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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 김정남 소설
김정남 지음 / 북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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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뒤에는 남성, 이라는 화자와 남성,이라는 작가가 우뚝하게 서 있다. 평범한 언어로 예민하게 일상의 부조리를 끌어내는 '여성스러운' 화자들에게 지극히 공감해 왔다는 사실을 거꾸로 자각하게 해준 소설집.  

소란스럽고, 미묘하고, 간지러운 느낌이 '여성스러운' 소설의 단서라면 <숨결>은 앞의 모든 형용을 거세한 채 던져진 살덩이 같다. 상처에선 정확히 피가 흐르고, 한계의 구분선은 명징하고, 동물적인 욕망은 직선으로만 존재하는 세계에 발을 담근 기분이다.
 
아시다시피 남성작가들이 모두 이런 소설에 합류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해 마지 않는 영미 작가 레이먼드 카버는 부엌과도 같은 협소한 공간과 단순한 동선, 식탁과 침대에서의 대화, (거의 감지하기 힘든)약간씩 뒤틀린 관계만으로도 지속가능한 파장을 보여주었다. 그를 존경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도 굵직한 서사의 힘이라고는 할 수 없는 예민한 감각으로 무장하긴 마찬가지다. 반면 헝가리 여류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은 이만큼 잔인하게 남성화된 문체를 만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드는 작품이다.
 
얼마 안되는 소설편력까지 끄집어 낸 건 이 단편들의 지독한 설정들 때문이다. 교통사고 가족이라 명명한 레커차 운전기사가 끝내 맞는 불운은 집 나간 부인의 시체를 아무것도 모른채 끌어 날랐던 지난 밤이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의 현대판일까?) 동영상 과외 강사로 절제된 식사와 충분한 정욕을 집안에서 모두 해결하는 정 박사는 절대 자기가 히키코모리가 아니라고 웅변한다. 서민의 한달치 월급봉투를 단번에 숍에 지불하는 사서와의 보름간의 희롱에 '어머니, 제 걱정일랑 하지 마세요. 서울에서 부잣집 딸 만나서 호의호식하고 있어요'라고 뇌까리고 마는 남자는 원룸텔로 돌아와 쓸쓸하다. 


생략의 생략을 거듭한 진술서들이 무척이나 불리해 보인다. 누굴 대변하고 누굴 비난하는 건지 쉽게 편들기가 힘들다. 물론 <숨결>의 모든 포즈는 시니컬이다. 주장을 담지 않고 '조명'하는 것만으로도 소설은 강력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르다. 도시의 꿉꿉한 삶을 다루는 것만으로 그의 시선은 만천하에 드러난 샘이다. 그러므로 '사회 비판'이라는 철지난 모토는 미뤄두자. 

문제는 그가 삶을 소화해내고 있는 방식이다. 다분히 직설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성적 서사의 진행은 소설 속의 삼류극장 간판 마냥 촌스럽고 동시에 아득하기도다. 비극의 무대에 올려진 주인공들은 고통을 향한 대사들을 응집하고 그외의 생의 이면들은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것만 같다.  

이 아주 오래된 소설적 기법이 새삼 낯설게 느껴지는 건, 여태 실은 다양하다고 할 수 없는 여성적 섬세함들이 지배하고 있는 소설들을 읽어왔기 때문이겠다. 지나친 자기 고백과 자아 성찰에서 한 걸음 물러나 '소설'이라는 '거짓말'을 되살리는 이 무뚝뚝한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 본다.
 
대단한 발견도, 중요한 변수도 아니지만 '이야기'를 마주하는 내 눈은 두 개의 동공만큼이나 균형을 잡고 싶어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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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누가와 - 鬼怒川
단이리 지음 / 나남출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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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한일전이 제일 재밌지' 아르헨티나 전을 보며 남편이 한 말이었습니다. 경술국치 백년.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백년이면 세월의 강물만도 억만겁은 흘러갔을테고, 우리에게 일말의 앙금이라고는 남아있지 않을법도 한데 '역사'는 전혀 그럴 의향이 없나봅니다. 


하긴 위안부의 삶을 처철히 재현한 권윤덕의 그림책 <꽃할머니>를 말끄러미 보고 있자니 흘러간 건 아무것도 없다,는 역사의 각인을 되새기게 됩니다. 해소되지 않은 치욕과 분노는 언제고 되살아 나 복수심을 일깨웁니다. 한일전이 재밌는 건 이겼을 때의 쾌감이 남다르기 때문이겠지요? 또 스포츠만이 선사할 수 있는 공정한 조건의 싸움이 일견 한일관계의 어긋난 부분을 보상해주기도 합니다.
 
