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입니까? 나는 개입니다, 아니 나는 개보다 낫지 않습니다.
문학의 시작이 이곳에 있다는 것, 지난 주 실감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개에 대해 쓰고, 개가 되서 쓰고, 개의 눈으로 사람을 보겠습니까. 동물이 사람의 문학 속으로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면 전 별로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것조차도 '인간'의 시선으로 말미암은 '상상력'이란 우수한 능력발휘 정도가 아닌가 했습니다. 비겁한 것도 같았습니다. 동물이 될라치면 마음껏 인간세를 조롱하고 평가하는 일이 더욱 당당해졌고, 보기 좋은 문학적 책략은 아닐지 눈을 가늘게 떴습니다.
<개>와 <워낭>
아닌게 아니라 김훈의 <개>는 좀 그랬습니다. ebs 다큐 프라임의 <인간과 개>를 통해 만난 <개>를 펼친 건 방송이 거의 잊혀질 즈음이었습니다. 극진히 의인화된 개가 무차별적인 개발의 서글픔과 아이들의 발바닥에서 찾는 희망을 의례 단호한 어투로 전달합니다. 도리없이 교훈이 앞장서고 개와 인간이 함께하는 세상사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이 심심하게 나열됩니다. '개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세상' 이라는 문학적 장치에 첫눈엔 탄식했을 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감상적으로 미화된 개의 말투는 그것이 개의 눈이 아님을 점점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웅변은 힘을 잃고 개에게도, 개가 응시하던 무지렁이들에게도 몰입할 수 없었죠. 이순원의 <워낭>은 같은 방식으로 '소가 바라보는 세상'을 전하면서도 소의 능력들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소 앞에서 인간도 역사도 유유히 흘러가면서 좀 더 자연스러운 '인간과 동물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지만 어니스트 톰슨 시튼의 <아름답고 슬픈 야생동물 이야기>를 읽지 않았더라면 과연 위험천만, 소설가 김훈의 작품에 흠이 있을거란 기대조차 했겠냐 싶습니다. <아름답고 슬픈~>은 '문학'은 아니지만,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문학보다 더 문학다운 기록입니다.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가 생물들의 기이한 습성을 다루거나, <동물의 왕국>이 먹이사슬의 광포함이나 개체에 대한 무한연정을 다루는데 하도 익숙해져서 '동물 이야기'라면 수순처럼 그런 영상이 떠오릅니다. 그곳엔 우리 삶의 가장 잔인한 법칙들과 드라마가 존재하고, 어쩌면 '그들'보다 내가 속한 '세상'를 발견하는데 더 혈안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아주 작은 우월감조차 허락하지 않는 어니스트 톰슨의 야생동물 관찰 기록은 굳이 개가 되지 않고도, 개처럼 몸을 낮추지 않고도, 연출 없는 드라마를 지어내지 않고도 충분히 경이로왔습니다. 실은 이런 지독한 열정 앞에선 '문학이 의도하는 바'가 한없이 작아집니다. 게다가 그는 이야기 집을 짓는 솜씨도 여느 문장가에 못지 않습니다. 저자가 직접 그린 동물들의 연필화로 장식된 이 책이 청소년을 위한 시리즈물의 1번에 등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못내 아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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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슬픈 야생동물 이야기>
실은 생면부지의 비극적인 야생동물들의 삶이 과연 무슨 재미가 있을까, 고개를 갸웃하고 시작한 독서는 단 몇 줄만으로 의심을 걷어내더니 단숨에 책을 덮고 입맛을 다시게 하고 말았습니다. 인간과 인간이 사육하는 동물들을 농락하면서 몇 년간 카럼포의 무법자로 지능을 뽐낸 늑대왕 로보, 갓 낳은 새끼를 기르며 지혜를 뽐내는 솜꼬리 토끼의 예정된 비극, 늑대의 야성을 버리지 못하고 야생동물의 최후를 맞이한 저자의 개 빙고, 죽음 앞에서도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의 삶. 전 누구보다 옛날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할 줄 아는 할아버지 앞에 앉은 듯 무릎을 조아리고 귀를 펼쳤습니다.
