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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오피스
말러리안 지음 / 델피노 / 2022년 11월
평점 :
작가가 필명으로 자신의 이름을 가렸다.
판타지 등의 웹소설을 제외하고 이런 필명으로 출간되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내가 이 소설에 끌린 것은 흔하디흔한 보통 회사와 조용한 사무실에서 온갖 소동이 벌어진다고 한 부분이다.
너무나도 낯익은 사무실 풍경에 피로 가득해지는 장면들이 떠올랐고, 머릿속으로 액션 스릴러를 그렸다.
하지만 이 소설은 나의 기대와 예상을 살짝 벗어난 방향으로 흘러갔다.
특히 2부의 장면들은 단순히 은유라고 생각한 나의 예상을 확 벗어났다.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마주한 3부는 또 어떤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디자인팀 직원의 자살로 이야기의 문을 연다. 직원 자살이란 단어를 읽고 몇 가지 과거가 떠올랐다.
아는 직원이, 같은 건물이 근무하는 직원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예전에 들었다.
나이가 들면서 삶의 반경이 줄어들면서, 일하는 곳이 이전처럼 큰 곳이 아니게 되면서 이런 소식은 없다.
대신 언론을 통해 어딘가에서 본 듯한, 들은 듯한 사람들의 자살 소식이 들려온다.
그런데 만약 회시가, 그 공동체가 자살 소식을 막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 소설 속 자살도 금방 잊혀지고, 그 흔적도 지워진다. 그리고 진짜 회사의 어두운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단순히 회사 운영을 둘러싼 윗선의 전쟁이 아닌 직원들의 생존이 걸린 이야기가 말이다.
소설 속 주인공 제욱은 야근을 밥 먹듯이 한다. 그가 쓴 문장들을 보면 예전의 내 경험이 떠오른다.
투자 실패한 그는 조폭의 돈을 끌어 썼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그 조폭 회사의 원료를 회사로 들여온다.
한 번 약점을 잡힌 그는 그 조폭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갑자기 자기 회사의 만두가 대박이 터지고, 원료 수급 문제가 생긴다.
이때 흔히 예상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고, 급하게 방향을 튼다.
혹시 조폭이 납품한 원료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검사를 의뢰한다.
그러다 조폭의 사무실을 훔쳐보다 그곳에 놓인 돈을 훔쳐 달아나려고 하다 정신을 잃는다.
그가 눈 뜬 세상은 이전과 완전히 뒤바뀌어 있다. 방독면이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
2부는 경영권 쟁탈에 성공한 세력이 점령군처럼 행동하면서 벌어지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고, 피가 사방에 튀고, 괴물처럼 변해 임직원을 공격한다.
처음에는 이 장면을 은유라고 생각했다. 한때 사무실에 재떨이가 날아다닌 적도 있다고 하지 않은가.
죽을 잘 못 선 관계로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잘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현실을 목을 물고, 목이 잘리고, 피가 흥건하게 그려낸다.
괴물처럼 변한 회장의 모습과 그가 보여주는 힘은 판타지의 악마나 다름없다.
그 밑에서 권력을 쥐고 실제 힘을 행사하는 사장과 그 수하들은 또 어떠한가.
생존을 위해 남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신사원동맹이 만들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신사원동맹이 결성되자 이 노조를 깨트리기 위해 프락치를 집어넣거나 폭력을 행사한다.
새로운 어용조직을 만들어 노노 갈등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포장한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한국 대기업이 노조를 깨뜨리기 위해 펼치는 기만전술이 생각났다.
내부의 프락치가 드러나면서 같은 조직 내의 갈등이 더 심해진다.
여기에 회장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를 먹은 사람들이 변하고, 괴력을 발휘한다.
어느 순간은 총이 등장해 서로 총을 쏜다. 뭐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은유나 비유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적과 아군이 뒤섞인다.
가독성은 상당히 좋다. 세계를 확장하지 않고 축소해 상황을 긴박하게 했다.
판타지처럼 표현된 2부를 또 다른 은유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한다.
마무리 3부를 본 후 이 장면들에 대한 해석이 또 달라진다.
전체 이야기의 균형감이 조금 약하게 느껴지고, 취향을 많이 탄다.
내 개인적 취향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다. 아니 기대와 다르다고 해야 하나?
소설 곳곳에 곱씹어 볼 문장이나 상황들이 나오지만 깊게 파고들지 않아 조금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