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 모르는 엔딩 사계절 1318 문고 116
최영희 지음 / 사계절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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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편의 sf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이 다섯 편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중고등학생이다. 작가는 외계인을 끌고 와 이 시대의 중고딩들의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sf소설이란 형식으로 풀어낸 이야기들은 정밀한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는다.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기술과 이름을 사용한다. 예전에 어른들이 황당무계한 이야기라고 불렀던 바로 그 방식이다. 실제 책을 읽다 보면 그 황당무계함에 놀란다. 요즘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가 하고. 하지만 이 황당함은 현실의 황당함과 이어지면서 현실성을 가진다. 재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생긴다.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는 그 유명한 중2병을 소재로 한다. 미국 동부 명문대 탐방 패키지를 간 부모들이 내뱉은 한탄을 외계인이 듣고 오해한 것에서 시작한다. ‘핏발 선 눈, 유니폼, 힘없는 걸음걸이, 공격성, 심한 감정 기복, 자기중심적’이란 키워드로 중딩을 잡으려고 한다. 우기영은 좋아하던 여자애를 친구에서 선수를 당해 의기소침한 상태로 학교를 땡땡이 친다. 이런 그를 혼내는 노인이 있다. 외계인은 당연히 이 노인을 중2병으로 생각한다. 이 노인을 도와주려는 기영은 키워드와 맞지 않다. 이런 오해와 착각 속에서 해프닝은 이어진다. 그리고 작은 반전이 있다. 읽으면서 그 옛날 방위병들의 도시락을 둘러싼 농당이 생각났다.

 

<최후의 임설미>는 제목만 보고 다중우주를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다중우주는 소재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슬리퍼다. 그것도 그 유명한 삼선 슬리퍼다. 이 슬리퍼가 중요한 것 이 삼선이 외계인 츠바인의 언어구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설미는 이 삼선 슬리퍼를 신지 않는다. 이 신발을 신기려는 학생과 이것을 막으려는 선생과 차해린이 있다. 물론 차해린은 자신도 모르게 이 대결에 끼어들었다. 학생부장의 부탁을 받고, 임설미를 관찰하고, 이 거대한 음모를 막는 일에 나선다. 역시 황당무계하다. 하지만 이 기발한 상상력은 우리사회의 획일화를 돌아보게 한다.

 

표제작 <너만 모르는 엔딩>은 소설 속에서 다중우주론을 말한다. 나의 선택과 가능성의 분기점을 통해 미래를 결정지을 수 있다는 설정이다. 호재가 보험처럼 미래를 설계하던 중 절대 원하지 않았던 여자 친구 이민아의 존재가 부각된다. 이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은 예상하지 못한 감정들을 보여준다. 인생에서 절대란 함부로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다. 재밌는 것은 외계인이 길거리 기독교 선교에 빠져 예수를 믿는 것이다. 현실의 종교를 비판하면서도 그 믿음은 더 굳건해진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외계인이란 점도 재밌다. 선택의 실패를 굳은 의지로 바로 잡을 수 있을까? 예측불가능한 성격의 이민아를 둘러싼 예측불가능한 호재의 미래가 재밌다.

 

<그날의 인간 병기>는 판타지 등에서 많이 쓴 방식이다. 어느 날 나에게 힘이 생긴다면 이란 설정이다. sf에서는 초능력보다 특수 전투복이다. 크롬소프트가 발명한 특수 전투복 T-998을 입고 경수는 이런 저런 일을 벌인다. 하지만 고딩 경수가 이 알바에 참여하게 된 데는 희대 일당의 괴롭힘이 큰 작용을 했다. 역시 황당한 설정과 전개로 이어지는데 이 속에는 현재 집단 괴롭힘이나 학교 폭력 등이 담겨 있다. 현실의 무거움을 깨트리는데 SF를 빌려와 풀어낸 점이 조금 씁쓸하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을 단숨에 깰 방법이 없다. 경수가 이 전투복을 입기까지 어른들이 보여주는 실수들이 현실과 연결된다.