네, 그러고보니 한일전이 진짜 재밌어보이기도 합니다. 한 번쯤의 승리에 찾아오는 우월감보다는 역사의 속내를 뒷주머니에 찔러넣고 누구나 앞마당에 모여 무기없이 알량한 조약 없이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이 세계는, 코 앞에 닥친 백년 전의 치욕에 비하면 너무도 평화로우니까요. 고통을 유희로 전환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분노의 처분법은 맨 먼저 분노를 응시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우월감인 용서는 분노를 덮어버리고 심지어 자괴감마저 들게 합니다. '일본은 없다'고 거부하는 것도, 일본의 위력을 깎아내려 우리를 추키는 것도 신나는 일은 아닙니다.

지금껏 일제의 야욕만을 대한제국 점령의 유일한 이유로 설명하는 역사관에서 균형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로지 피해자의 권리만 학습하고 누차 억울한 마음을 고한다고 해서 피의자의 주장을 막아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전 <기누가와>라는 살인추리소설을 통해 일본의 극단적인 우파들이 견지하고 있는 자세를 엿봤습니다. 말하자면 미개한 조선을 개화시켰다는 자부심이 미화가 아닌 실화(주인공의 실화)로서 인간사에 누적되어 있었습니다. 


<기누가와>/단이리/나남/2010.4 

그가 한국인 국회의원을 죽인 살인자 인데다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사실은 지당한 비난과 분노에 역의심을 살만했습니다. 일제가 대한제국에 가한 폭력과 잔인성만으로는 경술국치 100년을 톱아보는데 큰 장애가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극단적인 살인현장에서 발견하는 상대의 '입장'은 현재 내가 미워하고 있는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 되묻게 합니다. 

한국의 국회의원 박민자는 민주투사이자 일본의 역사적 과오를 비판하는 정의파로 경술국치 100년, 동경에서 대규모 항의집회를 준비합니다. 순진한 계산법으로 정당한 주장이 적법하게 발휘되는 동시에 위기를 겪고, 한일전의 한판승마냥 잠시나마 위안을 얻는 전말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자 단이리가 인용했듯 '역사에는 교묘한 통로들과 까다로운 복도들과 문젯거리들이 있게'(T.S. 엘리엇) 마련입니다. 그는 이것을 '우리 자신이 직접 역사에서 꺼내오는 인식과 감정들'이라고 말했는데, 저는 비슷한 말로 실제의 '역사'와 '역사의 현상'의 충돌로 바라봤습니다. 

박민자에게 역사란 정치적 계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고, 이를데 없이 모순적인 행위를 낳기도 했습니다. 박민자의 아버지는 일제의 징용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일본에 귀화해서 성공한 재일교포로 박민자의 막대한 정치자금은 일본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더없이 가까운 일본인 이복자매를 두고 자신의 컴플렉스(음경선망-성기를 동경하는 심리)를 해소하는 장소로 한국이 아닌 그토록 날서게 비판한 일본을 선택했다는 사실 역시, 순수한 역사관으로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녀를 죽인 가즈야는 그의 핏속에 단 한 가지, 식민역사의 우월성만이 거침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증조부와 조부가 모두 조선총독부의 뛰어난 관료였다) 극단적으로 '역사'만으로 살인을 할 수 있는 건 오히려 박민자 일텐데 말이죠. 주검과 살인자는 이토록 다른 지점에 있습니다. '역사의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의 '역사'를 죽입니다. 하지만 공통점도 있습니다. 둘 다 가족에게서 물려받은 컴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이죠. 이 부분은 한일 공동의 과제처럼 들립니다. 

