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갓난아기 - 소아과 의사가 신생아의 눈으로 쓴 행복한 육아서
마쓰다 미치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뜨인돌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육아서의 진지함은 텍스트가 아닌 독서자 때문이다. 타인의 역사에 이만큼 깊숙히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 또 어디 있을까. 부모는 짜장면과 짬뽕의 기로에서보다 신중하고, 잘익은 여드름을 골라 거울 앞에 선 사춘기보다 진지하다. 하지만 <나는 갓난아기>, 긴장 풀고 웃었다.(갓난쟁이 시기를 지나서 그랬겠지?) 

장자크 루소는 <에밀>에서 '에밀'이란 아이를 키우며 자연주의 교육사상을 녹인 가상의 장場을 마련했다. 한 때 유행했던 '마이펫'을 연상시킨다. 일본에선 육아서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는 <나는 갓난아기> 역시 한 명의 아기를 키우는(혹은 자라는) 이야기 속에 육아공식을 풀어낸다. 재밌게도 픽션이 육아,교육서와 만난 것이다.  

<나는 갓난아기>는 '양육자'가 아닌 '피양육자', 즉 아기의 목소리다. 정녕 바라건데 말랑한 머리통이 끄집어내지는 그 순간 나의 아기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은 누구이며, 여긴 어딘가요?" 

물론 요 영특한 아기는 그런것 쯤은 다 안다. 엄마젖을 과식했다는 것도 알고, 분유에 비타민제를 넣어줘도 귀신처럼 눈치채고, 아파트가 살기에는 별로라는 것도, 기저귀커버가 답답하다는 것도, 옆집 아줌마가 하는 말은 다 헛소리라는 것도, 활동량이 많아 몸무게가 500g정도 미달(망할놈의 평균치에서!) 된다는 것도, 여관이 지낼만한  숙소가 아니란 것도 안다. 게다가 엄마는 내 맘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도 체득했다.




..엄마가 타 주는 분유는 내겐 너무 진하다. 분유 회사는 분유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팔려고 하기 때문에 되도록 진하게 먹는 아이들의 입맛에 맞춰 분량을 제시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각자의 취향이 있다. ... 분유를 조금 적게 넣고 그 대신 물을 좀 더 넣어줬으면 좋겠는데, 순진한 엄마는 분유 회사가 광고하는 숫자대로 정확히 타주려고 애를 쓴다. 싱거운 분유로는 영양부족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갓난아기>40쪽 에서

 
 

맞다. 아기들은 다 안다. 어른들이나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간혹 자신을 잃는 것이지 아기들은 누구보다도 자기에 대해 잘 아는 시원始原의 존재다. 우리는 그들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때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자고로 어른은 자주 울어도 안되며 호기심으로 말썽을 부려도 안되고, 불평을 해서도 안된다. 결국 우리는 아이를 떼어내야만 했다.
 
그래서 아이를 어른의 키로 어른스런 생각으로 잡아당기기 전에(이 힘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아이' 그대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쭉 이어져 왔다. 아마 <나는 갓난아기>도 그 몫을 단단히 했을 것이다. 기어이 경쟁사회는 아이를 삶의 중심에 놓는 지경까지 다다랗지만, 그게 이 책이 홀대당해야 하는 이유는 결코 아니다.




...나는 위도 크지 않고 대식가도 아니어서 한꺼번에 많은 양을 먹거나 소화하지 못한다. 그러니 자주 젖이 먹고 싶어지는 게 당연한 것이다. 밤에 잠깐 깨었을 때 십분 정도만 젖을 먹여 줘도 나를 안고 한 시간 넘게 자장가를 불러 주는 것보다 숙면을 취하는 데 열 배는 더 효과적일 텐데, 어른들은 왜 그걸 모르는 걸까.-62쪽 에서



 

'나는 갓난아기야. 나를 알아줘, 내 얘기를 들어줘' 정도로, 부모중심육아와 아이중심육아에서, 과잉육아와 방치 사이에서, 육아의 환희와 고통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가는 솜씨가 굉장하다. '해야한다'는 묵언의 강요가 사라진 자리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신입 부모들을 모아 다독인다. 아무리 가짜라도 감정이입의 장치는 꽤나 쓸만해서 요 대리아기에게 깜빡깜빡 속아 넘어갈 지경이다.

