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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 쓰는 글쓰기 - 명로진의 인디라이터 시즌 2
명로진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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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글쓰기 책을 보면서 낄낄댔습니다. 블로그에 아얘 딴 살림을 차린 제게 작법 책은 교과서만큼 진지하거나 지루하거나 둘 중 하나였습니다. 오규원의 <현대 시작법>도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도 안도현의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도 <맛있는 글쓰기의 길잡이>도 유익한 참고서였지만 당장 손가락 관절에 펜을 쥐어 줄만큼 강력한 동기부여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다 제 탓입니다) 문청시절 읽었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가 개중 가장 뼛속을 후볐던 기억이 납니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아직 읽지 못한게 아쉽긴 하지만 <내 책 쓰는 글쓰기>만의 특별 것저리는 어디에도 없을것입니다.  

마치 달리기 주자가 출발선에서 신호총 소리를 들은 자동반사적 시점 같았다고나 할까요. 저는 들썩거렸습니다. 제게 뛰쳐나가지 않고는 못베길 만큼 시공간의 정적을 깨는 단발이었습니다. <내 책 쓰는 글쓰기>의 비법들은 모두 살을 부데끼고 나온 것 같았습니다. 종이와 펜, 모니터와 자판 사이 보다 밀착된. 폼도 없고 겸손도 없습니다. 내가 아는 모든 걸(그게 모든 비법은 아닐지라도) 전수하겠다는 봉사정신이 심금을 울립니다. (이 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사이긴 해도)


인디라이터


여기에는 있지만 다른 책에는 없는 것 중 하나는, 쓰기부터 출판 후 A/S까지의 과정을 시원스럽게 내다볼 수 있다는 거죠. 저자가 살사책을 완성하기 위해 살사의 고향 쿠바에 다녀와서 적잖이 딴지거는 인물에게 '쿠바에선 그렇게 안추거든?'이라고 했던 말이 '내 책에는 다른 책에 없는 뭔가가 있거든?'이라고 들립니다.  

예문도 많고 반면교사도 있고 책을 내본 사람의 충고와 가르쳐본 사람의 경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책에는 없는(100% 확신할 순 없지만) 날개 프로필 쓰기, 기획안 돌리기, 출판사와 컨텍하기, 가장 중요한 '인디 라이터', 즉 상업적인 글쓰기에 대한 독려가 있습니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대우받는 시대가 갔다는 통찰은 서글프기도 하지만 여태껏 외면하고 싶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전 여전히 작가들의 고루한 사색을, 난해한 요구를 기꺼이 감내하는 편입니다. 베스트셀러같은 최전방은 아닐지라도 지독한 고통의 허기로 불러들이는 극단적인, 혹은 비현실적인 세계가, 보존되어야 할 유물이라는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등단문인 신춘문예로 당선된 소설가들의 월 평균 수입이 100만원이라해도, 오히려 그런 이유로 더더욱 문학에의 애착은 강해져만 갑니다. 말하자면 저는 난생처음 '인디라이터'의 세계에 눈을 돌렸습니다. 지지부진 매끄럽지 못한 문장이나 손보면서 재능없음을 한탄하고 있을 때, 그들은 정말 멋지게 한 방 먹이고 있는 것입니다.   


작법이 작법


<내 책 쓰는 글쓰기>. 사실 이 책 한 권이 스스로의 이론들을 집약한 표본입니다. 

모욕과 치욕의 순간을 글로써라. 입사원서 접수만 100번 했다고? 265번을 채워라 그리고 <365일 만에 취업 성공하기>로 책을 내라.

저자는 책에 자신의 모욕과 치욕의 순간을 빼놓지 않습니다. 배우 섭외도 끊기고, 책이 무슨 소용이랴 모두 내 던지고, 머릿속의 먹물을 빼버렸던 어떤 시절이 사이 읽기에 끼어있지만 이론대로 결코 빠지면 안됩니다. 독자들은 주인공의 시련을 기대합니다.  설교대신 드라마를 원합니다.

돈을 내고 살 독자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시장에서 선택되지 않는다. 

이 책은 안마부터 시작되는 별의 별 서비스로도 모자라 집까지 모셔다줍니다. 다시 11번 장미!를 찾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대출받아 의료기계를 잔뜩 장만한 의사가 문을 열고 들오는 첫 환자를 대하는 마음으로 글을 쓸 준비가 됐는가?

이 비유는 의사의 소명과 밥벌이가 글쓰기와 얼마나 닮았는지를 상상하게 합니다.  

