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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킹의 후예 -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영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평점 :
이 소설이 네 마음을 끈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이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특촬물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 문학동네문학상 수상작을 읽을 때도 이 상에 대한 나의 호감을 말했다. 그럼 다른 하나 특촬물인데 사실 이 소설에서 기대한 것은 예전 안정효의 <헐리우드키드의 생애>와 같은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에 빠진 소년과 그가 본 수많은 영화에 대한 감상과 행동 등을 기대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런 방향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기대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물론 특촬물에 대한 애정 있는 시선은 그대로 담겨 있다.
첫 대사는 “우리, 결혼해”다. 특촬물과 결혼이라. 이상한 결합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대사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설명해준다. 암에 걸린 채연이 보험회사에 보험료를 신청하러 온다. 이때 영호와 만난다. 냉면집에서 인연이 이어지고 이 연상연하 커플은 결국 결혼한다. 물론 이 결혼은 직장에는 비밀이다. 고객과의 관계가 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다. 이 결혼까지 진행되는 과정이 간결하다. 솔직히 과연 이런 결합이 있을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거기에 그녀는 열세 살 된 아들까지 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은 아들 샘과 영호와 만나면서부터다.
제목에서 말하는 체인지킹은 특촬물 드라마 제목이다.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나오지 않는다. 영호가 이 드라마와 만나게 되는 것은 샘과 거리를 거닐다가 샘이 몰두하는 장면을 보면서부터다. 집에 있는 디지털TV에도 이 드라마를 본 흔적이 있다. 이 사실들이 나올 때만 해도 이제 본격적인 특촬물 세계로 들어가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샘이 영호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 드라마와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낳았다. 그런데 아니다. 또 맞다. 아닌 것은 본격적인 특촬물 세계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고, 맞는 것은 이 드라마와 샘의 말없음이 관계있다는 것이다.
소설 속 관계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채연의 아들 샘과의 관계, 다음은 샘이 열심히 보는 체인지킹 때문에 엮이게 되는 마니아 민과의 관계, 마지막은 보험심사원 안과 그가 의심을 가지는 보험수령자 윤필과의 관계다. 이 셋은 별개의 것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샘은 민과, 영호는 안과, 윤필의 과거는 체인지킹의 소문과. 이런 관계 외에 이들은 아버지 없는 세대를 대표한다. 샘의 아버지는 마약 중독자고, 영호와는 그 어떤 대화도 없다. 영호 아버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다. 윤필의 아버지는 아들들 손가락 잘라 보험료를 탄 이력이 있다. 여기에 샘의 아버지가 되려고 하는 영호와 자살한 아들과 소년원을 다녀온 딸을 둔 안의 관계는 그냥 무심코 지나갈 수 있는 설정이 아니다.
제목 <체인지킹의 후예>는 민이 영호에게 한 대화 후에 나온다. “아버지도 없고, 중심이 되는 이야기도 없고, 믿고 따를 진실도 없어. 신도, 철학도 아무것도 없어. 가진 건 그저 반복 학습된 찌꺼기야. 우리는 어디선가 있었던 이야기들의 흉내일 뿐이야. 위대한 과거의 지루한 모방이야. 비참한 소재의 처참한 패러디야.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어.”(252쪽)란 대화다. 이 속에 담긴 무력함과 패배적이고 허무적인 감상은 바로 반발을 불러온다. 감상에 매몰된 사람이 흔히 내뱉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반복 학습된 찌꺼기이기 때문이다.
특촬물에서 기대한 가볍고 경쾌하면서 조잡할 것 같은 내용은 사실 없다. 처음부터 짜놓은 설정과 관계 속에서 아무 의미 없는 듯 던져놓은 것들이 하나씩 의미를 찾을 때 고개를 끄덕인다. 숨겨져 있던 사연들이 하나씩 밖으로 드러날 때 그 상처는 아물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상처를 남에게 내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윤필과 안의 대립과 갈등 속에 벌어진 사고는 현실적이라기보다 너무 많은 비약을 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것은 영호와 샘이 첫 대화를 나누는 장면과 같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왜일까? 긴장의 끈이 풀렸기 때문일까?
체인지킹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불가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고 한 법문이 떠오른다. 왜 이런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체인지킹의 기본 줄거리는 고독하고 잔인하면서도 철학적이다. 아니면 내가 너무 많이 나간 것인지 모르겠다. 민의 분석이 샘의 그것과 너무 다른 것과 같이. 또 민의 ‘우리는 체인지킹의 후예다’라는 외침의 답으로 영호가 내놓은 말은 유치한 말장난 같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사연은 결코 유치하지 않다. 이 소설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