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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엄마처럼 살아갈까 - 엄마의 상처마저 닮아버린 딸들의 자아상 치유기
로라 아렌스 퓨어스타인 지음, 이은경 옮김 / 애플북스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엄마의 옷

<엄마를 부탁해>가 엄마 밖에서 엄마를 말하면서도 가장 엄마다운 엄마가 부각되는 점은 아이러니다. 박소녀라는 '엄마' 속에 존재하는 '키우는' 유전자는 비단 피붙이들에게만 발휘되는 게 아이었다. 집을 들고 나는 몸뚱이들, 시들어 가는 채마들, 심지어 엄마가 없는 아이들(고아원 후원)에게까지 입술 가까이 밥풀을 붙여 줄만한 실력을 뽐낸다. 더욱이 비릿한 연애의 주인공, 곰소의 사내도 미역국에 밀가루 반죽을 떼어줘야 하는 모성발휘의 대상이었지 않았나.
 
그러기에 엄마의 상실이 비탄할 만한 것이었고, 극적인 후회와 애통을 위해서 엄마는 부득불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비탄할 만한 일은 세상의 엄마들이 조금씩은 박소녀를 품고 있다고 해도 절대로 이 전형적인 모델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끝끝내 '희생'의 면모에 대해서는 거부했지만 백만이 넘는 독자들의 공감 영역에 '희생'을 제외한다면 '엄마 신드롬'을 어떤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 희미해진 감성에 불을 붙이고 톱아보게 한 중심이, 다른 사람이 부르는 엄마의 낯선 이름이 아닌 각자의 내면과 상상에서 불러온 '엄마'라는 고유명사였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이쯤해선, 지난해 한 작가가 낳았던 '엄마'라는 매끈한 달걀을 깨야할 차례다. 희생과 감내와 침묵과 외사랑이 아닌 질투와 이기와 비난과 강제의 엄마 말이다.
 
어디에 그런 엄마가 있냐고, 뉴스에나 나오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비운의 여인들을 말하는 거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되묻고 싶다. 당신의 엄마는 만족스러운가.

기브 앤 테이크라는 사회적 기준으로 볼 때 모녀의 관계는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들은 한 쪽으로 기울었을 때 더욱 안정적으로 보인다. 세상의 어떤 관계들은 무게가 달라야 삐걱거림이 없다. '화를 내더라도 사랑한다는 사실을 표명하라'는 육아의 코치는 곰이나 외계인을 만났을 때의 대처법 같기도 하다.




질투와 이기과 강제의 엄마
 
기본적으로 불공정한 관계의 함수가 <왜 나는 엄마처럼 살아갈까>라는 심리학 서적의 존재 이유다. 전폭적인 지지나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반대로 지나친 참견과 관심으로 딸과의 분리를 인정하지 못했을 때, 세상 모든 딸들은 엄마와의 관계에서 부득이하게 시소를 움직이는 수고를 치러야 한다. (세상 모든 엄마도 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책엔 바야흐로 수많은 엄마들이 등장한다. '박소녀 유형'은 제외되는 듯 하다. 하지만 <왜 나는 엄마처럼 살아갈까>에서도 <엄마를 부탁해> 만큼이나 '나의 엄마'가 쉴새 없이 뛰쳐 나온다.

자신이 받아왔던 외모에 대한 평가 때문에 딸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삶의 기준을 전달하는 엄마, 결핍에 대한 만족감을 위해 딸을 꼭두각시로 세우는 엄마, 자신과 딸을 일체시켜 딸의 독립을 가로막는 엄마, 주체적이지 못해 중요한 결정들을 남편에게 미루는 엄마, 쓸모있는 순간에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왜곡된 자아상을 형성시킨 엄마.  