 

<알파에게 가는 길>은 1회 한낙원과학소설상을 받은 <안녕, 베타>와 짝을 이루는 소설이라고 한다. 이 사실을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한번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대체 인간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로봇이 인간처럼 활동하는 미래를 그려내었다. 알파는 원래 모델이 되는 인간이고, 베타는 인간을 모델로 만들어진 대체 인간이다. 대체 인간 사냥꾼을 피해 대체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가기 전 이야기를 다루는데 인간과 기억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이 단편집에서 가장 무겁다. 앞의 작품들이 중고등학생을 등장시켜 황당무계하지만 현실을 다룬 것과 다른 전개다. 이 작가의 작품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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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홀릭 1 - 내가 제일 좋아하는것은 몬스터
에밀 페리스 지음, 최지원 옮김 / 사일런스북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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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책을 넘겨볼 때 그림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읽어나가면서 한 컷 한 컷을 보며 감탄했다. 일반적인 그래픽노블을 생각하고 접근했기 때문이다. 매끈하고 잘 정돈된 그림에 익숙하다보니 처음 약간 거부감이 들었다. 이 거부감을 지나면 생각보다 많은 글자들에 또 한 번 놀란다. 예상한 시간보다 읽는데 더 걸렸다. 그래도 이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아니 즐거웠다. 다만 몇몇 이야기를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한 번 더 뒤적이면서 놓친 부분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1968년 몬스터를 좋아하는 캐런 윗집의 앙카 실버버그가 죽었다. 밀실로 처리되어 자살로 결정났지만 몇 가지 의혹이 있다. 이것을 조사하는 탐정 역할을 캐런이 한다. 이 조사 과정에는 한 소녀의 삶과 가족과 역사가 뒤섞여 있다. 작가는 나중에 앙카의 삶을 액자구성으로 만들었다. 어떻게 엄마가 매춘부가 되었고, 자신도 매춘부로 팔렸는지. 어떤 일이 있어서 그곳을 떠났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는지. 유대인이란 이유로 홀로코스트의 대상이 되었다가 한 독일 거부의 도움을 풀려난다. 1차 대전 이후 독일의 모습과 2차 대전 전까지 다루면서 빠르게 바뀌는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이 어떤 일을 겪는지 잘 보여준다. 역사와 개인의 비극이 같이 나아가는데 이것은 다시 캐런의 삶과 이어진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유명한 암살 사건이 둘 있다. 하나는 JFK이고, 다른 하나는 마틴 루터 킹 목사다. 이 책에서는 킹 목사가 죽는다. 작가는 이 사건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JFK가 암살당했을 때는 엄마가 술에 취했고, 킹 목사가 암살되었을 때는 오빠가 취한다. 어린 소년 캐런에게는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하지 않다. 단지 이 시대의 아픔과 비극을 관찰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하지만 이 기억들은 성장했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시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이 그래픽노블은 그 결과물이다.

 

몬스터를 가장 좋아하는 소녀가 평소에 하는 것은 몬스터 잡지를 그리는 것이다. 이 책에는 상당히 많은 손으로 그린 몬스터 잡지들 표지가 나온다. 내 눈에 익숙한 모습인데 아마 이 시대 영화 표지를 많이 봤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그 섬세한 디테일이다. 이 그래픽노블 전체적으로 디테일이 살아 있다. 아는 것이 많고, 더 들여다보면 볼수록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수많은 활자와 더불어 나의 독서 시간을 늘인 것도 바로 이 그림들이다. 몬스터 잡지를 먼저 말했지만 사람들 얼굴과 표정, 거리의 풍경 등도 결코 그냥 보고 지나갈 수 없다. 어디까지 시대의 재현인지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많다.

 

몬스터홀릭 캐런의 이미지를 늑대소녀에서 빌려와 계속 표현했다. 실제 모습이 나오는 장면을 몇 번 되지 않는다. 그녀가 몬스터가 되고 싶은 것은 언데드의 특성 때문이다. 엄마가 암에 걸렸을 때는 이것이 더 절실해진다. 현실은 이 희망을 짓밟는다. 그리고 매력적인 오빠 디즈가 있다. 혼혈이지만 그의 매력에 빠진 여자들이 줄을 잇는다. 캐런 다음으로 출연 빈도가 높은 인물이 바로 오빠다. 그의 행동에는 섹스가 들어있다. 자신도 절제를 할 줄 모르지만 여자들도 그를 너무 유혹한다. 그의 무분별한 욕구 분출은 휘험도를 점점 높여간다.