이 아기는 <나는 갓난아기>에 출현하기 위해 각종 증상과 질병에 시달려야 했고, 심지어 개한테도 물려봐야 했다. 알만큼 아는 부모도 이리저리 휘둘려야 했고, 주변인물들은 엉터리이거나 달관자이거나 속물이어야 했다. 수집되고 과장된 현실들은 시트콤처럼 유쾌했고, 기어코 메시지를 전하는 힘도 잃지 않았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문학육아서' 한 권이 출생했던 것이다.
 
소아과 의사로서 메시지의 객관성을 검증받은 마쓰다 미치오의 몇몇 생각들은 양육법의 조언을 넘어, 부모의 양육 본능을 끄집어낸다. 아이와의 소통에서 가장 난항을 겪을 두 돌 전까진 이성(코칭)보다는 본능이 앞서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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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고 놀라지 마시라
케빈 마이클 코널리 지음, 황경신 옮김 / 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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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늘도 다시 쳐다봤다. 어제도 그랬고 아주 옛날에도 그랬다. 대놓고 보지 않아야 된다는 묵언으로 흘끗봤다. 그리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어쩌면 더 힘차게)팔 다리를 내저으며 내 삶, 비장애의 영역으로 되돌아 온다. 나는 이제 그와는 무관하다. 하지만 엄마손을 꼭 쥔 아이는 묻는다. 

"저 사람은 왜 휠체(어)를 타고 있어?" 

그렇다. 전혀 무관하지 않다. 아이를 낳으면 무관심이야말로 특권이 된다. 나와 무관한 일은 거의 없어져버린다. 드세고 대차지지만 아줌마는 물잔을 찰랑거리는 감수성도 가지게 된다. '미담'은 더이상 예쁜 이야기가 아니라 아줌마가 그려야 할 미래의 붓칠이다.

<나를 보고 놀라지 마시라-더블 테이크>가 미담은 아니다. 연하지도, 강인하지도, 감동적이지도 않다. 우스꽝스럽게 꼬꾸라지고 놀랄만큼 담백하다. 두 다리 없이 태어난 20대의 이야기치곤 무척 가뿐하다. 하지만 다시 돌아보는, 실은 시선을 'take'하는 우리의 눈은 그다지 가볍지 못하다. 굉장한 불운을 목도하는 상대적 안도감일지도 모르고 우리와 다른 신체에 깃든 고통스런 사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심정적 불편함을 감수하고 읽어야 하는게 장애 극복기고 더불어 '나도 사는 데 너도 살아라'같은 용기를 채집해야 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나를 보고 놀라지 마시라 (원제 'double take' ) 케빈 마이클 코널리/황경신 옮김/달




더블 테이크(double take) ; 「문득 갑자기 다시 돌아보는 것」글자 그대로 또한 상징적인 의미에서,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람 또는 사건의 의미에 대해 '문득 갑자기 다시 돌아보는 것'

하지만 이 책, 지금 우리얘기하는 거 맞지? 되돌아보는 우리와 시선을 맞추자는 거지? 왜 쳐다 보냐고 묻는 거 맞지?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감출수 없는 호기심에 대한 정당한 태클?