딸을 부탁해

이 책이 그런 엄마들의 딸 이야기, 즉 피해자의 심리치료서라고 단정하진 말자. 앞서 괄호 안에서 말했듯이 이 엄마들도 '엄마의 딸'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 부분이 치료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가 왜 그랬는지'를 상상하고 자신과 연관지어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작업은 <엄마를 부탁해>같은 허구가 보여주는 '내력의 힘'이다.  

그렇다고 엄마를 이해하는 관용을 베풀라는 지시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성급한 공감은 더욱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살인을 하게 된 어떤 핍박한 이유들도 범죄를 덮을 수는 없는 것처럼 '엄마를 이해하기'보다는 행위와 감정들을 제대로 꺼내보자는 취지다. 그런 연결고리가 생긴다면 엄마에게서 받은 상처로 인한 분노가 더이상 '자신을 향하는' 바보같은 일을 막을 수 있다. 게다가 엄마 역시도 할머니에게서 무의식적으로 물려받은 것들을 전해줄 가능성이 크다.   

또 이런 증상들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리라는 기대도 접어야 한다. 현재 자신의 편협한 관계망이나 왜곡된 자아상, 자신의 딸을 대하는 불안한 태도들이 거꾸로 엄마를 발견하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불행의 모든 연유를 과거나 타인에게서 찾는 것은 어리석지만 그것을 간과하는 것도 현명한 일은 아니다.

구체적인 치료의 과정들은 불가의 명상 수행법을 떠올리게 한다. 


문제를 바로 잡으려면 판단하거나 어떤 행동을 하려 하지 말고 이 분노 자체를 느껴봐야 한다. 그러면 분노를 더욱 잘 다스리게 되고, 이를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할지 아니면 아예 표출하지 않을지 결정할 수 있다. 분노는 우리가 똑바로 바라보기 전까지는 우리 곁을 계속 맴도는 유령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더는 분노가 두렵지 않을 것이다. -책에서

분노와 마찬가지로 사랑과 슬픔 역시도 '드러내기, 내버려두기, 밑바닥까지 느껴보기' 단계로 진행하라고 말한다. 분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반사적 행위들이 과장될수록 진실에서 멀어질 지도 모른다.


엄마옷 벗기
 
<엄마를 부탁해>가 엄마라는 존재를 진지하게 불러온 건 기쁜 일이지만 완벽하게 정형화된 엄마를 통해, 엄마를 급하게 용서하거나 미화할 가능성을 벗겨버리고 싶진 않다. 엄마는 있는 힘껏 자식을 위하지만, 작가가 직접 말했듯이 '그것이 동등하게 엄마를 기쁘게 한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된다. 엄마도 누군가의 영향력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배운 '딸'임은, 엄마의 왜곡된 목소리를 죄책감없이 가려낼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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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의 고수 - 신 변호사의 법조 인사이드 스토리
신주영 지음 / 페이퍼로드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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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집 주변이 오글거립니다. 먼 함성이 창에 불 켜진 여러 집을 합친 건지, 어디 특별 행사장의 모둠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네요. 지금 우리는 이기고 있습니까. 이 새벽에 배달차 소리가 산발적으로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합니다. 동네에 촘촘한 수비망을 형성한 치킨집 사장님들의 승리군요.  

(그 사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네이버 실시간 중계를 띄워놓고 있었습니다. 작업은 물건너 갑니다)

경기장이 법정이라면 어떨까요. 후반 추가 수혈된 김남일의 지나친 혈기가 실추한 패널티 킥에, 변호사가 고용된다면? 어쨌든 16강 진출이라는 큰 목적을 달성했기에 과실이긴 하지만 치사는 아니었다. 과장없이 변호할 수 있겠습니다. <법정의 고수>에 의한다면 말이죠.



긍정적인 기운으로 가득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법이 불행에 둥지를 튼다는 사실 만큼은 확실해집니다. 반대로 '단 한 사람'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행복의 수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하기도 합니다.     

