 사람은 부족한 사람끼리 어울리는 외모 지상주의가 곳곳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 동화처럼 한결 같이 왕자나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한다는 설정은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자연스러운 반영이 아닌가 한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고, 현재 떨어져 있는 여성의 권리를 제대로 신장시킬 필요가 분명히 있다. 나 또한 남자이기에 남성 본위의 마음이 있음을 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남성을 잔혹하고 파괴적이고 불쾌한 대상으로 몰아가는 것은 여남평등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우위를 주장하는 듯하다. 현대 여성들이 가지는 시각을 보면 남자보다 더 외모 지상적이고 더 욕심이 많고 파괴적인 경향도 보인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란 영향으로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쓰진 이 동화처럼 일방적으로 남성을 몰아가거나 편견이 가득한 경우 그 본래의 의도가 좋다고 하여도 쉽게 동의를 얻기는 어려울 것 같다. 혹 이 글에 나의 편견이 가득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장 검은 새 - 누가 메리 로저스를 죽였을까?
조엘 로즈 지음, 김이선 옮김 / 비채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미국 문학을 읽다보면 한 번은 꼭 에드거 앨런 포를 만나게 된다. 그를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는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몇몇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그를 살려내어 이야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 소설도 그를 빼고는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가 살았던 시절 일어난 매리 로저스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고, 그가 이 사건을 다룬 소설 <마리 로제 미스터리>를 썼기 때문이다. 단순히 단편 소설을 쓴 것만이라면 그냥 지나갈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포를 사건의 핵심으로 끌어당기고, 그 시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상상력을 극대화시킨다.  

 

 한 남자가 여자 시체를 옮기면서 시작한다. 그는 중얼거린다. “오, 메리.” 바로 그녀가 시가 가게 아가씨 매리 로저스다.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중에 그녀가 시선을 받은 것은 그녀를 둘러싼 환경 때문이다. 대단한 미모 덕분에 시가 가게는 번성하고, 주변엔 남자들로 가득했다. 그런 그녀가 죽었으니 당시 유력한 인사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하다. 실제는 영원한 미해결로 남겨졌지만 작가는 상상력과 풍부한 자료로 이 사건을 복원하고, 살을 덧붙이고, 미스터리를 해결한다. 이 소설은 바로 그 과정을 다룬다.  

 

 소설 속 탐정 역은 상급 치안관 올드 헤이스다. 현재 경찰 역이다. 이 당시는 현재처럼 흔히 알고 있는 경찰도 소방수도 없던 시절이다. 가끔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을 때면 이런 배경들이 낯설게 다가와 혼란을 심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 시대를 배우는 좋은 기회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뉴욕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메리 로저스 살인사건은 가끔 경찰들 이야기 속에 나오는 평생 해결하고픈 미해결 사건 같은 것이다. 그는 남은 삶 동안 이 사건에 집착한다. 그렇다고 그의 일상 업무를 팽개치지는 않는다.  

 

 이 살인사건과 더불어 두 개의 살인사건이 있다. 둘 다 명확하게 범인이 드러난다. 하나는 콜트 권총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콜트 가의 막내 존의 담당 편집자 살인이고, 다른 하나는 아일랜드 젊은 갱단 두목인 타미의 아내와 딸과 아내의 전 남자 친구 살인사건이다. 그냥 보면 이 세 사건은 아무 연관성이 없다. 그 시대에 벌어진 하나의 에피소드나 사실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작가는 이 사건들로 복선을 깔아둔다.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시대의 상황 속에 녹여낸 것이다. 그렇지만 그 중심엔 매리 로저스의 죽음이 있고, 그 죽음 곁엔 애드거 앨런 포가 있다.  

 

 올드 헤이스가 살인사건을 뒤좇고, 범인을 잡고, 정의를 실현한다면 포는 자신의 재능을 팔아 생계를 겨우 유지하고 있다. 그에 대한 여성들의 숭배와 시대를 앞선 문학적 재능과 날카롭고 저돌적이며 공격적인 논평들은 한편으론 많은 적을 만들었다. 그에 대해 풍부한 자료를 보여준다. 그 당시 미국에 저자권법이 없어 작가들이 쓴 글을 출판업자들이 마구 도용했다는 사실도 놀라운 사실 중 하나다. 이 때문에 주로 단편을 썼는데 그 이유가 잡지사는 원고료를 주기 때문이란다. 현재 저작권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미국이 불과 백 수십 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니 흥미롭다. 또 초반에 아일랜드 갱단들과 원주민 갱단들의 대결은 영화 “갱스 오브 뉴욕”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감옥인 툼스가 최근에 읽은 다른 소설 <이스트사이드의 남자>에서 등장했던 것을 생각하면 반갑다.  

