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역사, 예수의 역사 모두 '종교'라는 사명보다는 '역사'라는 거짓말을 농후하게 포함시켜 왔다. 

'역사는 모두 헛소리다' -헨리포드
'역사는 승리자가 자신을 위해 기록한 것'-<세계를 속인 거짓말> 서문에서

이미 한몸으로 지칭되어왔던 기독교와 예수를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로 방점을 찍어보자. 확실히 기독교의 역사는 예수 탄생 이후이므로 충분히 가능한 명제다. 굳이 교회에 나갈것도 없이 예수가 전하는 신의 말씀을 경청할 수 있다는, 다소 불안정한 가능성도 제기해보자. 그렇다면 기독교를 향해있던 의심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다.

혹시 일종의 기독교라는 사업계획 안에 예수가 가장 적절한 인물로 채택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문화적, 정치적, 집단적 산물이 신의 말씀과는 방향을 달리할 수 있다는 여실한 가능성으로, 위선적인 교인들이나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다소 폭력적인 슬로건을 향한 예민한 반응을 거두어본다. 

한 마디로,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예수 모독이 아니다. '사람'이 만든 기독교에 대해 '사람의 잘못'을 조금 짚어보고자 하는 것 뿐이다. 로마가 국교로 기독교를 채택하면서 제외한 복음들은 정확히 정통파와는 대결되는 것이었다. 정치적 결정이 신성을 내세우는 종교에서도 이루어지면서, 기독교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히람의 열쇠와 프리메이슨>은 콘스탄틴누스 대제가 '공식'성서에서 누락시킨 <도마복음>의 구절들을 증인으로 세운다. 로마교회가 차기 지도자로 선호했던 인물은 예수가 지목한 야고보가 아니라 베드로였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을 편집하는 '종교 만들기' 작업이 시작된다. 신약성서에서 야고보의 말씀 역시 누락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절차였다. 

더욱 중요한 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 알고 있었던 '예수'가 사실, 두 아들 중의 하나였고 둘 모두 구세주 또는 메시아라고 주장했던 점이다. 따라서 둘은 모두'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게다가 둘 중 의인으로 불리며 당대 더 낳은 평가를 얻었던 건 예수가 아니었다. 

한 명은 십자가 위에서 죽고 한 명은 그렇지 않았다. 죽지 않았던 자가 야고보, 바로 둘 중 더 낮았지만 평가는 더 높았던 자였다.
 -<히람의 열쇠와 프리메이슨>에서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었는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교환되었는지, 대체되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어왔다는 사실도 처음이지만 그런 불씨가 제공되는 고고학적 사적이 존재한다는 건 더 놀랍다. 의도적 탈락이 잠시 진실을 가리긴 했지만, 그건 고양이털을 숨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대단한 사실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주로 백인의 훤칠하고 반듯한 인물로 그려졌던 예수의 외향에 대한 숨겨진 기록 역시 역사가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거짓말의 단면을 입증한다.  

평범한 외모에 진한 피부색, 작은 체구, 3큐빗의 키(약140센티미터)긴 얼굴에 곱사등이, 코가 길고 눈썹이 맞붙은 성인 남자, 성성한 머리카락은 머리 가운데에서 나뉘고 나사렛인의 태도에 빈약한 턱수염을 가진 자로, 무서운 인상을 풍긴다.
 
신약성서에서 제외된 <요한 행전>에서도 예수는 '작은 체구의 남자'로 기록되고 있었다. 신에 버금갈만한 인물에게 아름다운 용모나 큰 키는 절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예수를 신으로 섬기게 하기 위해 벌인 가식적인 노력들이 들통났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2천 년 동안의 반유대주의 운동을 초래한 거짓말과, 예수가 행한 기적같은 일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확인하면서 감히 기반부터 흔들리는 기독교의 역사를 마주한다. 다만 기독교가 '사람'이 만들었다는 전제를 상기시킨다면, 신 혹은 예수의 말씀이 더이상 욕보이는 일은 없어야한다는 생각이다. 한 권의 책으로(6년에 걸친 공동탐구와 집필의 결과물이었다) 밝혀진 역사적 진실로 성경이 다시 쓰여지기에 기독교의 몸통은 너무 비대하다. 그들(공동저자)이 확신하는 로슬린 성당의 숨겨진 문서가 파헤쳐지기 전까지는.

하지만 여기 기독교인의 철저한 자기성찰을 담은 책이 있다.<왜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을까?> 목사의 반성치고는 꽤 강도도 세고, 위트도 있다. 네 명의 목사와, 평신도 유명 연예인, 사회학자, 반 기독교 방청객들이 두루 등장하는 100분토론이라.





기독교를 위한 변명이나 상식적인 결론의 도출을 위한 장치에 불과하진 않을까, 했지만 수위높은 비판들이 거침없이 쏟아지는 통에 기겁하고 말았다. 초고를 완성하고 원래 뜻과 달리 다른 기독교인을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는 저자는 <MBC100분 토론>의 형식을 빌어 지루한 종교서를 긴장감 넘치는 연극으로 탈바꿈해냈다. 현장의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생생한 토론 현장을 방청한다.
 