 

앙카를 죽였을 가능성 있는 인물들 목록에 엄마와 오빠도 있다. 이 미스터리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는다. 아니면 내가 놓쳤다. 그녀의 학교생활은 아웃사이드다. 함께 몬스터 영화를 보던 친구는 엄마의 등살에 멀어질 수밖에 없다. 새롭게 사귄 친구들도 하층민의 삶을 대변한다. 엄마를 힐빌리라고 부르는데 얼마 전에 읽은 책 때문에 이 단어의 의미를 안다. 현재의 삶과 문제들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이야기는 과거로 올라가 현재와 연결시킨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 오빠가 있지만 역시 나의 낮은 이해도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의 서평이나 다시 들춰보면서 그 단서를 찾아야 할 것 같다. 6년에 걸친 작업이라고 하는데 읽고 난 후 공감했다. 노트 속 펜으로 그린 그림체는 어디까지 연출인지 모르지만 감탄을 자아낸다. 한국 인쇄와 한진해운 사태를 겪었다는 것에 왠지 더 정감이 간다. 한마디로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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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도
박완서 외 지음 / 책읽는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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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명의 작가가 쓴 인도 여행 에세이다. 각각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을 여행한 후 쓴 글들을 편집한 책이다. 아홉 편의 에세이가 책 마지막에 출처가 나온 것을 보면 다른 글들은 이번에 쓴 것 같은데 정확하지 않다. 11명의 작가 중 대중적으로 유명한 사람은 몇 명되지 않는다. 고 박완서, 고 법정, 신경림, 강석경, 이해인 수녀 등을 제외하면 한두 번 이름을 들은 정도다. 물론 이것은 나의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이 떨어진 최근의 지식 때문이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인에 대한 정보 부족이다. 시집을 거의 읽지 않으니 오며가며 이름을 본 시인을 제외하면 모두 낯설다.

 

각각의 작가들이 자신의 여행 경험을 다루고 있는데 인지도와 책의 재미는 별개다. 짧은 에피소드가 담긴 박완서의 <잃어버린 여행 가방>은 분량도 적고 이야기가 진행되다 만 듯한 느낌이다. 짧은 경험담은 좋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인도라는 지역의 여행과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해인 수녀의 <소중한 만남>은 故 마더 테레사와의 만남을 보여준다. 우리가 인도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이미지 혹은 키워드 중 하나였던 분이다. 다른 위치에서 인도를 본다는 것은 우리가 그 나라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분을 아는 사람에게는 짧은 추억을 전달해주는 시간이었다.

 

인도 여행이 한때는 로망이었다. 하지만 실제 여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로망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긴 시간을 빼서 여행한다면 김선우의 말처럼 ‘어딘가 아파지는 일’을 겪은 후 즐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현실적으로 뺄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 내외다. 넘쳐나는 삐끼와 혼란과 비위생적인 상황은 긴장감을 계속 유지하게 만든다. 여행을 ‘고행’으로 만들 이유가 내겐 아직 없다. 이 작가들 중 인도를 홀로 오랫동안 여행한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처음 갔다온 사람의 감상에서 진짜 힘겨움이 많이 빠져 있는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아파하고 힘겨움을 지났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그런 경험 자체가 없었다는 것인지.

 

바라나시는 우리가 흔히 인도하면 떠올리는 갠지스강의 이미지를 그대로 담고 있다. 당연히 많은 글들에서 이곳이 무대로 등장한다. 시체 타는 냄새에 익숙해진다는 동명의 글은 조금은 충격이다. 얼마나 많은 시체 타는 냄새를 맡았기에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가장 취향에 맞는 에세이는 동명과 나희덕의 글이었다. 여행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이 글들 속에서 보였기 때문이다. 나를 태운다는 것과 인도의 속도에 대한 글은 짧은 글 속에서 나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다름을 이렇게 접근한다면, 인식하는 방법도 다르다.

 

북부 지방을 다룬 글들 중 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어느 글이나 방송에서 이 지역을 다룬 것을 본 것 같기에 그렇게 낯설지 않다. 갔을 때 느낀 감정과 가는 과정에 느낀 감정이 사뭇 다른 곳이다. 사실 몇 시간 차를 타는 것이 지겨운 나에게 인도 여행은 하나의 무모한 도전일 수 있다. 라다크를 다룰 때 <오래된 미래>가 등장하는데 사놓고 묵혀둔 것이 몇 년인가. 이곳도 시간의 흐름 속에 변했다는 말이 있는데 내가 갈 때까지라도 변화가 조금 더 더디었으면 좋겠다. 물론 이것은 나만의 욕심이다. 가보지 않는 나라에 대한 환상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렇다.

