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웃어줘 라오스 - 칫솔을 선물하러 떠난 청년의 777일간의 라오스 체류기
오동준 글.사진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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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는 개인적으로 일주일 이상의 시간이 있으면 가장 가보고 싶은 동남아 여행지 중 일순위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루앙프라방이다. 몇 년 전부터 이곳은 휴가를 길게 내어 다녀오고 싶었다. 일상은 이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나의 욕심이 과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최소 일주일 정도의 시간만 계속 생각하니 쉽게 가지지가 않는다. 그러다가 가끔 읽게 되는 라오스 관련 여행기 등은 그곳 이외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욕심은 더 긴 시간을 들여 여러 곳을 둘러보고 싶게 만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저자가 그곳에서 보낸 777일간의 체류는 부럽기만 하다. 실제 들여다보면 나의 부러움이 굉장히 피상적이란 것이 쉽게 드러나지만.

 

저자는 KOICA 요원으로 군복무 대신 라오스에 왔다. 2년 동안 방비엥 중학교 체육교사로 활동한다. 그냥 시간만 보내고 그 나라를 여행하면서 지낼 수도 있지만 그는 굉장히 활동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현지에 동화된다. 라오스 말과 문자를 열심히 배우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 사회에 발을 깊게 들여놓는다. 학생과 친해지기 위해 사진을 찍어 이름을 외우고, 체육 교재를 직접 만들기도 한다. 첫 단계로 라오스 말을 배우는 것인데 나중에 외국친구가 그곳에서 본 외국인 중 가장 라오스 말을 잘한다고 칭찬할 정도다. 이런 노력은 그의 글과 사진 속에 잘 녹아있다. 아마 이와 같은 생활이 계속 되었기에 한국 치과 의사와의 대화 후 치카치카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표지에 나오는 치카치카 프로젝트가 이 책의 핵심이 아니다. 이 프로젝트는 그의 복무 끝 부분에 오지의 라오스 소수부족을 돕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시작한 것이다. 콜라나 나쁜 과자 등을 먹으면서 아이들의 이가 급속하게 썩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사실 책을 읽기 전 이 프로젝트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문이었다. 그도 한때 이런 의문이 있었다. 하지만 피터의 물결 파문 이야기는 현실을 똑바로 보고 앞으로 나가게 하는 힘을 주었다. 현재까지 모두 네 번의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라오스 뿐이었지만 그의 영역은 더 넓어질 모양이다.

 

저자가 라오스 사람들을 보고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착하다’는 말이다. 얼마 전 라오스를 길게 여행한 한 여행자가 속된 말로 돈맛을 알게 된 라오스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모두가 착하다는 환상을 깨트렸지만 실제 그가 만난 수많은 라오스 사람들은 친절하고 착했다. 아마 이것은 그가 라오스에 장기간 살았고 라오스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짧게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어딘가에서 이런 사람을 노리는 라오스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항상 있다. 몇몇 나쁜 사람들 때문에 전체를 매도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실제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은 아직 자본주의 물을 덜 먹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더 빨리 가보고 싶다.

 

