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미스터리 2000 - 2
일본추리작가협회 편저 / 태동출판사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1편보다 더 마음에 든다. 낯익은 작가들도 많고, 일본적 특색이 묻어나거나 트릭이 더 정밀한 듯하다. 특히 요 몇 년 사이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일본추리작가들의 단편뿐만 아니라 생소한 작가들의 작품이 큰 재미를 주었다. 비슷한 유형의 단편이 아니고 거의 모두가 분위기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들이 재미를 주고 완성도를 떠나 즐거움을 준다.

 

단편집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특별히 정이 가는 작품이 몇 편씩 꼭 있다. 나이츠 키요미의 ‘시효를 기다리는 여자’와 곤노 빈의 ‘부하’나 기타모리 코의 ‘흉소면’이나 츠부리야 나츠키의 ‘생환자’와 니카이도 레이토의 ‘기스케의 세기의 대결’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나머지 작가들은 모두 한국에서 책으로 나왔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가다. 노자와 히사시(연애시대), 모리 히로시(모든 것은 F가 된다), 와카다케 나나미(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우타노 쇼고(벛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등이다.

 

재미있는 것은 노자와 히사시는 현재 연애소설로 이름을 날리고 있고, 모리 히로시의 ‘석탑의 지붕 양식’은 고대 인도를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를 통해 재미있고 깜찍하게 풀어보는 단순한 수수께끼 이야기고, 우타노 쇼고의 ‘까마귀의 계시’는 드러난 살인 속에 숨겨진 비밀을 풀어내는 아마추어 탐정의 놀라운 추리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다만 와카다케의 ‘아가씨의 출범’은 아직 읽지 않은 데뷔작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처럼  일상의 변화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나이츠 키요미의 단편이 서술 트릭을 이용하고 있는 점이 우타노 쇼고의 출간작을 떠올리고, 트릭이나 살인사건에 대한 것이 아닌 형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곤노 빈의 작품이 진한 동료애를 느끼게 한다. 전설을 이용해 민속학자가 탐정역을 하는 기타모리 코의 작품이 만화나 드라마로 본 민속탐정을 떠올려주며 일본적 풍경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특히 니카이도 레이토의 작품은 보는 내내 놀라운 상상력과 그 특이함에 추리소설에 대한 지적 허영심과 애착을 느끼게 만들어주었다.

 

장편으로 나를 사로잡은 작가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나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특징 있고 개성 있는 이야기를 담은 추리소설이 더 마음에 든다. 앞에서도 강조한 ‘기스케의 세기의 대결’은 추리소설 독자라면 읽어보고 놀라워하고 즐거워할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 속에 묘사된 추리소설들과 더불어 벌어지는 기묘한 대결은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고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만약 나에게 누군가 그런 대결을 제의한다면 나는 과감하게 포기하고 말 것이다. 나의 기억력을 내가 잘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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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김관오 옮김 / 아르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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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슴도치를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문장이 있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귀엽다’라는 속담이다. 우리가 보기엔 고슴도치의 가시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가시의 날카로움에 움찔하지만 고슴도치라는 존재는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세운 가시는 사람들의 눈엔 보기 싫은 하나의 흉물이고, 그 가시 속에 담겨있는 고슴도치의 삶이나 생각은 가시라는 외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두 명의 주인공을 보면 고슴도치의 우아함이라는 제목과 똑 닮았음을 알게 된다. 쉰네 살의 수위아줌마 르네와 열두 살의 소녀 팔로마가 보여주는 삶을 보면 가시로 자신을 보호하며 다른 사람의 시선을 차단하고 왜곡하는 것을 알게 된다. 왜 그런 삶을 사는 것일까? 두 사람 모두 보통 사람들 이상의 지식과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재능을 발휘하기보다 숨기고 위장하면서 살기를 바란다.