<기누가와>에는 사건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한국의 여형사 배영희를 등장시킵니다. 그녀는 가즈야 집안의 내력을 살피면서 통치자의 역사기록을 마주하게 됩니다. 배영희가 드러내는 사념, 고민, 혼란들을 지금 우리의 심중과 겹치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경술국치 100년 째, 또 다시 주검과 살인자로 만나 물밑으로 대립하는 한일간의 입장이 수사관의 중립적 견해로 정리됩니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 일본이라는 타국으로부터 식민통치를 당한 과거는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을 일본에서는 막연한 피해의식이라거나 우라미(원한)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과거의 일을 두고 한국과 일본 사람들이 충돌하는 가장 큰 요인은... 당시 서구세력이 아시아를 지배하고자 하므로 일본이 서구세력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하기로 '선택'하였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이는 지금도 일본의 많은 우익인사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라고 봅니다. 또 하나는 일종의 공리주의인데, 일본의 식민통치를 조선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결과적으로 일본의 통치가 조선의 근대화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주장이지요. 어떤 이들은 식민통치가 없었다면 조선은 러시아에 먹혀 버렸거나 오늘과 같은 발전이 없었다고 공공연히 말하지요."

이후 배영희는 '반일감정'의 불성실함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습니다. 일본의 호스트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우월감을 느끼려했던 박민자의 행동으로 공허한 신념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간과 쓸개를 걸어놓고 고통을 잊지 않도록 되새기는 것은 아닐겁니다. 

<기누가와>의 해법은 살인자가 의당 받아야 할 처벌(자살)과 어긋난 신념의 단절이었습니다. 동시에 일말의 계산과 위선, 절제되지 않은 복수심을 국가주의로 위장한 박민자 역시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역사의 신념을 변형없이 가두는 것도, 제식대로 풀어놓는 것도 모두 위험한 일처럼 보입니다. 이 양끝을 가로지르는 외줄에서 아슬아슬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한일관계는 분명한 판결을 기다릴 수 있는 살인사건은 아닙니다. 식민의 역사가 거대한 제국주의 속의 흐름이었음을 저는 우선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인 여형사 배영희의 말을 마지막으로 떠올려 봅니다. 

...동경의 한복판에 있는 일본경찰청의 책상에 앉아 100년 전에 조선에서 긴 세월을 보낸 한 일본인의 기록을 보면서, 자신이 마치 역사라는 상상의 공간 속에서 일탈하여 떠다니는 하나의 먼지라는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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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익문사 1 - 대한제국 첩보기관
강동수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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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익문사1,2>/강동수/실천문학사/2010.5


역사소설이라면 슬슬 피해다니는 제가 300여 페이지의 두 권을 흡입하듯 읽어내렸습니다. 초반부의 몰입이 쉽진 않았지만 일단 인물들의 동선을 파악하고나니 체스판에 옮겨지는 말을 보듯 경기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경기'라는 표현이 이 소설의 묵직함에 비하면 천박하긴 하지만 첩보의 수를 읽어내려는 고수들의 신경전이 <제국익문사>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입니다.

과연 이 재미가 없었다면 조선말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명성왕후 시해와 잇따른 암살, 고종시대 비밀정보기관 '제국익문사' 등, 제법 딱딱한 역사적 사료들이 술술 넘어갈 수 있었을지는 여전히 자신이 없습니다.

더구나 짧은 호흡과 감각적인 문장에 길들여진 제가 굵직한 서사와 고풍스런 우리말 어휘에 쉽게 달라붙진 못했는데, 이 또한 <제국익문사>의 외피로서 보기좋게 어우러지면서 어느덧 별다른 장애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경술국치 백 년을 맞아 '이유있는 독서'를 해보고자 두 번째 펼친 소설이 독서의 스펙트럼을 흔쾌히 넓힐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난제는 책과 여러부분 소통한 후 쓰는 독후감의 역량이 부족하군요. 그래서 그 어느때보다 예리하게 파고드는 소설가 조정래의 서평을 먼저 옮겨 봅니다. 


...우리는 자칫 일제강점기를 박제품과 같은 것으로 방치하는 오류를 범하기 쉬운데, 이 각별한 소설은 '지금, 여기'의 삶과 백년 전의 삶이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박제된 역사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장쾌한 서사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애국과 매국 사이에서의 갈등을 다루는 균형잡힌 시선에 신뢰가 간다. 가히 경술국치 밴 년만에 나온 '대한제국 멸망사'로 읽힐만한다.(중략)
 
맞습니다. <제국익문사>는 조선말 국가첩보기관의 애국사상을 담아내는 지당한 과정이 빠졌습니다. 오히려 큰 줄기의 서사는 매국노, 즉 국모시해에 연루된 인물 우범선의 뼈아픈 감정기록입니다. 작가가 말했듯 '우범선은 한 개인이면서 동시에 당대 개화당의 이념이 뭉뚱그려져 육화된 인물'입니다. 피해자를 자처하는 애국자라면, 목숨을 버리고라도 한 나라의 왕과 왕후를 지켜내야하는 수구당의 첩보기관이라면 '죽일 수밖에 없었던' 절절한 이유를 마주하는 심정이 분노로만 설명될 순 없을 것입니다. 