아얘 사진까지 찍어두었군. 촛점의 흔들림도 개의치 않고 올려다 본 구도로 찍힌, 두려움과 호기심이 깃든 아이들이나 떫고 노골적인 표정의 어른들. '이것은 다리없는 사람의 스케이트보드입니다'라고 적힌 구르는 판 위에서 이른바 '더블 테이크'를 포착한 수 백 수천 개의 컷 중 18개의 사진이 각 장을 장식하고 있다. (총19장으로 되어 있지만 나머지 한 장은 저자 케빈이 스키타는 장면이다) 

사실, 이 사실은 명백한 스포일러다! 중반 이후 서서히 밝혀지는 사진의 각도에 정말로 책을 'double take' 했으니 말이다. 말을 꺼냈으니 다시 담지는 않겠다. '이건 '역전'이군.' 속으로 생각한다. 그 사진 속에서 감시자는 우리가 아닌 그다. 그러나 어쩐지 케빈이 통쾌하지만은 않다. 이게 무슨 꿍꿍인지 고민하고, 장애를 '이용'하는 수작이 될까 걱정도 한다. 

'자경단 퍼레이드'사건은 매우 상징적이다. 케빈이 속한 팀은 본디 없었던 다리를 이용해 유혈이 낭자할 신체절단 이벤트를 벌일 계획에 들뜬다. 케빈은 팀에 기여하는 자신의 역할에 거의 병적인 자부심에 차 있었고, 약간의 실패조차 예감하지 못했다. 불쾌감이나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던 구경꾼들 덕택에, 자신을 구경거리로 만든 프로젝트에 대해 그만한 가치가 있었는지 되묻는다. 

그는 다시 본격적으로 '장애 재활용'프로젝트를 구상한다. 바로 더블 테이크의 시선을 붙잡는 이 사진들이다. 오스트리아, 러시아, 일본..각국의 많은 도시들을 스케이트보드와 맨손으로 누비면서 쳐다보는 사람들을 카메라로 쳐다본다. '뒤 돌아봐'라고 주문을 걸 판이다. 달라진게 있다. 적어도 그가 웃음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비슷한 감정이 몰려 온다. '수동적이면서도 공격적인' 복수의 형식이기도 했고, 일종의 치료법, 카타르시스 이기도 했지만 이기적인 목적임을 자각한다. 
 
그 고민들이 명확히 해결책을 찾은 것 아닌 듯 하다. (케빈은 이제 겨우 스물셋이다!) 어쨌든 그는 끝까지 갔다. 그가 받은 시선들을 되돌려 주었고, 자신의 존재를 거부하고도 싶었다. 낭떠러지 앞에 서 본 사람은 안다. 이제 반대 쪽으로 몸을 돌려 다시 힘껏 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이가 큰다면 성공담 말고, 이런 도전기와 분투기를 권하고 싶다. 게다가 그의 작문실력은  A+++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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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엄마처럼 살아갈까 - 엄마의 상처마저 닮아버린 딸들의 자아상 치유기
로라 아렌스 퓨어스타인 지음, 이은경 옮김 / 애플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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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옷

<엄마를 부탁해>가 엄마 밖에서 엄마를 말하면서도 가장 엄마다운 엄마가 부각되는 점은 아이러니다. 박소녀라는 '엄마' 속에 존재하는 '키우는' 유전자는 비단 피붙이들에게만 발휘되는 게 아이었다. 집을 들고 나는 몸뚱이들, 시들어 가는 채마들, 심지어 엄마가 없는 아이들(고아원 후원)에게까지 입술 가까이 밥풀을 붙여 줄만한 실력을 뽐낸다. 더욱이 비릿한 연애의 주인공, 곰소의 사내도 미역국에 밀가루 반죽을 떼어줘야 하는 모성발휘의 대상이었지 않았나.
 
그러기에 엄마의 상실이 비탄할 만한 것이었고, 극적인 후회와 애통을 위해서 엄마는 부득불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비탄할 만한 일은 세상의 엄마들이 조금씩은 박소녀를 품고 있다고 해도 절대로 이 전형적인 모델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끝끝내 '희생'의 면모에 대해서는 거부했지만 백만이 넘는 독자들의 공감 영역에 '희생'을 제외한다면 '엄마 신드롬'을 어떤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 희미해진 감성에 불을 붙이고 톱아보게 한 중심이, 다른 사람이 부르는 엄마의 낯선 이름이 아닌 각자의 내면과 상상에서 불러온 '엄마'라는 고유명사였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이쯤해선, 지난해 한 작가가 낳았던 '엄마'라는 매끈한 달걀을 깨야할 차례다. 희생과 감내와 침묵과 외사랑이 아닌 질투와 이기와 비난과 강제의 엄마 말이다.
 
