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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9일이 '한글날'이었다. 나라의 '국경일'이었지만 '법정 공휴일'은 아니었다. 2005년 12월, 근 15년 간 각계의 노력으로 '다시' 국경일로 지정 되었지만 '빨간 날'로 기념할 수 없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노는 날이 많으면 나라가 가난해 진다는 것. 한글날을 무심히 지나쳐버리면서 빨간 날의 위력을 새삼 느낀다. 대신 그 날을 즈음하여 쏟아진 도서들이 '한글날'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한달 간 쉬엄쉬엄 한글 관련 책들을 읽어내렸다. 홀로 자축한 한글날. 쓸쓸하고 풍성하다. 책을 돌아보기 전에 한글에 얽힌 역사와 국어사전 이야기를 잠깐 해본다.    

   

한글날로 돌아보는 역사

'가갸날'

<훈민정음혜례>를 완성한 날(1446년 음력 9월)로부터 480주년(8회갑)을 맞은 1926년 9월 26일(음력) 조선어연구회는 기념 축하회를 열었다. 그 때 쓰인 이름이 '가갸날'이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글은 이미 온 백성이 쓰는 글자가 되었지만 한일합병으로 '한글의 규범화'가 정책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던 시기였다. 우여곡절 끝에 1929년 조선어 편찬회가 설립되어 국문연구소의 연구를 토대로 '한글맞춤법통일안'이 1933년 제정되었다.

국문연구소의 과업이었던 '조선어사전'은 일제의 탄압(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첫 간행에 실패하고, 해방 후 2년이 지난 뒤에야 최초의 한글 사전이 탄생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지 500년이 넘은 해였다. 그마저도 일제에 의해 압수되었던 사전 원고가 일본의 패전 직후 격성역(지금의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의 화물더미 속에서 발견 되었다니, 한글이 걸어온 길이 우리네 역사만큼 기구하다. 
 
'한글날'

현재의 '한글날'(10월 9일)은 1945년에 처음 결정되었다.('한글날'이란 명칭은 1928년부터 쓰였다) 한글을 해설한 책인 <훈민정음해례>가 발견되면서 해례에 표기 된 '9월 상한'(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바꾸어 다시 정한다. 한글이 처음 완성되었다고 알려진 1443년이 아닌 <훈민정음해례>(1446년)가 완성된 날이 기준이 되었다. 북한은 반대로 한글이 완성된 날을 기준으로 '훈민정음 창제일'(1월15일)을 기념한다고 하니, 분단의 역사 역시 '한글' 안에 쓰여진다.   

'공휴일'

1946년 훈민정음 반포(<훈미정음해례>가 완성된 날) 500돌을 맞아 처음 공휴일이 되었다가 1949년 '법정공휴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 시절 '공휴일이 너무 많아 경제 발전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1990년 공휴일에서 빠져 '기념일'로 전락한다. 그 이후로 15년 간 각계각층에서 '한글날 국경일 지정 운동'을 벌여 2006년 국민의 정부 때 다시 '국경일'이 되긴 했지만 '법정 공휴일'은 아니었다. 이와 관련해 올 해 취업포탈 '잡 코리아'가 '공휴일로 지정했으면 하는 날'을 묻는 설문조사를 벌여 '공휴일이 부족하다'고 답한 직장인들 중 70%가 넘는 응답자가 '한글날'을 꼽기도 했다. (한글날 즈음에 이루어진 설문이었다)

'겨레말큰사전'

최초의 한글 사전 첫 권(을유문화사)이 1947년 10월 힘겹게 태어나고 또 하나의 의미있는 사전 작업이 2006년부터 시작되었다.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 2005년 2월20일 故 노무현 대통령 시절 남과 북의 어학학자들이 금강산에 모여 민족어 공동사전을 편찬하기로 합의하고 그 이름을 '겨레말큰사전'이라고 했다. 이 사업은 남과 북이 공동으로 추진하여 남북의 언어적 차이를 극복하는 최초의 우리말 사전으로 <표준국어대사전>과 <조선말대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약 7만여 개의 새 어휘를 발굴하여 수록한다. 2009년 본 집필이 시작되 2013년 작업을 마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난 10월 4일 한글날을 앞두고 고은 시인은 ‘절반의 고개를 넘어온 <겨레말큰사전>사업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이기도 한 고은 시인은 ‘지난해 국회에서 의결되고 배정받은 기금 중에서 편찬사업비를 지원받지 못했다’며 <겨레말큰사전>사업의 위기를 알렸다. 

이후 통일부가 2억 9000만원을 지원하겠다고 발표 했으나 북측편찬사업보조비 6억원 등이 빠져 있어 '생색용 지원'에 그쳤다. 고은 시인은 ‘독일은 분단 상황에서도 동서독이 힘을 합쳐 <괴테사전>을 만들었고 중국과 대만은 <양안사전>을 만들어 말의 길을 열어가면서 통일의 순간을 기다렸다’며 ‘남북관계의 긴장과 상관없이 학술적이며 사전학적인 의미로 집필사업이 지속되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현 정부 이후로 불편했던 남북관계의 영향이 의미 있는 민족어 공동사전 사업 마저 삐그덕 거리게 만든 것은 아닐까.   






 

한글날 즈음부터 읽기 시작한 4권의 책. 

<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로의 여행>
이바라기 노리코/뜨인돌/2010.10.5

윤동주를 사랑한 일본 여류작가, 한글로 한국을 말하다.


일본작가의 한국어 공부를 담은 책이다. 전후 일본문단을 대표하는 여류작가 이바라키 노리코(1926-2006)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는 시로 국내에서 이미 유명세(?)를 얻었다. 공선옥 소설의 표제로 쓰였고, 이 시의 형식을 패러디한 작품이 유형진 시인의 등단작이 되기도 했다. 다만 원작이나 원작자의 모습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는데, 거꾸로 그가 '한글'과 '한국문화' '한국인'을 이야기 한다.  

작가의 한글 공부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50세에 남편을 잃은 이바라기 노리코는 한글을 공부하며 사별의 슬픔을 달랜다. 그 즈음 발표한 에세이집이 <한글로의 여행>(1986)이었는데 그 중 '윤동주'라는 수필이 일본 고교 검정 교과서에 실렸고, 1995년 이를 소재로 한 <윤동주 특집> 프로그램이 NHK TV를 통해 방송되면서 양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이번 <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로의 여행>은 이 에세이집의 번역작이자 '아사히 신문'에 연재 되었던 칼럼을 모은 것이다. 신문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글이라 그런지 쉽고 편안하게 쓰여졌다. 무엇보다 명랑하고 재기발랄 하다. 한글 공부의 동기와 난관, 과정들을 술회하는 첫번 째 장 부터 '일본에서 한국어를 배운다는 것'의 아이러니를 재치있게 보여준다. 왜 하필 한국어냐는 숱한 질문에 작가는 '이웃 나라 말이잖아'라고 눙쳐보지만, 여전히 일본인들을 아리송해 한다. 작가만큼은 '무난한' 대답임을 강조하지만.(일본 열도에 한류 바람이 불고 있는 지금과는 사정이 다르다) 

당시 50세가 넘었던 작가의 나이나, 문학계에서의 위상을 고려해 본다면 지식인의 뻣뻣함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놀랍다. 오히려 한글, 한국에 대한 호기심은 아이와 같이 빛이 난다. 쉬운 단어와 소박함이 있는 '이웃나라 민요의 멋'을 알았던 소녀시절을 회상하기도 하고, 조선시대 방랑 화가들이 그린 민화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기도 한다. 그만의 애정으로 혹은 이방인의 눈으로 비춰지는 한글과 한국은 새삼스러운 데가 있다. 되려 '우리가 이런가?'라고 되묻게 된다. '한국어의 울림만큼 낭랑하고 아름답게 여겨지는 언어가 없다' 이 같은 낯 간지러운 구절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신선한 이유 중 하나다.