방송국의 김탁환이 작가지망생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작가는 혼자 밥 먹을 줄 알아야 한다"였습니다. 저자는 인디라이터는 고독을 인정해야한다면서 이런 식으로 두툼한 살을 붙입니다. 앨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를 인용하며 우리는 '흥미로운 예시도 없이 주장부터 한다. 에피소드도 없이 원론부터 말한다'에 대한 적절한 예가 됩니다. 

'한 장의 원고지를 메우는 작가의 피를 토하는 고통'은 시인이나 소설가의 몫이다. 인이라이터는 '글을 쓰는 동안 자유롭고 글쓰기를 통해 오르가즘을 느끼는 사람'이어야 한다. 글쓰기가 지겹거나 어렵가고 느낀다면? 쓰지 않으면 된다. 

저자의 문장들은 (가벼운게 아니라)가뿐합니다. 힘이 안들어 갑니다. 어떤 춤 강사의 말처럼 '춤출 때 근육을 쓰지마라'는 것을 글로 보여줍니다.

프로필 쓰기의 핵심은 '드러내기'다

그의 프로필을 봅니다. 16개의 책이 드러났습니다. 다른 책도 팔릴 것입니다. 저자는 기자의 발과 마감의 유전자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쓰든 '정보를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쓰려고 하는 대부분의 정보는 이미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 나와 있다. 중요한 것은 해석이다. 해석은 이미지를 통해 전달된다.

결국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명로진은 이 책으로 글쓰기에 대한 그만의 해석법을 정리했습니다. '설명하든 묘사하든 재미있게 써라'가 그 중 하납니다. 하위 오락문화로 여겨진 '게임을 벤치마킹하라'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삼천포로 빠져라도 그렇습니다.  

물론 알고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헝그리 정신은 배고프다고 쓰는 것이 아니라, 진짜 배고픈 것입니다. 문제는 제가 그런 관문을 버틸만 하겠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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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미국 미술관 - 문화저널리스트 박진현의
박진현 지음 / 예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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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과 사진과 형용사가 압권입니다. 형용사요? 미술, 작품의 감흥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늘 '형용사'를 사용해야하는 한계에 부딪힙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림 앞에서 저는 운전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듭니다. '빵빵'으로 '아름답다'는 울분을 토하는 수밖엔 별 도리가 없습니다. 황금비율로 계산된 르네상스의 조각품이든, 드로잉 실력에 자신 없었던 잭슨 플록이 페인트 흩뿌리기로 만든 No.1이든 참 매 한가지로 아름답습니다.

그 '아름답다'가 어떻게 분화되는 지, 마치 꽃들의 축제처럼 '형용사의 잔치'를 배불리 만끽할 수 있는 미국 미술관 가이드 입니다. 그 찬탄의 대상이 미술관이 소장하는 작품은 물론이고 미술관 건물의 양식, 미술관에서 만난 아티스트까지 해당됩니다. 수려한 문장이나 비유는 없습니다. 깜빡이는 방향지시등이나 비상등, 야간 조명등 등, 감정은 거세되었지만 단순한 필력으로 속도감있게 시승할 수 있는 미국 미술관 탐방입니다.
 
실은 미국 미술을 만날 기회는 적었습니다. 미술 사조들을 다루는 책들에서 주목되는 쪽은 아무래도 낭만주의, 인상주의, 큐비즘, 추상화파 이고 미국화가들은 늘 변방처럼 보였기 때문이죠. 요행히 잭슨 플록이나 앤디 워홀을 거의 독보적으로 미국을 대표할 만한 화가로 인식하고 있을만큼 미국 미술에 대한 제 조명은 어두웠습니다.

옳거니, 좋은 기회다 싶었죠. 부러 찾아볼만하지는 않았지만 최대 강대국 실용주의 노선의 미국에 어떤 예술가의 피가 흐르고 있을 지 훑기에 딱 적당해 보였죠. 이건 시누이도(전 시누이가 없습니다만) 못말리는 제 허영심 입니다. 


지식을 연결해주는 '눈이 즐거운' 정보들을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골치 아픕니다) 네. 이 책은 정보서에 가깝지만 원한다면 미술사의 흐름을 심심치 않게 꿰찰 수 있기도 합니다. 미국 미술관이라지만 본국의 작품보다는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이 양적으로 우세합니다. 특별히 전통을 고집하는 '아메리칸 포트아트 뮤지엄' 같은 곳이 아니라면 거물급 작품들이 미술관의 자존심을 추켜세웁니다. 히틀러의 독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유럽 화가들의 작품이 미국으로 몰리게 된 연유들과 같은 삼삼한 정보들이 달콤합니다. 

