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좀 읽어야, 200쪽은 읽어줘야 책 좀 읽었다,는 기분. '먹물만 차서는' 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이는 말인가 봅니다. 골방에 앉아 문자를 해독할 때는 제법 똑똑해졌다는 으쓱함으로 대차게 방문을 열지만, 불한당인양 들이치는 햇볕에 미간이 구겨집니다. 웅크리려는 관성과 슬리퍼를 꿰고 마당으로 진입하려는 운동력이 싸우기 시작합니다. 시간으로 치면 매우 짧지만 시공간의 상대운동으로서는 굉장한 한 발자국을 내밀고 있는 샘입니다. 마치 등 뒤로 골방의 지구가 밀려나는 것처럼요.
문자는 계속 읽게 하려는 성질을 가졌다고 가정해봅니다. 무거운 물주전자처럼 문자를 행동으로 옮기려면 상당한 외부의 힘이 필요합니다. 또 독서자와 문자 간의 강렬한 화학적 결합이 스스로 외부힘으로 상정되기도 합니다. 책의 관성에 굴복하는 시간은 문자의 에너지를 깊히 체험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그림은 어떨까요. 그림도 문자처럼 계속 바라보게 하려는 관성을 가졌을까요. 기막힌 풍광을 보고 '눈을 떼지 못했다'는 표현은 그림에도 충분히 그런 가능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실제로 어떤 그림이나 풍경, 장면들은 수시로 머릿속을 들락거리며 멀지 않은 곳에 달라붙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런 시각적 기억들은 생각의 지도에 어떤 표시로 존재할까요.
강물처럼 멈추지 않거나 바다처럼 들고 나는 것이 문자라면 통째로 각인되길 원하는 그림은, 제 생각의 지도에 우뚝한 육지였습니다. 문자의 형상은 추상적이지만 그림의 형상은 구체적입니다. 그 육지의 안온함에 반해 그림을 곧잘 담아두곤 했습니다. 미술관에도 가고, 화첩도 사보고, 화가들의 책도 더러 읽고, 엽서도 모으고, 뭔가를 읽는 것만큼 보는 것에도 공을 들였습니다.
게다가 그림은 그닥 세상과 격리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제게 세상은 구경의 다른 이름이었고 그림 외출은 관성과 싸울만큼 힘겹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오늘도 그림을 봅니다. 그림이 그린 세상을 목격합니다. 글자는 세상을 많이 담으려고 주머니를 부풀리지만 그림은 네모의 인색함으로 넉넉합니다. 운동과 정지 사이에서 머무를 수 있다면 그건 표면적인 힘이 0이 되는 팽팽함 입니다.
엄마가 되어 '문화생활'이라 일컫는 그림구경은 거의 할 수 없었지만 그림책은 제게 무궁무진한 장면을 선사합니다. 여기 '그림책 화가'들이 있습니다. 엄마에게도 알량한 문화생활을 제공하는 그들에게 작은 감사를 전합니다.
만희네 집/권윤덕/길벗어린이//꽃할머니/권윤덕/사계절/2010.6
그림책 작가 권윤덕을 만난 건 <만희네 집>이었습니다. 평범한 주택의 일상 세밀화 정도로 여겼던 그림들이 파노라마의 판형으로 길어진 시계를 확보합니다. 안보이는 게 없습니다. 십장생 자개장부터 서늘한 광에 매달린 조리나 키, 옥상 위로 낮아진 전봇대, 색색의 이불보까지, 눈은 평화롭고 싱싱해 집니다. 산수화와 공필화, 불화를 공부했다는 작가는 옛 그림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려고 노력합니다.(<꽃할머니>에서) 만희를 따라 집안 곳곳을 살피면서 열린 방문 사이나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먹빛으로 칠해지는데, 그건 다음 공간으로 이어지는 소박한 장치예요.
무엇보다 옅은 수묵담채화 풍의 사실적인 그림들이 숨길 수 없는 위트를 발휘하는 곳이, 이집트로부터 세잔, 피카소로 이어지는 입체(원근법의 입체감이 아닌)기법 이예요. 원근법도 사용하고 있지만, 같은 바닥에 놓인 장독들이 마치 서로 다른 위치에서 보고 그린 것마냥 화가의 시선이 일치하지 않아요. 모든 각도에서 본 것을 평면에 나열했을 때 세잔의 정물화는 위태롭고 피카소의 초상화들은 기괴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권윤덕 그림에서 느껴지는 푸근한 재미는 이 책의 주인공인 만희의 시선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인것 같아요. 만희가 바라보는 장독과 엄마가 뜨고 있는 장독 안의 장은 서로 다르니까요. 또 사선으로 기울어진 광은 마치 만희와 함께 엄마에게 비스듬히 기대 이야기를 듣는 모양처럼 정답습니다.