''당신'일까 '선생님'일까'라는 꼭지에서는 우리나라의 호칭문화가 슬쩍 드러난다. 상대방을 칭하는 대명사 '당신'이 부부사이에서는 허락되지만 연상에게는 무례한 칭호다. 성씨 뒤에 붙는'~씨' 역시 풀네임 뒤에는 가능하지만 성 뒤에 붙여 부르면 실례가 된다. 그래서 '저 나라에서는 선생님이 마구 오간다'는 내용이다. 그러고 보니 책 서평을 부탁하는 출판사로부터 필자도 왕왕 '선생님'이란 호칭을 듣기도 한다. 

작가는 이런 한글 표현법과 일본어 사이의 연관점, 차이점을 찾아낸다.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두 나라간의 격차와 뼈아픈 역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각 민족마다 발성기관의 고유한 특징이 있음을 역이용 해 '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인을 잡아들여 학살한 일, 일본인이 '조선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 한국의 미술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만들어낸 민족에 대해 냉담한 현실을 응시한다. 한글을 배워줘서 고마울 정도다. '한글'이라는 외형적 기능적 아름다움을 사랑하기보다 한글을 쓰는 민족을 이해하려는 마음씀이 뜨겁다.

그녀는 대표작에서도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단순한 시구를 반복하며 패전 후 일본인들의 무력감과 상실감을 담아냈다. 시대의 아픈 곳에 서 있고자 했다. 시를 사랑하는 만큼, 언어를 대하는 예민함을 작가는 '한글 공부'에서도 발휘한다. 학자나 전문가의 논리는 없지만 직관과 감성이 대신한다. 무엇보다 '이웃 나라'에 대한 애정이 깊으면서 단순하고, 단순하면서도 결이 곱다. 물고기가 물을 대하듯 한글을 쓰고 있는 우리에게 새삼 한글 속을 헤엄치게 하는 책이다. 굳이 한글의 우수성을 되새기기보다, 이바라기 노리코처럼 '관계' 속에서 언어를 여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이밖에 '일상 속 한국어 염탐기'라는 두번 째 장에서는 우리나라의 속담, 기발한 일상어들, 세계 유래없는 '모국어의 날'을 만들어 기념하는 한국 이야기를 들려 준다. 또 네번 째 '여행길에 마주친 풍경'에서는 제목처럼 한국 여행길의 에피소드 들을 만날 수 있다. 마지막 장의 '역사에 깃든 한국문화의 표상들'에서는 묵직한 주제들을 다룬다. 숫자로 대신하는 우리나라의 두 기념일인 8.15와 6.25, 일제시대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이야기, '윤동주'라는 수필로 일본 문학 교과서에 소개되었던 '비운의 청년 시인, 윤동주'등이 실렸다. 작가는 마지막 꼭지에서 윤동주가 '일본 검찰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으므로 '일본인 스스로 그 죽음의 전모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어 윤동주의 아우 '일주'씨 와의 만남, 시인의 작품세계, 그에 대한 애틋함을 담았다. 덧붙여 윤동주의 시가 다치하라 미치조의 시와 닮았음을 꼬집기도 한다.



  

(사진은 <다 알지만 잘모르는 11가지 한글 이야기>에서)

<도사리와 말모이, 우리말의 모든 것>
장승욱/하늘연못/2010.10.1

찰진 우리말 뒤엉킨 도사리 장터

글쓴이 장승욱은 알아주는 한글 전문가다. 한글문화연대가 선정한 '우리말글작가상' 수상작가로 지난 해 한글날 즈음에서 <우리말은 재미있다>를 펴내기도 했다. 이번 책은 우리말의 '도사리'를 모아 풀어 쓴 사전 형식이다. 책의 절반은 아예 사전처럼 꾸며 '말모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도사리'란 익는 도중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를 말하는데 이 책을 내면서 '도사리를 한 광주리 모아 팔겠다고 시장 귀퉁이에 나앉아 있는 촌부의 심정'이라고 했다. <우리말은 재미있다>가 집대성된 형태인 듯 하다.   

'사전' 같은 딱딱함은 없다. 우리말 하나하나를 투박한 듯 세심하게 어루만지는 말 맛이 일품이다. 꾸밈 없고 시원시원한 문장에 속도감이 있다. 생소하면서도 낯익은 우리말들을 한눈에 구경할 수 있는 장터는 흔치 않다. '사전'의 탈을 쓰고 저자가 떠는 '익살'을 즐거이 감상하는 동안 찰진 우리말이 뒤엉킨다. 가령 '총각김치과 홀아비김치'라는 꼭지에서는 '처녀김치가 없으므로 영원히 총각신세를 면할 가망이 없는 총각김치도 있다'고 운을 떼며 '홀아비 김치'를 소개한다. 거기다 '총각이 어떻게 홀아비가 되었는지 시간이 넉넉한 사람이라면 한 번 연구해 볼 일이다'고 덧붙이며 ' 써레기김치, 섞박지, 덤불김치, 얼갈이김치, 지레김치, 둥둥이김치 등을 차례로 소개 한다. 마지막에는 수수께끼도 낸다. '김치 가운데 가장 맛이 없는 김치는?' 답은 '기무치'다. 이렇게 생활, 세상, 자연, 사람, 언어 속의 우리말들을 175꼭지에 걸쳐 소개한다.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문장편
김철호/유토피아/2010.10.15

한글을 제대로 쓰기 위한 실용서다. 이미 <국어실력~>시리즈로 '국밥'이라는 별칭을 얻은 책의 '문장편'이다. 20년 동안 글쟁이로, 번역자로, 텍스트 편집자로 살아 온 저자가 낱말편에 이어 이번엔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저자는 책에서 좋은 문장의 세가지 조건으로 '의미의 명확성''표현의 경제성''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글맛'을 든다. 또 이 각각의 목표를 실현한 또렷한 문장, 찰진 문장, 맛있는 문장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알려준다.
 
'은/는' '이/가'로 대표되는 조사의 사용법, 헷깔리는 조사와 연결어미들의 미세한 차이를 다양한 예문과 연습문제를 통해 설명한다. 내몸처럼 쓰고 있는 한글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또 문장을 쓸 때 흔히 저지르기 위운 중복과 쓸데없는 표현들을 걸러내는 방법을 비롯해, 꾸밈말, 문장성분의 호응 등을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한다. 특히 구어체와 문어체에 대한 탐구 편을 통해 '어떻게 쓸 지'에 대한 방향을 잡아 주고, '번역문'에 대한 오류와 실례를 들어 문장 공부의 필요성을 더한다.        



 

<다 알지만 잘 모르는 11가지 한글 이야기>
배유안/책과함께어린이/2010.10.9

어른들도 '잘 모르는' 한글 이야기

글쓴이 배유안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소설로 쓴 <초정리 편지>로 창비 '좋은 어린이책' 대상을 받은 바 있다. 게다가 작가는 학교 선생님이었다. 이 책을 쓰기에 좋은 조건이다. '한글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지식, 그리고 오늘의 한글이 있기까지 험난했던 역사'를 돌아본다. 게다가 한 일본인에게 5년 넘게 한글을 가르쳤다니 이보다 더 한글을 '잘 가르쳐 줄' 사람이 있을까?
책은 조카와 조카가 데리고 온 일본인 친구에게 한글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썼다. 만화가 정우열씨가 그림을 그려 흥미를 돗운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다지만 책의 표제처럼 어른들도 '잘 모르는' 내용이 수두룩하다. 한글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한글이 만들어지고 크게 반발했던 쪽이 실은 집현적 학자들이었다는 사실. 문자를 가지고 있는 100여 개의 언어 중창제자가 밝혀진 문자가 손에 꼽힐 정도이며, 그 중 일상에서 쓰이고 있는 문자로는 한글이 유일하다는 점. 사라진 옛글자에 대한 발음과 사용 설명 등, 두꺼운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사실(史實)들이 풍성하다. 모두 역사적 사료들을 바탕으로 들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의 기반이 튼튼한 이유는 아마도 원저에 있을 것이다. 2008년 한글날 즈음 나온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책과 함께)이라는 인문서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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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이바구 하나 들려드립니다.