완벽한 피해자도 승리의 감격도 얻지 못하는 역사의 딜레마를 겪는 첩보요원, 이인경은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입니다. 명성왕후 시해 이후 또 다시 고종을 겨눈 총구를 수색하는 그의 첩보전이 역사소설 밖의 현란한 스릴을 선물합니다. 이 허구는 김옥균의 삼일천하로 불발된 개화파 정권이 다시 부활을 꿈꾼다는, <제국익문사>의 가장 발칙한 역사적 가정을 안고 있습니다.
 
한 때는 동지였던 개화파와 수구파 대표인물들의 라이벌전을 통해서 독자는 세계관의 대립을 구체적으로 목도할 수 있습니다. 나라로 상징되는 국왕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의롭고 이로운 일이라고 믿어왔던 역사관에 의한다면, '매국노, 반란'이라고 단정짓기 편하겠지만 그들 역시 '나라를 구하는 길'을 반대로 상정한 것에 다름없었습니다. 

왜와 청국과 아라사 사이에 끼여 나라의 명운이 풍전등화 같은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아직도 반상만 따지는 저 북촌 세도가 무리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민씨네 척족들이 말하는 개화라는 것은...진실로 나라를 지키고 부강케하여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니라 저네들의 권세와 부귀를 잃지 않기 위해 또 다른 권력의 울타리를 치려는 것임을,(중략)-소설 속 우범선의 비망록에서 

이것이 '갈등을 다루는 균형잡힌 시선'이며 '명성왕후로 대표되는 수구당이 과연 올바른 노선을 밟았는가'란 작가의 의문일것입니다. 덧붙여 그들 모두의 실패는 역사적으로 예견된 것이었지만 그 이유, 즉 한계를 직시하는 것이 독자의 몫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진보적인 명분으로 합중공화를 꿈꿨던 개화파나 봉건세력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던 수구파 모두 각각 일본과 청, 즉 외세의 힘을 빌었다는 점이 '대한제국 멸망'의 가장 큰 요인으로 드러납니다. 게다가 봉건세력은 세계사의 흐름에 둔감하여 새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거의 되있지 않았습니다.

거참, 그래서 박영효가 미국을 본떠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이로군. 나라라는 것은 세세연년 이어진 왕통이 있어 위로는 하늘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 창맹을 돌보는 게 아닌가. 여기 왜국도 총리대신 국사를 받들지만 천황에게서 통치권을 위임받은 게 아닌가. 창맹들이 세상물정을 어찌 알아서 임금을 뽑는 다는 거지?" -제국익문사 요원 유석하의 말.

경술국치 백 년에 필요한 것이 민족감정을 앞세운 애국심의 고취도 아니고, 야욕을 품은 외세에 대한 비난 역시도 아니었습니다.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던 약소국의 처지를 비탄하고 피해를 곱씹기 전에, 우리가 이미 독립을 잃은 객체였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익히 습득해왔던 진정한 애국도, 매국노의 그들만의 우국(優國)도 진짜 핵심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한치 앞이 낭떠러지라고 해도 다른 패는 없었지만, 후대는 객관적 역사 돌아보기를 통해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수순처럼 들이닥친 주권침탈, 저홀로 고독한 테러리스트가 된 첩보요원 이인경의 독백을 들어봅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잘못했던 것일까……. ... 장동화의 길도, 우범선의 길도 결국엔 나라를 지켜낼 수 없었다면, 그 답을 찾아내기 위해선 참으로 혹독한 시간을 견뎌내야 할 것이었다. 시베리아의 겨울과 같은 인고의 시간이 지나야만 그 해답의 실마리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지난 백년 참으로 혹독한 시간을 견뎌내온 우리의 답이 '애국'만은 아니길 바라면서 <제국익문사>를 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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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브레인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놀라운 무의식의 세계
샹커 베단텀 지음, 임종기 옮김 / 초록물고기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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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브레인>/샹커 베단텀/초록물고기/2010.5

무의식적 편향

오로지 문학 장르에서만 '책'이란 걸 발견해왔다. 문학의 감수성과 직관과, 문학이 주는 영감과 공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독서는 순탄했다. 고전이라는 난항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불구의 독서를 자각하게 된 건 얼마되지 않은 일이다. 거의 최근에야 인문서를 조금씩 집어들게 되었고 지금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듯 힘겨워 하고있다. <히든 블레인>의 샹커 베단텀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어떻게 조류(潮流)가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겠는가?'