 

단순히 두 주인공의 이야기에 집중한 소설이라면 부담 없이 빠르게 페이지가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것을 거부한다. 철학 콩트라는 광고 문구처럼 곳곳에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는 내용으로 속도감을 붙이는 독자의 시선을 붙잡고 멈추게 한다. 이 장면들이 그녀들의 삶의 한 단면을 멋지게 나타내어주는 동시에 소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준다. 덕분에 읽는 사람 입장에선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 않고 잠시 쉬면서 음미하고 그냥 지나가면 된다. 또 다른 고개에서 이런 장면을 반복하지만 그 속에 매몰되지 않고 지나가면 혹은 배움을 받으면 부가적인 수입도 많다.

 

구성에서 제목에서 재미난 책이다. 기본 진행은 르네 아줌마의 시선과 생각으로 진행되고, 중간 중간에 팔로마의 사색이 끼어드는 형식이다.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다 한 일본인의 등장으로 상대를 인식하고 인정하고 아껴주고 이해하는 장면에 가서는 이 소설이 주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외견 상 드러나는 르네의 모습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모습과 고슴도치처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사들을 조금씩 걷어내는 장면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생각하게 한다.

 

곳곳에 드러나는 일본문화에 대한 동경이나 철학 논의도 즐겁지만 나의 시선을 강하게 끈 장면은 거의 마지막에 나오는 카쿠로와 르네의 외출에서 보여준 아파트 주민들의 반응이다. 이십칠 년을 수위로 산 그녀가 다른 복장과 화장으로 약간 변했다고 알아차리지 못하고 카쿠로의 연인으로 인식하는 장면은 놀랍고 흥미로운 대목이다. 한 명의 사람으로 그녀를 보아온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수위로만 그녀를 보아왔기에 그녀의 조그마한 변신에도 그 정체를 알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이 가진 선입견과 편견의 무서움을 느끼는 장면이었다.

 

쉽게 읽히는 책은 분명 아니다. 속도감이나 간단한 구성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즐거움을 주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하지만 재미나고 빠져들게 하는 장면들도 많다. 허식과 가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틀어 보여주는 장면이나 신랄한 르네 아줌마의 분석을 보는 재미는 대단하다. 문장도 표현도 재미난 곳이 많다. 이런 점들이 무겁고 복잡한 철학 논쟁이나 분석을 다룬 장면을 넘어 재미를 주는 듯하다. 특히 마지막에 와서 르네의 비밀이 드러나는 장면에 오면 아! 하고 감탄하고, 마지막 장을 덮은 순간은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한 가지 눈에 거슬리는 것은 오즈 야스지로를 영문대로 오주(ozu)로 번역한 것이다. 너무나도 많이 알려진 일본 거장의 이름이라 아쉽다. 프랑스 발음대로라면 어떨지 모르지만 오주보다 오즈가 더욱 친밀하고 정확한 표기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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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09-11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흥미로운 책이네요~~~ 리뷰 잘 읽었어요!

한잔의여유 2007-09-14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읽은 리뷰중에서도 좋은 편이네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1
로렌 와이스버거 지음, 서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소위 말하는 유행이니 패션이니 하는 것에 관심이 없는 나에겐 이 소설에 나오는 수많은 브랜드가 하나의 암호처럼 느껴진다. 이전에 비해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이 책에 나오는 의상이나 신발이나 백들은 너무 유명한 몇 가지를 제외하면 처음 듣거나 그냥 평범한 상표가 아닌가 착각하기도 한다. 이런 무지가 이 책에 대한 재미를 조금은 낮추지 않았나 생각하지만 작가의 재미있는 표현과 위트 넘치는 문장들은 나의 시선을 계속해서 붙잡아둔다.

 

직장 초년생이 부딪치는 현실은 사실 엄청나게 힘겹다. 하는 일이 없어도 괜히 졸리고 집에 오면 힘에 부치고 피곤해 쉽게 잠에 빠져들곤 한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주인공 같은 경우라면 잠조차 제대로 자는 것이 무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힘겹게 회사 생활을 하였다고 약간은 말하는 나에게 여기에선 소위 명함도 내밀 수 없다. 100만 명이 원하는 직장이니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 과연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앤드리아보다 그런 자리에 있다 자리를 옮겨간 사람이나 에밀리가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너무 뚜렷한 목표의식 때문인가?