 

타지마할에 대한 감상은 여러 번 바뀌었다. 그곳을 감탄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었고, 생각보다 별로라는 상사의 말도 들었다. 사진으로 본 이미지는 솔직히 내 취향이 아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본다면 어떨까? 며칠 전 뉴스에서 입장료를 올렸다는 내용에 클릭하고 들어가니 내국인 입장료다. 유적에 큰 관심이 없지만 실제 본다면 어떨지 알 수 없다. 이 책에서 가장 다루어지지 않는 분야가 음식이다. 법정 스님의 글에서 남부 지역의 음식이 입맛에 맞다는 것을 보고 떠오른 생각이다. 인도 출장 가면 음식 때문에 고생한다는 동료의 말은 그냥 듣고 넘어갈 수 없다. 음식은 여행의 재미 중 하나니까. 예전 해외여행에서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 때문에 고생한 적이 있기에. 그리고 이 책을 선택하는데 결정적이었던 사진들이 글쓴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 아쉽다. 글과 이어질 때 그 사진이 조금 서툴러도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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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가야 한다
정명섭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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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력이 약하면 국민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는다. 철저한 계급 사회에서는 그 피해가 밑으로 갈수록 더 심해진다. 최근 한국의 20여년 역사를 봐도 이것은 잘 드러난다. 이보다 더 심한 조선시대라면 어떨까?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앞장 서야할 양반은 돈으로 상놈의 자식을 사 대신 군대에 보낸다. 가끔 자신의 명예나 다른 목적 때문에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경우도 있다. 이 소설 속 두 인물 노비 황천도와 양반 강은태는 그렇게 여진족과의 전쟁에 내몰렸다. 그 결과는 누구나 알 듯이 조선의 패배. 둘은 노비로 살게 된다. 작가는 이 과정을 간결하면서도 빠르게 풀어내었다.

 

황천도. 엄마가 노비였기에 법에 따라 태어나자마자 노비가 되었다. 노동력이 귀했던 시절 남자 아이는 좋은 노동력이다. 출생 시 어머니는 죽고 아비와 함께 살았다. 그런데 황천도가 옆집 훈장에게서 문자를 배운다. 이것이 가능한지 여부는 그냥 묻어두자. 이 교육이 나중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현실에서 문자를 안다고 그가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좀 더 좋은 자리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열릴지 모르지만 공고한 신분사회에서 위로 올라갈 가능성은 없다. 외거노비에서 솔거노비로 바뀌는 순간 그와 훈장이 나누는 사자성어는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전조이자 현실이다.

 

강은태. 집안을 세우려는 아버지의 욕심에 여진과의 전쟁에 내몰렸다. 강은태가 책상물림의 말을 할 때 아비는 아주 현실적인 말을 한다. 이 현실 감각이 나중에 새로운 권력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아들은 신분이 기울어지는 결혼을 해야 했고, 전쟁에 나가야 했다. 이길 수 없고, 이길 마음도 없는 전쟁에서 그는 노예로 전락한다. 황천도와 만나고, 그의 도움으로 살아남는다. 동갑의 둘은 좋은 친구가 된다. 만주에서 노예로 살면서 그는 황천도에게 글을 가르친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뜬금없는 일이다. 이것 또한 다음 이야기를 위한 하나의 장치다.

 

노예는 돈을 주면 사고 팔 수 있다. 돈 있는 양반에 자식이 살아있다는 것을 안다면 어떨까? 광해군에서 인조로 넘어갔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시기에 강철견의 현실감각은 아주 잘 작용했다. 아들을 속환하기 위해 사람을 보낸 것은 당연하다. 이 소설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바로 이때부터다. 거의 20년을 같이 다니면서 얼굴이 비슷해 보인다는 말을 들은 둘 사이가 틀어진다. 속환된다는 말에 양반 기질이 밖으로 드러나는 은태와 자신도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인 천도가 충돌한다. 욕망은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진 것. 천도는 은태를 죽이고, 은태처럼 행동하기로 결심한다. 이 결심이 다음부터 벌어질 이야기에 긴장감을 불어넣어준다.