몸의 어딘가가 아플 때에야 비로소 몸의 부위를 또렷히 의식하게 된다. 그제야 몸에 대해 갖은 아양과 겸손을 떨며 몸을 보살피고,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날 밀어내는 물살과 마주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째서 문학 이외의 장르에 거의 손을 뻗지 않았는가. 문이건 마음이건 생각이건 열려 있어야 함을 이성적으로 판단했던 내가 왜 독서의 편향을 막지 못했는가. 아무도 '다른 책은 읽지 마라'라고 말하지 않았고, 심지어 '책'에 한에서 만큼은 확짝 열려 있었다고 확신했을까. 

상커 베단텀이 말한 '숨겨진 뇌'의 무의식적 편향은 이렇게 의식하지 못한 채로, 아주 작은 힘이지만 지속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 작용은 생각의 흐름을 주시하는 것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다.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통섭

초보 입문자 답게 '인문'이 가진 교양이나 지식이 '예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로 인문서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자연히 '통섭'의 책들이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고, 나아가 '문학'의 재미를 능가하기도 했다. 독서법을 지도하는 <독서의 즐거움>에서는 아얘 '통섭의 책을 읽는다'는 꼭지를 통해 최재천 교수의 <지식의 통섭>을 중심으로 <프로메테우스 인간의 영혼을 훔치다><문학으로 역사읽기, 역사로 문학읽기><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등등을 소개한다. 

대중문화로 철학하고, 문학으로 과학하고, 그림으로 음악을 듣는 일은 흩어진 지식들을 그러모아 적소에 배치하는 실용성을 띈다. 소재에도 한정이 없는만큼 지식의 확장에도 한몫한다. 인문학과 함께 부상한 '통섭'이란 이슈는 독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렵고도 반가운 손님이다.

<히든 브레인>을 펼쳤을 때 이 책이 소설적 기법으로 심리학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았다. 논제 안에 예시가 포함된 형태가 아니라 사건을 축으로 논리를 드러내는 식이다. 그 분량의 분배 못지 않게 스릴러를 방불케하는 소설적 구성이 이야기 자체로 의미있다. 테러리즘, 성폭행, 살인, 치매, 정치 이야기가 모두 사실에 근거하고 있어 '논픽션' 기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술되기에 이론이 방해받는 법은 없다. '천부적 이야기꾼'이라 불리는 상커 베단텀을 통해 논픽션과 심리학이 만난 지점에 선다.

..(숨겨진 뇌의 역할을 과장해서)윌에게는 숨겨진 뇌만 있다고 가정해보자. 윌을 사무실을 환하게 만드는 미소를 가진 영리하고 잘생긴 젊은이로 보는 대신, 웹(네트워크)의 중심점이라고 상상해보자. 그 중심으로부터 관계의 선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뇌로부터 나온 가는 실 하나가 그가 성장했고 부모가 지금도 살고 있는 뉴욕의 콜드 스프링 하버로 흘러간다. 또 하나의 가는 실이 가톨릭 사제인 그의 형이 살고 있는 인디애나 주의 사우스벤드로 향한다. ... 윌이 가는 곳이 어디든 새로운 케이블들이 사방으로 싹튼다. ...어떤 케이블은 윌이 직장으로 가면서 모르는 누군가를 스쳐지나감에 따라 순식간에 생겨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책에서

9.11테러 현장의 89층에 있었던 한 직원의 하루를 의도적 발상으로 쫓는 이 광경은, 관계망의 역학과 집단심리, 숨겨진 뇌가 어떻게 윌의 행불행을 나누었는지를 긴박하게 보여준다. 무척 특수하고 극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절제된 묘사를 통해, 평상시의 위기나 사소한 위험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식으로 도피하고 대응하는지 충분히 병치시켜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되었다. 저자가 의도한 바 아주 개인적인 사례에서부터 살인, 테러리즘, 정치로 동심원처럼 확장하고 있는 숨겨진 뇌의 작용들에 빨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숨겨진 뇌   

나는 왜 위기 속에서 집단의 동의를 얻길 원하는가. 아이에게 인종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같다는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눈썹 짙은 외국인 노동자가 다가오면 가슴이 움찔하는가. 길을 잃고 울고 있는 아이에게 보이는 동정은 왜 매일같이 굶주려가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향하지 못하는가. 나는 왜 응원해 마지않을 친구에게 속좁은 질투심을 느끼는가.

