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의 비밀 - 아시아 베스트 컬렉션 아시아 문학선 15
바오 닌 외 지음, 구수정 외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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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대역 문예 계간지 <아시아>에 실린 단편 중 열두 편을 선정해서 한 권으로 묶었다. 열두 편이면 열두 나라일 것이란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런데 실제는 아홉 나라다. 가장 많은 나라는 베트남이다. 조금 의외다. 세 편이나 실렸다니. 이것이 또 아쉬움이기도 하다. 동남아의 많은 나라들 작품이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필리핀, 태국, 싱가포르의 단편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은 아주 반가웠다. 쉽게 만날 수 있는 나라의 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편집은 간단하지만 충실하다. 먼저 작가에 대한 소개를 하고, 그 밑에 번역자의 정보를 넣는다. 그리고 각 단편이 원래 어떤 언어로 쓰여져 있었는지 알려준다. 영역한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작품도 있다. 이런 정보는 외국 문학을 읽을 때 항상 궁금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워낙 한국 번역에서 중역이 많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전보다 일본어 번역본을 재번역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중역하면서 생긴 오류나 어투의 차이 등은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기 때문이다.

 

목차를 보면서 낯익은 작가는 딱 두 명이었다. 한 명은 바오 닌이고, 다른 한 명은 야샤르 케말이다. 케말의 작품은 읽은 적이 있지만 바오 닌은 처음이다. 이전에 바오 닌의 대표작인 <전쟁의 슬픔>에 대한 극찬을 읽고 책을 사 놓았던 기억이 난다. 몇 년을 묵혀 두었는데 단편으로 먼저 만났다. 그 작품은 바로 표제작 <물결의 비밀>이다. 아주 짧은 단편인데 반전과 강한 여운을 남겨주었다. 마지막을 읽으면서 다시 앞장을 펼치고 앞에서 놓친 것을 찾았을 때 그 여운은 정말 멋있었다. 케말의 <하얀 바지>는 이전에 읽은 작품과 다른 분위기였다. 한 소년의 열망이 현실 앞에서 무너지는 과정이 그려지는데 안타깝고 아쉬웠다.

 

처음 읽은 필리핀 작가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의 <불 위를 걷다>는 깔끔한 전개에 비해 이야기는 조금 으스스하다. 필리핀의 거대한 빈부 격차와 시대의 아픔이 그 나라 역사에 무지한 나도 공감하게 된다. <꽃피는 계절>은 대만 작가 리앙의 작품이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얻기 위해 가는 과정에서 한 소녀가 멋대로 상상하는 내용이 섬뜩하면서도 유쾌하다. 그 시절 대만에서는 어떤 사건이 있었기에 이런 상상을 한 것인 궁금하다. 아니면 무슨 책이나 영화를 보았는지. 베트남 남 까오의 <지 패오>는 한국 근대의 일상 중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 패오의 행동에 공감할 수 없지만 그 상황들은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처음 읽은 태국 찻 껍찟띠의 <발로 하는 얼굴마사지>는 다 읽고 난 후 현재 한국의 정치인들이 떠올랐다. 혹시 그들이 태국에 단체로 마사지를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중국 츠쯔젠의 <돼지기름 한 항아리>는 예상하지 못한 전개와 마무리였다. 남편이 있는 곳으로 아이 셋을 데리고 가는 과정도 재미있었다. 투박한 이야기 전개는 또 다른 매력이다. 베트남 레 민 쿠에의 <골목 풍경>은 해학적이지만 그 이면에 깔린 의도는 씁쓸한 현실이다. 인도 마하스웨타 데비의 <곡쟁이>는 인도 하층민의 삶과 상층민들의 거대한 허세를 잘 그려낸 작품이다. 하층민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세밀하게 그려내지 않는 것은 일상이기에 표현할 필요가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다 가쓰에의 <모래는 모래가 아니고>는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해서 한 개인의 기억을 다룬다. 잊고자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을 긍정하는 마지막은 평범하지만 좋다. 인도 사다트 하산 만토의 <모젤>은 사랑에 빠진 남자 이야기다. 자신의 종교가 걸림돌이 되지만 모젤은 쉬운 여자가 아니다. 역사적 사건의 한 장면을 삽입한 마지막 장면은 의외다. 싱가포르 고팔 바라담이 쓴 <궁극적 상품>은 읽으면서 싱가포르의 정치적 현실을 풍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몇 가지 설정들이 강한 독재국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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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서 온 아이
에오윈 아이비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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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알래스카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이 소설을 이끌어 가는 두 인물, 메이블과 잭이 번갈아 가면서 등장한다. 이 둘은 부부고, 메이블이 낳은 아기가 바로 죽은 후 더 이상 아이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나이가 들고,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메이블은 주변 사람들의 쑥덕거림 속에서 살아야 했다. 쉽지 않은 삶이다. 견디기 힘들어 선택한 곳이 알래스카다. 둘 만이 살 수 있는 더 넓은 대지에 농장을 개척할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 온 곳이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도피다. 하지만 차가운 대지인 알래스카는 쉬운 곳이 아니다. 더 이상 젊지 않은 잭에게는 더욱 힘들다. 부부 사이는 하루하루 힘겨움만 존재한다. 이런 그들에게 변화가 오는 것은 눈으로 한 소녀를 만든 다음부터다.

