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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브레인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놀라운 무의식의 세계
샹커 베단텀 지음, 임종기 옮김 / 초록물고기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히든 브레인>/샹커 베단텀/초록물고기/2010.5
무의식적 편향
오로지 문학 장르에서만 '책'이란 걸 발견해왔다. 문학의 감수성과 직관과, 문학이 주는 영감과 공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독서는 순탄했다. 고전이라는 난항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불구의 독서를 자각하게 된 건 얼마되지 않은 일이다. 거의 최근에야 인문서를 조금씩 집어들게 되었고 지금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듯 힘겨워 하고있다. <히든 블레인>의 샹커 베단텀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어떻게 조류(潮流)가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겠는가?'
몸의 어딘가가 아플 때에야 비로소 몸의 부위를 또렷히 의식하게 된다. 그제야 몸에 대해 갖은 아양과 겸손을 떨며 몸을 보살피고,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날 밀어내는 물살과 마주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째서 문학 이외의 장르에 거의 손을 뻗지 않았는가. 문이건 마음이건 생각이건 열려 있어야 함을 이성적으로 판단했던 내가 왜 독서의 편향을 막지 못했는가. 아무도 '다른 책은 읽지 마라'라고 말하지 않았고, 심지어 '책'에 한에서 만큼은 확짝 열려 있었다고 확신했을까.
상커 베단텀이 말한 '숨겨진 뇌'의 무의식적 편향은 이렇게 의식하지 못한 채로, 아주 작은 힘이지만 지속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 작용은 생각의 흐름을 주시하는 것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다.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통섭
초보 입문자 답게 '인문'이 가진 교양이나 지식이 '예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로 인문서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자연히 '통섭'의 책들이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고, 나아가 '문학'의 재미를 능가하기도 했다. 독서법을 지도하는 <독서의 즐거움>에서는 아얘 '통섭의 책을 읽는다'는 꼭지를 통해 최재천 교수의 <지식의 통섭>을 중심으로 <프로메테우스 인간의 영혼을 훔치다><문학으로 역사읽기, 역사로 문학읽기><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등등을 소개한다.
대중문화로 철학하고, 문학으로 과학하고, 그림으로 음악을 듣는 일은 흩어진 지식들을 그러모아 적소에 배치하는 실용성을 띈다. 소재에도 한정이 없는만큼 지식의 확장에도 한몫한다. 인문학과 함께 부상한 '통섭'이란 이슈는 독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렵고도 반가운 손님이다.
<히든 브레인>을 펼쳤을 때 이 책이 소설적 기법으로 심리학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았다. 논제 안에 예시가 포함된 형태가 아니라 사건을 축으로 논리를 드러내는 식이다. 그 분량의 분배 못지 않게 스릴러를 방불케하는 소설적 구성이 이야기 자체로 의미있다. 테러리즘, 성폭행, 살인, 치매, 정치 이야기가 모두 사실에 근거하고 있어 '논픽션' 기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술되기에 이론이 방해받는 법은 없다. '천부적 이야기꾼'이라 불리는 상커 베단텀을 통해 논픽션과 심리학이 만난 지점에 선다.