'글로벌 경영의 성공신화'로 소개된 '구겐하임 미술관'을 볼 때는 지난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을 즐겁게 떠올렸죠. 과거의 현재를 확인한 샘입니다. 또 미국의 미술관들이 대부분 재력가들의 기증과 기부로 이루어진 컬렉션이라는 사실이 미국의 문화적 지형을 가늠해 보게 했습니다. 


당시 뉴요커들이 가장 증오하는 기업가였던 헨리 클레이 프릭은 인색했던 양반이었을텐데, 선뜻 미술관 건립에 눈을 돌리게 된 계기가 재밌습니다. 라이벌들이 은퇴 후 자선과 나눔에 관심을 보인데에 대한 경쟁심으로 추측된다는 것입니다. '문화 경쟁력'이 공공성이나 고차원적인 욕구가 아니라 말초적인 질투심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미국 미술관들이 표방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아이같은 모습입니다. 

또 대부분의 미술관들이 미술관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이 참 부러웠습니다. 고고한 품격, 쾌적하고 지적인 공간의 대명사인 미술관의 이런 시도는 미국인의 실용주의를 많이 닯았습니다. 각 주의 개성있는 미술관들의 면면으로 자유로운 표현 수단을 중시하는 그들을 만납니다. 또 건립자의 정신이 대대로 존중되는 전시틀이 남달랐습니다. 

학술적 가치로 그림들을 줄세우는게 아니라 개인(물론 만 명의 재산을 모은 만큼 돈이 많은) 컬렉터들의 취향이 그대로 존중 받으면서 전시의 감흥이 새로워질 수 있다는 또 다른 대화의 창을 열어보입니다. 거장들의 작품도 넘쳐났지만 인상적인 미국작가들을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도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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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만드는 책 - 북 아티스트 강진숙의, 만들면서 행복하고 보기에도 아름다운 책 만들기
강진숙 지음 / 글을읽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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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만든다구요? 고가의 기계나 특별한 기술 없이도, 무슨무슨 센터에 다니지 않아도 집에서 책을 만들 수 있을까요? 집에서 빵도 만들고 미싱질도 하는데 책이라고 못 할 거 있나요. 대신 이 책은 우리가 아는 '책'은 아닙니다. 바인딩 같은 고난이도 기술을 전수하는 것도 아닙니다.

'북 아트'라는 말에서 떠올릴 수 있듯 제품이 아닌 작품을 만드는 일입니다. '작품'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두꺼운 종이를 앞 뒤로 접어서 만든 아코디언 북이라면 어떨까요. 너무 시시한가요. 여러 장의 종이를 겹쳐 반으로 접고 실로 꿴다면 그럭저럭 보급형 책 흉내를 낼 수도 있습니다. 같은 크기의 종이만 있으면 얼마든지 묶을 수 있는 전통제본법도 별 부담이 없습니다. 팝업북도 수학적 구도에 대한 머리씨름 없이 누구나 쉽게 따라해 볼 수 있는 메뉴얼을 제공합니다. 터널 북, 별북, 과일 책도 아이와 함께 해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난이도 있는 제작법도 등장하지만 이 책의 주된 목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본 없이도, 네모 반듯한 형태가 아니어도, 꼭 직접 쓴 글이나 그림이 아니어도 사진으로, 도장으로, 스크랩으로 '아무나' 책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이 즐겁습니다. 북 아티스트 저자의 작품뿐아니라 어린이, 일반인, 대학생의 작품까지 다양하게 소개된 점도 정답습니다. 어렴풋이 책의 원형과 만나고, 새로운 책의 가능성도 상상해 봅니다.  

스탬프를 찍어 만든 아코디언 북

스텐실로 그린 접기 책

종이를 과일 모양으로 잘라 접고 등끼리 붙여 만든 과일 책

시나 노래가사, 편지를 적은 하트 북

형태를 벗어난 책, 강진숙(저자)


쉽게 도식화한 팝업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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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글쓰기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래리 W. 필립스 엮음, 이혜경 옮김 / 스마트비즈니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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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날개 위에 무엇이 있든, 매의 깃털이 어떻게 배열되었든 그것을 보여주거나 그것에 관해 말하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

