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을 응용한, 온고지신이 빛나는 글소리 책 <훈민정음 ㄱㄴㄷ>. 한글을 만든 원리를 설명해 두었다는 원본을 본적이 없었기에 낯설고도 아름답다. 글자가 있기 전부터 소리가 있었던 우리말을 적기 위해 소리로 설명되었다는 훈민정음의 창안을 빌어
ㅇ 이응은 애자의 처음 나는 소리와 같아요 -애기똥풀꽃
과 같이 적혀있다. 책 뒤에 공개된 원본에서는
ㅇ 목구멍소리니 '욕(欲[욕])'자의 처음나는 소리와 같다.
를 대응할 수 있다. 우리말로 된 우리 꽃들을 소릿자에 따라 세밀화로 보여주고 있는 점도 흐뭇하다. 강아지풀, 달개비, 민들레, 찔레, 어디하나 아름답지 않은 말이 없고 예쁘지 않은 꽃이 없다. 나랏님이 백성에게 들려준 한글 수업을 엄마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유산같은 글자책이다.
<소리치자 가나다>. 글자에는 무심해도 그저 즐겁다. '가,나,다,라,마,바,사'에 어울릴 감정데로 책을 읽어주는 게 중요하다.
볼일을 보고있는 아이에게 달려드는 강아지. 그 옆엔 크고 분명하게 쓰여진 '가'라는 글자가 있다. "가, 저리가!"라고 가를 반복해서, 강조해서 읽어주면 낱자와 문장, 그림 상상법 등을 두루 익힐 수 있다. 이를테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글자와 협응이 가능하다. 상황들이 매우 익살스러워서 이야기를 꾸며내기에도 알맞다. '카'는 벤치에 앉아 음료수를 들이키는 부녀의 그림이 곁들여지고, '하'의 경우에는 유리창에 입김을 불고 하트를 그리는 여자아이를 그려넣었다.
ㄱ,ㄴ,ㄷ,의 초성만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두 권의 책이 있다.
하나는 <기차ㄱㄴㄷ>, 또 하나는 <개구쟁이ㄱㄴㄷ> 이다. 작가의 말놀이 재능을 십분 발휘했을 이 책들은, 한글의 닿소리(자음)과 홀소리(모음) 스물 네 개를 '모아쓰기' 했을 때 1만 개가 넘는 글자를 만들 수 있다는 대단한 위력을 실감케한다. 초성만의 제약으로도 어엿하게 이야기가 완성되는 걸 보면 말이다.
'ㄱ기다란 기차가 ㄴ나무 옆을 지나서 ㄷ다리를 건너서 ㄹ랄랄라 노래를 부르며'
로 이어지는 <기차ㄱㄴㄷ>은 기차의 여행 풍경을 무리없이 담고 있다. 'ㅋ커다랗고 컴컴한 ㅌ터널을 통과해서'에서는 이 소재가 이 책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 지 알 수 있었다. 어렵지 않다면 아이와 이야기 짓기를 시도하면서 첫소리를 다양하게 변형해 보는 것도 좋겠다.
'ㄱ기린이 ㄴ나뭇잎을 보고 ㄷ동그랗게 혀를 말아서 ㄹ랄랄라 노래를 부르며'같이.
<개구쟁이ㄱㄴㄷ>은 주인공 만큼이나 개구진 그림과 흥겨운 말놀이가 즐겁다. <기차ㄱㄴㄷ>의 서사가 단순한 반면, 이 책은 글씨를 빼고라도 한 편의 극적인 이야기로 모양새를 갖춘다.
'기웃기웃, 고양이가 구멍(나무구멍) 속에 들어갔는데?(나무 뒤에서 도깨비가 부끄러운 듯 실실거린다)ㄴ누구야, 누구? 너 때문에 놀랐잖아! ㄷ다다다닥! 도깨비 달아난다.'
역동적이고 생기 넘치는 등장인물들의 움직임이 말을 쏟아내는 듯 느껴진다. 이어 도깨비와 장난질을 시작하는 아이가 집으로 들어와 일상 속에서 벌이는 일들을 실감나게 말 속에 담는다. 한 장의 그림 속에 셀 수 없이 많은 주변 물건들이 고스란히 등장하는데, 그냥 넘긴다면 아까울 정도다. 각 초성에 해당하는 물건들을 짚어보는 보물찾기 지도로 사용해 보자.
현재 5권까지 나온 <최승호 시인의 말놀이 동시집>이다. 최승호 시인의 말솜씨는 이미 여러 편의 시집에서 발휘되 왔다. 다의적인 언어의 성질을 누구보다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시인말고 또 있을까.
한 편의 시에 어떤 어휘든 사용될 수 있지만 모든 말이 시가 될 수 있는건 아니다. 하지만 모든 말을 시로 쓰기로 결심한 것처럼 시도된, 이 말놀이 동시의 릴레이를 구경한다.
초, 초여름밤//초가집 위에/초롱초롱/올빼미 눈 위에/초롱초롱/별 떴다/초여름밤/초승달 떴다
부, 부엉이//부엉/부엉/부엉이 운다/두부 몰래 먹는/부뚜막 생쥐야/부엉이 발톱 조심해라/부엉/부엉/부엉이 운다
쉽고 단순해 보인다면 지금 당장 아이와 시도해 보는 것도 좋겠다. 마치 시제를 주고 시문을 써내는 과거 시험처럼 말이다. 어구를 대응하고 운을 맞추는 시의 기법도 꼭, 넣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