늘 억울합니다. 차인것도, 탈락한 것도, 주머니가 가벼운 것도 모두 내 탓이 아니길 바랍니다. 교통사고도, 사랑도, 다툼도, 내가 옳았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바쁩니다. 내 억울함을 증거할 단서들이 어디든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법정은 철저한 증거주의 입니다. 이의 반대기조인 자유심증주의도 안전장치로 증거능력 안에서 자유심증합니다. 현대의 증명적 사고는 법정과 맞닿아 있는것 같습니다.

좀 더 합리적으로, 단 사진 한 장 이라도, 단 한 줄의 인용이라도, 공인된 인물의 권위를 빌어서 나의 주장을 증명하려는 증거주의 사고가 널리 통용됩니다. 진실이 진실 스스로의 힘으로 드러나는게 아니라 밝혀야만 되는 어떤 주장들 속에서 뒤져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관계에 집착하는 부득불 씁쓸한 곳에 사람냄새 물씬 나는 변호사가 떴습니다. 법정을 삶터로 바꿔 씁니다. <법정의 고수>는 법조계의 숨겨진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승소와 유불리, 증인, 증거, 판례, 법조항, 날카로운 칼날을 쥔 직업인이 차가운 세상을 비비는 내용입니다. 편하고 재밌습니다. 소설 한 편만큼 잘 읽힙니다. 고민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공격적인 변론서라기보다는 감정적인 탄원서에 가깝습니다.  

법조계의 드라마틱한 성공사례나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사건 보다는,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교통사고, 이혼, 간통, 사기, 연대보증 같은 평범한 사건들을 다룹니다. 십년차 변호사가 괴나리 봇짐을 이고 떠나는 자아여행 같습니다. 전혀 과장된 몸부림도, 목적지가 분명한 여행도, 감격스런 현장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속에 잠복되어 있는 보편적인 고민이 법과 만나는 지점이 이상하리만치 다정합니다.  

부모님이 당했던 사기로 노무현, 이성암 변호사를 차례로 만난 어린시절 이야기로 행복한 시동을 겁니다. 돈을 주고 사야하는 변론에 약간의 온도차를 주기 시작합니다. 이후로 줄줄이 이어지는 법정의 사례들은 신주영 변호사(저자)의 보온으로 따숩습니다. 피고와의 적극적인 공감, 연민부터 사법연수생들의 고충, 법조인의 업무환경, 법정 고수들의 역전되는 수, 실패한 변론들, 신나는 승리보다 신명나는 고민들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판사를 설득하려면 판사의 말을 써야한다는 조언처럼 그녀는 독자의 말을 몸으로 익혀 흔들리는 인간의 변호사가 됩니다. 그녀도 세상의 법을 익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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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나를 사랑하는가
진 트웬지 & 키스 캠벨 지음, 이남석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나는 왜 나를 사랑하는가>/진 트웬지,키스캠벨/옥당/2010.6


기독교가 오로지 하느님의 눈을 통해서 선과 악을 구분하듯이, <나는 왜 나를 사랑하는가>는 나르시시즘의 기준으로 세상을 판별합니다. 인간이라면 '선과 악'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처럼 나르시시즘이 저를 옭아매고 말았습니다. 일생의 종교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어떤 강렬한 책들은, 제게 '종교'와도 같은 힘을 발휘합니다.
 
부정하다 수긍하고, 수긍하다 도리질치고, 몸부림치다 온순해지길 반복하면서 동심원으로 중심부에 다가갑니다. 그곳에 실체가 있다면 하느님이 아니라 '나의 믿음'인 것처럼(전 무교 입니다), 나의 나르시시즘과 마주앉아 황망합니다. 이곳저곳 어긋나고 줄이 끊어진 삶이 혹여 '나르시시즘' 때문은 아니었나 생채기를 내며 물어봅니다. 