라고 말하며 글쓰기에 대한 대답을 회피했던 헤밍웨이도 말기에는 그의 소설, 편지, 인터뷰, 기사들을 통해 글쓰기에 대한 글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은 그의 작품과 작가에 대한 애정의 발로로 엮어진다. 한 번쯤은 이루져야 했을 작업물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헤밍웨이의 작품들이 어떤 작업과정을 거쳤을지 상상해 보는 일은, 어떤 구절 앞에서 짜릿하기까지 했다. 세기의 거장답게, 하드 보일드 스타일의 대표자답게 거침없고 실랄한 作법들이 열거된다. 동시대 작가들에 대한 비판,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혐오, 진실한 글 한 줄에 대한 강한 신념, 경험이 촉발하는 상상력 등을 헤밍웨이의 육성으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갑다. 

글쓰는 사람이라면, 특히나 작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지표로 삼을 만한 다양한 충고가 담겨져 있다. 하지만 역시나 책을 덮고 드는 생각은 헤밍웨이의 작품을 더욱 강하게 갈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가 말했던것처럼 글쓰기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 신비로운 과정을 모두 내포할 수는 없으므로 작품 한 권이 글쓰기에도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헤밍웨이는 대단한 독서광이었던 듯 하다. 책 속에 열거되는 작품들만도 엄청나며 뛰어난 고전들을 읽어치워야 하는 이유는 그것과 다른 것을 쓰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필자와 같은 속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포부에 가깝다. 또 글쓰기와 글쓰기 사이에 책을 많이 읽는다는 그는 자신의 글을 잊어버리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것도 일종의 作법에 포함될 것이다. 글쓰기의 샘을 마르지 않게 하는 방법은 다음에 쓸 글감이 분명해 졌을 때 작업을 중단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작업까지는 그에 대해 떠올리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면 다시 작업대 앞에 앉았을 때 막힘이 없을 거라는 연금술 같은 비법을 소개한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이면 그 다음부터는 쉽다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작가 안에 자리잡은 분할된 서사가 단 하나의 문을 통해 줄줄이 빠져나올 것 같은 그림이 그려진다. <엄마를 부탁해>의 신경숙 작가와의 인터뷰때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 째다'라는 문장이 나를 찾아왔고 그 다음부터 소설이 풀리더란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단순하고 진실한 평서문 하나면 된다는 말.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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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기 구겐하임 자서전 - 어느 미술 중독자의 고백
페기 구겐하임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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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금은 창작의 시대가 아니라 수집의 시대다' 


미술계의 수많은 사조와 천재를 배출했던 20세기. 미술운동 전체가 거대한 투기사업의 현장으로 바뀌기 이전 페기 구겐하임은 뛰어난 수집가로서 화가의 조력자로서 전시의 컬렉터로서, 뉴욕과 런던 베네치아등을 오가며 천재 화가들의 작품을 선점하는 재력과 재능을 선보인다. 

유럽등지를 돌며 전시활동을 하고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는 주식처럼 거래되는 미술품들의 가격에 벼락이라도 맞은듯 놀란다. 진정으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작품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란 사실에 통탄하고 책임감을 느낄만큼 그녀의 미술계를 향한 사랑은 특별했다. 너무 열심히 노력만 하는 예술가들이 잃은 독창성에 대해 '더이상 그림이 아니다'라고 일갈하는 그녀의 자신만만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천재가 10년 단위로 나올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피카소, 몬드리안, 칸딘스키, 클레, 레제, 브라크, 그리스, 에른스트, 미로, 브랑쿠시, 아르프, 자코메티, 립시츠, 콜더, 플록 등으로 만족해야한다고 선언한 그녀가 할 일은 그들을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이었다. 


어느 미술 중독자의 고백





이 책은 뒤샹의 다다와, 에른스트의 초현실과, 플록의 추상표현을 한 여성의 반짝거리는 개인사를 통해 엮을 수 있는 독창적인 자서전이다. (뒤샹은 그녀의 선생님, 에른스트는 그녀의 남편, 플록은 그녀가 후원하는 화가였다)         

후원자라고 하면 고급스럽거나 유별난 취미로 미술품을 수집하고 화가를 돕는 큰 손을 상상할 수 있었다. 페기 구겐하임을 만나기 이전에는 말이다. 부의 권력자도, 자선가도, 하물며 예술가도 아닌채로 예술과 예술가 모두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자신의 수단(돈 이겠다)을 동원해 국가를 넘나들며 미술관을 짓고 예술가를 돕는 사명감을 가진 이 여성을 뭐라고 불러야할까.
 
