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 - 어느 미술 중독자의 고백
페기 구겐하임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인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지금은 창작의 시대가 아니라 수집의 시대다'
미술계의 수많은 사조와 천재를 배출했던 20세기. 미술운동 전체가 거대한 투기사업의 현장으로 바뀌기 이전 페기 구겐하임은 뛰어난 수집가로서 화가의 조력자로서 전시의 컬렉터로서, 뉴욕과 런던 베네치아등을 오가며 천재 화가들의 작품을 선점하는 재력과 재능을 선보인다.
유럽등지를 돌며 전시활동을 하고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는 주식처럼 거래되는 미술품들의 가격에 벼락이라도 맞은듯 놀란다. 진정으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작품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란 사실에 통탄하고 책임감을 느낄만큼 그녀의 미술계를 향한 사랑은 특별했다. 너무 열심히 노력만 하는 예술가들이 잃은 독창성에 대해 '더이상 그림이 아니다'라고 일갈하는 그녀의 자신만만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천재가 10년 단위로 나올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피카소, 몬드리안, 칸딘스키, 클레, 레제, 브라크, 그리스, 에른스트, 미로, 브랑쿠시, 아르프, 자코메티, 립시츠, 콜더, 플록 등으로 만족해야한다고 선언한 그녀가 할 일은 그들을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이었다.
어느 미술 중독자의 고백
이 책은 뒤샹의 다다와, 에른스트의 초현실과, 플록의 추상표현을 한 여성의 반짝거리는 개인사를 통해 엮을 수 있는 독창적인 자서전이다. (뒤샹은 그녀의 선생님, 에른스트는 그녀의 남편, 플록은 그녀가 후원하는 화가였다)
후원자라고 하면 고급스럽거나 유별난 취미로 미술품을 수집하고 화가를 돕는 큰 손을 상상할 수 있었다. 페기 구겐하임을 만나기 이전에는 말이다. 부의 권력자도, 자선가도, 하물며 예술가도 아닌채로 예술과 예술가 모두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자신의 수단(돈 이겠다)을 동원해 국가를 넘나들며 미술관을 짓고 예술가를 돕는 사명감을 가진 이 여성을 뭐라고 불러야할까.
'페기 구겐하임'이라는 이름을 각인 시킬만한 이 자서전은 마치 처음 보는 실로 만들어진 옷감 같았다. 솔직하고 유쾌한 건 그녀의 기질일테지만 평범한 문장으로 유머를 구사하고, 단순한 설명으로 상황을 압축하고, 담백한 묘사로 상상력을 돋우고, 똑박또박 적은 일기 한줄로 감정의 굵은 선들을 잡아낸다.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은 날아다닐 듯 경쾌한 한 여자의 자화상과 천재 예술가들의 질척한 기질들이 어우러져 시대의 낭만을 그려낸다.
욕망의 발견
지루한 건 딱 싫어할 타입인 그녀답게 어린시절 가족일가에 관한 통찰들은 흥미롭다. 목탄을 먹고 사는 삼촌이나 모피코트를 쌓아놓고 아무에게나 주는 외삼촌, 치유불가능한 고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다녔던 이모 등 괴상스럽거나 불운한 가족사는 그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학교에 가지 않고 좋은 교육을 받으면서 '고상한 취향'을 길렀다는 페기 구겐하임은 타이타닉호의 침몰로 아버지를 잃는다. 학교 졸업 후 만난 급진적인 가정교사로 인해 질식할 것같은 가족사로부터 해방될만한 놀라운 씨앗을 뿌리고 모든 것을 보고자하는 강렬한 욕망으로 미술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남자 수집사
그녀의 작품 수집사가 자서전의 가장 큰 비중이긴 하지만 '남자 수집사'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재미 중 하나이다. 대단한 남성편력으로 예술가이자 남자였던 그들을 만난건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솔직하게 밝히는 그녀의 애증의 역사는 편생 한 두(?)번의 결혼으로 생을 마감하는 우리에게 오히려 진보적인 고백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나는 첫 경험을 했다.그것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로렌스 베일과의 7년간의 결혼생활 덕분에 20세기 지식인의 세계에 합류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녀는 남편이란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보다 그 생활이 끝난 다음 더 만족스러운 존재인것 같다고 총평하기도 한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어지는 두 번째 남편 존 홈스는 천재라는 평을 듣는 이였는데 법적 결혼 상대는 아니였지만 아주 특별한 관계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여자를 제대로 '이해'하는(이런 남자가 있다니!) 남자였다는 그는 죽는 날까지 페기의 생각 하나하나를 이끌어주는 인생과 예술의 교사 역할을 해냈다.
영국의 시골에서 스스로 최대한 유용한 존재가 되기를 갈망한 페기. 그녀의 오랜 친구(!)로 등장하는 마르셀 뒤샹은 현대미술에 입문할 수 있는 초석을 만들어주었고, 당시 사무엘 베케트(!)를 향한 일방적인 열정을 지닌 상태였다.(이 때부터 거의 책을 넘길 때마다 소위 천재적인 화가나 예술가라고 알려진 이름들이 주변인물로 셀 수 없이 등장한다)
몬드리안, 브르통, 브랑쿠시, 에른스트, 플록과의 에피소드나 애정전선은 이름하나하나가 주는 묵직한 느낌에 먼저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또 이 예술가들을 위한 헌신 혹은 열정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발휘되었는지 확인하는 담백한 글귀들로 인해 그녀의 과감성과 대범함, 상상력들을 부러워 하고만다. 그것들이 간혹은 미친 생각이었을지라도 파격적인 아이디어로 혼란을 안겨줄지라도 예술가를 사랑하듯 그녀를 사랑할 수 밖에 없을 고백들이다.
금세기미술 화랑
사실 가장 주목되어야 할 부분은 그녀가 기획한 혁신적인 전시들이다. 가장 열정적으로 몰두했던 분야인 이 일은 그녀의 자신만만함과, 담백하고도 대담한 고백들과, 미술계를 향한 거침없는 직언들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증명한다. '어느 미술 중독자의 고백'이라는 부제처럼 그녀는 그림을 너무나도 사랑했고, 특히 20세기 현대미술을 위해 몸과 돈과 매력을 흩뿌렸고, 그 열정은 막을 수 없이 흘러넘치기도 미술계의 균형을 기가 막히게 맞추어 내기도 했다.
<페기 구겐하임 자서전>은 '나는 추문을 일으키는 여자이고 더없이 멋진 여자이니' 가능한 고백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