남보다 앞서기를 원하는가.
독특한 것들이 나를 빛낼 것이라 믿는가.
나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가.
다른 사람과의 공통점보다 차이점을 더 강조하는가.
유명해지고 싶은가.
나는 나만 사랑하는가.
성과를 자랑하길 즐기는가.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사람을 만난적이 있는가.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고, 멋지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타인의 고통에 무뎌졌는가.
아이에게 '너는 특별하다'라고 말하고 싶은가. 
나의 행복은 침해받을 수 없는 것인가. 
돈을 빌려서라도 나를 돋보이게 할 물건을 구입했는가.
날 비난한 사람에게 지나친 적대감을 품었는가.

이런 질문들이 지긋지긋한 두더지처럼 문자를 뚫고 튀어나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라고 방망이질을 해도 잠복된 나르시시즘을 완벽히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몇 가지 변명을 해봅니다. 이제 30대, 저는 '겸손의 시대'가 아닌 '자기 PR의 시대'를 걸어왔습니다. '도덕'이 아닌 '상상력, 개성의 모터'가 힘을 발휘하는 곳에 서있습니다. 이웃과 가족이 아닌 '웹'과 '사회적 지위'가 발분하는 소통의 에너지에 휘둘립니다. 더디게 늘거나 급격히 깎여나가는 저금 통장이 아닌 신용카드의 대출이용한도가 더 절대적인 숫자였습니다. 책은 이 모든 상황을 나르시시즘이 창궐하는 증표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겸손을 배울 곳도 많았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제가 알기론 '겸손'이 성공의 시대에 어울리는 가치는 아니었습니다. '사랑받으려면 나를 드러내라'가 훨씬 솔직하고 당당해 보였죠. '겸손하라'는 권유보다 무서운 나르시시즘에 대한 해부는, 그것을 거의 악성 종양으로 진단하고 적극적으로 파괴할 것을 종용합니다.
 
이 점은 무책임한 사회비판보다 뼈아픈 자아검열을 먼저 요구합니다. 언론과 교육과 웹시대와 정치와 경제가, 어떻게 나르시시즘을 확산시키고 파멸로 이끄는지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만, 결국 '나는 나르시시즘에서 자유로운가'를 묻게되는 이 책은 좀 잔인할 만큼 단순화 된 경향도 있습니다.
 
자신 안에 여러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일개의 현대인으로서 나르시시즘에 의한 인간 분류는 천사와 악마의 구별만큼이나 선명하면서도, 한편 의심스럽습니다. 예뻐지고 싶은 욕구, 유명해지고 싶은 욕구,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는 자기계발의 욕구, 나와 내 아이는 특별하다는 천부권, 엣지있고 핫하고 쿨한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유혹, 등이 모두 나르시시즘에 의해 발현된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이마에 거울을 하나씩 달고 있는 자아기계라도 되는 듯 느껴졌습니다. 

이 블로그만해도 독후라는 미명 아래 '나'를 과시하기 위한 방편은 아닌지, 어제도 잔소리를 퍼부은 시어머니가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나르시스트는 아닌지, 방어기제로 적개심을 품은 제가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르시시즘에 이미 전염된 건 아닌지, 자기 얘길 하기 좋아하는 옆집 할머니도 유사한 증상인지, 꾸미길 좋아하는 남편도 누구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경계대상은 아닐지, 갑자기 '나르시시즘'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일상을 재단하고 있었습니다.
 
책은 수많은 처방전을 내놓는데, 그 중 나르시스트들을 격리 시키는 방법으로 '그들이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한 되도록 얽히지 않으면서 자신을 보호하라고 말합니다. '친밀하게 굴되 친구가 되지는 마라''그들과 주고받은 것들을 꼼꼼하게 기록해두어라. 상황이 나빠지면 뒤통수를 칠 나르시스트와 대적할 때 유용하게 쓰일 테니까' 이 처방은 이 책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이기는 하지만, 나르시스트들의 위험도에 얼마나 증오에 가까운 판결을 내리고 있는지를 알게합니다. 