붕어빵 기독교, 개독교, 예수없는 기독교, 짝퉁예수,먹사 등 거침없이 비판의 정체를 해부하면서, 옹호를 위한 언급이 아니라 토론을 통한 가치관 찾아내기로 방향을 잡아가는 구성은 참신하고 속시원하다. 예상대로 각기 다른 입장을 가진 패널들이 출연하는데 정통파, 보수파, 급진파로 나뉘어지는 목사들에게서는 현실 기독교의 다양한 모습들을 관찰할 수 있다.
 
필자는 급진적인 대안과 의견을 쏟아내는 조하나 목사에게 동조했지만 정통적인 기독교적 입장이나, 신실한 마음의 연예인 신자 예신자, 기독교를 사회적 안목으로 바라보는 권중진의 말에도 적극 공감했다.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로서 인간이 만든 사회적, 문화적 실체입니다.  ..그런 종교를 신뢰하고 믿는 것과 예수님이라느 존재를 믿는 것을 동일시하게 되면 기독교를 좇아가다가 예수님 신앙을 잃어버릴 수도 있어요. 또한 반대로 기독교를 절대화시킬 수 있는 위험도 있고요.
 
'어떻게 목사로서 기독교를 안 믿고 교회를 안 다녀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는 이성공 목사(가상인물)의 비난을 받은 말이긴 하지만, 기독교가 예수의 모든 것을 포함하긴 해도 예수가 모든 기독교를 포함할 수 있는 건 분명히 아니다. '로마의 공인과 국교화로 시작한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가 아니라 '예수에 관한 종교'였다'고 보는 남예혁 목사(가상인물)의 말로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붕어빵 기독교에 대한 정화력도 대단하다. 예수님의 겉모양만 있을 뿐,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품어내는 생명의 자궁을 잃어버린 쓸쓸한 종교. 그 원인을 짚어보는 것만으로도 해결책은 드러난다. 성격독해력의 저하, '죽어서 가는 천국'에 대한 불순한 이미지, 교회만 나가면 신앙심을 얻을 수 있다는 가벼움, 예수님을 이용해 이루려는 사적인 욕망, 자본주의와 결합한 맘몬주의. 

스스로 몸담은 종교를 향한 화살치곤 대차다. 이참에 기독교, 제대로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무관심을 철회하고 나니 오히려 두 눈은 충실해진다. 의심하는 자를 끌어들일 때는 의심만 걷어주면 된다는 아주 간단한 전도의 룰이 적용된 샘일까.

<제 3의 예수>는 성경독해를 위해 팔을 걷어부친다. 조하나 목사(가상인물)의 말대로 '문자 너머의 말씀이 담고 있는 깊은 뜻과 큰 진리'를 보려는 노력이다. 성경의 진실여부를 떠나 하나의 철학서로 읽힐 수 있다.    





 디팩 초프라(저자)는 예수와의 인간적인 관계를 맺어야 함을 강조한다. 성서를 깊이 파고 든다면, 그 안에 진정으로 종교에 구하는 단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이 환하다. 일방적인 '믿음'과 '교화'를 강조하던 기독교의 몸불리기 전술에 빠졌던 핵심이 아닐까. 기적이나, 희생의 뿌연 안개에서 높은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준 예수가 걸어 나오는 기분이다. 

책은 다양하게 성경구절을 되읊으면서 의미를 재해석하는 데 중점을 둔다. "누군가 너의 빰을 치거든 다른 쪽 빰을 내주라"는 자학이나 순교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비폭력 또는 아힘사로 전해지는 이 구절의 깊은 속내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폭력을 제압함으로써 스스로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말이라는 것이다.     
 
신약에 대해서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남긴 예수 해설서라고 일축하면서 예수 재림에 대한 기대도 단박에 꺽어버린다. 예수와 하나님의 증거에 목마른 교인들에게는 불벼락 같을지라도 예수의 깨달음을 거웃없이 받아들이기 위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천국이 안에 있다'는 말씀은 내면으로 들어감이 깨달음과 같다는 방향으로 풀이된다. 천국으로의 도달을 위한 헌신과 봉사, 묵상등의 방법만으로 내면과 바깥 세계의 모순을 풀어줄 수 없단다! 예수는 매일의 기도와 하나님에 대한 경배로 가득 찬 길을 바라지 않는단다! 저자는 오로지 자신을 깨우치는 깨달음만이 어떤 영적인 길이든 충만히 사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필자도 언젠가는 종교로 귀의할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있다면 내가 아니라 종교가 날 찾아올 것이다. 나뭇잎 한장이 손바닥에 떨어지는 것만큼 우연을 가장해야하는 일이겠지만 무심결에 잡을 지도 모른다. 약한 인간이 깨달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누가 말릴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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