또 어떤 구절 앞에서는 한참을 머물러 눈을 감았습니다. 징그러울 정도로 육감이 발달한 늑대왕 로보를 잡기 위해 덫을 만들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는 갓 죽인 한 살짜리 암소의 콩팥 중 기름덩어리에다 치즈를 섞은 후 도자기 그릇에 담아 끓였다. 그러고는 치즈로 범벅이 된 고기를 식혀 몇 덩이로 자르면서 쇠붙이 냄새가 나지 않도록 일부러 뼈로만든 칼을 사용했다. 그 다음에는 스트리키네와 시안화물을 냄새가 나지 않도록 캡슐을 듬뿍 담은 후 입구를 치즈로 막았다. 나는 작업하는 내내 어린 암소의 뜨거운 피에 흠씬 적신 장갑을 끼고 있었을 뿐 아니라 미끼에 숨결이 닿는 것조차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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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서운 겨울, 적들로부터는 안전했지만 굶주림의 고통을 이겨야만 했던 빨간목깃털 메추라기가 맞이한 밤은 이토록 잔인했습니다.
이틀째 밤에는 더욱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북풍이 자신의 흰말 떼를 보냈다. 그 말들은 쉬익쉬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하얀 대지 위를 흰 갈기를 휘날리며 질주했다.
메시지란 이야기가 아니라 숨결에 있다고 야생동물들이 속삭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이때만큼은 문학이 이다지도 시시할 밖에요. 기록자이자 관찰자인 저자가 여는 글에서는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구절이 책을 다시 응시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어떤 상식적인 생각, 즉 지난 세기에 도덕이라고 불려왔던 것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은 틀림없이 도덕을 자신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사람들이 성서만큼이나 오래된 하나의 도덕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그 성서만큼이나 오래된 하나의 도덕을 <시튼 탐정 동물기>라는 독특한 소설에서 찾아보기로 결정합니다. 왜냐면 저를 '자연주의자 톰슨 시튼'으로 이끈 주범이 바로 이 소설이었으니까요. 이 책은 굳이 분류하자면 탐정소설입니다.
자연주의자 시튼, 탐정 시튼
몇 겹의 액자 구성으로 재미를 배가 시키는 <시튼 탐정 동물기>는 무엇보다 실물을 주인공으로 허구의 살을 입혔다는 점이 진가로 느껴집니다. 더우기 그 실물은 탐정이 아닌 숲 속의 자연주의자였습니다. 애드가 앨런 포가 미스터리와 동물의 조합을 선보인 것처럼, 동물을 사건 해결의 열쇠로 내세우고 동물의 성향에 누구보다 해박한 어니스트 시튼이 뒤죽박죽이 된 사건을 꿰어가는 내용들입니다.
이 일본 작가의 글쓰기조차 탐정의 추리방식이었다는 걸 <아름답고 슬픈 야생동물 이야기>로 확인합니다. 어린 시절 형이 선물받은 세계명작 전집을 새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물려 받아 <시튼 동물기>를 읽었던 저자가 아주 사소한 단서들-그것이 한줄 뿐이래도-을 단초로 이야기를 꾸며낸겁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시 살아난 어니스트 시튼의 목소리로 재생됩니다. 마치 그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처럼요.
시튼이 동물자신보다 동물을 더 사랑한것처럼, <시튼 탐정 동물기>의 작가 역시 시튼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시튼의 자서전을 포함해 많은 저작들을 읽어본다면 얼마나 많은 단서들이 이 소설의 독특한 탐정을 만들어냈음을 알게 될까요. 결국 탐정과 동물학자가 얼마나 닮았는지를 발견하는 것은 그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발자국으로 동물의 크기나 종을 가늠하고 지난한 관찰을 통해 동물의 울음소리를 감별해내는 능력이 탐정의 이성적 추리력이나 육감과 일맥상통한다는 건, 시튼 뒤에 붙은 '탐정'이란 말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를 말해줍니다. 실제로 시튼의 입에서 셜록 홈즈의 기술이 몇 번 언급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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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의 울음 소리를 악보로 만든 시튼. 그 기록을 그대로 옮겨 놓은 소설. (왼쪽이 <시튼 탐정 동물기> 오른쪽이 <아름답고 슬픈 야생동물 이야기>)
카람포의 악마는 '늑대왕 로보의 전설'에서, 실버스팟은 우표수집처럼 반짝이는 작은 물건들을 모으길 좋아하던 '세상에 둘도 없는 까마귀'에서, 외양간 밀실과 메기 조는 형이 소의 젖을 짜기 위해 꼬리에 벽돌을 달아놓았다는 어니스트 시튼의 몇 줄의 경험담에서 시작됩니다. 작가의 상상력은 이야기 짓기에서 멈추지 않고, 어니스트 시튼의 자연주의적 삶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보탭니다. 이를테면 숲 속에서 종종 총을 든 사냥꾼들과 마주치면 어니스트 시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현명해지기 위해 숲에 온 겁니다. 동물들에게서 숲에 대한 멋 진 지식을 배우기 위해서요."
