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코의 지름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3
나가시마 유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제1회 오에 겐자부로상 수상작이다. 이 상도 상당히 특이하다. 상금은 없고, 심사위원은 오에 겐자부로 단 한 명이다. 영어와 불어 등으로 번역되는 것을 제외하면 단순히 명예 밖에 없다. 점점 사라지는 일본 순문학에 대한 바람을 담고 만든 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기존의 강한 개성을 보여준 소설들에 비해 조금 심심하다. 초반은 이런 느낌이 더 강하다. 하지만 조금만 더 읽다보면 새로운 재미를 발견한다.   

 

 느린 듯하면서 일상의 순간을 포착해낸 실력은 대단하다. 섬세하지도 선이 굵은 내용도 아니지만 각각의 등장인물과 그들의 행동과 삶이 만들어내는 향기는 강하고 오래간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흔히 만나게 되는 인물들이 아닌데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묻어나는 치기와 순수함은 약간 밋밋한 듯한 소설에 활기를 불어넣어준다. 봄날의 따스한 햇살에 졸음이 몰려오듯이 나른하게 젖어든다.   

 

 7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연작소설이다. 서양 골동품 전문점 후라코코에서 일하는 화자의 시선을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 화자는 일하기가 싫어서 후라코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 점포에 딸린 조그마한 방에서 살아간다. 일하기 싫어한 사람이 아르바이트에 열성을 가질 리가 없다. 하지만 그는 후라코코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사람들과 사이가 좋다. 이 소설이 지닌 매력이 바로 이 관계들이 맺어지고, 이어지는 과정을 잘 살려낸 것이다. 그 한 명 한 명이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이 심심한 소설에서 과속 방지턱처럼 순간적으로 독자로 하여금 튀어 오르게 만든다.   

 

 

 소설 속 사람들의 인간관계는 평범하면서도 비범하다. 인간관계라는 점에서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다면 그들 각자가 서로를 바라보고 그대로 인정하면서 사는 것이 상당히 비범하다. 알면서도 아는 척하지 않고, 무의미한 듯한 상자 만들기를 그냥 그렇게 쳐다보고, 서른다섯의 나이를 사사오입하여 마흔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어쩌면 너무 무심한 듯하지만 깊은 속내는 따뜻함으로 가득 차 있음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소설 속에선 심각한 사건도 그냥 평범한 일상과 나른한 삶 속에 그냥 묻힌다. 어쩌면 이 소설은 긴 삶의 순간을 그냥 그렇게 거리를 두고 그려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소설이라면 깊숙하게 파고들고, 심각하게 이야기할 내용이 몇 줄의 문장으로 간략하게 처리된다. 우리의 일상이 바로 그렇지 않을까? 한때 엄청나게 고민했던 일이 어느새 시간이 흘러간 후 단순히 과거의 추억으로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문득 책을 읽다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다. 바로 유코와 나의 움직임이 각 단편의 그림에서 조금씩 전진하는 것이다. 이것도 느릿느릿 나아간다. 똑같은 그림으로 생각하다 천천히 들여다보니 위치가 조금씩 앞으로 가고 있었다. 아마 이 소설의 진행을 잘 표현한 그림이 아닐까 생각한다. 단숨에 읽기 보다는 한 편 한 편 느긋하게 읽는다면 다른 재미가 드러난다. 한 번 보다는 두 번 읽는다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개성 강한 등장인물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두 번 읽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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