내 안에 살고 있는 악마처럼 분명 나르시시즘도 한 자리 차지할 것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완벽한-경계할만한- 나르시스트의 모델이 과연 존재하겠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성형녀, 방송에 자주 노출되는 유명인, 라이프 스타일의 잡지들, 총기 살해자, 천부권자, 독특한 이름을 짓는 부모들, 자기계발서 속에 나르시시즘의 징후는 분명히 있지만 그들을 '나스시시스트'로 못박고 벌하는 행위가 절대적으로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책이 권하는 처방전은 '나'에게 만큼은 '나르시시즘이 없다'는 전제하에만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르시시즘에 방어하고 거부할 수는 있겠지만 나르시시스트라고 찍은 낙인으로 사람을 대한다면 그것 또한 얼마나 위험한가요. 나르시시즘은 존재할 망정 나르시시스트는 없다고 반박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조금 순화되어 해석해야할 것 같습니다. 강경한 어조를 조금 포기했다면 더욱 지적인 목소리가 될 수 있었음에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하지만 산발적이면서도 소중한 아래의 구절들은 이 책을 빛나게 만듭니다. 이런 주장은 나르시시즘의 반대편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돕고, 서구의 자아비판을 통해 동양적 가치에 대한 재발견을 이끌기도 합니다.          


*저축을 하는 것에 더 많은 인센티브가 주어져야 한다.(신용도가 아닌)
*나르시시즘과 자존감에는 차이가 있다. 아이에게는 '특별하다'고 말하는 대신 그저 수학을 잘한다고 말해주면 된다.
*우리는 모두 독특한 존재이지만, 공통적인 경험과 도전과 특성을 나눠 갖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만약 자신을 너무 사랑하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할 몫을 남겨놓지 않게 된다'는 신념이 널리 퍼져야 한다.
*'미래에 우리는 모두 15분 동안은 유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앤디 워홀의 말-유명해지지 않는다는 말과 동의어처럼 들립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빚은 숨기지만, 그들이 소유한 재산이나 물건은 절대로 숨기지 않는다. 
*전통적인 불교에서 나온 개념이기도 한 '깨달음'은 나르시시즘을 줄이고 자아를 얌전하게 하는 한 방법이다. 
*아이들에게 서로 얼마나 비슷한지 가르칠 수 있다면, 나르시시즘적인 공격성에 대한 잠재적 치료제를 얻게 될 것이다.(아이에게 동감과 동정을 가르치는 데 집중하라)  
*학문적으로 우리는 '실패를 배우는'것이 '네가 특별하다'는 메시지보다 훨씬 유용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독서 후, 우연찮게 제가 살고 있는 도시의 시민헌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르시시즘의 국가적 각인인가요.



시민헌장 1.부지런하고 알뜰히 하여 남보다 앞서는 시민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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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와 통하는 불교 - 청소년이 처음 만나는 싯다르타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2
강호진 지음, 스튜디오 돌 그림 / 철수와영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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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하나 냅니다.


들에 단을 쌓고 법회를 여는 것을 뜻하는 불교 용어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시긴 전) 마지막으로 제자인 마하가섭에게 정법을 전수하면서 영취산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석가모니가 갑자기 설법을 중단하고 대중을 향해 연꽃을 들자 어리둥절해하는 대중들 사이로 가섭만이 이 뜻을 알고 빙그레 웃었던 '염화시중의 미소'도 이 곳에서 탄생합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어지럽고 떠들썩한 상황을 뜻하는 말로 쓰입니다. 무엇일까요?




<10대와 통하는 불교>, 청소년을 위한 교양 도서의 냄새가 납니다. 아쉽군요. <당신과 통하는 불교>라고 고쳐부릅니다. 모두가 읽기에 모자람이 없는 책입니다. 대게 쉽게 읽히려는 인물전이나 종교서들이 '일화'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형국인데 교훈이나 정설을 언급하기보다, 쉽게 풀어 쓴 말로 동심원을 그리며 불교의 핵심을 향해 갑니다. 고민거리도 던져주고 보다 넓은 시야로 불교를 보도록 끌어올립니다. 타겟을 지정한 책이긴 하지만 타겟을 벗어나도 즐거울 책입니다.