또 영특한 다람쥐 배너가 해결한 사건 뒤에는 기분 좋은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이런말을 전합니다.
"..이 미국에서 열매를 맺는 숲 속 나무는 사실상 모두 회색다람쥐나 그 동료들 덕분에 자라난 거랍니다. 그들은 나무 열매를 땅속에 모아둡니다. 그중 95퍼센트는 자기 것이지만 나머지 5퍼센트의 나무열매는 먹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데 그 열매가 싹을 틔워 이윽고 숲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런 자그마한 다람쥐들이 이 광대한 미국의 모든 숲은 만든다고 하니 그런 통쾌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이 만든 숲을 루즈벨트(전 미국 대통령)와 함께 걸을 때, 어니스트 시튼은 이런 단상을 남깁니다.
'숲길을 산책하는 사람은 모두 걷기 시작해서 한걸음씩 뗄 때마다 다양한 자연과 동물을 만나게 됩니다. ..자연이나 동물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길을 산책하다보면 실제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후 대통령이 된 루즈벨트 씨가 종종 군사력을 동원해 일반인들에게 곤봉정책이라고 불리는 매우 강경한 외교정책을 추진한 것은 당신도 잘 아실테지요. 나는 어떤 전쟁이든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일으키는 전쟁이야말로 최대의 자연파괴 행위이고 야생 동물들의 생명과 살아갈 장소를 앗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루즈벨트 씨가 정책으로 삼은 자연보호란 우선은 인간이, 특히 미국 국민이, 굳이 말하자면 백인 사회가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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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틈히 이어지는 어니스트 시튼의 깊은 목소리는 <시튼 탐정 동물기>가 흥미로운 사건에 대한 재미거리로만 동물을 다루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입니다. 까마귀의 울음 소리를 음계로 그려서 그들의 의사소통법에 대해 말하는 시튼의 모습은 '성서 만큼이나 오래된 하나의 도덕'이, -제식대로 말하면- 인간은 자연의 관찰자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연이나 동물을 소유할 수도, 더구나 마음대로 죽일 권리도, 파헤칠 권리도 우리에겐 없다는 것. 을 어니스트 톰슨 시튼이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 세심한 동물 기록도, 동물들이 인간의 욕망을 폭로하듯 사건의 실마리를 내주는 것도, 그의 관찰력을 뽐내거나 자기 주장을 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야생동물 나름대로의 완벽한 삶의 방식을 들려주는데 몰두하는 것입니다. 눈요기에 좋은 글거리가 아닌, 끝끝내 숨어 존재하는 위대한 구도자들의 삶을 파헤치는 한 도덕가의 삶을 떠올리게 합니다.
숲의 외딴 길에서 곰을 만났을 때 저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안녕, 곰 아저씨"
*못다한 이야기
더불어 지난 주에 함께 읽었던 두 권의 동물 관련 책에 대해서도 슬쩍 말해볼까 합니다.
<나는 개입니까>
동물들이 사람이 되어 인간세를 경험하는 약간은 익숙한 판타지물입니다. 하지만 '블랙 코미디'가 섞여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게 매력적입니다. 도시의 맨홍뚜껑 밑에 사는 개 가족들이 '창구'라 이름 붙인 세상으로 나와 단절되고 무시무시한 존재였던 세상과 뒤섞입니다. 지하세계에선 빛이였던 그곳도 결코 아름다울리만은 없습니다. 그 끔찍한 인간의 세상에 대해 감정묘사없이 다가서는 솜씨가 아프고 우스웠습니다.
<곰과 인간의 역사>는 곰과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테디 베어 애호가나 생물학자, 사냥꾼, 밀렵꾼, 동물권을 옹호하는 변호사 같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합니다. 자신만의 견해를 들려주는 사람들이라고 못박기도 하구요) '곰의 기원' 을 찾겠다는 포부를 밝힙니다. 마구 뒤얽힌 문화와 자연의 역사가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서서 인간과 곰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곰에 관련된 전세계적인 신화, 설화, 생물학자들의 기록을 샅샅히 뒤져가며 활동범위와 다양성, 습성과 행동을 정리합니다. 더불어 현대의 놀이와 광고, 예술과 문학에서의 곰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곰 사냥 너머에는 곰이 우리의 몸을 살찌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을 살찌우는 연속적인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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