옛날에 어떤 왕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왕은 세 아들을 똑같이 사랑해서 자기가 죽은 뒤 어느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할지 고민이었습니다. 왕은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세 아들을 침대 곁으로 불러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내가 요즘 깊이 생각한 게 있는데, 지금 너희들한테 그걸 말해주고 싶다. 나는 너희들 중에서 제일 게으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했다."
"그렇다면 왕국은 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자려고 누워 있을 때 비가 와서 제 눈으로 빗방울이 들어가더라도 이미 눈 감은 것 때문에 그냥 잠이 들 정도로 게으르거든요."
가장 나이 많은 아들이 먼저 말하자 둘째 아들이 나섰습니다.
"그렇다면 왕국은 제 것입니다. 저는 난롯가에서 불을 쬐고 있을 때 발을 끌어당기는 것이 귀찮아서 차라리 발꿈치를 불에 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만큼 게으르거든요."
셋째 아들이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왕국은 제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게으르냐 하면 제가 교수형을 당하게 돼서 제 목에 올가미가 씌워져 있는데, 누가 제게 그 밧줄을 자를 수 있는 날카로운 칼을 준다고 해도 차라리 교수형을 당하고 말지 귀찮게 제 손을 움직여서 밧줄을 자르지 않을 정도거든요."
왕이 이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네가 제일 게으르니 네가 왕이 되거라."
-<어른들을 위한 그림형제 동화 전집>,231~232쪽(<아이들은 이야기 밥을 먹는다>에서 재인용.)

 

 

  

아이들은 이야기밥을 먹는다/이재복/문학동네/2010.6 

 

듣자듣자 하니 게으름이를 찬양하다니요. 이 동화는 참 해롭겠습니다. 권선징악의 공식에 의한다면, 지혜의 씨름장인 동화판에 의한다면, 게으름을 증명하지 못해 어쩔줄 모르는 부지런이가 왕의 간택을 받아 마땅하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게으름도 보상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각인하지 않을까요.
 
그치만 아니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이야기밥을 먹는다>의 이재복 선생님에 의하면 말이죠. 뭐 꼭 선생님 말씀이 아니라도 도덕가의 주장이 무색할만큼 유쾌한 허풍들입니다. 마지막 발언권을 가질수록 유리한 경기 입니다. '게으름'이란 주제가 헛갈리게 만들지만 상상력과 기획력이 돋보이는 답입니다. 어른들은 메시지를 보지만 아이들은 유희합니다. 전혀 헤롭지 않을겁니다.


동화 공부장이 이재복은 더 많은 해석들을 내놓습니다. '근면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기존의 문화 바탕에서 나오는 고정 관념을 비틀어 보고, 뒤집어 보려는 대결 의식의 감정이 숨어 있다.''자본의 이윤 창출을 위해 과도한 경쟁 사회로 몰아가는 지금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내면에도 게으름이 영웅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있다''일의 논리, 이성의 본질, 일중독에만 빠진 사람에게 게으름은 밖을 지향하는 일의 논리보다는 내면을 지향하는 감성적인 직감, 사랑의 본질, 애정 방식에서 여성의 원리를 상징하다고 볼 수 있다''게으름이 아이에게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옛이야기의 시시함을 단번에 깨뜨리는 대목이었습니다. 바보, 마녀(계모), 공주, 괴물이라는 전형도 얼마든지 전복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권선징악'에도, 잔혹한 이야기에도 새 힘을 나눠줍니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으로 못박았던 옛이야기 속의 대결 인물들을 '빛이 되는 인간과 그림자가 되는 인간'으로 바라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빛과 그림자를 떼어 설명할 수 없듯이, 선과 악을 상징하는 두 인물은 모두 우리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겁니다. 왜 이 당연한 사실을 품지 못했던 걸까요.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른들은 이런 동화를 이렇게 읽혔을 겁니다. '나쁜 짓을 하면 벌 받아.착한 사람이 되야 복을 받는 거야' 이제 아이들에게 다르게 읽어줘야 할껍니다. '너의 마음에도 착한이와 나쁜이가 있지?' 

잔혹한 이야기에도 '에너지가 강한 원형의 꿈'이라는 타이틀을 선사합니다. 이런 이야기나 꿈은 귀하게 여겨야 한답니다. 마음속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상징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라지요. 

참으로 조곤조곤, 이야기 하듯이 편하게 들려주는 <아이들은 이야기밥을 먹는다>는 성심껏 글씨를 따라 읽어주거나, 주제가 되는 교훈을 전달하고 마는 '책 읽어주기'의 함정을 깨닫게 합니다. 창의력에 목매 선호하는 창작동화, 좋은 습관에 얽매여 고르는 딱딱한 책들을 돌아보게도 만듭니다. 그런 와중에 위시하고 말았던 옛이야기의 매력도 되찾습니다. 이야기가 놀이고, 유희고, 하나의 세계라는 근본적인 사실을 그새 잊어버린듯 합니다. 건설적인 독서습관이나 학습태도를 위한 수단으로써의 '이야기 책'들이 재발견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전래동화나 명작동화 전집으로 공급책을 확보해야 할까요? 저는 이부분에 일말의 의심을 죽 품고 있었습니다. 유익함 말고도 책을 읽어주는 순간의 신체적, 감정적 교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귀로 듣고 머릿 속으로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빠져 못내 아쉬웠습니다. 제아무리 영감으로 가득하고, 아이의 마음을 끄는 그림이래도 '보는'는 행위에 그친다는게 불구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결심합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매일 밤 할머니가 들려주던 캥거루 이야기처럼 엄마만의 테마도 만들어보자는 제법 당찬 포부를 가졌지요. 책보다는 육성으로, 아이에게 곧 닥칠 분열되고 단절된 세계를 합쳐주고 싶었습니다. '종이'가 아닌 '품'이 앎의 시작이라는 점을 각인하고 싶었습니다.
 




 

 

순전히 제가 읽을 요량으로 짧은 이야기들이 실린 어린이 책 두 권을 보았습니다. 한 권은 이솝이야기, 또 한 권은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하루에 한 편씩 읽고 들려주는 일이 여렵지 않아보였습니다. 돌아보니 아이를 업고 다닐 때, 가장 많이 들려준 이야기가 '호랑이와 곶감' 이었네요. 하지만 거기까지. 아이가 말을 시작하자 지루해 하는게 눈에 보였습니다. 그렇게 여러번 중단하고 나니 저도 힘이 빠져서는 반쯤 포기하고 말았지요.

하지만 위 <아이들은 이야기 밥을 먹는다>와 이어 소개할 <베이비 스토리텔링>이 숨죽인 열망을 일깨웁니다. 맨 처음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결심했을 때 <책 읽어주고 이야기해주는 부모들>이란 흥미로운 책을 봤습니다. 들려주기 좋은 옛이야기의 매력은

지루한 설명 없이, 사건의 연속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그 사건들은 그림을 보듯 이야기의 진행을 상상할 수 있고, 일말의 반복성이 있다.-<책 읽어주고 이야기해주는 부모들> 94쪽



 

 

<아이들은 이야기 밥을 먹는다>와 비교한다면 옛이야기의 외형적 유용성을 언급하는 샘이네요. 옛이야기의 원본을 들려주기 좋게 압축하는 실예를 제시하고, 아이들의 경험과 환경에 맞게 지어낸 이야기들도 담습니다. 책은 고개를 주억거릴만 했지만 어쩐지 제 세치 혀는 굳어버렸습니다. 줄줄 꿸 것 같았던 이야기들이 통 입에 붙질 않았습니다. 아이가 지루한 것도 당연하지요.