어디에 그런 엄마가 있냐고, 뉴스에나 나오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비운의 여인들을 말하는 거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되묻고 싶다. 당신의 엄마는 만족스러운가.

기브 앤 테이크라는 사회적 기준으로 볼 때 모녀의 관계는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들은 한 쪽으로 기울었을 때 더욱 안정적으로 보인다. 세상의 어떤 관계들은 무게가 달라야 삐걱거림이 없다. '화를 내더라도 사랑한다는 사실을 표명하라'는 육아의 코치는 곰이나 외계인을 만났을 때의 대처법 같기도 하다.




질투와 이기과 강제의 엄마
 
기본적으로 불공정한 관계의 함수가 <왜 나는 엄마처럼 살아갈까>라는 심리학 서적의 존재 이유다. 전폭적인 지지나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반대로 지나친 참견과 관심으로 딸과의 분리를 인정하지 못했을 때, 세상 모든 딸들은 엄마와의 관계에서 부득이하게 시소를 움직이는 수고를 치러야 한다. (세상 모든 엄마도 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책엔 바야흐로 수많은 엄마들이 등장한다. '박소녀 유형'은 제외되는 듯 하다. 하지만 <왜 나는 엄마처럼 살아갈까>에서도 <엄마를 부탁해> 만큼이나 '나의 엄마'가 쉴새 없이 뛰쳐 나온다.

자신이 받아왔던 외모에 대한 평가 때문에 딸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삶의 기준을 전달하는 엄마, 결핍에 대한 만족감을 위해 딸을 꼭두각시로 세우는 엄마, 자신과 딸을 일체시켜 딸의 독립을 가로막는 엄마, 주체적이지 못해 중요한 결정들을 남편에게 미루는 엄마, 쓸모있는 순간에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왜곡된 자아상을 형성시킨 엄마.  


딸을 부탁해

이 책이 그런 엄마들의 딸 이야기, 즉 피해자의 심리치료서라고 단정하진 말자. 앞서 괄호 안에서 말했듯이 이 엄마들도 '엄마의 딸'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 부분이 치료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가 왜 그랬는지'를 상상하고 자신과 연관지어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작업은 <엄마를 부탁해>같은 허구가 보여주는 '내력의 힘'이다.  

그렇다고 엄마를 이해하는 관용을 베풀라는 지시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성급한 공감은 더욱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살인을 하게 된 어떤 핍박한 이유들도 범죄를 덮을 수는 없는 것처럼 '엄마를 이해하기'보다는 행위와 감정들을 제대로 꺼내보자는 취지다. 그런 연결고리가 생긴다면 엄마에게서 받은 상처로 인한 분노가 더이상 '자신을 향하는' 바보같은 일을 막을 수 있다. 게다가 엄마 역시도 할머니에게서 무의식적으로 물려받은 것들을 전해줄 가능성이 크다.   

또 이런 증상들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리라는 기대도 접어야 한다. 현재 자신의 편협한 관계망이나 왜곡된 자아상, 자신의 딸을 대하는 불안한 태도들이 거꾸로 엄마를 발견하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불행의 모든 연유를 과거나 타인에게서 찾는 것은 어리석지만 그것을 간과하는 것도 현명한 일은 아니다.

구체적인 치료의 과정들은 불가의 명상 수행법을 떠올리게 한다. 