많은 외국 체류기가 그곳을 칭찬한다. 나쁜 인상이 강했다면 아마 책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살면서 겪었던 문화의 충돌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많이 나온다. 왜 1등에게만 상품을 주는가 하는 물음처럼. 모두가 노력한 것을 감안하면 이런 불평이 나올 만 하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히 생각하고 있는데 그만큼 경쟁 속에서 살면서 당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제일 앞에 나오는 인생은 경주가 아니라 완주라는 말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속도 속에 놓치는 수많은 즐거움과 의미는 포기라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곳곳에 우리의 방식으로 그 나라를 보는 저자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나의 시선이기도 하다. 라오스 사람들의 삶은 급하게 변하고 있다. 이들의 하얀 미소를 위해 진행하고 있는 치카치카 프로젝트가 더 발전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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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고전 : 한국편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김욱동 지음 / 비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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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전도사 역할을 해온 저자의 총결산 책이다. 한국편, 동양편, 서양편 세 편으로 나누어 출간될 예정이다. 이번 책은 한국편이다. 사실 한국의 환경 관련 서적을 거의 읽은 적이 없다. 나의 관심 분야가 아닌 것도 있지만 읽은 것 대부분 외국 번역본이었다. 아니면 나의 무지 탓에 읽으면서 그 가치를 전혀 몰랐을 수도 있다. 그 무지를 제대로 경험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29편의 한국 고전을 통해 녹색, 즉 환경 문제를 풀어내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글들이 현재까지 한 번쯤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시조에서 시작하여 천도교의 법설을 거쳐 시나 유행가 등에서도 환경 문제를 찾아내 그것을 해석한다. 그 해석을 읽고 있으면 여태까지 내가 생각하지 못한 삶과 사회와 철학의 문제를 엿볼 수 있게 된다. 물론 이 해석이 전적으로 나와 맞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자의적인 해석이 아닌가 하는 부분도 분명 있다. 하지만 그 인식과 해석을 가장 작은 것까지 확장한 것은 정말 배운 바가 많다. 특히 무심코 지나간 수많은 문장과 책들을 하나씩 풀어내었을 때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에 나올 동양편과 서양편이 벌써 기대된다면 너무 심한 오버일까?

 

구성은 간단하다. 먼저 인용할 한국 고전이나 법설이나 시조 등을 전문 혹은 부분적으로 쓴다. 그리고 이 글을 쓴 사람에 대해 간략한 약력을 설명한다. 이어서 앞에 나온 인용문을 하나씩 생태학적으로 풀어낸다. 그런데 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과정이 상당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이어진다. 이 분야의 엄청난 내공이 없다면 결코 다룰 수 없는 것이다. 하나의 글이나 인용이 저자의 해석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흔히 깊이 파고들 때 경험하는 학문과 관심의 가지치기가 그대로 펼쳐진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흔한 말이 그대로 적용된다.

 

지구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 지구 생태 환경 문제를 해결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은 사람들의 편리와 자본주의 이익이란 거센 바람 앞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나 자신도 편리함에 매몰되어 있다. 선조들이 쓴 글에서 이를 잡아 죽이지 않고 놓아주는 장면을 읽을 때 공생이란 단어가, 새로운 짚신을 신고 다니면 조그만 생명도 밟아 죽이지 않으려고 했다고 말할 때는 피를 빠는 모기를 때려잡지 않으려는 스님들의 의지가 떠올랐다. 창세무가가 성경의 창세기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할 때 살짝 의문이 생기지만 벌레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하고 놀라게 된다.

 

최시형의 <향아설위> 해석을 읽으면서 제사를 이렇게 혁명적으로 해석할 수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제사를 받들고 위를 베푸는 것은 그 자손을 위하는 것이 본위”(216)라고 했을 때 우리가 제사 지낼 때 가지는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것을 생태와 환경으로 확대하면 우리는 자손을 전혀 위하지 않는 선조가 된다. 또 이 철학은 ‘지금 그리고 여기’로 풀어내는 현실주의적 사상이다. 천도교의 종교적인 색채를 걷어낸다고 해도 이 부분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생각거리를 저자는 곳곳에 풀어내었다. 읽으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생각하게 만든다. 실천까지 갈 길이 아직 많이 남았지만 조그만 발걸음 한 발은 내딛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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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역 살인사건 - 제34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2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레드박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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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 미스터리의 대가로 불리는 니시무라 쿄타로의 1980년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요 무대인 우에노 역을 지난 초여름에 다녀왔다. 정확하게 말하면 역앞에 있는 호텔에서 며칠 머물렀다. 현재 역의 풍경은 소설 속에 묘사한 장면과 다르지만 불과 몇 개월 전에 다녀왔다는 사실 때문인지 무척 반가웠다. 이런 우연을 바탕으로 여행객이 아닌 일본에 사는 사람들에게 우에노 역이 어떤 의미인지 듣는 것은 새로운 느낌이다. 수많은 전철노선과 국철 등이 통과하던 그 역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완전히 새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한다.