그러다 이재복 선생님의 책에서 지당하지만 미처 깨닫지 못한 명확한 단서를 발견합니다.
 
줄거리를 안다고 해서 남에게 재미있게 들려줄 수는 없습니다.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이야기밥을 먹는다> 24쪽

이 두 문장 안에 제가 저지른 실수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줄거리만 알고 감동 받은 적은 없다'는 거죠. 또 한 가지는 <책 읽어주는 부모>가 언급했던 아이의 경험과 환경에 맞는 이야기를 발굴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베이비 스토리텔링>으로 이정표를 찾았습니다.


                                                                                                                                                                         베이비 스토리텔링/로니 M.콜/팝콘북스/2010.4


 

  

이 책에는 주변의 부러움을 살만한,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빠가 등장합니다. 저자이기도 한 로니 M.콜이 풀어놓는 이야기는 'literary fairy tails'(새로 옷을 입힌 요정이야기-옛이야기)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직접 꾸며낸 환타지죠. 칙폭이(기차), 탁탁이(탭슈즈), 햄순이(햄스터)가 지구와 우주, 집안 곳곳을 여행하고 새로운 인물들을 만나서 낯설거나 혹은 익숙한 경험을 하는 내용들입니다. 

별안간 걱정이 앞섭니다. "내가 과연 이야기를 지어낼 능력이 있을까?" 우선 이 중대한 문제는 덮어둡시다. 우선 잠자리 이야기가 강력한 효과를 자랑하는 잠 최면제라는 사실을 <베이비 스토리텔링>이, 서투른 제가 증명 합니다.

이런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그날부터 아이들은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또 하루를 마감하는 그러한 의식이 기대되어 날마다 행복에 겨워 잠자는 시간을 기다리게 됩니다.-11쪽

홈쇼핑에 미리 섭외된 충실한 사용자 후기 같지만, 지난 주 저희 모녀는 유례없이 평화로운 잠자리 시간을 가졌습니다. 엄마가 어디서 얻어온 이야기에는 시큰둥하던 아이가, 마당에서 시체로 발견된 우리집 암탉 '꼬꼬'가 밤이면 깨어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다소 엽기적인 이야기에 열렬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옆집 언니도 나오고, 할머니 할아버지, 다른 동물들도 마구 등장시킵니다. 황당할 뿐 아니라 더듬거리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나서서 잠자리 의식을 채근하는 아이에게 강력한 피드백을 받고 있습니다. 

<베이비 스토리텔링>의 신선한 이야기 창작법들을 조금 만나봅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아이디어와 먼저 친해지기 위해서 강력한 시각화의 기술을 사용하십시요. 
#대부분의 이야기에 늘 출현하는 핵심 등장 인물들이 있으면 이야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됩니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하세요.
#옛속담을 사용하면서 줄거리를 만드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이름을 짓고 이야기를 만드세요.


어떤가요? 가능할까요? 그래도 좀 어렵나요? 그렇다면 책이 제안한 한가지 묘수(잠자는 시간이 창의력을 발전시키기 좋다는 교육적 의미였지만)를 시도해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잠들기 전 우리의 정신에 답을 제시하라는 긍정적 명령 내릴 수 있습니다.' '뇌야. 문제를 해결해주길 원해. 멋진 답얻을 수 있게 해줘. 고마워.'라고 말하는 거죠. 자기계발서의 우스꽝스러운 주문 같은가요?

어쨌든 저는 '이야기 들려주는 엄마'라는 명함을 놓칠 수 없습니다. 책값을 줄이려는 꼼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활자가 아닌 목소리로 감정과 온기를 전달하고픈 욕구는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요? 이게 바로 이야기가 가진 밈[각주:1] 유전자 때문일까요? 
           


 



  1. 유전자처럼 개체의 기억에 저장되거나 다른 개체의 기억으로 복제될 수 있는 비유전적 문화요소 또는 문화의 전달단위로 영국의 생물학자 도킨스의 저서《이기적인 유전자 The Selfish Gene》에서 소개된 용어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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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어가는 독서의 맥을 살려라. 강하고 빠른 가슴 압박과 열린 기도로 들어오는 타인의 호흡. 쫓기는 자의 숨결이라도 좋다. 그게 날 더 숨가쁘게 할 지도 모른다. 가느다란 숨 한 올이 터질 때까지 내 머리를 젖히고 입을 덮어 축축하고 비릿한 날숨을 쑤셔 넣어라. 밤새 숨죽인 배추마냥 질기고 뚝뚝한 문자에 기필코 속도감을 실어줄 만한 구원수는 스릴러! 너 뿐이다.




 
만날 쓰는 것도 어렵지만 읽는게 어려울 땐 방도가 없습니다. 안 읽으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읽고 싶은 날, 장마도 흐지부지한 요새가 그렇습니다. 어쩌다 제프리 디버의 <잠자는 인형>을 들고 문자의 엔터테인먼트를 경험합니다. 책오락은 삼가는 지루한 아줌마가 제대로 걸렸죠. 미국식 스릴러도 스릴러였지만, 김영사의 자회사 비채가 선보인 <모중석 스릴러 클럽>에 얄팍한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지은이도 옮긴이도 아닌 '모중석'과의 짤막한 인터뷰가 <잠자는 인형>의 마지막 세 쪽을 여흥으로 남겼을 때 검색어를 입력했습니다. '한사람이 기획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시리즈물을, 그것도 스릴러 장르의 책만 모아 출간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동아일보가 썼습니다. 10년동안 준비한 자료를 들고 도서출판 비채의 문을 두드렸다던(모중석 스릴러 클럽) 그의 행보가 가명을 한층 음침하게 만들더군요. 모던 스릴러 전문가라. 시간 죽이기로 작정한 독서에 즐거운 허영 한꺼풀.

곧장 '모중석 스릴러 클럽'의 다른 작품을 보아도 좋았겠지만 비채의 다른 장르기획인, <블랙 앤 화이트>시리즈(일본 추리 소설)의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를 숨 한번 고르지 않고 달아 읽었습니다. 마치 범인이라도 쫓듯 <살인광시곡1>까지 읽었을 땐 3일이 후딱 사라지고 없더군요. 그러고보니 미국, 일본, 한국의 장르문학을 맛본 샘입니다. 더불어 꽤나 유쾌했던 자연주의자 탐정소설<시튼 탐정 동물기>까지, 숨가쁜 독서 호흡을 들려드릴까 합니다.



 

 

 

 

잠자는 인형/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비채

 

미국식 스릴러물의 전형. 장르문학의 '원소스멀티유즈'로 영화가 떴다 하면 원작을 찾아봐야 될 정도니, 읽으면서 영상의 컷을 구상하는 것도 무리 없는 연결. 이미 작가의 작품 <본 콜렉터>가 영화화 되었고, 이 작품 역시 영화로의 재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거짓말을 할 때 사람이 느끼는 스트레스는 그들을 네 가지 감정 상태 중 하나로 떠밀어버린다. 분노하거나, 의기소침하거나, 부정하거나, 적당한 타협을 통해 곤란한 상황을 빠져나가려 하거나. 워터스가 방금 내뱉은 '맹세코'와 '정말'이라는 단어는 흥분된 몸짓과 더불어 기선으로부터 많이 벗어난 것이었다. 댄스는 교도관이 거짓말의 부정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걸 확인했다. ..상대가 분노 단계에 접어들었다면 그가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계속 자극하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부정 단계라면 사실을 무기 삼아 끈질기게 공격해야 한다.