 

 하나의 미해결 살인사건을 한 명의 아마추어가 해결한다는 것은, 특히 오랜 시간이 지난 사건을 재구성하고 범인을 찾아낸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작가는 그 사건을 통해 그 시대와 그 당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여러 가지 가능성을 탐구할 뿐이다. 어쩌면 작가는 포가 소설로 범인을 추리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범인을 찾아내기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모든 사람들이 사라진 지금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단지 얼마나 논리적이고, 설득적으로 사건을 구성하고 풀어내는지가 관건이다. 여기에 재미난 이야기가 담겨 있다면 더욱 좋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만족스럽다.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빠르게 읽히고, 사실과 상상력이 조화를 이루면서 이야기를 끌고 가기 때문이다. 만약 책을 읽는 독자가 작가의 가정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자신만의 추론을 내세워 범인상을 만들어내어도 좋지 않을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을 말해줘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오래전 일본드라마 특집극을 본 적이 있다. 귀머거리 아내와의 결혼을 다룬 것이었다. 칸노 미호 주연의 ‘너의 손이 속삭이고 있어’란 작품이다. 이 작품을 끝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귀가 들리는 남자와의 결혼과 삶이다. 사랑으로 결합하여 힘들게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예전에 전혀 생각하지 못한 장면들을 보여주었다. 그녀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배려에 대한 불편함이나 아이를 키우면서 들리지 않음으로 인해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이 예상하지 못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상생활에서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 것들이 그 한 편의 드라마로 단숨에 깨어졌다. 왜 이렇게 다른 드라마 이야기를 하느냐고? 바로 이 소설의 교코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슌페이는 어느날 우연히 공원에서 한 여자를 보게 된다. 퇴원 시간이 되었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지만 보통 사람들이 보여주는 반응은 아니다. 그렇게 그는 교코와 만남을 시작한다. 한 번이 두 번으로 바뀌고, 그녀를 불편함을 받아들이면서 사랑이란 감정을 키워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보도국에서 밀려나 다른 부분에서 일하던 그에게 우연히 탈레반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이었던 바미안 대불이 파괴되는 비디오가 들어온다. 이것은 그는 충격을 받고 하나의 다큐멘터리로 만들고자 한다. 이렇게 소설은 슌페이의 사랑과 바미안 대불 파괴를 둘러싼 다큐멘터리 제작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두 이야기가 하나의 주제로 묶여있다. 그것은 관심과 목소리다. 청각장애가 있는 교코와의 사랑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삶과 사랑을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면 바미안 대불 폭파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야기들은 그에게 새롭게 그 사건을 돌아보게 한다. 소리로 대화를 하지 못하는 교코와의 대화는 늘 필기로 이어지고, 소리가 제거된 그 대화는 그에겐 색다른 경험이다. 전화 대신 문자로 자신이 말을 전하고, 사소한 몸동작이나 행동으로 감정이나 자신을 드러낸다. 일에 빠져 정신이 없을 때 그를 떠난 여자들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자 삶이다. 작가는 교코의 행동이나 반응을 통해서 슌페이의 감정과 청각장애인의 삶을 드러낸다. 너무 당연했던 슌페이의 생각이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새롭게 다가오고, 주변사람들과 다른 반응을 보여주는 그녀의 모습에 놀란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주변의 소리가 사라진 것 같고, 그녀의 자연스러운 행동은 가끔 섬뜩하고 무섭게 느껴진다. 낯선 삶을 들여다 본 그의 반응은 신선함을 받기도 하지만 크나큰 벽을 세운 것 같기도 하다.   