 

우에노 역은 도호쿠 아오모리 역으로 가는 기차의 출발역이자 종착역이다. 아오모리로 가는 사람에게는 출발역이지만 도쿄로 오는 사람에게는 종착역이다. 제목에 종착역이란 이름을 붙인 것도 소설 속 인물들이 도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가장 직접적으로 조사하면서 도쿄 역과 우에노 역의 차이를 설명하는 아오모리 현 출신 가메이 형사는 이 차이를 아주 잘 설명해준다. 아오모리 현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에서 7년을 산 7명의 친구들에게 이 역은 과거에 함께 약속했던 추억을 다시 되살리는 기회이자 공간이 된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시작한다. 하나는 가메이 형사가 고향 모교에서 선생하는 친구 모리시타의 부탁으로 하루 휴가를 내고, 친구와 함께 한 학생을 찾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7년 전 약속을 위해 미야모토가 우에노 출발 침대특급 유즈루 7호 탑승권을 산 후 친구들에게 연락해 함께 2박3일의 여행을 같이 하는 것이다. 어느 미스터리 소설처럼 이 둘은 전혀 관계없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후반부로 가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짐작할 수 있지만 어떤 관계를 맺는지는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모리시타의 부탁은 가족과 연락이 끊어진 제자를 찾아달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 드러나는 사실은 불편하고 어색한 부분이 많다. 가메이가 단서를 쫓아가는 도중에 미야모토 일행 중 여섯 명은 유즈루 7호를 타고 떠난다. 한 친구는 도착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역안 화장실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이 소설 속 첫 희생자다. 그는 통상성 공무원 야스다다. 기차는 밤의 어둠을 뚫고 달린다. 친구들은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푼다. 밤새 달리는 도중에 또 한 명의 친구가 기차에서 사라진다. 두 번째 희생자다. 그는 가와시마다. 나중에 미토 근처 강에서 그의 시체를 발견한다. 당연히 아오모리 경찰은 이들을 호텔에 격리한 후 조사한다. 그러다 또 한 명이 죽는다. 이번에는 여자인 마유미다. 유서도 있어 자살처럼 보이는 밀실살인이다. 누가 범인일까보다 어떤 원한이기에 이런 연쇄살인이 벌어질까 호기심이 생긴다.

 

사실 이 소설에서 트릭으로 내세운 철도 운행 시간표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약하다. 책끝 해설자의 말처럼 철도전문가라면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는 정보를 조금씩 흘려보내면서 이 미스터리를 좀처럼 풀지 못한다. 이런 와중에 또 다른 살인사건이 펼쳐진다. 두 명이 더 죽는다. 이 순간 당연하다는 듯이 두 사람의 공범이 떠오른다. 그런데 작가도 이 부분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이 공범이 아닐까 의심한다. 하지만 알리바이와 상황 등을 생각하면 공범이 될 수 없다. 분명 이 둘 중에 범인이 있는데도 말이다. 살인동기를 찾지 못한 상황에서 트릭은 더 큰 힘을 발휘한다. 형사들은 혼란에 빠진다.

 

