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아름다운 나라 문학동네 청소년 1
김진경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연 이 소설의 제목처럼 우리들의 나라는 아름다울까? 하루하루 쫓기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이란 단어는 그냥 단어일 것이다. 나 자신도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지금의 아이들은 내 때보다 더 심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물론 나보다 더 많은 자유와 아름다움을 누리고 살아가는 친구들도 있겠지만 더 많은 아이들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쫓기듯이 절대공부를 추구하고 있다.  

 

 

 절대공부란 단어는 책을 읽으면서 유일하게 웃었던 장면에서 나온다. 누구나 알고 있는 절대반지의 패러디다. SKY산을 오르는 골룸이 가지고자 한 절대공부, 하지만 정상에서 주어진 것은 참 잘했어요 도장. 웃음이 입가에 걸리고, 이 속에 담긴 의미들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처럼 이 소설은 우리의 교육문제에 대해 엄숙함을 벗어던진다. 물론 이 소설의 배경은 암울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정말 대단하다. 아니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세계화란 이름으로 전 지구적으로 펼쳐진 현상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첫 장면부터 충격적이다. 밤에 일어나 아침이라고 말하고, 등교하고, 출근한다. 이유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의 시간과 맞추기 위해서 대통령 등이 정했다고 한다. 야당은 소수당이니 거대야당이 이를 승인했다. 밤낮이 뒤바뀌었다. 이전 같으면 천지가 개벽할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것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이 있다. 학생들의 머리에 씌워진 시계모자다. 공부 잘하게 도와주는 기계라고 하는데 어떤 기계가 부작용이 없겠는가? 그것이 뇌에 작용하는 것이고, 하루 종일 쓰고 있다면. 이런 시대적 상황적 배경을 바탕으로 중3 학생들을 전면에 내세워 이 괴상한 시대를 이야기한다.   

 

 시계모자를 거부하는 아이들의 모임이란 것을 만들어 학교에서 소위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이 있다. 전교생 대부분이 착용하고 있는 시계모자를 이들은 거부한다. 나머지 아이들이 전자파에 압도되어 자신을 잃고 있는데 반해 이들은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한때 이 모임을 만들었던 이카루스 기우는 어머니가 죽고, 고위직 아버지 자리가 위태하자 친구들을 버리고 시계모자를 썼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강화학교란 곳으로 끌려가고, 그 후 탈출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현실의 벽을 깨부수고 넘기 위해 변한다. 지하도시 사람들의 도움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시계모자를 벗고, 정신을 조금씩 차리게 되지만 매일 자신을 찾아오는 미지의 존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미지의 괴물은 그 자신이다. 시계모자 때문인지 부작용을 경험하는 그의 모습은 마지막 장면을 위한 포석이자 결국 자신이 극복해야할 존재도 그 자신이란 평범한 사실을 알려준다.  

 

 300쪽에 많은 이야기를 담기는 사실 힘들다. 시대 설명도 해야 하고,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에 생명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조금 허약한 전개와 진행도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이 펼쳐 보여주는 세상은 끔찍하다. 과연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을 무색하게 만드는 일들이 벌어지는 요즘 현실을 생각하면 가능할 것도 같다. 판타지란 외피를 둘러싸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한국의 현실이기에 더 공감한다. 부분적으로 미스터리 형식을 띄고 있어 읽는 재미도 솔솔하다. 작년 촛불시위 때문인지 아니면 작가의 이전부터의 작업 연속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청소년들의 행동력과 기발한 착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뿌듯함과 즐거움을 준다.  

