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 짓는 여인
엄정진 지음 / 북퀘스트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한국 sf단편집은 오랜만이다. 한 작가의 단편집은 더 오래되었다. sf 불모지 한국에서 단편집이 나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나왔다. 한 명의 sf팬으로서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또 큰 기대로 이어졌다. 이 기대가 해외 걸작으로 단련된 과거를 생각하면 아주 과도한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기대하게 된다. 몇 년 전 아주 재미있게 읽은 한국 sf단편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 그 후 정체된 느낌이 강하지만.

 

모두 일곱 편이다. 솔직히 이 중에서 관심을 끄는 작품은 둘이다. <악마와의 거래>와 <소설을 쓰는 사람들에 대한>이란 작품들이다. <악마와의 거래>가 재미있었던 것은 악마와의 계약을 아주 꼼꼼하면서도 반전을 노린 설정으로 풀어내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소원과 마지막 소원을 이용해 악마가 영혼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려는 한 남자의 노력이 코믹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악마와의 계약에서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데 성공한 수많은 사람들의 결과를 악마의 계약서에 포함하여 다룬 것도 아주 흥미로웠다.

 

<소설을 쓰는 사람들에 대한>은 알까기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A가 B에 대한 소설을 쓰고, B는 C에 대한 소설을 쓴다. 이렇게 물린 사람들의 절박함을 다루는데 이 단편이 흥미로웠던 것은 이런 구성이 아니다. 각각의 다른 장르를 쓰는 작가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문학, 추리, sf, 무협, 로맨스 등. 각 장르별 문제점이 같이 다루어지는데 공감대가 많이 형성된다. 물론 전혀 읽지 않는 장르도 있다. 중반 이후 이야기가 너무 순환 고리에 집중하면서 어디에서 본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인생의 꿀맛>은 몇 번의 타임루프 속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간략하게 다룬다. 형식과 소재는 특별한 것이 없지만 상황이 재미있다. <네거티브 퀄리아>는 무한 긍정이 세상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 아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서 힘이 부족해서 재미가 조금 떨어진다. <거울 속에 사는 법>은 기존 판타지, sf를 재구성한 것 같다. <고르바초프>는 황당하지만 재미있는 설정이다. 하지만 갑자기 중단된 느낌이 든다.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데도 그냥 멈춰 섰다. 개인적으로 중편 이상이 되었으면 더 재미있었을 것 같다.

 

표제작 <고치 짓는 여인>은 남자의 욕망과 여자의 순수함이 충돌한다. 단편이지만 그 속에 담긴 남성들의 우월함에 대한 착각과 처녀성에 대한 집착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고치와 처녀성을 연관시켜 풀어낸 이야기가 역설을 노린 것이 아니라면 굉장히 남성우월적인 이야기다. 보통 남자들이 흔히 갖게 되는 환상과 허상이 곳곳에 드러난다. 여자의 사랑과 아픔을 남성의 시각으로 풀어내었다고 하지만 그 시각에 그대로 안주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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