일곱 명의 동창생이 살인자에게 한 명씩 죽어간다. 분명 이 중에 살인자가 있다. 알리바이는 견고하고 트릭은 쉽게 깨지지 않는다. 살인동기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형사들은 주변을 조사하고 단서를 하나씩 모으면서 알리바이와 트릭을 하나씩 깨트린다. 조직의 힘이다. 그 사이에 이 일곱 명의 동창생들의 삶을 간략하게 풀어낸다. 고향을 떠난 젊은이들이 타지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준다. 이들의 삶 속에 우에노 역에 대한 가메이 형사의 감상이 녹아있다. 모든 사실이 다 밝혀진 후 왜 이 소설의 제목이 <종착역 살인사건>이 되었는지 되새겨보게 된다. 비록 살인동기에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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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의 악마
모 헤이더 지음, 최필원 옮김 / 펄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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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맨> 이후 처음으로 번역된 작가의 소설이다. 이미 영미권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너무 적은 번역이다. 아마도 남경대학살을 소재로 하지 않았다면 번역되지 않았을 것 같다. 아닌가? 굉장히 자극적일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작가는 노골적인 묘사를 상당히 많이 생략했다. 어떻게 보면 기대치에 조금 못 미친다. 남경대학살의 풍경이 소설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곳의 생존자이자 그 시기를 경험한 스충밍과 그 학살의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영국 여자 그레이의 사실 집착이 더 강하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남경대학살은 역사적 진실이다. 하지만 일본은 거부하고 있다. 너무 잔혹한 이야기지만 그들은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어찌 남경대학살 뿐이겠는가. 종군위안부 문제도 역시 그들은 부인하고 있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도 역시 마찬가지다. 일제의 만행과 잔혹함 중 상당 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거나 묻힌 것들이 많다. 그 유명한 731부대도 그 실체가 완전히 벗겨지지 않고 있다. 나치의 대학살이 낱낱이 밝혀지고 진심으로 사죄한 것과 정말 대조된다. 이런 현실에서 이 작품이 나왔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것과 관계없이 상당히 의미 있다. 장르 속에 그 이야기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가 교차한다. 현재는 영국 학생 그레이가, 과거는 남경대학살 당시 남경에 살았고 지금은 동경에 거주하는 대학교수 스충민의 일기가 중심이다. 그레이는 아픈 기억이 있다. 이 기억과 남경대학살에 대한 사실 집착이 스충민을 찾아오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이 역사적 사실을 지우고 왜곡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한 일본에서 쉽게 자료를 받을 수 없다. 스충민은 거부하고 그레이는 계속 요청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돈이 바닥난다. 이때 한 남자가 그녀를 클럽으로 유혹한다. 자신이 바라는 정보를 확인하려는 욕망이 너무 강한 그녀는 동경에 머물고 클럽에서 돈을 번다. 이 체류 속에 무시무시한 사실이 숨겨져 있다.

 

대학살이 일어나기 전 스충민은 그곳을 떠날 기회가 있었다. 장개석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그는 그 기회를 놓친다. 역사를 알고 있는 지금 그 선택은 너무 미련해 보인다. 그 대가는 너무 무시무시하다. 일본군이 진격한 후 직접 스충민이 본 것은 사실 그렇게 직접적이고 충격적인 장면들이 아니다. 학살이 있지만 다른 곳에서 묘사된 수위를 생각하면 조금 부족하다. 하지만 그 시기에 생존을 위해 살았던 그가 경험했던 것들이 연쇄적인 상상으로 이어지면서 엄청난 장면을 연상하게 만든다. 특히 냄새에 대한 착각은 끔찍하다.

 

스충민은 남경대학상 필름에 대한 보답으로 그레이에게 뭔가를 받기 원한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것의 정체를 말하지 않는다. 그레이는 그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찾고자 한다. 이 상황을 만들게 된 것은 그녀가 일하는 클럽에 야쿠자 두목 후유키가 오면서부터다. 그는 가끔 이 클럽의 호스티스들을 자신의 집 파티에 초대한다. 이 초대가 뭔가를 훔칠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필름에 대한 집착으로 삶이 정체된 그녀에게 이것은 엄청난 유혹이자 기회다. 그렇지만 야쿠자 집의 보안이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여기에 오가와 간호사가 만들어내는 공포도 상당하다. 교수가 원하는 물건에 대해 떠도는 소문만으로 짐작하게 되지만 그 실체를 알지 못하니 훔칠 수가 없다. 독자의 상상력이 마구 발휘되는 순간이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과정에 긴장감은 점점 더 고조된다. 이 긴장감은 그레이와 스충민이 쫓기는 과정에 더 높아진다. 두 사람의 죽음이 예상되지 않지만 앞으로 밝혀질 사실이 줄 충격 때문이다.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두 부류가 등장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잔혹함에는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살의만 가득하다. 이 때문에 더 무섭다. 그리고 마주하는 진실은 조금 약했다. 더 심한 장면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스충민과 그레이의 집착과 상처가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상승해야 하는 고통과 아픔과 공포등이 순간 사라진 것이다. 그 동안 그들의 감정에 깊이 몰입하지 못한 모양이다.