유능한 여성 수사관 캐트린 댄스의 지적 활약이 돋보이는 이 스릴러는 동작학을 바탕으로 한 심문 전략을 전면에 내세운다. 지능적인 범인의 특질상 범인에 대한 심리분석이 다음 동선을 예측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양들의 침묵>을 필두로 한 미국 스릴러에서 공들여 다뤄지는 '수사관 머리 위에 올라선 범인'의 유형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똑똑한 범인들은 범죄라는 사슬마냥, 얽매인 자신의 규칙에 포박되기 마련이다. 철저한 규칙은 변수에 아둔하기도 해서 결정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고, 결국 거듭되는 반전의 빌미를 제공한다. 반전을 감상할 때, 반전에 필요한 복선을 얼마나 세심히 깔았느냐가 스릴러의 신뢰도를 높인다. <잠자는 인형>의 경우 대체로 네 가지의 반전이 은폐된 진실의 전구를 켠다. 서사를 완벽히 리와인드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가장 중요한 모티브라고 할 수 있는 '잠자는 인형', 즉 숨겨진 피해자 부분에선 수시로 팽팽한 암시를 줬던 것 같다.

범죄 해석으로 뒤꽁무니를 쫓을 수밖에 없는 수사관이란 위치의 벌점은 범인의 프로필을 완성하며 만회된다. 범인 검거보다 심리적 압승이 더 짜릿하게 느껴진다. 범인을 잡느냐 놓치느냐는 지루한 정의의 문제일 뿐, '범인을 이해했다'는 통제적 안정감을 더욱 갈급하게 된다. 오히려 그가 더욱 심란한 난제를 던져 수사관을 골탕먹이길 바라는 건 스릴러에서 실현될 수 있는 환상이다. 이제는 익숙해진 프로파일링 수사법과 인적 물적 자원을 활용한 기존의 수사법이 적절히 혼용되면서 두뇌적, 동적 추격 모두를 지루함 없이 만끽할 수 있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비채


얼핏 추리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편안한 서술, 명탐정의 기대를 어기는 연이은 실수, '조각상에서의 동공처리'라는 미학적 모티브, 어느 하나 인상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더불어 치밀한 복선에 대한 괜찮은 재능 보다는 실제하는 가능성들이 어떻게 '사건'으로 변질되는 지를 지켜보는, 완벽하게 '과정'을 즐길 수 있는 본격미스터리다.
 
'본격'이라는 단어가 궁금해 찾아봤지만 역시 작가이자 이 책의 탐정인 노리즈키 린타로의 설명이 가장 유력했다. 후미에 실린 인터뷰에서 에도가와 란포의 탐정소설의 정의를 언급한다. "본격은 '수수께끼'와 '논리적 해결'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수수께끼가 서서히 풀려가는 경로의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실은 이랬다'는 재미만으로도 실은 탐정 소설의 역할에 만족하긴 하지만, 독자와 탐정과의 공평한 싸움이 가능하다면 어떨까. 동일한 사실관계의 조건에서 탐정을 제치고 사건 해결의 열쇠를 선점할 수 있다면? 그는 간혹 틀렸으나 나는 맞았다면? 쾌감은 배가 될 것이다. '과정'을 즐길 수 있었다는 인상평은 처음 꺼냈던 이 책의 매력에 근거를 둔다. 

의도를 거의 감지할 수 없었던 초반부 일상의 묘사는 사건이 발생되기 이전부터 독자가 참여할만한 여지를 주는 샘이다. 일종의 '사건일지'를 읽어가는 긴장감보다는 실제 '사건'을 맞닥뜨리는 거욷함이 즐겁다. 게다가 여러 가설을 재고하면서도 실패로 이어지는 수사상황에 '풀고 싶다'는 욕구가 유연하게 찾아온다.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1부에서 5부로 이어지는 동안의 각 장의 서문을 장식하는 루돌프 비트코어의 <조각의 제작 과정과 원리>의 구절들이 제시하는 탐구의 가능성이다. 

조각에서의 동공 표현의 의미는 복선만큼이나 강력한 무기임을 점차 실감하게 된다. 여태 추리 소설의 숨겨진 가능성에 많은 기대를 걸고 강력한 게 '나타나길' 기다려 왔다면, 드러난 증거들을 선별해서 사건의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발견하기' 작업이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의 본격의 미덕이 아닌가 한다.
 
슈퍼맨과 같은 초인적 탐정의 마력에 약간 진력이 났다면, 완벽한 범행에 걸맞는 해체력보다 (인터뷰어가 말했던)'복선을 관통하는 키워드-오해', 즉 인간사의 불편한 감정들을 수사하는 탐정을 만나고 싶다면 상당히 재미있을 소설이다.



 

 

 

  

시튼 탐정 동물기/야나기 코지 지음, 박현미 옮김/루비박스 


아마도 이 책은 '본격'이란 수식어는 달지 못했을 것이다. 사건의 해결사도 탐정이 아니거니와 독자는 모든 추리과정을 전적으로 전해들을 수 밖에 없는 수동적인 입장에 처한다. 독서 당시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실이었지만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를 통해 비교해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 책의 재미가 덜하진 않다. <시튼 탐정 동물기>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동물 탐정들이 능력을 과시하고 있으니까. 누구보다 야생동물들을 사랑하고 깊이 이해하는 어니스트 시튼은 실제 인물이기도 하며, 각각의 사건들은 모두 그의 저작에서 발굴한 사소한 단서들을 확대한 재기 넘치는 상상물이다.

숲 속의 자연주의적 삶에 매료된 시튼의 야생 경험담과 담백한 철학들이, 유쾌하게 해소될 크고 작은 사건들과 어우러져 손바닥 크기의 책만큼이나 아기자기한 매력을 준다. 동물들이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탐정소설들을 간혹 보긴 했지만 동물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만으로 완성되는 추리는 무척 독특하다. 

야생동물의 흔적으로 몸체를 상상하고 생태를 가늠하는 추리력이 탐정의 직감, 논리력과 얼마나 유사한지 <시튼 탐정 동물기>의 저자는 간파하고 있었으리라.



 

 

 

살인 광시곡 1/김주연 지음/아름다운사람들 

 

2편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1편밖엔 못봤단 얘기다. 신선하지만은 않은 거친 문장들과 정형화된 캐릭터들이 장막이 되긴 했지만 저자가 전달하려는 메시지 만큼은 강렬하달밖에. 병적이고 음울한, 현실에선 좀처럼 만날 수 없는 극단적인 인물들이 대거 등장해서 예술가와 지식인들의 이면을 뒤집어 깐다.

그 뒤집어진 주머니에서 털리는 먼지 중의 하나가 아동 토막 살인이다. 빤지르르한 엘리트 계층의 용의자가 의아하게도 자신을 껴안아줄 줄 엄마를 찾는 듯, 법의학자를 불러세운 1편의 마지막 장은 기초적인 궁금증을 불러세운다. 그는 범인일까 아닐까.
 
1편의 시작과 끝은 '살인사건'에 대한 경과 보고이지만 나머지 두 인물들은 일단 그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2편에서는 그와의 연결점을 확연히 제시할 것이라고 짐작된다. 

천재와 거장 사이에서, 연주자와 작곡가 사이에서, 영감과 현실 사이에서 외롭고 괴로운 '서연'이란 인물이 <살인광시곡>의 배경음악이다. 새끼 손가락의 두 마디를 잃은 비애의 피아니스트 영애는 이 책의 작곡가 구실을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용의자로 지목되 불안한 감정들을 수시로 드러내야만 하는 안유상은 <살인광시곡>의 연주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말하자면 음악의 광기에 얽힌 살인악보다. 예술에 덧붙여진 수많은 수식어 중에 '아름답다'를 빼놓았을 때, 창작과 열정에 수반되는 고통과 희생 모멸감, 광적인 희열 등의 검은 그림자를 나열한다. 찬란해야만 할 재능의 힘이 역으로 치명적인 독(毒)처럼 재능의 몸통을 괴롭힌다.
 