 

러시아의 ‘눈 소녀’ 이야기를 바탕으로 대자연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눈 소녀는 잭과 메이블이 눈사람을 만든 후 나타났다. 메이블 둘러 준 옷 등을 입고. 처음에 이 소녀가 등장했을 때 둘은 환상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이 소녀 파이나를 만난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는 그들이 이 소녀를 환상으로 생각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들의 반응은 당연하다. 그 추운 알래스카의 겨울에 소녀 혼자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이나는 실재했다. 비록 현실과 환상 사이에 살아가는 그녀지만.

 

개척민이 되어 농지를 개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이가 있기에 더욱 그렇다. 이런 그들에게 이웃이 생긴다. 조지와 에스더 가족이다. 메이블은 홀로 살기를 원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긴 알래스카의 겨울을 보내기 위한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아 어쩌면 탄광에서 일해야 할지 모른다. 이런 그들에게 겨울을 날 방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조지다. 사냥으로 잡은 무스 고기로 긴 겨울을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잭은 사냥에 서툴다. 이런 그에게 행운이 다가온 것은 파이나를 만난 다음이다. 파이나를 좇다가 거대한 무스를 잡은 것이다. 이 일은 조지의 아들 개렛으로 하여금 잭을 존경하게 만든다.

 

척박한 대지에서 홀로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메이블과 잭의 처음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조지가 찾아와 서로 돕자고 했을 때, 조지의 아내 에스더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이 부부 사이에 얼어 있던 감정이 녹아내린다. 그리고 눈에서 온 아이 파이나가 등장하면서 자신들이 잊고 있던 감정들을 되살린다. 이후 메이블 부부는 에스더 가족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는다. 잭이 곰에게 놀란 말에 끌려다니는 큰 상처를 입었을 때도 이 부부가 없었다면 죽거나 옛집으로 돌아갔어야 했을 것이다. 외롭고 힘든 곳일수록 공동체가 왜 필요한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에스더 가족이 보여준 행동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공동체의 참모습을 떠올려주었다.

 

판타지 소설이 아니다. 현실의 무거움을 바탕으로 힘들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다. 하지만 파이나의 존재는 현실을 뛰어넘는다. 메이블은 자신이 읽은 동화의 기억으로 파이나를 눈 소녀로 생각하고, 잭은 파이나의 아빠를 묻어준 것 때문에 자연 속에 힘들게 살아가는 소녀로 생각한다. 이 차이는 둘의 충돌을 불러오기도 한다. 서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나중에 서로 이 사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메이블의 행동이 바뀐다. 눈 소녀를 버려진 소녀로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방식으로 파이나를 키우려고 한다. 소녀는 거부한다. 늘 그렇듯이 파이나는 겨울이 끝나면 사라졌다가 첫눈과 함께 돌아온다.