 

 소설을 읽으면서 행동하는 청소년과 시민단체에 박수를 보내지만 학생에게 언제나 정의니 윤리니 솔선수범을 외치는 선생들이 복지부동하는 모습을 보여줘 안타깝다. 실제 현실에서도 선생들은 이미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몇몇 행동하고 실천하고 노력하는 선생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는 현실 속에 안주하고, 방관자로, 혹은 권력에 기생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선생 중 한 명을 제외하곤 거의 등장시키지 않는다. 아니라고? 그럼 다행이다. 지금 한국의 현실을 보면 이 소설이 결코 판타지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희망을 보여주지만 그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 눈을 크게 뜨고, 천 개의 눈을 가진 신들이 그리워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
메리 앤 셰퍼.애니 배로우즈 지음, 김안나 옮김 / 매직하우스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거의 모든 글이 편지나 쪽지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근 500쪽에 달하는 소설을 재미있게 끌고 나간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앞부분에 조금 적응기를 거치고 나면 재미나고 즐거운 등장인물들 때문에 그냥 빨려 들어간다. 소설 속 중심인물인 줄리엣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따뜻하고 진솔한 감정과 에피소드들은 화려하지도 긴장감을 심어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요즘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감성과 감정들로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하고, 전쟁이란 비극 속에 벌어진 안타깝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가슴이 먹먹하고, 머릿속으론 각각 인물들의 모습을 그려보고, 건지 섬의 풍경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 소설이 나오기까지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작가 메리 앤 셰퍼의 첫 작품이자 유작이란 것도 있지만 언젠가 책을 쓰기를 원했던 그녀에게 “닥치고, 글을 쓰라고!” 란 친구의 말에 자극을 받아 쓰기 시작했다는 것과 건지 섬에 가서 안개 때문에 공항에 발이 묶이면서 무료함을 이기기 위해 이 섬에 대한 자료를 읽고 매혹되어 글을 썼다는 사실이다. 친구의 말 한 마디와 안개가 없었다면 아마도 우린 건지 섬과 그 섬에 사는 매력적인 인물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건 분명 우리의 행운이다.  

 

 줄리엣이 한 통의 편지를 도시에게서 받으면서 건지 섬 사람들과의 인연이 시작한다. 시대적 배경은 전후 1년이 지난 1946년이다. 줄리엣은 몇 년 간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에서 예상하지 못한 칼럼 모음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름을 알린다. 우연히 그녀의 이름과 주소가 있는 책을 산 도시가 그녀에게 찰스 램에 대해 알고 싶어 편지를 쓴다. 이 한 통의 편지는 앞으로 펼쳐질 재미나고 감동적이며 가슴 아프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들의 시발점이다. 두 사람의 편지 왕래는 곧 건지 섬에서 일어난 문학 동호회 감자껍질파이 클럽 탄생 비화로 이어지고, 이것은 곧 클럽 회원들의 편지로 각각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진행된다. 하나는 줄리엣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이야기고, 다른 것은 건지 섬에 있었던 과거다. 예상하지 못한 책의 성공과 그녀의 로맨스가 한 축을 이루면서 새로운 글에 대한 고민과 친구 오빠이자 출판사 대표인 시드니와의 편지 왕래는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잘 나타내준다. 반면에 건지 섬 클럽회원과의 편지 왕래는 전쟁 때 있었던 어려움과 안타깝고 애절한 사연들이 잘 살아있다. 그 중에서도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는 활기차면서도 사랑스럽고 즐겁지만 가슴 아픈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가슴이 아릿아릿하다.   

 

