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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엄마처럼 살아갈까 - 엄마의 상처마저 닮아버린 딸들의 자아상 치유기
로라 아렌스 퓨어스타인 지음, 이은경 옮김 / 애플북스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엄마의 옷
<엄마를 부탁해>가 엄마 밖에서 엄마를 말하면서도 가장 엄마다운 엄마가 부각되는 점은 아이러니다. 박소녀라는 '엄마' 속에 존재하는 '키우는' 유전자는 비단 피붙이들에게만 발휘되는 게 아이었다. 집을 들고 나는 몸뚱이들, 시들어 가는 채마들, 심지어 엄마가 없는 아이들(고아원 후원)에게까지 입술 가까이 밥풀을 붙여 줄만한 실력을 뽐낸다. 더욱이 비릿한 연애의 주인공, 곰소의 사내도 미역국에 밀가루 반죽을 떼어줘야 하는 모성발휘의 대상이었지 않았나.
그러기에 엄마의 상실이 비탄할 만한 것이었고, 극적인 후회와 애통을 위해서 엄마는 부득불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비탄할 만한 일은 세상의 엄마들이 조금씩은 박소녀를 품고 있다고 해도 절대로 이 전형적인 모델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끝끝내 '희생'의 면모에 대해서는 거부했지만 백만이 넘는 독자들의 공감 영역에 '희생'을 제외한다면 '엄마 신드롬'을 어떤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 희미해진 감성에 불을 붙이고 톱아보게 한 중심이, 다른 사람이 부르는 엄마의 낯선 이름이 아닌 각자의 내면과 상상에서 불러온 '엄마'라는 고유명사였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이쯤해선, 지난해 한 작가가 낳았던 '엄마'라는 매끈한 달걀을 깨야할 차례다. 희생과 감내와 침묵과 외사랑이 아닌 질투와 이기와 비난과 강제의 엄마 말이다.
어디에 그런 엄마가 있냐고, 뉴스에나 나오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비운의 여인들을 말하는 거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되묻고 싶다. 당신의 엄마는 만족스러운가.
기브 앤 테이크라는 사회적 기준으로 볼 때 모녀의 관계는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들은 한 쪽으로 기울었을 때 더욱 안정적으로 보인다. 세상의 어떤 관계들은 무게가 달라야 삐걱거림이 없다. '화를 내더라도 사랑한다는 사실을 표명하라'는 육아의 코치는 곰이나 외계인을 만났을 때의 대처법 같기도 하다.
질투와 이기과 강제의 엄마
기본적으로 불공정한 관계의 함수가 <왜 나는 엄마처럼 살아갈까>라는 심리학 서적의 존재 이유다. 전폭적인 지지나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반대로 지나친 참견과 관심으로 딸과의 분리를 인정하지 못했을 때, 세상 모든 딸들은 엄마와의 관계에서 부득이하게 시소를 움직이는 수고를 치러야 한다. (세상 모든 엄마도 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책엔 바야흐로 수많은 엄마들이 등장한다. '박소녀 유형'은 제외되는 듯 하다. 하지만 <왜 나는 엄마처럼 살아갈까>에서도 <엄마를 부탁해> 만큼이나 '나의 엄마'가 쉴새 없이 뛰쳐 나온다.
자신이 받아왔던 외모에 대한 평가 때문에 딸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삶의 기준을 전달하는 엄마, 결핍에 대한 만족감을 위해 딸을 꼭두각시로 세우는 엄마, 자신과 딸을 일체시켜 딸의 독립을 가로막는 엄마, 주체적이지 못해 중요한 결정들을 남편에게 미루는 엄마, 쓸모있는 순간에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왜곡된 자아상을 형성시킨 엄마.
딸을 부탁해
이 책이 그런 엄마들의 딸 이야기, 즉 피해자의 심리치료서라고 단정하진 말자. 앞서 괄호 안에서 말했듯이 이 엄마들도 '엄마의 딸'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 부분이 치료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가 왜 그랬는지'를 상상하고 자신과 연관지어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작업은 <엄마를 부탁해>같은 허구가 보여주는 '내력의 힘'이다.
그렇다고 엄마를 이해하는 관용을 베풀라는 지시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성급한 공감은 더욱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살인을 하게 된 어떤 핍박한 이유들도 범죄를 덮을 수는 없는 것처럼 '엄마를 이해하기'보다는 행위와 감정들을 제대로 꺼내보자는 취지다. 그런 연결고리가 생긴다면 엄마에게서 받은 상처로 인한 분노가 더이상 '자신을 향하는' 바보같은 일을 막을 수 있다. 게다가 엄마 역시도 할머니에게서 무의식적으로 물려받은 것들을 전해줄 가능성이 크다.
또 이런 증상들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리라는 기대도 접어야 한다. 현재 자신의 편협한 관계망이나 왜곡된 자아상, 자신의 딸을 대하는 불안한 태도들이 거꾸로 엄마를 발견하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불행의 모든 연유를 과거나 타인에게서 찾는 것은 어리석지만 그것을 간과하는 것도 현명한 일은 아니다.
구체적인 치료의 과정들은 불가의 명상 수행법을 떠올리게 한다.
문제를 바로 잡으려면 판단하거나 어떤 행동을 하려 하지 말고 이 분노 자체를 느껴봐야 한다. 그러면 분노를 더욱 잘 다스리게 되고, 이를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할지 아니면 아예 표출하지 않을지 결정할 수 있다. 분노는 우리가 똑바로 바라보기 전까지는 우리 곁을 계속 맴도는 유령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더는 분노가 두렵지 않을 것이다. -책에서
분노와 마찬가지로 사랑과 슬픔 역시도
'드러내기, 내버려두기, 밑바닥까지 느껴보기'의
단계로 진행하라고 말한다. 분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반사적 행위들이 과장될수록 진실에서 멀어질 지도 모른다.
엄마옷 벗기
<엄마를 부탁해>가 엄마라는 존재를 진지하게 불러온 건 기쁜 일이지만 완벽하게 정형화된 엄마를 통해, 엄마를 급하게 용서하거나 미화할 가능성을 벗겨버리고 싶진 않다. 엄마는 있는 힘껏 자식을 위하지만, 작가가 직접 말했듯이 '그것이 동등하게 엄마를 기쁘게 한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된다. 엄마도 누군가의 영향력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배운 '딸'임은, 엄마의 왜곡된 목소리를 죄책감없이 가려낼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