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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의 불행학 특강 - 세 번의 죽음과 서른 여섯 권의 책
마리샤 페슬 지음, 이미선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이 두껍다고 느낀 것은 한 권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만약 두 권으로 나누어 나왔다면 두껍다는 느낌은 사라졌을 것이다. 800쪽이 넘는 분량은 사실 들고 다니면서 읽기 쉬운 편이 아니다. 움직이는 지하철에서 책을 펼치고 오랫동안 읽기엔 너무 무겁다. 하지만 블루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이 무게 잊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보여준 수많은 책들은 나로 하여금 부족함과 절망으로 몰아간다. 아직도 이렇게 읽어야 하는 책이 많다니 하면서.
3부 36강으로 나누어져 있다. 서문을 제외하고 각 강의는 필독서로 제목이 정해져있다. 원작엔 각 필독서에 대한 해설이 없는데 번역본에선 내용이 조금 요약되어 있다. 이 덕분에 내가 읽지 않았거나 그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책들의 내용을 알게 됐다. 어떤 의미가 있냐고. 각 필독서가 각 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두 36권의 책을 내세우는데 이 중에서 한 권은 실존하지 않는 가상 서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수많은 책들에 비하면 정말 새발의 피다. 수많은 인용과 주석은 처음엔 한 번 찾아볼까 하는 마음을 불러왔지만 곧 포기하게 만들 정도다.
기본 줄거리는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죽은 후 아버지와 함께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살던 블루가 마지막 고등학교 학기를 맞이하여 도착한 스톡턴에서 벌어진 사건을 회상하는 형식이다. 24번이나 전학을 다녔던 그녀가 세인트 골웨이 고등학교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낸다. 이 학교에서 그녀는 이전과 다른 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멋쟁이들인 그들은 그녀를 자신들의 모임 블루블러드에 초대한다. 그런데 이 모임을 은연중에 조정하는 사람이 있다. 그녀가 바로 한나 슈나이더다. 방금 전학 왔고 친구도 없던 그녀를 이 모임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거기에 그녀는 엄청난 미녀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느끼기엔 미스터리가 좀 약하다. 한나의 죽음이나 그녀의 집에서 죽은 스모크의 사인을 두고 그런 요소가 있지만 책 전반에 걸친 엄청난 주석과 인용들은 지적소설로 다가오고, 그녀가 새롭게 경험하는 학창시절은 청춘소설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도 뒤로 가면서 변한다. 음모론이 살짝 깔리면서 자살로 처리된 죽음에 의문이 드러나고, 새로운 사실들이 튀어나온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작가의 수많은 인용과 상상력의 결합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쉽게 읽히는 책은 분명 아니다. 이 책에서도 자주 말해지는 <율리시즈>(제임스 조이스) 정도로 난해하거나 어렵지는 않지만 단숨에 읽히지도 않는다. 속도감 있게 사건을 만들고, 풀어내는 형식이 아니라 여기저기를 쑤시고 건들이면서 천천히 진행된다. 너무 많은 책이 인용되니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이 어떤 것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이것은 <밤의 음모>(스모크 하비)란 가상의 책을 한 강의로 설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강의 필독서니 구분이 쉽게 되지만 만약 이것을 내용 속에서 간단히 인용하고 지나갔다면 놓쳤을 것이다. 사실 그 많은 책들을 다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대부분이 우리나라에 출간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블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녀의 박학다식함에 놀라고 주눅이 들었다. 이 소설이 지닌 매력 중 하나다. 주눅이 들 정도의 수많은 책들은 새로운 문장 구조를 만들어내었고, 복잡하게 얽힌 구성은 정말 조심조심 꼼꼼하게 읽지 않으면 놓칠 것들이 많다. 단숨에 읽다 보면 오히려 수많은 책들과 인용에 놓치는 것이 더 많을 것 같다. 문장도 결코 빨리 읽히는 구조가 아니다. 짧은 문장도 많지만 의도적으로 길게 늘인 문장과 주석들은 호흡을 길게 가져야만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덕분에 오랜 시간 집중해서 보면 조금 피곤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지만 매력적이다. 블루와 블루블러드의 관계와 행동이 낯설면서도 재미있고, 후반에 펼쳐지는 미스터리를 둘러싼 음모론과 분석은 앞에 펼쳐놓은 단서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 기말고사의 문제들은 작품을 정리하는 동시에 의문과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