'페기 구겐하임'이라는 이름을 각인 시킬만한 이 자서전은 마치 처음 보는 실로 만들어진 옷감 같았다. 솔직하고 유쾌한 건 그녀의 기질일테지만 평범한 문장으로 유머를 구사하고, 단순한 설명으로 상황을 압축하고, 담백한 묘사로 상상력을 돋우고, 똑박또박 적은 일기 한줄로 감정의 굵은 선들을 잡아낸다.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은 날아다닐 듯 경쾌한 한 여자의 자화상과 천재 예술가들의 질척한 기질들이 어우러져 시대의 낭만을 그려낸다.   

욕망의 발견


지루한 건 딱 싫어할 타입인 그녀답게 어린시절 가족일가에 관한 통찰들은 흥미롭다. 목탄을 먹고 사는 삼촌이나 모피코트를 쌓아놓고 아무에게나 주는 외삼촌, 치유불가능한 고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다녔던 이모 등 괴상스럽거나 불운한 가족사는 그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학교에 가지 않고 좋은 교육을 받으면서 '고상한 취향'을 길렀다는 페기 구겐하임은 타이타닉호의 침몰로 아버지를 잃는다. 학교 졸업 후 만난 급진적인 가정교사로 인해 질식할 것같은 가족사로부터 해방될만한 놀라운 씨앗을 뿌리고 모든 것을 보고자하는 강렬한 욕망으로 미술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남자 수집사


그녀의 작품 수집사가 자서전의 가장 큰 비중이긴 하지만 '남자 수집사'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재미 중 하나이다. 대단한 남성편력으로 예술가이자 남자였던 그들을 만난건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솔직하게 밝히는 그녀의 애증의 역사는 편생 한 두(?)번의 결혼으로 생을 마감하는 우리에게 오히려 진보적인 고백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나는 첫 경험을 했다.그것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로렌스 베일과의 7년간의 결혼생활 덕분에 20세기 지식인의 세계에 합류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녀는 남편이란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보다 그 생활이 끝난 다음 더 만족스러운 존재인것 같다고 총평하기도 한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어지는 두 번째 남편 존 홈스는 천재라는 평을 듣는 이였는데 법적 결혼 상대는 아니였지만 아주 특별한 관계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여자를 제대로 '이해'하는(이런 남자가 있다니!) 남자였다는 그는 죽는 날까지 페기의 생각 하나하나를 이끌어주는 인생과 예술의 교사 역할을 해냈다. 

영국의 시골에서 스스로 최대한 유용한 존재가 되기를 갈망한 페기. 그녀의 오랜 친구(!)로 등장하는 마르셀 뒤샹은 현대미술에 입문할 수 있는 초석을 만들어주었고, 당시 사무엘 베케트(!)를 향한 일방적인 열정을 지닌 상태였다.(이 때부터 거의 책을 넘길 때마다 소위 천재적인 화가나 예술가라고 알려진 이름들이 주변인물로 셀 수 없이 등장한다)

몬드리안, 브르통, 브랑쿠시, 에른스트, 플록과의 에피소드나 애정전선은 이름하나하나가 주는 묵직한 느낌에 먼저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또 이 예술가들을 위한 헌신 혹은 열정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발휘되었는지 확인하는 담백한 글귀들로 인해 그녀의 과감성과 대범함, 상상력들을 부러워 하고만다. 그것들이 간혹은 미친 생각이었을지라도 파격적인 아이디어로 혼란을 안겨줄지라도 예술가를 사랑하듯 그녀를 사랑할 수 밖에 없을 고백들이다.
 

금세기미술 화랑

사실 가장 주목되어야 할 부분은 그녀가 기획한 혁신적인 전시들이다. 가장 열정적으로 몰두했던 분야인 이 일은 그녀의 자신만만함과, 담백하고도 대담한 고백들과, 미술계를 향한 거침없는 직언들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증명한다. '어느 미술 중독자의 고백'이라는 부제처럼 그녀는 그림을 너무나도 사랑했고, 특히 20세기 현대미술을 위해 몸과 돈과 매력을 흩뿌렸고, 그 열정은 막을 수 없이 흘러넘치기도 미술계의 균형을 기가 막히게 맞추어 내기도 했다.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은 '나는 추문을 일으키는 여자이고 더없이 멋진 여자이니'[각주:1] 가능한 고백이리라. 
                        



  1. 기원전3~4세기경 나그 함마디에서 출토된 이시스 찬가 중에서-안현미 시인의 시집 이별의 재구성 에서 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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