문제를 바로 잡으려면 판단하거나 어떤 행동을 하려 하지 말고 이 분노 자체를 느껴봐야 한다. 그러면 분노를 더욱 잘 다스리게 되고, 이를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할지 아니면 아예 표출하지 않을지 결정할 수 있다. 분노는 우리가 똑바로 바라보기 전까지는 우리 곁을 계속 맴도는 유령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더는 분노가 두렵지 않을 것이다. -책에서

분노와 마찬가지로 사랑과 슬픔 역시도 '드러내기, 내버려두기, 밑바닥까지 느껴보기' 단계로 진행하라고 말한다. 분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반사적 행위들이 과장될수록 진실에서 멀어질 지도 모른다.


엄마옷 벗기
 
<엄마를 부탁해>가 엄마라는 존재를 진지하게 불러온 건 기쁜 일이지만 완벽하게 정형화된 엄마를 통해, 엄마를 급하게 용서하거나 미화할 가능성을 벗겨버리고 싶진 않다. 엄마는 있는 힘껏 자식을 위하지만, 작가가 직접 말했듯이 '그것이 동등하게 엄마를 기쁘게 한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된다. 엄마도 누군가의 영향력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배운 '딸'임은, 엄마의 왜곡된 목소리를 죄책감없이 가려낼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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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 김정남 소설
김정남 지음 / 북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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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뒤에는 남성, 이라는 화자와 남성,이라는 작가가 우뚝하게 서 있다. 평범한 언어로 예민하게 일상의 부조리를 끌어내는 '여성스러운' 화자들에게 지극히 공감해 왔다는 사실을 거꾸로 자각하게 해준 소설집.  

소란스럽고, 미묘하고, 간지러운 느낌이 '여성스러운' 소설의 단서라면 <숨결>은 앞의 모든 형용을 거세한 채 던져진 살덩이 같다. 상처에선 정확히 피가 흐르고, 한계의 구분선은 명징하고, 동물적인 욕망은 직선으로만 존재하는 세계에 발을 담근 기분이다.
 
아시다시피 남성작가들이 모두 이런 소설에 합류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해 마지 않는 영미 작가 레이먼드 카버는 부엌과도 같은 협소한 공간과 단순한 동선, 식탁과 침대에서의 대화, (거의 감지하기 힘든)약간씩 뒤틀린 관계만으로도 지속가능한 파장을 보여주었다. 그를 존경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도 굵직한 서사의 힘이라고는 할 수 없는 예민한 감각으로 무장하긴 마찬가지다. 반면 헝가리 여류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은 이만큼 잔인하게 남성화된 문체를 만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드는 작품이다.
 
얼마 안되는 소설편력까지 끄집어 낸 건 이 단편들의 지독한 설정들 때문이다. 교통사고 가족이라 명명한 레커차 운전기사가 끝내 맞는 불운은 집 나간 부인의 시체를 아무것도 모른채 끌어 날랐던 지난 밤이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의 현대판일까?) 동영상 과외 강사로 절제된 식사와 충분한 정욕을 집안에서 모두 해결하는 정 박사는 절대 자기가 히키코모리가 아니라고 웅변한다. 서민의 한달치 월급봉투를 단번에 숍에 지불하는 사서와의 보름간의 희롱에 '어머니, 제 걱정일랑 하지 마세요. 서울에서 부잣집 딸 만나서 호의호식하고 있어요'라고 뇌까리고 마는 남자는 원룸텔로 돌아와 쓸쓸하다. 


생략의 생략을 거듭한 진술서들이 무척이나 불리해 보인다. 누굴 대변하고 누굴 비난하는 건지 쉽게 편들기가 힘들다. 물론 <숨결>의 모든 포즈는 시니컬이다. 주장을 담지 않고 '조명'하는 것만으로도 소설은 강력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르다. 도시의 꿉꿉한 삶을 다루는 것만으로 그의 시선은 만천하에 드러난 샘이다. 그러므로 '사회 비판'이라는 철지난 모토는 미뤄두자. 