음악적 구성이 될 지는 예의 지켜봐야겠지만 창작욕의 극단과 인간성의 극단이 만나 연주될 가파른 클라이막스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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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좀 읽어야, 200쪽은 읽어줘야 책 좀 읽었다,는 기분. '먹물만 차서는' 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이는 말인가 봅니다. 골방에 앉아 문자를 해독할 때는 제법 똑똑해졌다는 으쓱함으로 대차게 방문을 열지만, 불한당인양 들이치는 햇볕에 미간이 구겨집니다. 웅크리려는 관성과 슬리퍼를 꿰고 마당으로 진입하려는 운동력이 싸우기 시작합니다. 시간으로 치면 매우 짧지만 시공간의 상대운동으로서는 굉장한 한 발자국을 내밀고 있는 샘입니다. 마치 등 뒤로 골방의 지구가 밀려나는 것처럼요.
 
문자는 계속 읽게 하려는 성질을 가졌다고 가정해봅니다. 무거운 물주전자처럼 문자를 행동으로 옮기려면 상당한 외부의 힘이 필요합니다. 또 독서자와 문자 간의 강렬한 화학적 결합이 스스로 외부힘으로 상정되기도 합니다. 책의 관성에 굴복하는 시간은 문자의 에너지를 깊히 체험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그림은 어떨까요. 그림도 문자처럼 계속 바라보게 하려는 관성을 가졌을까요. 기막힌 풍광을 보고 '눈을 떼지 못했다'는 표현은 그림에도 충분히 그런 가능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실제로 어떤 그림이나 풍경, 장면들은 수시로 머릿속을 들락거리며 멀지 않은 곳에 달라붙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런 시각적 기억들은 생각의 지도에 어떤 표시로 존재할까요. 

강물처럼 멈추지 않거나 바다처럼 들고 나는 것이 문자라면 통째로 각인되길 원하는 그림은, 제 생각의 지도에 우뚝한 육지였습니다. 문자의 형상은 추상적이지만 그림의 형상은 구체적입니다. 그 육지의 안온함에 반해 그림을 곧잘 담아두곤 했습니다. 미술관에도 가고, 화첩도 사보고, 화가들의 책도 더러 읽고, 엽서도 모으고, 뭔가를 읽는 것만큼 보는 것에도 공을 들였습니다.

게다가 그림은 그닥 세상과 격리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제게 세상은 구경의 다른 이름이었고 그림 외출은 관성과 싸울만큼 힘겹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오늘도 그림을 봅니다. 그림이 그린 세상을 목격합니다. 글자는 세상을 많이 담으려고 주머니를 부풀리지만 그림은 네모의 인색함으로 넉넉합니다. 운동과 정지 사이에서 머무를 수 있다면 그건 표면적인 힘이 0이 되는 팽팽함 입니다.
 
엄마가 되어 '문화생활'이라 일컫는 그림구경은 거의 할 수 없었지만 그림책은 제게 무궁무진한 장면을 선사합니다. 여기 '그림책 화가'들이 있습니다. 엄마에게도 알량한 문화생활을 제공하는 그들에게 작은 감사를 전합니다. 




만희네 집/권윤덕/길벗어린이//꽃할머니/권윤덕/사계절/2010.6 


 



그림책 작가 권윤덕을 만난 건 <만희네 집>이었습니다. 평범한 주택의 일상 세밀화 정도로 여겼던 그림들이 파노라마의 판형으로 길어진 시계를 확보합니다. 안보이는 게 없습니다. 십장생 자개장부터 서늘한 광에 매달린 조리나 키, 옥상 위로 낮아진 전봇대, 색색의 이불보까지, 눈은 평화롭고 싱싱해 집니다. 산수화와 공필화, 불화를 공부했다는 작가는 옛 그림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려고 노력합니다.(<꽃할머니>에서) 만희를 따라 집안 곳곳을 살피면서 열린 방문 사이나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먹빛으로 칠해지는데, 그건 다음 공간으로 이어지는 소박한 장치예요.







무엇보다 옅은 수묵담채화 풍의 사실적인 그림들이 숨길 수 없는 위트를 발휘하는 곳이, 이집트로부터 세잔, 피카소로 이어지는  입체(원근법의 입체감이 아닌)기법 이예요. 원근법도 사용하고 있지만, 같은 바닥에 놓인 장독들이 마치 서로 다른 위치에서 보고 그린 것마냥 화가의 시선이 일치하지 않아요. 모든 각도에서 본 것을 평면에 나열했을 때 세잔의 정물화는 위태롭고 피카소의 초상화들은 기괴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권윤덕 그림에서 느껴지는 푸근한 재미는 이 책의 주인공인 만희의 시선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인것 같아요. 만희가 바라보는 장독과 엄마가 뜨고 있는 장독 안의 장은 서로 다르니까요. 또 사선으로 기울어진 광은 마치 만희와 함께 엄마에게 비스듬히 기대 이야기를 듣는 모양처럼 정답습니다. 





차례로, 이집트 벽화, 위안소 조감도, 부분 확대 사진

이 기법이 한중일 공동 기획으로 나온 평화 그림책 1번 <꽃할머니>에서도 소중한 구실을 합니다. 위안소의 조감도를 담은 한 페이지는 이집트의 벽화처럼 나무가 옆으로 눕고 일본군들이 성냥개비처럼 위안소를 빙 둘러싸고 있습니다.(머리통이 보이는게 아니라) 화장실같이 다닥다닥 붙은 위안부들의 거처가 문앞에 줄을 선 일본군들을 전시하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평면도에는 침대에 널부러진 위안부들과 벨트를 클러 바지를 내리는 수직의 일본군들과 대조적입니다. 

말하자면 기법에 담은 생각들이, 시각을 기억으로 새기고 있었습니다.


 

그 집 이야기/존 패트릭 루이스(글), 로베르토 인노첸티(그림)/사계절/2010.5








왼쪽이<그 집 이야기>, 오른 쪽이 피터르 브뤼헐의 <농가의 혼례>(그림 출처; 네이버 검색)


비슷한 소재의 집 그림 책인 <그 집 이야기> 역시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한 눈에 <교수대 위의 까치>(진중권)에서 만났던 피터르 브뤼헐의 농가 그림을 연상케 합니다. '그 집'이 이 책의 주인공인건 확실치만 집을 채우는 인간들, 또한 이 책의 주인입니다. 집과 함께 집 주변의 대지와도 인연을 맺고 삶을 드러내는 인간들이, 백년 동안 동일한 프레임으로 포착됩니다. 이 부분은 피터르 브뤼헐이 재생했던 소박한 농가의 휴머니즘과 일맥상통 합니다. 백년 동안 인간들은 좀 더 단단해지려 땅을 일구고 혼례와 장례를 치르고, 전쟁을 겪고, 새로운 일가를 이룹니다.








그동안 '집'은 울타리, 피난처, 새로운 꿈이 되면서 인간들을 품습니다. <그 집 이야기>의 또 하나의 백미는 그림을 뒤따르는 짧은 시들 입니다.


한여름이 초록 옷 입고 들러리 설 때/언덕 집 아가씨는 앞날을 꿈꾸며/아랫마을 벽돌장이 청년의 손을 꼬옥 잡는다/혼례를 치르는 동안, 삶은 잠시 숨을 멎는다.    
                  
숨이 멎을만큼 정제되고 핵심적인 구절들이 마음을 뒤흔듭니다. 어쩌면 '집'이 사람과 어깨를 거는 순간 이 책은 '시'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림으로 그린 시가 시구와 만나면서 무심한 프레임조차 명암을 바꾸며 화답합니다. 집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시간을 관람하면 대체 '시'란 어디서 나오는지 조금 알듯도 합니다.