..(숨겨진 뇌의 역할을 과장해서)윌에게는 숨겨진 뇌만 있다고 가정해보자. 윌을 사무실을 환하게 만드는 미소를 가진 영리하고 잘생긴 젊은이로 보는 대신, 웹(네트워크)의 중심점이라고 상상해보자. 그 중심으로부터 관계의 선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뇌로부터 나온 가는 실 하나가 그가 성장했고 부모가 지금도 살고 있는 뉴욕의 콜드 스프링 하버로 흘러간다. 또 하나의 가는 실이 가톨릭 사제인 그의 형이 살고 있는 인디애나 주의 사우스벤드로 향한다. ... 윌이 가는 곳이 어디든 새로운 케이블들이 사방으로 싹튼다. ...어떤 케이블은 윌이 직장으로 가면서 모르는 누군가를 스쳐지나감에 따라 순식간에 생겨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책에서
9.11테러 현장의 89층에 있었던 한 직원의 하루를 의도적 발상으로 쫓는 이 광경은, 관계망의 역학과 집단심리, 숨겨진 뇌가 어떻게 윌의 행불행을 나누었는지를 긴박하게 보여준다. 무척 특수하고 극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절제된 묘사를 통해, 평상시의 위기나 사소한 위험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식으로 도피하고 대응하는지 충분히 병치시켜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되었다. 저자가 의도한 바 아주 개인적인 사례에서부터 살인, 테러리즘, 정치로 동심원처럼 확장하고 있는 숨겨진 뇌의 작용들에 빨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숨겨진 뇌
나는 왜 위기 속에서 집단의 동의를 얻길 원하는가. 아이에게 인종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같다는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눈썹 짙은 외국인 노동자가 다가오면 가슴이 움찔하는가. 길을 잃고 울고 있는 아이에게 보이는 동정은 왜 매일같이 굶주려가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향하지 못하는가. 나는 왜 응원해 마지않을 친구에게 속좁은 질투심을 느끼는가.
이전엔 의심의 여지도 없었던, 어쩌면 더 생각하기 싫은 질문들이었지만 '숨겨진 뇌'의 존재는 이 무형의 감정들을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숨겨진 뇌는 절대 우리의 재능을 능가해 똑똑함을 발휘한다든가 어려운 일들을 해결해주는 새로운 능력자가 아니다.
의식적인 마음은 합리적이며, 신중하고, 분석적이지만 숨겨진 뇌는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들을 하기 위해 마음의 지름길을 잘 이용한다. 의식적 뇌는 느리고 신중하지만, 숨겨진 뇌는 빠르게 활동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숨겨진 뇌는 속도을 얻기 위해 정교함을 희생한다. 숨겨진 뇌는 간결하지만, 예리하지는 못하다. 숨겨진 뇌는 우리를 세계에 신속하게 동화시키고, 우리가 빠른 결정을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일련의 간결한 도구들을 준다. (책에서 정리)
숨겨진 뇌의 이런 행동방식을 통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이성적인 판단을 거스르면서까지 세상과 단절된 터널을 유의미하게 통과할 수도 있다. 물론 그 터널 안에서는 터널밖의 규범이 이단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불합리한게 뻔한 다단계 판매나 사이비 종교 집단에 편입되는 것 또한 '숨겨진 뇌'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실은 전혀 이상하거나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경험할 때, 그들을 '미치광이'로 부르는 건 그들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내가 책을 읽는 건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서다. '숨겨진 뇌'는 <존 말코비치 되기>의 7과 1/2층 같았다.
오히려 '우리는 왜 의식적인 뇌가 있을까.'라고 묻고 있는 이 지적이면서 감수성 넘치는 책에 대한 호평 대신 <히든 브레인>의 마지막 구절을 그대로 옮겨본다.
이 책은 합리적 마음이 얼마나 숨겨진 뇌의 교묘한 책략을 감당해내기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또 이성이 편향을 극복할 수 있는 우리의 유일한 보루라고 주장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성은 우리의 등대이며, 우리의 구명조끼이다. 이성은 양심의 목소리이다. 그게 아니면, 양심의 목소리여야만 한다.
숨겨진 뇌와 무의식
숨겨진 뇌, 무의식적 편향이 <히든 브레인>의 핵심 코드이기에 앞서 프로이트가 명명한 무의식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야했다.
억압된, 허용되지 못하는 욕구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세계만으로는 의도와는 다른 행동들을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 최면, 자각, 꿈에 의해서 무의식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다면 이 숨겨진 뇌로의 접근법은 전혀 다르다. '이기적 유전자'에 가깝다는 저자의 말을 참고 한다면 유전자가 자기복제하기 위해 종과 무관하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듯이
숨겨진 뇌 역시도 어떤 가치의 지향 없이 다양하게 확산 되기만을 기다리는 독립적 정신활동이다. 무의식, 잠재 의식, 암시성과 같은 개념들이 숨겨진 뇌 안에 포괄된다고 하니, 더 이상 미천한 증명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