 

눈에서 온 소녀 파이나의 성장은 현실적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녀가 홀로 그 긴 겨울을 보냈는지는 명확한 답이 없다. 그녀가 사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추운 한 겨울을 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대비되는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 메이블 부부다.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힘든 일을 반복한다. 충분한 수확이 없으면 사냥으로 고기를 비축해야 한다. 외롭고 긴 겨울을 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현실적인 묘사가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고되고 힘든 삶의 모습이다. 하지만 ‘눈이 와’란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난 후에는 강한 울림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들이 겪은 힘들고 고되었던 일들은 뒤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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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시
윤동주 외 지음 / 북카라반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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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49인의 시인이 쓴 70편의 시가 실려 있다. 대부분의 시인이 낯설지 않지만 낯선 시인도 몇 명 보인다. 시집 한 권을 제대로 읽지 않은 낯익은 시인의 시도 있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 약간의 노력만 들였던 시기가 있다 보니 시인들의 이름은 꽤 많이 안다. 그리고 한때 좋아했고 감탄했던 시인의 이름도 보인다. 왜 그의 시가 이 책에 실렸을까 하는 의문이 살짝 들지만.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이런 기획 시집을 읽는다. 주마간산처럼 지나갈 때가 대부분이지만 울컥 가슴에 와 닿는 경우도 적지 않다.

 

70편의 시 중에서 이미 읽었던 시도 적지 않다. 시집 속 한 편으로 만난 시도 있고, 다른 매체를 통해 읽은 시도 있다. 사놓고 묵혀둔 채 펼치지도 못한 시집 속 시도 몇 편 보인다. 다시 읽은 시의 경우 새롭게 그 의미가 다가오면 괜히 반갑고 즐겁다. 시를 읽었지만 희미한 기억 속에 있거나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시의 경우는 아쉽고 더 자주 시집을 펼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차이가 단순히 시의 선호도 문제는 아니다. 한 편은 얼마 전에 읽은 시고, 다른 한 편은 십수 년은 지났기 때문이다.

 

다섯 부분으로 나눠 시를 담았다.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 그대 눈동자 속에 새겨진 별의 궤도,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꽃처럼 웃을 날 있겠지요 등이다. 이 구분도 시적인 부분이 있다. 처음 몇 편의 시를 읽었을 때는 이 시집이 한쪽에 실리는 시만 실렸다는 섣부른 판단을 했다. 하지만 더 많은 시를 읽어가면서 더 긴 시를 마주하게 되었다.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시라는 제목을 사랑으로 이해하고 절절한 현실을 노래한 시를 만났을 때 ‘왜 이 시가 실렸지?’하는 의문을 품기도 했다. 삶에는 사랑과 이별과 그리움과 기다림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데 말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다시 목차를 한 번 훑고 짧은 시 한 편을 읽는다. 교과서에서 만난 낯익은 이름보다 낯선 시인의 시에 더 눈길이 간다. 이정록의 <머리맡에 대하여>는 바뀐 형식 때문에 잠시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마지막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고 진한 여운을 준다. 김소월의 <꿈길>은 입속으로 시를 읊조리며 그 이미지를 떠올려본다. 예전에는 이런 시가 어렵고 재미없었는데 지금은 재밌다. 강은교의 <물길의 소리>는 시인의 시선으로 물소리를 풀어내었다. 흔히 말하는 물소리가 물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고 할 때 함께함을 잊고 있던 내가 떠올랐다. 기형도의 <엄마 걱정>은 시장 간 엄마를 기다리며 가슴 졸이고 무서워하던 소년의 이미지가 눈에 들어온다.