이전엔 의심의 여지도 없었던, 어쩌면 더 생각하기 싫은 질문들이었지만 '숨겨진 뇌'의 존재는 이 무형의 감정들을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숨겨진 뇌는 절대 우리의 재능을 능가해 똑똑함을 발휘한다든가 어려운 일들을 해결해주는 새로운 능력자가 아니다.

의식적인 마음은 합리적이며, 신중하고, 분석적이지만 숨겨진 뇌는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들을 하기 위해 마음의 지름길을 잘 이용한다. 의식적 뇌는 느리고 신중하지만, 숨겨진 뇌는 빠르게 활동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숨겨진 뇌는 속도을 얻기 위해 정교함을 희생한다. 숨겨진 뇌는 간결하지만, 예리하지는 못하다. 숨겨진 뇌는 우리를 세계에 신속하게 동화시키고, 우리가 빠른 결정을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일련의 간결한 도구들을 준다. (책에서 정리)  
 
숨겨진 뇌의 이런 행동방식을 통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이성적인 판단을 거스르면서까지 세상과 단절된 터널을 유의미하게 통과할 수도 있다. 물론 그 터널 안에서는 터널밖의 규범이 이단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불합리한게 뻔한 다단계 판매나 사이비 종교 집단에 편입되는 것 또한 '숨겨진 뇌'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실은 전혀 이상하거나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경험할 때, 그들을 '미치광이'로 부르는 건 그들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내가 책을 읽는 건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서다. '숨겨진 뇌'는 <존 말코비치 되기>의 7과 1/2층 같았다. 

오히려 '우리는 왜 의식적인 뇌가 있을까.'라고 묻고 있는 이 지적이면서 감수성 넘치는 책에 대한 호평 대신 <히든 브레인>의 마지막 구절을 그대로 옮겨본다.

이 책은 합리적 마음이 얼마나 숨겨진 뇌의 교묘한 책략을 감당해내기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또 이성이 편향을 극복할 수 있는 우리의 유일한 보루라고 주장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성은 우리의 등대이며, 우리의 구명조끼이다. 이성은 양심의 목소리이다. 그게 아니면, 양심의 목소리여야만 한다.   


숨겨진 뇌와 무의식
         

숨겨진 뇌, 무의식적 편향이 <히든 브레인>의 핵심 코드이기에 앞서 프로이트가 명명한 무의식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야했다. 

억압된, 허용되지 못하는 욕구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세계만으로는 의도와는 다른 행동들을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 최면, 자각, 꿈에 의해서 무의식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다면 이 숨겨진 뇌로의 접근법은 전혀 다르다. '이기적 유전자'에 가깝다는 저자의 말을 참고 한다면 유전자가 자기복제하기 위해 종과 무관하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듯이 숨겨진 뇌 역시도 어떤 가치의 지향 없이 다양하게 확산 되기만을 기다리는 독립적 정신활동이다. 무의식, 잠재 의식, 암시성과 같은 개념들이 숨겨진 뇌 안에 포괄된다고 하니, 더 이상 미천한 증명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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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가 되는 비밀 17가지
E. L. 코닉스버그 지음, 이원형 옮김 / 지양어린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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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네요. 아이를 재우고 듀오백 의자에 앉아 부팅을 기다리고, E 아이콘을 더블클릭하면 웹세계로 진입하는 포털 창이 뜹니다. 서울과 인천, 다시 서울, 그리고 대전을 경유해서 딱 한 주만에 모니터 앞에 앉았습니다. 지난 주에 읽고 미처 포스팅 하지 못한 책들이, 개키지 않은 빨래 옆에 쌓여 있습니다. 이 아줌마는 아무래도 아이 옷의 얼룩보다 정리되지 못한 책에 더 마음이 쓰입니다.          