 

미국 영화나 드라마 등을 보다 보면 너는 해고다! 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직장에서 사람을 저렇게 쉽게 해고하다니 한국의 수많은 사장들이 본다면 부러워할만한 상황이다. 덕분에 피고용인은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당해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상황에 따라 분노하고 가끔은 즐거워하고 통쾌해하면서 보게 된다. 이 상황을 전체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자주 보다보면 당연한 장면처럼 느껴지니 나도 적응이 되어가는 모양이다.

 

직장에서 가장 힘든 것은 언제나 인간관계다. 일이 힘든 경우도 많지만 역시 대부분 사람이 떠나게 되는 경우는 상사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경우다. 하지만 이 소설은 좋지 않은 경우를 넘어 너무 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편집장의 어처구니없는 요구와 앤드리아의 아슬아슬한 상황들이 우릴 즐겁게 한다. 그녀가 사고로 죽기를 원하지 않는 이유가 자신이 죽일 수 없기 때문이라는 문장을 보며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게 되고, 자연스럽게 편집장의 부름에 응하는 그녀를 보면 현실의 높은 벽을 실감하게 된다.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잡지의 편집장이라는 것만으로 그녀가 누리는 엄청난 혜택은 보는 내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다. 편집장의 비서라는 이유만으로 그녀가 누리는 엄청난 물질적 혜택은 그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피어나는 한 줄기 샘물 같다. 일반 여성이라면 눈을 부릅뜨고 부러워할만한 상표들이 그녀에겐 공짜로 제공되는 것이다. 나중에 1년도 되지 않은 경력에서 얻은 옷을 헌옷가게에 판 돈만 3만불이 넘어가니 대단하지 않은가? 헌옷이 이러니 새옷이라면 어떻겠는가? 물론 나에게 이런 금전적 혜택이 있지만 이런 상사를 모셔라고 한다면 당연히 사직서를 던지고 나올 것이다.

 

작가의 이력에 보그 편집장 어시스턴트였다고 하는데 그 경험이 바탕이 된 모양이다. 실화에 가깝다는 해설을 보면 미국 대기업의 회장들이 누리는 엄청난 혜택과 연봉을 자연스럽게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대기업 회장이 연초 인사 자리에서 자신의 직원들을 가리켜 우리 하인이라고 말했다는 소문이 생각나는데 이 소설을 보면 그것이 사실이 아닌가 한다. 선진국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미국에서 이런 정도라면 한국에선 어느 정도인지 상상하기 힘들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책 겉장에 뉴스메이커 편집장에 글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한 미국에서조차 꿈을 위해서라면 피나게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강추한다는 문장을 발견하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 벌어지는 상황들이 피나게 노력하는 장면인지 거대한 자본과 권력 앞에 한 인간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놀랍다. 한 잡지의 편집장이 본 것이 녹녹하지 않은 사회생활에만 그친 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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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여자 친구
고이케 마리코 지음, 오근영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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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으론 도저히 미스터리 소설이라곤 생각하기 힘든 작품들이 많다. 그 중 한 편이 이 소설이다. 처음 이 소설에 대한 평을 보았을 때 제목으로 인한 편견이 무너지면서 많은 기대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만족이다.

여섯 편의 단편이 보여주는 살인과 죽음들은 일상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살의들의 총합과도 같다는 느낌을 준다. 생활하는 동안 쌓여간 분노나 의심 등이 살의로 발전하고, 그것이 실행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면서 삶의 냉혹함과 잔인함을 느끼게 된다. 일상의 평온함 속에 숨겨진 그 욕망이 마지막 장면에서 밝혀지는 순간 살인의 의미를 잃게 되는 장면은 허망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각각의 단편들이 마음에 든다. 하지만 주는 느낌은 모두 다르다. ‘추락’이나 ‘잘못된 사망 장소’는 살인의 섬뜩함보다 그 뒤에 펼쳐지는 상황들이 왠지 모르게 웃음을 자극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들의 결과가 전혀 예상 밖의 결말로 이어지는 전환은 그들의 섬세한 감정을 넘어 색다른 재미를 주었다. ‘보살 같은 여자’와 ‘종막’은 삶 속에 숨겨진 감정과 살의가 잘 계산된 행동으로 이어지는데 그 목적이나 결말은 다르지만 해당되는 사람들의 감정이나 진실이 현실에 의해 왜곡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의도된 살인을 알지만 현실의 부를 위해 입을 다물거나 숨겨졌다고 생각한 불륜이 사실은 모두가 아는 일이라는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비극임을 알게 된다.