 도시의 믿음직한 행동이나 아멜리아의 따스한 마음씨나 이솔라의 활기차고 덤벙거리는 모습들은 각각의 매력으로 즐겁게 만들어준다. 가끔 나오는 독일군과의 에피소드는 독일인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가 아닌 가슴 따뜻하고 인정 많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많았음을 보여주고, 독일군에서 자행한 수많은 악행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분노에 휩싸이게 한다. 전쟁 때문에 먹을 것이 없어 서로 고생한 사연에선 점령자와 피점령자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로 다가온다. 건지 섬 주민들의 독일에 대한 반응도 집단과 개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즐겁고 유쾌하고 재미있다. 가슴 따뜻하고 유머 넘치고 위트 있는 단어 사용은 읽는 순간 미소를 짓게 만든다. 역사 속에서 전체나 개인에게 일어난 비극적 사건들은 너무 큰 충격이고 아픔이다. 그 와중에도 웃음을 짓고, 서로를 격려하고, 다른 사람을 돕는 그들을 보면 인간이 지닌 힘을 느끼게 한다. 또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풍기는 영국 여성작가들의 향기는 읽는 내내 가슴으로 스며든다. 책이 없어, 혹은 좋아서 몇 권의 책만 반복해서 읽는 그들을 보면 다독으로 책장을 채우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건지 섬, 갈 수 없을지 모르지만 내 마음 속에 그 섬이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 섬에 살고 있는 주민들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성탐정록 경성탐정록 1
한동진 지음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자주 가는 사이트에서 설홍주에 대한 단편이 올라왔을 때만 해도 한 아마추어의 습작이란 생각이 들었다. 호평이 있었지만 모니터로 긴 글에 잘 집중하지 못하는 요즘 습관 때문에 그냥 그렇게 기억 속에서 지웠다. 그런데 어느 날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 나 자신이 그냥 그렇게 생각했던 단편들이 출간된 것이다. 이 순간 놀랍고 반가웠으며 동시에 부끄러웠다. 섣부른 판단과 편견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놓칠 뻔한 것이다.  

 

 설홍주는 셜록 홈즈의 우리식 패러디고, 화자 왕도손은 당연히 와트슨의 변주다. 그런 때문인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예전에 본 홈즈의 장면들이 겹쳐 떠오르기도 한다. 특히 첫 작품인 <운수 좋은 날>은 도입부에서부터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 모르고 읽었다면 아마 표절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할 정도다. 이후에도 이런 장면들은 자주 나온다. 홈즈의 소설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부쩍 생기는 것도 이 소설이 주는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모두 다섯 편이다. 창작 연도순을 잘 모르겠지만 <운수 좋은 날>은 아직 미완성의 느낌이 강하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홈즈의 분위기가 너무 강하게 드리워져 설홍주만의 매력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런 영향력은 뒤로 가면서 많이 가신다. 특히 시대 배경이 다름으로 인해 벌어지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그 경계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 단편은 기묘한 실종사건을 시작으로 납치사건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이 조금은 매끄럽지 못하게 진행되지만 읽는 재미는 상당하다. 홈즈의 한국판이 그 모습을 드러내어 사건을 해결하면서 보여주는 장면 장면이 반갑고 재미있다.   

 

 <황금사각형>은 수수께끼 풀이다. 작가가 많은 공을 들인 것이 보이는데 왠지 모르게 탁월하다는 느낌보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에 머물고 만다.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지 않아서 그런지 긴장감도 떨어진다. 만약 꼼꼼하게 메모를 하고, 수수께끼를 본격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면 다른 재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광화사>는 트릭이 중첩되어 있다. 초반 트릭은 쉽게 간파를 했는데 다른 트릭은 미술에 대한 무지로 몰랐다. 하지만 무엇보다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매끄럽게 이야기를 끌고 가고, 대결구도를 만드는 능력은 장편 작가로의 가능성이 엿보여 반가웠다. 그의 탁월하고 뛰어난 추리 능력은 그 시대 상황과 맞물려 멋지게 드러난다. 재미만 놓고 본다면 이 단편집에서 최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천변풍경>은 쉽게 범인을 알 수 있었다. 트릭은 조금 신선한 맛이 있지만 범인을 너무 쉽게 정해진 궤도 위에 올려놓았다. 특별히 추리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그리고 김두한의 등장은 반가우면서도 그의 이력을 생각하면 아쉽다. 작품 속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냉정하다.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그 시대의 대표인물을 다루지 않고 넘어가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마지막 <소나기>는 소소한 소품이다. 일상에서 발생하는 미스터리를 다루는데 약간 느슨하면서도 세부적이고 풍부한 이야기로 즐겁게 읽었다. 설홍주가 트릭을 말하기 직전 해답을 알게 되었지만 그 단순한 착상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점이 더 재미있다. 마지막 단무지 이야기는 현대의 경험을 과거를 이식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직 조금 더 다듬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한 편으론 덜 다듬어져서 좋다. 홈즈에 대한 패러디와 오마주가 반갑고 즐겁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1930년대 경성을 제대로 구현한 작가의 노력과 묘사에 놀란다.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묘사는 나로 하여금 그 시대로 끌고 들어간 듯하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풍부한 자료와 생기 넘치는 인물들을 등장시켰지만 왕도손과 레이시치 경부의 대화가 너무 매끄러운 것이다. 왕도손이 일본어를 잘 모른다는 점을 생각하면 레이시치 경부가 우리말을 해야 하는데 이 시대에 과연 그랬을까 의문이다. 이런 저런 것보다 더 반가운 것은 새롭고 멋진 한국 탐정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울한 해즈빈
아사히나 아스카 지음, 오유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제목을 처음 보곤 커피 빈을 연상했다.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커피 한 잔이 마시고 싶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빈이란 이름에서 장소를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영어의 has been 현재완료형을 뜻한다. has-been으로 표기하면 한창 때가 지난 사람, 시대에 뒤떨어진 과거의 사람을 일컫는다. 갑자기 왠 영어 단어냐고? 바로 이 소설 속 주인공인 리리코의 현재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많은 분량의 소설이 아니다.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결코 밝은 소설도 아니다. 리리코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녀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도쿄 대학을 나와서 같은 대학 출신의 변호사 남편과 좋은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그녀는 밖에서 보기엔 부러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면 그녀는 의욕도 활기도 없다.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실업급여 때문에 고용안정센터에 나가고, 구직활동을 정열적으로 하지 않지만 하나씩 자료를 모은다. 이런 그녀의 일상을 보여주는 앞부분은 읽다 보면 화가 난다. 뭐가 부족해서 저렇게 날카롭고, 투정을 부리며, 예민한 것일까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나 이런 의문은 뒤로 가면서 연민으로 변하게 된다.  