 

은태의 귀환을 둘러싼 의심과 갈등 등이 후반부에 펼쳐지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혹시나 하는 의심과 이 의심을 넘어서려는 의지와 노력은 곳곳에서 벌어진다.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상황들과 자신의 감정을 추슬러야 하는 천도의 모습은 극적 재미를 고조시킨다. 이렇게 작가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는 아주 재밌는데 그 이야기를 묶는 데는 조금 힘이 딸린다. 허술한 초반부와 많은 감정과 이야기가 생략된 감정의 변화 등은 사실 집중력을 많이 떨어트린다. 아쉬운 부분이다. 작가가 쓴 다양한 장르 중에서 역사소설만 읽었는데 모두 아쉬웠다. 다른 작품도 읽은 후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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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
반다나 싱 지음, 김세경 옮김 / 아작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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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나 싱의 SF단편소설집이다. 모두 10편이 실려 있다. 인도 출신이란 것과 이론물리학자란 것이 소설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익숙한 지명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낯선 인도라는 공간을 SF라는 장르로 잘 녹여내었다. 어떤 작품은 과연 SF소설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작가 자신은 “SF소설은 무척 난해한 방법으로 위대한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는 걸, 문학에 심취한 속물들을 속이고 무심한 독자들을 불러 세우기 위해 설계된 일종의 암호”라고 말한다. 이러니 외계인도, 우주로 나갈 필요도 없다. 첫 작품 <허기>를 읽으면서 생긴 의문이 이 문장으로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이 단편들에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있다. 그것은 인도라는 배경이다. 작가가 미국에서 학자 생활을 한다고 그 무대마저 미국으로 잡은 것은 아니다. 이 지역적 배경은 문화적 배경을 깔아놓고 진행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카스트 제도가 있고, 여자들은 결혼할 때 지참금을 가지고 간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이 이어지고 있고, 그 갈등이 폭발한 적도 있다. 이런 배경들이 단편들에 녹아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사건도 나온다. 작가는 이 갈등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지만 얼마나 큰 문제인지 충분히 인지할 수 있게 보여주었다. 몇몇 이야기는 이 문제들이 이야기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흔히 생각하는 가장 SF소설 같은 작품은 <델리>와 <사면체>다. <무한>이나 <보존법칙>도 마찬가지다. 표제작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의 경우는 판타지 요소가 더 강하다. <갈증>과 <다락방>과 <은하수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 등도 개인적으로 판타지로 읽힌다. ‘가장 덜 SF 같은 SF’로 부를 수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그리고 이 단편들 속에는 수많은 인도 신화와 신들이 등장한다. 당연히 전공분야인 과학 지식도 같이 나온다. 주석이 없다면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소설들이 재미없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상당히 재밌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물들의 성별이나 연령도 제각각이다. 이 때문에 그들이 느끼는 감정들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어쩌면 이 소설집의 가장 큰 매력인지도 모른다. 시간의 틈을 보는 <델리>의 화자는 혼자 살지만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의 화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다. 보수적인 남편의 시선과 아내에게 일어나는 사건은 읽는 재미가 가득하고 예상하지 못한 마무리를 보여준다. <무한>의 수학자는 자신의 재능을 펴보지 못한 채 살지만 종교 갈등 와중에 어릴 때부터 따라 다녔던 신비한 체험을 한다. 이때 엿본 우주와 비슷한 것이 <보존법칙> 속 우주 이미지와 연결된다. 나만 그런가?

 

<갈증>의 변화와 <다락방>의 마지막 장면은 일상 속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마법 같은 변화를 다룬다. 분위기를 점점 고조시키다가 어느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변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가장 SF답지 않은 단편들인 <허기>와 <아내>는 여성의 심리 묘사가 아주 돋보인다. 인도에서 아내의 삶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유출할 수 있다. 이런 삶에 대한 거부감을 담고 있는 것이 <사면체>다. 전통적인 결혼관에 묶인 대학생 마야를 등장시키고, 갑자기 등장한 사면체의 존재를 통해 새로운 세계로의 진출을 보여준다. 미지의 물체는 우리의 인식 한계를 넘어서 있지만 우린 우리의 지식 속에서 그것을 파악하려고 한다. 이 차이를 여러 단편에서 보여준다.

 

보통 SF소설은 가볍게 읽으려는 마음에서 선택한다. 하지만 꽤 많은 하드SF는 나의 뇌를 쉴 새 없이 움직이게 만든다. 이 단편집 속 몇 작품은 그랬다. 읽으면서 가장 인도적인 소재를 가장 잘 다룰 때, 그것이 장르와 결합할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문장 곳곳에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인도 문화의 이면과 문제점은 우리의 문화를 돌아보게 한다. 섬세하고 세밀한 관찰이 곁들여진 문장들은 가독성을 높여주고, 경험 속에서 우러나는 통찰력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좋은 SF작가 한 명을 만났다. 더 많은 작품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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