문제는 그가 삶을 소화해내고 있는 방식이다. 다분히 직설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성적 서사의 진행은 소설 속의 삼류극장 간판 마냥 촌스럽고 동시에 아득하기도다. 비극의 무대에 올려진 주인공들은 고통을 향한 대사들을 응집하고 그외의 생의 이면들은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것만 같다.  

이 아주 오래된 소설적 기법이 새삼 낯설게 느껴지는 건, 여태 실은 다양하다고 할 수 없는 여성적 섬세함들이 지배하고 있는 소설들을 읽어왔기 때문이겠다. 지나친 자기 고백과 자아 성찰에서 한 걸음 물러나 '소설'이라는 '거짓말'을 되살리는 이 무뚝뚝한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 본다.
 
대단한 발견도, 중요한 변수도 아니지만 '이야기'를 마주하는 내 눈은 두 개의 동공만큼이나 균형을 잡고 싶어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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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누가와 - 鬼怒川
단이리 지음 / 나남출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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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한일전이 제일 재밌지' 아르헨티나 전을 보며 남편이 한 말이었습니다. 경술국치 백년.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백년이면 세월의 강물만도 억만겁은 흘러갔을테고, 우리에게 일말의 앙금이라고는 남아있지 않을법도 한데 '역사'는 전혀 그럴 의향이 없나봅니다. 


하긴 위안부의 삶을 처철히 재현한 권윤덕의 그림책 <꽃할머니>를 말끄러미 보고 있자니 흘러간 건 아무것도 없다,는 역사의 각인을 되새기게 됩니다. 해소되지 않은 치욕과 분노는 언제고 되살아 나 복수심을 일깨웁니다. 한일전이 재밌는 건 이겼을 때의 쾌감이 남다르기 때문이겠지요? 또 스포츠만이 선사할 수 있는 공정한 조건의 싸움이 일견 한일관계의 어긋난 부분을 보상해주기도 합니다.
 
네, 그러고보니 한일전이 진짜 재밌어보이기도 합니다. 한 번쯤의 승리에 찾아오는 우월감보다는 역사의 속내를 뒷주머니에 찔러넣고 누구나 앞마당에 모여 무기없이 알량한 조약 없이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이 세계는, 코 앞에 닥친 백년 전의 치욕에 비하면 너무도 평화로우니까요. 고통을 유희로 전환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분노의 처분법은 맨 먼저 분노를 응시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우월감인 용서는 분노를 덮어버리고 심지어 자괴감마저 들게 합니다. '일본은 없다'고 거부하는 것도, 일본의 위력을 깎아내려 우리를 추키는 것도 신나는 일은 아닙니다.

지금껏 일제의 야욕만을 대한제국 점령의 유일한 이유로 설명하는 역사관에서 균형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로지 피해자의 권리만 학습하고 누차 억울한 마음을 고한다고 해서 피의자의 주장을 막아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전 <기누가와>라는 살인추리소설을 통해 일본의 극단적인 우파들이 견지하고 있는 자세를 엿봤습니다. 말하자면 미개한 조선을 개화시켰다는 자부심이 미화가 아닌 실화(주인공의 실화)로서 인간사에 누적되어 있었습니다. 


<기누가와>/단이리/나남/2010.4 

그가 한국인 국회의원을 죽인 살인자 인데다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사실은 지당한 비난과 분노에 역의심을 살만했습니다. 일제가 대한제국에 가한 폭력과 잔인성만으로는 경술국치 100년을 톱아보는데 큰 장애가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극단적인 살인현장에서 발견하는 상대의 '입장'은 현재 내가 미워하고 있는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 되묻게 합니다. 

한국의 국회의원 박민자는 민주투사이자 일본의 역사적 과오를 비판하는 정의파로 경술국치 100년, 동경에서 대규모 항의집회를 준비합니다. 순진한 계산법으로 정당한 주장이 적법하게 발휘되는 동시에 위기를 겪고, 한일전의 한판승마냥 잠시나마 위안을 얻는 전말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자 단이리가 인용했듯 '역사에는 교묘한 통로들과 까다로운 복도들과 문젯거리들이 있게'(T.S. 엘리엇) 마련입니다. 그는 이것을 '우리 자신이 직접 역사에서 꺼내오는 인식과 감정들'이라고 말했는데, 저는 비슷한 말로 실제의 '역사'와 '역사의 현상'의 충돌로 바라봤습니다. 