 

삶은 시인의 눈을 통해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문정희의 <남편>은 흔히 하는 말로 시작하여 가장 평범한 일상을 보여준다. 남자들의 경우라면 <아내>로 바꿔도 되지 않을까? 고정희의 <지울 수 없는 얼굴>은 사랑에 빠진 감정을 아주 잘 표현했다. 공감한다. 이렇게 저렇게 뒤적이다 보면 그 당시 스쳐지나갔던 혹은 강한 인상으로 남았던 시들이 가슴에 와 닿는다. 순서대로 읽을 때 몰랐던 재미가 항상 이때 나타난다. 그래서 시선집 등에 빠지는 모양이다. 물론 한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그 시집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즐거움도 무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초보에게 그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왠지 책읽기 싫고 집중력이 깨졌을 때 이 시집을 펼치고 몇 편 가볍게 읽으면 색다른 즐거움을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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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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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간단한 소개글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올린 인물이 있다. 덱스터다. 자신이 사이코패스이지만 사이코패스급 악당만 죽이는 반영웅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덱스터를 읽으면서 주인공에게 쉽게 공감하는 것은 역시 그가 죽이는 인물들이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 소설 속에서 죽는 인물들은 어떨까? 과연 죽여 마땅한 사람들일까? 아니다.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가장 중요한 인물인 릴리에게는 그럴지 모르지만 보통 사람들이 봤을 때는 그냥 나쁜 년과 놈일 뿐이다. 법의 관점으로 본다면 가장 죽여 마땅한 사람은 당연히 릴리다.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두 명의 인물이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1부는 테드와 릴리, 2부는 릴리와 미란다, 3부는 킴볼과 릴리다. 이 네 사람은 모두 이어져 있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테드는 미란다의 남편이고, 미란다는 릴리의 동창이다. 킴볼은 형사로 살인사건을 수사한다. 이 인물들이 이어지면서 화자로 등장하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기 위한 설정이다. 테드가 공항 바에서 릴리를 만나 아내의 부정을 이야기할 때만 해도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열차 안의 낯선 사람들>이 떠올랐다. 1부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특히. 비록 릴리의 살인이 강한 인상을 준다고 해도 말이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구성이다. 아내의 부정을 본 남편이 새로운 여자와 함께 아내와 그 내연남을 죽이려고 하다가 먼저 죽고, 새로운 여자가 그 둘을 죽인다는 설정이다. 단순화시켜 놓고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작가는 각 부에 두 명의 화자를 등장시켜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차분하게 그려낸다. 여기에 긴장감을 불어넣어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형사 킴볼이다. 하지만 악녀들의 알리바이는 단단하다. 허점을 찾는다고 해도 바로 드러나지 않고, 기소하는 것도 쉽지 않다. 물론 살인자가 스스로 자백한다면 조금 다르겠지만 그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2부의 시작은 1부에서 테드와 릴리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장면이다. 테드의 아내 정체도 밝혀진다. 1부에서 테드가 현실의 시간을 말한다면 릴리는 자신의 과거사를 설명한다. 2부에서는 릴리가 현재를 말한다. 이 이야기를 듣는다 해도 그녀가 1부에서 제안한 것이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 아니다. 릴리와 미란다의 악연이 나온다고 해도. 릴리가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이면은 그녀 자신이 사이코패스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그녀가 펼친 두 번의 살인만 보아도 과연 그것이 죽일만한 일인지 의문이다. 그녀의 대담함과 놀라운 실행력은 충분히 독자의 시선을 끈다.

 