파도야 놀자/이수지/비룡소//나무집/마리예 톨만, 로날트 톨만/여유당/2010.6 

 
 

 

글씨없는 그림책은 이미 이수지의 <파도야 놀자>로 경험했습니다. 오로지 그림으로 이야기하고, 그림으로 눈맞추는 이런 책들은 아이에게나 저에게나 짧고 깊은 휴식을 줍니다. 낱자를 따라 가는 대신 그림의 물감이 마음에 번지도록 놔두면 그만입니다. 몇 번 보다 지루해지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물론 그림에 주석을 다는 정도로요. 말없이 볼 수 있다면 언제나 그 편을 택하고 싶지만요. 







<파도야 놀자>는 개구쟁이 소녀가 파도와 장난을 치는 연속 컷이예요. 붓 펜의 묵빛 부드러움이 푸른색 유화 물감빛 바다에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그 어느때보다 장난끼 넘칩니다. 역시 이 책도 <그 집 이야기>처럼 고정된 프레임 속에서 아이와 파도가 신경전을 벌입니다. 그러고보니 <나무집>도 같은 방식이군요. 말그대로 나무 위에 집이 한 채 있고, 그 곳에 흰 곰과 갈색곰이 차례로 도착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좋은 친구나 연인이 되었나 봅니다. 집에 머무르며 수많은 동료들을 맞이하고, 어울리고, 떠나보내는 과정 일체가 환상적 분위기로 포착됩니다.  

생명, 평화, 자연을 노래한다지만 글씨가 없으니 직설도 없습니다. 서로와 나무에 몸을 부비고,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들이 물처럼 계절처럼 흘러갈 따름입니다. 연필로 그린듯한 순도 낮은 파스텔화가 눈을 순하게 길들입니다. 그림을 조목조목 들여다보면 유머러스한 장면들이 숨어 있습니다. 색감으로 먼저 보고 보물찾기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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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0-06-17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도야놀자 환상적이네요.

책맘 2010-07-12 15:43   좋아요 0 | URL
그렇죠?
 

나는 개입니까? 나는 개입니다, 아니 나는 개보다 낫지 않습니다.

문학의 시작이 이곳에 있다는 것, 지난 주 실감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개에 대해 쓰고, 개가 되서 쓰고, 개의 눈으로 사람을 보겠습니까. 동물이 사람의 문학 속으로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면 전 별로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것조차도 '인간'의 시선으로 말미암은 '상상력'이란 우수한 능력발휘 정도가 아닌가 했습니다. 비겁한 것도 같았습니다. 동물이 될라치면 마음껏 인간세를 조롱하고 평가하는 일이 더욱 당당해졌고, 보기 좋은 문학적 책략은 아닐지 눈을 가늘게 떴습니다. 

<개>와 <워낭>
아닌게 아니라 김훈의 <개>는 좀 그랬습니다. ebs 다큐 프라임의 <인간과 개>를 통해 만난 <개>를 펼친 건 방송이 거의 잊혀질 즈음이었습니다. 극진히 의인화된 개가 무차별적인 개발의 서글픔과 아이들의 발바닥에서 찾는 희망을 의례 단호한 어투로 전달합니다. 도리없이 교훈이 앞장서고 개와 인간이 함께하는 세상사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이 심심하게 나열됩니다. '개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세상' 이라는 문학적 장치에 첫눈엔 탄식했을 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감상적으로 미화된 개의 말투는 그것이 개의 눈이 아님을 점점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웅변은 힘을 잃고 개에게도, 개가 응시하던 무지렁이들에게도 몰입할 수 없었죠. 이순원의 <워낭>은 같은 방식으로 '소가 바라보는 세상'을 전하면서도 소의 능력들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소 앞에서 인간도 역사도 유유히 흘러가면서 좀 더 자연스러운 '인간과 동물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지만 어니스트 톰슨 시튼의 <아름답고 슬픈 야생동물 이야기>를 읽지 않았더라면 과연 위험천만, 소설가 김훈의 작품에 흠이 있을거란 기대조차 했겠냐 싶습니다. <아름답고 슬픈~>은 '문학'은 아니지만,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문학보다 더 문학다운 기록입니다.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가 생물들의 기이한 습성을 다루거나, <동물의 왕국>이 먹이사슬의 광포함이나 개체에 대한 무한연정을 다루는데 하도 익숙해져서 '동물 이야기'라면 수순처럼 그런 영상이 떠오릅니다. 그곳엔 우리 삶의 가장 잔인한 법칙들과 드라마가 존재하고, 어쩌면 '그들'보다 내가 속한 '세상'를 발견하는데 더 혈안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아주 작은 우월감조차 허락하지 않는 어니스트 톰슨의 야생동물 관찰 기록은 굳이 개가 되지 않고도, 개처럼 몸을 낮추지 않고도, 연출 없는 드라마를 지어내지 않고도 충분히 경이로왔습니다. 실은 이런 지독한 열정 앞에선 '문학이 의도하는 바'가 한없이 작아집니다. 게다가 그는 이야기 집을 짓는 솜씨도 여느 문장가에 못지 않습니다. 저자가 직접 그린 동물들의 연필화로 장식된 이 책이 청소년을 위한 시리즈물의 1번에 등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못내 아깝습니다. 



<아름답고 슬픈 야생동물 이야기>
실은 생면부지의 비극적인 야생동물들의 삶이 과연 무슨 재미가 있을까, 고개를 갸웃하고 시작한 독서는 단 몇 줄만으로 의심을 걷어내더니 단숨에 책을 덮고 입맛을 다시게 하고 말았습니다. 인간과 인간이 사육하는 동물들을 농락하면서 몇 년간 카럼포의 무법자로 지능을 뽐낸 늑대왕 로보, 갓 낳은 새끼를 기르며 지혜를 뽐내는 솜꼬리 토끼의 예정된 비극, 늑대의 야성을 버리지 못하고 야생동물의 최후를 맞이한 저자의 개 빙고, 죽음 앞에서도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의 삶. 전 누구보다 옛날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할 줄 아는 할아버지 앞에 앉은 듯 무릎을 조아리고 귀를 펼쳤습니다.

또 어떤 구절 앞에서는 한참을 머물러 눈을 감았습니다. 징그러울 정도로 육감이 발달한 늑대왕 로보를 잡기 위해 덫을 만들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는 갓 죽인 한 살짜리 암소의 콩팥 중 기름덩어리에다 치즈를 섞은 후 도자기 그릇에 담아 끓였다. 그러고는 치즈로 범벅이 된 고기를 식혀 몇 덩이로 자르면서 쇠붙이 냄새가 나지 않도록 일부러 뼈로만든 칼을 사용했다. 그 다음에는 스트리키네와 시안화물을 냄새가 나지 않도록 캡슐을 듬뿍 담은 후 입구를 치즈로 막았다. 나는 작업하는 내내 어린 암소의 뜨거운 피에 흠씬 적신 장갑을 끼고 있었을 뿐 아니라 미끼에 숨결이 닿는 것조차 피했다'



매서운 겨울, 적들로부터는 안전했지만 굶주림의 고통을 이겨야만 했던 빨간목깃털 메추라기가 맞이한 밤은 이토록 잔인했습니다.




이틀째 밤에는 더욱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북풍이 자신의 흰말 떼를 보냈다. 그 말들은 쉬익쉬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하얀 대지 위를 흰 갈기를 휘날리며 질주했다.