차례로, 이집트 벽화, 위안소 조감도, 부분 확대 사진
이 기법이 한중일 공동 기획으로 나온 평화 그림책 1번 <꽃할머니>에서도 소중한 구실을 합니다. 위안소의 조감도를 담은 한 페이지는 이집트의 벽화처럼 나무가 옆으로 눕고 일본군들이 성냥개비처럼 위안소를 빙 둘러싸고 있습니다.(머리통이 보이는게 아니라) 화장실같이 다닥다닥 붙은 위안부들의 거처가 문앞에 줄을 선 일본군들을 전시하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평면도에는 침대에 널부러진 위안부들과 벨트를 클러 바지를 내리는 수직의 일본군들과 대조적입니다.
말하자면 기법에 담은 생각들이, 시각을 기억으로 새기고 있었습니다.
그 집 이야기/존 패트릭 루이스(글), 로베르토 인노첸티(그림)/사계절/2010.5
왼쪽이<그 집 이야기>, 오른 쪽이 피터르 브뤼헐의 <농가의 혼례>(그림 출처; 네이버 검색)
비슷한 소재의 집 그림 책인 <그 집 이야기> 역시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한 눈에 <교수대 위의 까치>(진중권)에서 만났던 피터르 브뤼헐의 농가 그림을 연상케 합니다. '그 집'이 이 책의 주인공인건 확실치만 집을 채우는 인간들, 또한 이 책의 주인입니다. 집과 함께 집 주변의 대지와도 인연을 맺고 삶을 드러내는 인간들이, 백년 동안 동일한 프레임으로 포착됩니다. 이 부분은 피터르 브뤼헐이 재생했던 소박한 농가의 휴머니즘과 일맥상통 합니다. 백년 동안 인간들은 좀 더 단단해지려 땅을 일구고 혼례와 장례를 치르고, 전쟁을 겪고, 새로운 일가를 이룹니다.
그동안 '집'은 울타리, 피난처, 새로운 꿈이 되면서 인간들을 품습니다. <그 집 이야기>의 또 하나의 백미는 그림을 뒤따르는 짧은 시들 입니다.
한여름이 초록 옷 입고 들러리 설 때/언덕 집 아가씨는 앞날을 꿈꾸며/아랫마을 벽돌장이 청년의 손을 꼬옥 잡는다/혼례를 치르는 동안, 삶은 잠시 숨을 멎는다.
숨이 멎을만큼 정제되고 핵심적인 구절들이 마음을 뒤흔듭니다. 어쩌면 '집'이 사람과 어깨를 거는 순간 이 책은 '시'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림으로 그린 시가 시구와 만나면서 무심한 프레임조차 명암을 바꾸며 화답합니다. 집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시간을 관람하면 대체 '시'란 어디서 나오는지 조금 알듯도 합니다.
파도야 놀자/이수지/비룡소//나무집/마리예 톨만, 로날트 톨만/여유당/2010.6
글씨없는 그림책은 이미 이수지의 <파도야 놀자>로 경험했습니다. 오로지 그림으로 이야기하고, 그림으로 눈맞추는 이런 책들은 아이에게나 저에게나 짧고 깊은 휴식을 줍니다. 낱자를 따라 가는 대신 그림의 물감이 마음에 번지도록 놔두면 그만입니다. 몇 번 보다 지루해지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물론 그림에 주석을 다는 정도로요. 말없이 볼 수 있다면 언제나 그 편을 택하고 싶지만요.
<파도야 놀자>는 개구쟁이 소녀가 파도와 장난을 치는 연속 컷이예요. 붓 펜의 묵빛 부드러움이 푸른색 유화 물감빛 바다에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그 어느때보다 장난끼 넘칩니다. 역시 이 책도 <그 집 이야기>처럼 고정된 프레임 속에서 아이와 파도가 신경전을 벌입니다. 그러고보니 <나무집>도 같은 방식이군요. 말그대로 나무 위에 집이 한 채 있고, 그 곳에 흰 곰과 갈색곰이 차례로 도착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좋은 친구나 연인이 되었나 봅니다. 집에 머무르며 수많은 동료들을 맞이하고, 어울리고, 떠나보내는 과정 일체가 환상적 분위기로 포착됩니다.
생명, 평화, 자연을 노래한다지만 글씨가 없으니 직설도 없습니다. 서로와 나무에 몸을 부비고,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들이 물처럼 계절처럼 흘러갈 따름입니다. 연필로 그린듯한 순도 낮은 파스텔화가 눈을 순하게 길들입니다. 그림을 조목조목 들여다보면 유머러스한 장면들이 숨어 있습니다. 색감으로 먼저 보고 보물찾기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