 

 바미안 대불의 폭파는 문화의 충돌이자 역사의 한 장면이다. 지나간 역사를 돌아보면 수많은 정복자들이 피정복자의 문화유산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수많은 유물들이 그렇게 획득된 것들이다. 최근에 와서 세계적인 여론으로, 상업적 목적으로 문화재 보호가 강화되고 있지만 자신들의 교리나 문화와 다른 유물을 파괴하는 데는 목적이 담겨있다. 바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세계에 전달하기 위해서다. 물론 그 사건을 둘러싸고 수많은 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그 사건을 절실하게 받아들이고, 진실 되게 보호하려고 했는지는 다른 문제다. 많은 인물들이 그 유적을 보호하려고 했을 테지만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유적일 것이다. 자신들의 종교와 다르고, 자신들의 나라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괜찮다고 생각하고 소리를 놓이지 않은 그들의 모습은 다시 슌페이와 교코의 사랑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작가는 의도적인지 아니면 생략한 것인지 모르지만 교코의 과거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그녀의 감정과 사랑이 슌페이의 시선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보니 말 못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단지 문자나 손으로 쓴 글로만 전해지는데 그녀의 감정을 전달하기엔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슌페이는 수화를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만난 시간이 짧아서인지 아니면 바빠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와의 대화를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수단을 배제하고 있다. 그의 관심이 소리에 너무 집착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녀가 만들어낸 고요함이나 소리 없는 세상이 안락함을 주기도 하지만 그 동안 살아온 삶의 방식을 바꾸기엔 쉽지 않은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개골의 서
로버트 실버버그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소설을 읽기 전 작가의 말을 보고 왜 이런 글을 썼을까? 궁금하였다. 하지만 모두 읽은 지금 작가의 말에 대한 의문만 더 생겼다. 작가는 이 소설이 SF소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휴고와 네뷸러 상 후보에 올라가기까지 했다. 과연 SF소설인가? 영생을 다루고 있지만 소설의 진행이나 소재를 보면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않는다. 아마 작가에 대한 설명이나 장르 구분에 둔한 사람이라면 소위 말하는 주류문학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그만큼 이 소설은 장르의 경계를 걷고 있다.  

 

 일라이, 티모시, 네드, 올리버. 이 네 명의 룸메이트들이 일라이가 발견한 고서 ‘두개골의 서’의 해석에 의해 영생을 찾기 위해 떠나는 이 소설이 상당히 특이하게 다가온다. 책의 전반부가 로드무비처럼 진행된다면 후반부는 오히려 도인들의 수련 같다. 이 양극단의 진행이 단순한 이야기의 흐름을 쫒아가기보다 각각의 화자들의 개인사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기에 더욱 재미있게 느껴진다. 그리고 4명이 가서 두 명만 영생을 얻고, 2명은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각자가 추론하는 결과와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결과는 다르고, 그들이 의도했던 영생과 실제의 모습을 비교하는 재미도 준다. 과연 영생으로 불멸을 이루었을까?   

 

 구성은 각각의 화자가 현재의 진행 속에서 자신들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성장배경도 살아온 과정도 성적 취향도 모두 다른 네 명의 남자가 불멸을 꿈꾸며 가는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다. 현재의 모습을 그려내기보다 과거의 삶에 끊임없이 집착하는 그들을 보며 그들에게 영생은 자신들의 과거를 부정하거나 또 다른 삶을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일라이가 영생을 얻고 나서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시간 단위로 나눈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상상은 나도 이전에 하여 본 것이기에 많은 공감을 가진다. 하지만 가끔 불멸을 가진 사람들의 힘겨움을 마주하다보면 또 다른 하나의 불멸인 자식 놓기가 더 편한 것처럼 느껴진다.  

 