 

작가는 무지를 말한다. 스충민도 그레이도 무지했다. 그들이 겪은 고통은 무지에서 비롯했다. 이 무지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일까? 이것은 다시 일본의 역사 왜곡으로 이어진다. 일본 사람들은 왜곡되고 감춰진 역사에 무지하다. 그들이 저지른 만행에 무지하다. 그럼 용서받을 수 있을까. 무지와 실수를 연결한 대목을 읽을 때 그 무지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알려고 노력했는지도. 소설 속 화자 두 사람은 그 무지로 인해 충분히 고통받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현재 일본은 어떤 노력을 했는가? 그들이 거부한 잔혹한 역사의 진실은 몰랐다는 말로 결코 덮을 수 없는 것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완전히 치료받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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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 짓는 여인
엄정진 지음 / 북퀘스트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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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sf단편집은 오랜만이다. 한 작가의 단편집은 더 오래되었다. sf 불모지 한국에서 단편집이 나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나왔다. 한 명의 sf팬으로서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또 큰 기대로 이어졌다. 이 기대가 해외 걸작으로 단련된 과거를 생각하면 아주 과도한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기대하게 된다. 몇 년 전 아주 재미있게 읽은 한국 sf단편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 그 후 정체된 느낌이 강하지만.

 

모두 일곱 편이다. 솔직히 이 중에서 관심을 끄는 작품은 둘이다. <악마와의 거래>와 <소설을 쓰는 사람들에 대한>이란 작품들이다. <악마와의 거래>가 재미있었던 것은 악마와의 계약을 아주 꼼꼼하면서도 반전을 노린 설정으로 풀어내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소원과 마지막 소원을 이용해 악마가 영혼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려는 한 남자의 노력이 코믹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악마와의 계약에서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데 성공한 수많은 사람들의 결과를 악마의 계약서에 포함하여 다룬 것도 아주 흥미로웠다.

 

<소설을 쓰는 사람들에 대한>은 알까기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A가 B에 대한 소설을 쓰고, B는 C에 대한 소설을 쓴다. 이렇게 물린 사람들의 절박함을 다루는데 이 단편이 흥미로웠던 것은 이런 구성이 아니다. 각각의 다른 장르를 쓰는 작가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문학, 추리, sf, 무협, 로맨스 등. 각 장르별 문제점이 같이 다루어지는데 공감대가 많이 형성된다. 물론 전혀 읽지 않는 장르도 있다. 중반 이후 이야기가 너무 순환 고리에 집중하면서 어디에서 본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인생의 꿀맛>은 몇 번의 타임루프 속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간략하게 다룬다. 형식과 소재는 특별한 것이 없지만 상황이 재미있다. <네거티브 퀄리아>는 무한 긍정이 세상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 아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서 힘이 부족해서 재미가 조금 떨어진다. <거울 속에 사는 법>은 기존 판타지, sf를 재구성한 것 같다. <고르바초프>는 황당하지만 재미있는 설정이다. 하지만 갑자기 중단된 느낌이 든다.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데도 그냥 멈춰 섰다. 개인적으로 중편 이상이 되었으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다.

 

표제작 <고치 짓는 여인>은 남자의 욕망과 여자의 순수함이 충돌한다. 단편이지만 그 속에 담긴 남성들의 우월함에 대한 착각과 처녀성에 대한 집착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고치와 처녀성을 연관시켜 풀어낸 이야기가 역설을 노린 것이 아니라면 굉장히 남성우월적인 이야기다. 보통 남자들이 흔히 갖게 되는 환상과 허상이 곳곳에 드러난다. 여자의 사랑과 아픔을 남성의 시각으로 풀어내었다고 하지만 그 시각에 그대로 안주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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