<스타가 되는 비밀 17가지>에 대해 떠들고 싶어 안달이 나놓고도 어찌 태연한 척 일주일 씩이나 밖을 쏘다녔나 싶습니다. 허구의 세계가 저를 더 흥분시킨다는 사실을 이제 인정해야겠습니다. 제겐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남편과, 인생의 쓴 맛과 함께 담배를 빼어물 수 없는 아이와, 벚꽃과 날씨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옆집 언니가 있습니다. 지금은 죽었지만 '스타가 되는 비밀'에 대해선 일갈해줄 수 있는 내쇠적인 배우 '탈룰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곳은 여기, 바로 블로그의 글쓰기 창 뿐입니다.

탈룰라라면 제게 무슨 조언을 해줄까요. 

"그건 고독이야. 고독을 느낄 수 있는 건 인간 뿐이고, 고독을 물리치치 않아야 하는 게 배우야. 스타가 되고 싶은게 맞다면 지금 그 냄새를 기억해. 그렇지만 사람들 앞에선 널 꼬치꼬치 드러내면 안돼."

"너무 길게 이야기하지 마라. 훌륭한 설명이란 수영복 같아야 하는 거야. 수영복은 최소한의 크기로 모든 것을 드러내지."

후자가 진짜 탈룰라의 이야깁니다. 제가 지금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쓰기 시작하면서 알게됩니다. '스타가 되는 17가지 비밀'의 '스타'대신 그 무엇을 우겨넣어도 통찰력을 줄만한 시적 비법들이 이 소설의 가능성이군요. 긴장됩니다. 아슬아슬 치부만 가리고 이 소설이 준 감동에 대해 쓴다는 게 어렵게 느껴집니다. 

이 글쓰기 창은 무대입니다. 세상은 제게 '아줌마'란 직책을 주었지만 저는 배우(연필 한다스)이길 자청했습니다.

"무대 안쪽에서 보면 왼쪽이 오른쪽이다. 무대 안쪽이 뒤쪽이고, 무대 아래가 앞쪽이다. 극장의 무대는 거울에 비치는 세상과 같아."

거울만큼 분명한 것도 없지만 거울만큼 거짓으로 위장된 것도 없습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모습을 비추는 거울은 내면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노력합니다. 블로그라는 무대는 스스로에 의해 검열된 모습만을 비춥니다. 탈룰라가 일깨웁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너희들은 지금 배우라는 거야.

저는 이 블로그의 마법을 현실로 믿습니다. 그래야 진짜 배우가 될 수 있습니다. 연극 연습이 심장, 폐, 그리고 평소 쓰이지 않는 신체기관을 튼튼하게 만든다면 블로그의 글쓰기 연습은 청소기를 돌리거나 반찬을 만드는데는 쓰이지 않는 지적 영감을 단련시킵니다. 기껏해야 책이라는 통로가 필요한 의존적 과정이지만 자음과 모음을 분해하고 밑 줄을 옮겨 적고 주석을 다는 일이 적어도 자동기술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이 저를 위로합니다. 오늘 모니터 앞에 엄정히 책을 두고 앉아서 무슨 말을 하게 될 지 일부러 재단하지 않습니다. 그건 '아줌마'에게 허용되지 않는 '연필한다스'의 스릴입니다. 얼마나 영악하게 훌륭한 연기를 하느냐가 관건입니다.

또 다시 탈룰라는 뒤통수를 칩니다.

"나는 사람들이 왜 스타가 되려고 애쓰는지 모르겠어. 스타가 된 후에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보이려고 그렇게 애쓰면서 말이야."

제게는 답이 있습니다. 애초 스타가 되려는 게 아니라 '똑같이'되려고 시작한 일입니다. 탈룰라도 맞습니다. 특별해 진다는 건 외로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똑같이 보일 수 있다면 특별함은 더욱 빛날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어떻게 읽으실 건가요. 

지금껏 아줌마와 연필한다스를 분리하기 바빴지만 모두 제 삶의 일부분이라는 건 당연하겠지요. 말콤과 진마리가 탈룰라의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투명인간으로 공간이동을 했다해도 '보이지 않는 것'도 삶의 한 부분임을 인정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스타가 되는 비법, 즉 여왕석으로 상징되는 남은 하나는 무엇일까요. '답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같은 어처구니 없는 교훈이라도 탙룰라가 던진 말이라면 흔쾌히 수락할 생각입니다. 

'이만큼 했으면 됐잖아?'라고 또 다시 7개 째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였을 때 각자의 영역으로 연기처럼 사라져야 합니다. 그것이 스타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준비 입니다. <스타가 되는 비밀 17가지>. 책을 덮었을 때 다시 읽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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