'남자를 잡아먹는 여자’나 ‘아내의 여자 친구’는 잃지 않기 위해 펼친 살인에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는 아이러니가 여운을 강하게 남긴다. 일상에서 남들이 불어넣어준 의심이 과거의 이력과 마주치고 현실에서 발생한 사건과 결합하는 순간 살의는 살인으로 옮겨가게 되고, 불편한 아내와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힘들게 실행한 살인이 그 가정을 잃게 만드는 마지막 장면은 여자의 강한 인내와 냉혹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살의와 마주한다. 그 실행은 사실 힘들고 대부분 생각에서 그친다. 그 한계 용량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우리 주변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살인과 죽음들은 많은 경우가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경우가 많다. 만약 치밀한 살인 계획을 세운다하더라도 실제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극히 일부분이다. 그래서 세상은 살인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극히 일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살인 그 자체나 배경보다 그 뒤에 펼쳐지는 사실이나 현실적인 요소들이 더 와 닿는다.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한 일들이 그것을 잃어버리는 원인이 되는 현실을 보면 더욱 현실의 부조리함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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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강 밤배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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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가끔 읽게 되는 작가가 있다. 그들 중 한 명이 요시모토 바나나다. 출세작인 ‘키친’을 처음 읽었을 때 밋밋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후 다시 읽은 후 생각을 수정한 기억이 있다. 처음 읽을 당시 나의 책 읽는 법과 생활방식이 지금과 상당히 달랐던 것도 이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집중력과 취향 탓이 아닌가 한다. 인터넷으로 읽었던 ‘키친’은 건성 건성으로 읽었고 이야기가 좀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남성적인 굵직함이나 몽환적인 이야기나 현실을 충실히 반영한 소설을 좋아하는 나에게 너무 소녀 취향으로 느껴졌었다.

 

다시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바뀌었지만 몇 권 더 읽은 그녀의 작품에서 마음에 드는 장편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뭐 그렇다고 그녀의 작품을 모두 읽은 것은 아니지만 첫 작품인 ‘키친’을 능가하는 것을 발견하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집에서 다시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엔 장편으로 생각하였는데 세 편으로 구성된 단편집이었다. 그것도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었다.

 

무겁거나 어둡거나 힘겨운 내용이 담겨있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통해 현재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리움과 안타까움 등을 그려내고 있다. 각각 죽은 방법이 다르고 그 상처가 여러 방법으로 드러나지만 작가의 말처럼 그들을 구원하고 있다. ‘하얀 강 밤배’에서 자살한 친구나 ‘밤과 밤의 나그네’의 교통사고 당한 오빠나 ‘어떤 체험’에서 연적이었던 이의 알콜중독사 등으로 그들은 죽었으나 현실의 무거움과 어두움과 방황을 되풀이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기억이나 추억 등은 이 모든 힘겨움을 이겨내는 좋은 약이 된다. 비록 풀어가는 방법이 현실적이지 않고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힘을 내게 하는지 모르겠다.

 

가끔 나른한 잠에 취해 헛것을 본 듯하거나 사무치는 그리움에 밤거리를 방황하거나 예전에 있었던 일이 마음에 걸려 안타까워하거나 하는 일들을 우리는 겪게 된다. 그 이유를 알지만 해결한 방법은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 없다. 잠시 후 잊게 되겠지만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 그 뒤끝을 가볍게 털어낼 수 있다면 살아가는 동안 편안한 것이다. 여기 세 편에 담겨있는 이야기가 그런 삶의 한 면을 몽환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마음에 든다. 바나나는 아마 장편보다 단편이 나에게 더 맞는 모양이다. 현재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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