 소설이 출간된 1970년대의 시대상을 보여주기 때문인지 상당히 낯선 장면과 생각들이 나온다. 당시 히피처럼 삶을 살아가고, 성 혁명이 일어난 시기이기에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묘사와 관계들은 지금 상당히 많이 풀어진 한국의 현실에서 보아도 일상적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또 후반부 수도원에서 펼쳐지는 수련을 보면 왠지 모르게 무협소설의 연공장면을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단지 이 소설의 외피일 뿐이다. 작가가 말하는 이야기는 네 청년들의 생각과 행동 속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이 마지막에 자신들의 가장 추악한 과거를 고백하는 장면과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한 부분도 있지만 위선으로 가득한, 혹은 강하게 절제된 삶의 한 형태들을 보여준다.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작가의 다른 작품에 대한 출판 기록을 찾아보았다. 현재 절판되지 않은 것은 ‘다잉 인사이더’가 유일하였다. 그의 단편이 sf모음집에 실려 있지만 왜 그를 몰랐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책 뒤에 나오는 해설처럼 이 소설을 통해 sf의 새로운 시도를 알게 되었고, 인식의 확장은 더욱 넓어졌다. 그리고 장르 구분에 대한 고민은 더욱 심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가 말을 죽였을까 - 이시백 연작소설집
이시백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살아오면서 나쁜 버릇이 점점 많아진다. 그 중 하나가 유명작가나 최소한 문학상 한둘은 딴 작가들의 작품만 읽는 것이다. 이미 상들이 문학의 완성도나 재미와 상관없이 상업적 목적에 의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다. 하지만 가끔 입소문이나 다른 사람들의 평을 통해 접한 책들에서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을 받는다. 그때의 기쁨은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 말하는 의도는 너무 분명하다. 바로 이 소설이 그런 소설이기 때문이다. 혹시나 했는데 기대한 이상의 재미를 주었다. 그러니 서두에 이런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시백. 사실 이 작가 모른다. 유명작가도 아니고, 출판사도 낯선 곳이다. 만약 누군가의 극찬이 없었다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고 이문구 선생의 계보를 잇는다는 표현에 조그마한 기대를 가지고 읽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각각의 주인공들에게 정이 간다. 걸쭉한 토박이 말투를 능청스럽게 구사하면서 농민의 삶 속으로 들어간 문장과 묘사들은 감탄을 절로 하게 만든다. 충청도 말이 자연스럽게 풀어지고, 여과 없는 듯 흘러나오는 현재 삶에 대한 한탄과 비판과 충성과 열정은 늘 주변에서 실제 듣던 이야기들이다. 그 생생함은 가끔 갸웃하게 하거나 주억이게 만든다.   

 

 연작소설이다. 열하나의 단편을 통해 충청도 농촌 풍경을 펼쳐 보여준다. 연작이지만 직접적으로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 가족이나 한 마을 사람들이 한 곳에서 지지고 볶고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상의 한 농촌을 좀더 광범위하게 다룬다. 앞에 나온 이가 뒤에 중복되게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 연작이란 느낌이 약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다양한 농촌 사람들의 삶과 입을 통해 드러나는 한국 현대사와 삶은 보는 나로 하여금 순간 뜨끔하게 만들기도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시골사람들은 누구는 영악하고, 누구는 우직하고, 누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사람도 있고, 영악하게 처신한다고 하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아내를 구박하다 살짝 사라진 그녀를 찾아 동네를 헤매기도 하고, 외국 아내가 설마 도망가랴 막 대하다 놓치기도 한다. 아내의 죽음 때문에 동네사람들에게 돈 밖에 모른다는 소리를 듣지만 그 내막을 듣다보면 처참했던 가난과 과거의 아픔이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박통에 대한 강한 향수를 토해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변하는 농촌 현실에 발 빠르게 대처하여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행동하기도 한다. 몇 푼 되지 않는 선심성 공사와 저렴한 관광 여행에 토지를 싼 값에 팔고 더 영악한 다른 동네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인다. 데모를 해야 하는데 할 줄 몰라 전직 학생 운동가를 찾아 데모를 벌이지만 조그마한 목적을 달성한 후 그를 팽개치는 이기적인 모습도 보여준다. 그런가하면 이장으로 동네 땅 팔아 구전 챙기는 재미를 누리던 이가 며느리의 노래방 도우미에 허망해한다.   

 

 요지경 같은 세상 속을 감정이나 사상의 치우침 없이 약간 거리를 두고 능청스럽게 작가는 이야기한다. 구수한 토박이 말투는 가끔 뭔 뜻인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게 만들고, 농촌사람들의 말에선 삶의 생생한 현장을 경험한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는 현실은 너무나도 사실적이라 옆에서 보고 듣는 것 같은 경우도 있다. 그런데 재미난 점은 작가가 충청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도 능청스럽고 자연스럽게 나와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경기도에서 나고 자랐다고 한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나이가 먹어가면서 토박이 말투들이 정겹고 아름답고 즐겁다. 영화 ‘황산벌’에서 각 지역 말투들이 지닌 가치를 이미 경험했지만 점점 언어가 획일화되어가는 현실에서 이런 소설은 더욱 더 가치를 지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