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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
반다나 싱 지음, 김세경 옮김 / 아작 / 2018년 11월
평점 :
반다나 싱의 SF단편소설집이다. 모두 10편이 실려 있다. 인도 출신이란 것과 이론물리학자란 것이 소설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익숙한 지명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낯선 인도라는 공간을 SF라는 장르로 잘 녹여내었다. 어떤 작품은 과연 SF소설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작가 자신은 “SF소설은 무척 난해한 방법으로 위대한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는 걸, 문학에 심취한 속물들을 속이고 무심한 독자들을 불러 세우기 위해 설계된 일종의 암호”라고 말한다. 이러니 외계인도, 우주로 나갈 필요도 없다. 첫 작품 <허기>를 읽으면서 생긴 의문이 이 문장으로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이 단편들에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있다. 그것은 인도라는 배경이다. 작가가 미국에서 학자 생활을 한다고 그 무대마저 미국으로 잡은 것은 아니다. 이 지역적 배경은 문화적 배경을 깔아놓고 진행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카스트 제도가 있고, 여자들은 결혼할 때 지참금을 가지고 간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이 이어지고 있고, 그 갈등이 폭발한 적도 있다. 이런 배경들이 단편들에 녹아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사건도 나온다. 작가는 이 갈등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지만 얼마나 큰 문제인지 충분히 인지할 수 있게 보여주었다. 몇몇 이야기는 이 문제들이 이야기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흔히 생각하는 가장 SF소설 같은 작품은 <델리>와 <사면체>다. <무한>이나 <보존법칙>도 마찬가지다. 표제작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의 경우는 판타지 요소가 더 강하다. <갈증>과 <다락방>과 <은하수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 등도 개인적으로 판타지로 읽힌다. ‘가장 덜 SF 같은 SF’로 부를 수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그리고 이 단편들 속에는 수많은 인도 신화와 신들이 등장한다. 당연히 전공분야인 과학 지식도 같이 나온다. 주석이 없다면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 소설들이 재미없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상당히 재밌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물들의 성별이나 연령도 제각각이다. 이 때문에 그들이 느끼는 감정들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어쩌면 이 소설집의 가장 큰 매력인지도 모른다. 시간의 틈을 보는 <델리>의 화자는 혼자 살지만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의 화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다. 보수적인 남편의 시선과 아내에게 일어나는 사건은 읽는 재미가 가득하고 예상하지 못한 마무리를 보여준다. <무한>의 수학자는 자신의 재능을 펴보지 못한 채 살지만 종교 갈등 와중에 어릴 때부터 따라 다녔던 신비한 체험을 한다. 이때 엿본 우주와 비슷한 것이 <보존법칙> 속 우주 이미지와 연결된다. 나만 그런가?
<갈증>의 변화와 <다락방>의 마지막 장면은 일상 속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마법 같은 변화를 다룬다. 분위기를 점점 고조시키다가 어느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변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가장 SF답지 않은 단편들인 <허기>와 <아내>는 여성의 심리 묘사가 아주 돋보인다. 인도에서 아내의 삶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유출할 수 있다. 이런 삶에 대한 거부감을 담고 있는 것이 <사면체>다. 전통적인 결혼관에 묶인 대학생 마야를 등장시키고, 갑자기 등장한 사면체의 존재를 통해 새로운 세계로의 진출을 보여준다. 미지의 물체는 우리의 인식 한계를 넘어서 있지만 우린 우리의 지식 속에서 그것을 파악하려고 한다. 이 차이를 여러 단편에서 보여준다.
보통 SF소설은 가볍게 읽으려는 마음에서 선택한다. 하지만 꽤 많은 하드SF는 나의 뇌를 쉴 새 없이 움직이게 만든다. 이 단편집 속 몇 작품은 그랬다. 읽으면서 가장 인도적인 소재를 가장 잘 다룰 때, 그것이 장르와 결합할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문장 곳곳에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인도 문화의 이면과 문제점은 우리의 문화를 돌아보게 한다. 섬세하고 세밀한 관찰이 곁들여진 문장들은 가독성을 높여주고, 경험 속에서 우러나는 통찰력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좋은 SF작가 한 명을 만났다. 더 많은 작품들이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