 

 그녀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구마자와의 만남은 그 변화의 시발점이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학원에서 늘 톱을 놓치지 않던 아이다. 하지만 어느 날 가족과 함께 이사를 가면서 그 소식이 끊겼는데 취업세미나에서 우연히 만난다. 아이 때 늘 일등을 하여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가 10살은 더 늙은 모습으로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만남으로 그녀의 성장과정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사립학교 열풍이 강하지 않던 시절, 사립학교 입학 학원에서 최하위반에서 최상위반으로 올라가기 위한 노력과 열정이 잘 나타난다. 그리고 그녀는 부모의 자랑이 된다. 거기에 대학도 도쿄대학을 나왔고, 세계적인 대기업에서 일했으니 얼핏 보기에 멋진 조건을 갖추었다. 또 남편은 변호사고, 시아버지는 대기업 임원이며, 시어머니도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어가는 종이 공예가다. 이런 외양은 오히려 삶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짐처럼 다가온다.   

 

 소설의 대부분은 그녀의 짜증과 열등감과 날카롭고 예민한 심리와 행동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후반으로 가면서 진실한 그녀의 삶이 나오면서 분위기는 바뀐다. 결혼하기 전 남편에게 보여주기가 그렇게 부끄러웠던 집이 아버지의 간병을 위해 간 순간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학원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얻었고, 시험이라면 어려움 없이 합격한 그녀의 힘겨웠던 과거도 나오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학창시절이나 입사시험에서 탁월함을 보여준 그녀가 어느 순간 적응장애를 겪으면서 총아에서 짐으로 전락한다. 세상사가 시험처럼 직선으로 흘러간다면 그녀는 분명 더 높고, 더 큰 성취를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냉혹하고 살벌하면서 살아 움직이며 순발력과 유화능력이 필요한 세계에 적응을 실패한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그녀의 이때까지 성공이 마지막 순간에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소설에서 가장 가슴으로 파고드는 장면은 책 뒷장에 나오는 대사다. 늘 바르고 자신감 차 있던 그녀가 밥을 먹으면서 눈물을 흘린다. 지금까지 그녀를 지탱하고 있던, 강요하던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여기서부터 그녀의 세상을 보는 시선이 변한다. 자신을 둘러싸고 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을 깨트린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알 수 없다. 그 순간을 영원하게 끌고 가는 아주 힘든 싸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웃음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제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그녀에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황의 시절]의 서평을 써주세요.
방황의 시절 문지 푸른 문학
다치아 마라이니 지음, 천지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63년 소설이다. 그 시절 이탈리아 사람들의 사랑에 대해 잘 모른다. 뭐 지금 우리 주변의 사랑도 잘 모르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엔리카의 생활을 따라가다 보면 놀라운 장면들을 만나게 된다. 일정한 시간이 되면 찾아가는 체사레나 그녀의 동기생인 카를로와의 섹스는 아무 목적 없는 것처럼 다가올 때도 있다. 건조하고 메마른 문장과 행동 속에 어떤 삶이 감추어져 있기에 이런 행동이 나오는 것일까 궁금하다. 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결코 쉽게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체사레의 아버지가 문을 열어주는 장면부터 나온다. 이 문장을 읽고 나서 친구를 만나러 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섹스는 이런 섣부른 판단을 무참하게 깨어버린다. 체사레가 엔리카를 대하는 방식은 결코 사랑하는 사람을 연상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카를로와의 섹스는 그녀를 이해하는데 더욱 어렵게 만든다. 단순히 그녀는 섹스를 즐기고 좋아하는 것일까? 아니면 삶의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마구 달린다.  