 
메시지란 이야기가 아니라 숨결에 있다고 야생동물들이 속삭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이때만큼은 문학이 이다지도 시시할 밖에요. 기록자이자 관찰자인 저자가 여는 글에서는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구절이 책을 다시 응시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어떤 상식적인 생각, 즉 지난 세기에 도덕이라고 불려왔던 것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은 틀림없이 도덕을 자신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사람들이 성서만큼이나 오래된 하나의 도덕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성서만큼이나 오래된 하나의 도덕을 <시튼 탐정 동물기>라는 독특한 소설에서 찾아보기로 결정합니다. 왜냐면 저를 '자연주의자 톰슨 시튼'으로 이끈 주범이 바로 이 소설이었으니까요. 이 책은 굳이 분류하자면 탐정소설입니다.


자연주의자 시튼, 탐정 시튼
몇 겹의 액자 구성으로 재미를 배가 시키는 <시튼 탐정 동물기>는 무엇보다 실물을 주인공으로 허구의 살을 입혔다는 점이 진가로 느껴집니다. 더우기 그 실물은 탐정이 아닌 숲 속의 자연주의자였습니다. 애드가 앨런 포가 미스터리와 동물의 조합을 선보인 것처럼, 동물을 사건 해결의 열쇠로 내세우고 동물의 성향에 누구보다 해박한 어니스트 시튼이 뒤죽박죽이 된 사건을 꿰어가는 내용들입니다. 

이 일본 작가의 글쓰기조차 탐정의 추리방식이었다는 걸 <아름답고 슬픈 야생동물 이야기>로 확인합니다. 어린 시절 형이 선물받은 세계명작 전집을 새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물려 받아 <시튼 동물기>를 읽었던 저자가 아주 사소한 단서들-그것이 한줄 뿐이래도-을 단초로 이야기를 꾸며낸겁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시 살아난 어니스트 시튼의 목소리로 재생됩니다. 마치 그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처럼요. 

시튼이 동물자신보다 동물을 더 사랑한것처럼, <시튼 탐정 동물기>의 작가 역시 시튼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시튼의 자서전을 포함해 많은 저작들을 읽어본다면 얼마나 많은 단서들이 이 소설의 독특한 탐정을 만들어냈음을 알게 될까요. 결국 탐정과 동물학자가 얼마나 닮았는지를 발견하는 것은 그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발자국으로 동물의 크기나 종을 가늠하고 지난한 관찰을 통해 동물의 울음소리를 감별해내는 능력이 탐정의 이성적 추리력이나 육감과 일맥상통한다는 건, 시튼 뒤에 붙은 '탐정'이란 말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를 말해줍니다. 실제로 시튼의 입에서 셜록 홈즈의 기술이 몇 번 언급되기도 합니다.



까마귀의 울음 소리를 악보로 만든 시튼. 그 기록을 그대로 옮겨 놓은 소설. (왼쪽이 <시튼 탐정 동물기> 오른쪽이 <아름답고 슬픈 야생동물 이야기>)


카람포의 악마는 '늑대왕 로보의 전설'에서, 실버스팟은 우표수집처럼 반짝이는 작은 물건들을 모으길 좋아하던 '세상에 둘도 없는 까마귀'에서, 외양간 밀실과 메기 조는 형이 소의 젖을 짜기 위해 꼬리에 벽돌을 달아놓았다는 어니스트 시튼의 몇 줄의 경험담에서 시작됩니다. 작가의 상상력은 이야기 짓기에서 멈추지 않고, 어니스트 시튼의 자연주의적 삶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보탭니다. 이를테면 숲 속에서 종종 총을 든 사냥꾼들과 마주치면 어니스트 시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현명해지기 위해 숲에 온 겁니다. 동물들에게서 숲에 대한 멋 진 지식을 배우기 위해서요."

또 영특한 다람쥐 배너가 해결한 사건 뒤에는 기분 좋은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이런말을 전합니다.



"..이 미국에서 열매를 맺는 숲 속 나무는 사실상 모두 회색다람쥐나 그 동료들 덕분에 자라난 거랍니다. 그들은 나무 열매를 땅속에 모아둡니다. 그중 95퍼센트는 자기 것이지만 나머지 5퍼센트의 나무열매는 먹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데 그 열매가 싹을 틔워 이윽고 숲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런 자그마한 다람쥐들이 이 광대한 미국의 모든 숲은 만든다고 하니 그런 통쾌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이 만든 숲을 루즈벨트(전 미국 대통령)와 함께 걸을 때, 어니스트 시튼은 이런 단상을 남깁니다.

'숲길을 산책하는 사람은 모두 걷기 시작해서 한걸음씩 뗄 때마다 다양한 자연과 동물을 만나게 됩니다. ..자연이나 동물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길을 산책하다보면 실제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후 대통령이 된 루즈벨트 씨가 종종 군사력을 동원해 일반인들에게 곤봉정책이라고 불리는 매우 강경한 외교정책을 추진한 것은 당신도 잘 아실테지요. 나는 어떤 전쟁이든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일으키는 전쟁이야말로 최대의 자연파괴 행위이고 야생 동물들의 생명과 살아갈 장소를 앗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루즈벨트 씨가 정책으로 삼은 자연보호란 우선은 인간이, 특히 미국 국민이, 굳이 말하자면 백인 사회가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틈틈히 이어지는 어니스트 시튼의 깊은 목소리는 <시튼 탐정 동물기>가 흥미로운 사건에 대한 재미거리로만 동물을 다루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입니다. 까마귀의 울음 소리를 음계로 그려서 그들의 의사소통법에 대해 말하는 시튼의 모습은 '성서 만큼이나 오래된 하나의 도덕'이, -제식대로 말하면- 인간은 자연의 관찰자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연이나 동물을 소유할 수도, 더구나 마음대로 죽일 권리도, 파헤칠 권리도 우리에겐 없다는 것. 을 어니스트 톰슨 시튼이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 세심한 동물 기록도, 동물들이 인간의 욕망을 폭로하듯 사건의 실마리를 내주는 것도, 그의 관찰력을 뽐내거나 자기 주장을 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야생동물 나름대로의 완벽한 삶의 방식을 들려주는데 몰두하는 것입니다. 눈요기에 좋은 글거리가 아닌, 끝끝내 숨어 존재하는 위대한 구도자들의 삶을 파헤치는 한 도덕가의 삶을 떠올리게 합니다.

숲의 외딴 길에서 곰을 만났을 때 저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안녕, 곰 아저씨"


*못다한 이야기

더불어 지난 주에 함께 읽었던 두 권의 동물 관련 책에 대해서도 슬쩍 말해볼까 합니다.

<나는 개입니까>
동물들이 사람이 되어 인간세를 경험하는 약간은 익숙한 판타지물입니다. 하지만 '블랙 코미디'가 섞여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게 매력적입니다. 도시의 맨홍뚜껑 밑에 사는 개 가족들이 '창구'라 이름 붙인 세상으로 나와 단절되고 무시무시한 존재였던 세상과 뒤섞입니다. 지하세계에선 빛이였던 그곳도 결코 아름다울리만은 없습니다. 그 끔찍한 인간의 세상에 대해 감정묘사없이 다가서는 솜씨가 아프고 우스웠습니다.




<곰과 인간의 역사>는 곰과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테디 베어 애호가나 생물학자, 사냥꾼, 밀렵꾼, 동물권을 옹호하는 변호사 같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합니다. 자신만의 견해를 들려주는 사람들이라고 못박기도 하구요) '곰의 기원' 을 찾겠다는 포부를 밝힙니다. 마구 뒤얽힌 문화와 자연의 역사가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서서 인간과 곰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곰에 관련된 전세계적인 신화, 설화, 생물학자들의 기록을 샅샅히 뒤져가며 활동범위와 다양성, 습성과 행동을 정리합니다. 더불어 현대의 놀이와 광고, 예술과 문학에서의 곰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곰 사냥 너머에는 곰이 우리의 몸을 살찌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을 살찌우는 연속적인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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