1부 마지막에서 한 번 허를 찔렸다면 3부 마지막 편지는 작가의 의도와 함께 또 다른 가능성이 나에게는 열린 채 다가왔다. 작가가 이성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지는 장치이기도 하다. 마지막 문장으로 분위기를 완전히 돌려놓았다고 해야 하나. 가끔 이런 엔딩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또 다른 가능성을 찾는다. 강한 여운을 남긴다는 의미다.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도 좋고, 심리 묘사도 탁월하여 속도감 있게 읽히는데 반전까지 펼쳐지니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자신이 릴리의 심리와 행동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해도. 한 가지 억지로 찾는다면 킴볼의 육감과 우연이 너무 상황을 딱 맞아떨어지게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장치로 작동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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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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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에쿠니 가오리 소설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다. 완전히 나의 취향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아닌데도 말이다. 예전에 소설을 추천해달라고 해서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 몇 편을 소개한 적이 있다. 물론 여자다. 재미있어 했다. 솔직히 나는 그냥 그랬는데. 최근에 읽은 몇 작품은 재미있었다. 이 기억이 계속 읽게 만든다. 이번 작품도 읽으면서 크게 공감을 하지는 못했다. 이성은 세 자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게 만들지만 감성은 아직 남자와 과거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속으로는 어쩌면 한국과 일본의 문화 차이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지만 이것도 남자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첫째 아사코, 둘째 하루코, 막내 이쿠코, 세 자매의 삶을 다룬다. 이 세 자매 누구에게도 나의 감성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 특이한 자매라는 생각이 먼저다. 유일하게 결혼한 아사코가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면서 그와 자신을 변명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 분노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매맞는 아내의 내면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이성적 판단이 따라왔다. 중간에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여자를 데리고 집을 나가는 모습을 보여줄 때만 해도 변화가 일어나겠구나 했는데 다시 돌아가면서 놀라게 만들었다. 물론 이때부터 그녀 내면에 큰 변화가 생기긴 했다. 하지만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남편 구니카즈의 심리 묘사다. 그렇게 많은 분량을 차지 않지만 가해자의 내면을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하는 놀라움을 주었다.

 

하루코. 학구적인 여자다. 유명 외국계 회사에서 고액 연봉을 받는다. 자신의 일을 잘 처리하는 직장 여성이다. 구마키라는 무명 작가와 동거한다. 구마키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몸은 다른 남자의 좋은 몸을 참지 못한다. 단순한 섹스일 뿐이다. 이것은 그녀만의 생각이다. 구마키가 한 통의 편지와 이메일을 통해 이것을 알았을 때 보인 반응은 정상적이지만 그녀의 대응은 그녀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구마키가 한 두 번의 프로포즈를 거절한 그녀의 삶은 어디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즐기는 것이다. 비록 구마키와의 동거가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었다고 해도. 내 주변에 이런 여자가 없어서 그런지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문득 이것을 남자에게 대입해본다.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다. 최소한 한국에서는.

 

가장 특이하게 다가온 자매는 이쿠코다. 남자와 쉽게 자는 그녀가 꿈꾸는 삶이 현모양처라는 것이 의외였다. 매일 밤 사색적인 일기는 쓰는 것도. 여자 친구의 애인과 섹스를 하고, 이것이 들키자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이 너무 낯설다. 단 한 번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가지만 반복적이다. 자신을 서부영화에 나오는 창부에 비교하는 모습은 왠지 씁쓸하다. 하지만 순진한 한 남자를 만나 ‘단계’를 밟아가는 모습은 귀엽다. 그 남자는 초식남이 연상된다. 많은 남자와 몸을 섞지만 제대로 된 연애를 한 적이 없다 보니 그녀의 삶은 늘 외로웠다. 물론 언니와 부모로 그 외로움을 가리고 있다. 혼자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우던 그녀에게 변화가 시작되었다.

 

세 자매가 같이 자랐다고 하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삶의 방식이나 생각들은 한국의 자매들에게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자주 보게 되는 도덕과 윤리에 대한 지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아사코의 폭력 부분은 다르다. 하루코가 강하게 사건에 개입하려고 했을 때 남자친구 구마키가 보여준 반응은 또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곳곳에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장면을 넣는다. 이 의외의 모습들은 경쾌하고 간결한 문장과 더불어 가독성을 높인다. 구마키가 몬스터라고 외칠 정도의 자매들이지만 그녀들은 자신의 삶을 즐기고 있다. 감성과 도덕성으로 읽는다면 ‘뭐 이런 여자들’이란 단어를 사용하겠지만 이성은 이런 삶도 있구나, 하고 긍정한다. 각자의 경험에 따라 이 세 자매의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를 것 같다. 그리고 이 세 자매를 이렇게 키운 부모에게 눈길이 간다. 비록 남편의 외도로 이혼했지만 나름 멋진 가훈을 잘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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