 

엔리카의 집밖 생활이 남자들과 관련되어 있다면 집안은 무능한 아버지와 생활고에 시달리는 어머니로 힘겨운 나날이 이어진다. 돈이 되지 않는 비싼 취미인 새장 만들기에 몰두하는 아버지는 두 부부가 이미 정도 사랑도 없는 무심한 일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렇다고 그녀가 살갑게 아버지를 대하는 것도 아니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가슴 한 곳엔 체사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 어머니가 하는 말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목적 가득한 평범한 이야기뿐이다.  

 

 열일곱 살 그녀가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결코 장밋빛으로 치장되어 있지 않다. 이런 저런 남자를 만나 섹스를 하고, 어머니가 죽은 후론 먹고 살 걱정도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체사레에 대한 애정에 비해 돌아오는 반응은 늘 육체적 욕망의 순간적 배출뿐이다. 예상하지 못한 섹스로 잠시 돈을 받기도 하지만 순간의 방황일 뿐이다. 그녀가 임신을 했다고 말했을 때 체사레와 카를로가 보여준 반응은 지극히 남성적이다. 자신의 순간적 욕망만 배출하는데 목적이 있던 체사레는 자신의 책임을 뒤로 하고, 조심하지 않은 그녀 탓만 한다. 흔히 수많은 남자들이 책임지고 싶지 않을 때 보여주는 낯익은 행동이다. 반면에 카를로의 반응은 순간적 흥분과 열정에서 비롯한다. 그녀를 책임질 능력도, 자신도 없으면서 말만 앞세운다. 물론 순수하고 순정적인 마음은 보이지만 그 순간의 감정은 젊음의 한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런 쉽지 않은 관계와 상황 속에서 더욱 낯선 느낌을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작가의 문체다. 그녀는 사람과 사람의 대화 속에서나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이나 심리묘사에서 감정 이입을 극도로 절제한다. 감상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장황하게 상황을 풀어주지도 않는다. 간결하면서 건조한 문장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들을 볼 것을 요구한다. 잘 읽히면서도 단숨에 읽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녀의 삶 속으로 나의 감정 이입이 이어지지 않고, 한 발짝 떨어진 곳에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보게 된다. 모두 읽은 지금도 그녀는 알 수 없는 존재다.  

 

•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전후 이탈리아의 생활상과 한 여고생의 방황이 사실적이고 건조한 문장과 절제된 묘사로 잘 표현되었다.
•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김훈을 좋아하는 독자나 건조하고 사실적이고 절제된 시선을 유지하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 

•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비가 오기 시작했다. 훈훈한 기운과 함께 빗방울은 듬성등성 인도 위로 떨어졌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곧 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우선은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일은 새벽에 일어나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날 것이다. (30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