박민자에게 역사란 정치적 계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고, 이를데 없이 모순적인 행위를 낳기도 했습니다. 박민자의 아버지는 일제의 징용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일본에 귀화해서 성공한 재일교포로 박민자의 막대한 정치자금은 일본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더없이 가까운 일본인 이복자매를 두고 자신의 컴플렉스(음경선망-성기를 동경하는 심리)를 해소하는 장소로 한국이 아닌 그토록 날서게 비판한 일본을 선택했다는 사실 역시, 순수한 역사관으로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녀를 죽인 가즈야는 그의 핏속에 단 한 가지, 식민역사의 우월성만이 거침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증조부와 조부가 모두 조선총독부의 뛰어난 관료였다) 극단적으로 '역사'만으로 살인을 할 수 있는 건 오히려 박민자 일텐데 말이죠. 주검과 살인자는 이토록 다른 지점에 있습니다. '역사의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의 '역사'를 죽입니다. 하지만 공통점도 있습니다. 둘 다 가족에게서 물려받은 컴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이죠. 이 부분은 한일 공동의 과제처럼 들립니다. 

<기누가와>에는 사건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한국의 여형사 배영희를 등장시킵니다. 그녀는 가즈야 집안의 내력을 살피면서 통치자의 역사기록을 마주하게 됩니다. 배영희가 드러내는 사념, 고민, 혼란들을 지금 우리의 심중과 겹치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경술국치 100년 째, 또 다시 주검과 살인자로 만나 물밑으로 대립하는 한일간의 입장이 수사관의 중립적 견해로 정리됩니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 일본이라는 타국으로부터 식민통치를 당한 과거는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을 일본에서는 막연한 피해의식이라거나 우라미(원한)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과거의 일을 두고 한국과 일본 사람들이 충돌하는 가장 큰 요인은... 당시 서구세력이 아시아를 지배하고자 하므로 일본이 서구세력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하기로 '선택'하였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이는 지금도 일본의 많은 우익인사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라고 봅니다. 또 하나는 일종의 공리주의인데, 일본의 식민통치를 조선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결과적으로 일본의 통치가 조선의 근대화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주장이지요. 어떤 이들은 식민통치가 없었다면 조선은 러시아에 먹혀 버렸거나 오늘과 같은 발전이 없었다고 공공연히 말하지요."

이후 배영희는 '반일감정'의 불성실함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습니다. 일본의 호스트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우월감을 느끼려했던 박민자의 행동으로 공허한 신념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간과 쓸개를 걸어놓고 고통을 잊지 않도록 되새기는 것은 아닐겁니다. 

<기누가와>의 해법은 살인자가 의당 받아야 할 처벌(자살)과 어긋난 신념의 단절이었습니다. 동시에 일말의 계산과 위선, 절제되지 않은 복수심을 국가주의로 위장한 박민자 역시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역사의 신념을 변형없이 가두는 것도, 제식대로 풀어놓는 것도 모두 위험한 일처럼 보입니다. 이 양끝을 가로지르는 외줄에서 아슬아슬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한일관계는 분명한 판결을 기다릴 수 있는 살인사건은 아닙니다. 식민의 역사가 거대한 제국주의 속의 흐름이었음을 저는 우선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인 여형사 배영희의 말을 마지막으로 떠올려 봅니다. 

...동경의 한복판에 있는 일본경찰청의 책상에 앉아 100년 전에 조선에서 긴 세월을 보낸 한 일본인의 기록을 보면서, 자신이 마치 역사라는 상상의 공간 속에서 일탈하여 떠다니는 하나의 먼지라는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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