각 꼭지의 끝에, 궁금하지만 어떤 책도 가르쳐주지 않을 것같은 질문들이 모여있는데 '불교 신자들도 일요일마다 절에 가야 하나요?'에는 적절한 답문 뒤에 김규항의 <교회>란 글을 덧붙입니다.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인이다. 아이가 경기라도 하면 나는 며칠 사이 지은 죄를 떠올린다. 나는 예수에 의지한다. 내가 가진 단출한 지식과 사상을 통틀어 예수의 삶만큼 나를 지배하는 건 없다. ...교회에는 예수대신 맞춤식 예수 상像들만 모셔져 있었다. ...나는 이제 나보다 다섯 살이 적어진 예수라는 청년의 삶을 담은 마가복음을 읽는다. 내가 일 년에 한 번쯤 마음이라도 편해 보자고 청년의 손을 잡고 교회를 찾을 때 청년은 교회 입구에 다다라 내 손을 슬그머니 놓는다. 내가 신도들에 파묻혀 한 시간 가량의 공허에 내 영혼을 내맡기고 나오면 그 청년은 교회 담장 밑에 고단한 새처럼 앉아 있다." 


바쁜 현대인들을 위해 일요일에 법회를 열고 사람들을 모아놓고 경전 공부를 하는 사찰이 많이 늘긴했지만, 교회에서만 예수를 만나는 '교회 기독교'의 괴리를 불교가 답습해서는 안되겠다는 바깥 의지가 생기더군요. 즉시 마음에 품는 순간, 예수와 부처의 삶을 몸으로 쓰는 순간이 '종교를 믿는다'는 행위의 시발점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질문을 도출한 본문에서 이미 예견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식의 입신 출세나 함격, 부모님의 건강이나 남편의 사업을 위해서 절에 들락거리는 '보살' 아주머니들을 과연 이타적인 서원을 세운 보살이라 물러야 할까요? 또, 마치 절을 법당의 주인이양 행세하면서 관광객들과 일반 신도들의 법당내에서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사납게 눈을 부라리다, 누군가 축원과 재를 지내기 위해 시주를 한다고 하면 상냥한 얼굴로 돌변하는 법당보살들도 과연 '보살'이란 이름이 어울리는 존재들일까요? 어쩌면 이시대의 보살은 절 안이 아니라 절 밖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10대와 통하는 불교>에서

호기심을 가장하는 질문이 그 깊이를 더해갈 때, 부도전 앞의 연못에 무심결 얼굴을 비추다가 석가산의 봉우리를 마주하는 격입니다.
 
이쯤에서 두 번째 퀴즈 나갑니다. 


옛날에 게으른 승려가 있었는데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수행과 정진을 게을리하다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승려는 그 과보로 죽은 뒤 이것의 몸으로 환생하여 살게 되었는데 등 위에 나무가 솟아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스승을 보게되어 반갑고 서러운 마음에 스승 앞으로 가 눈물만 뚝뚝 흘렸습니다. 이것의 전생을 살펴본 스승은 자신의 제자였음을 알고 천도재를 지내니, 제자가 꿈에 나타나 수행승들이 자기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나무로 이것 모양을 만들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스님들이 목탁을 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에서 발췌       
        
    

저도 그제야 목탁이 이것 모양을 무척 귀엽게 닮았다는 사실에 무릎을 칩니다. 이것 말고도 절로 신명이 나게하는 사물놀이의 네 가지 악기가 불교의 사물로부터 연원된 사실도 뒤 쪽에 나옵니다. 예불에 이용하는 사물, 즉 목어, 운판, 북, 범종이 북, 장구,꽹과리, 징과 짝을 이뤄 축소되었다고 합니다. 불교의 수행도구 하나하나가 교리의 상징성을 닮고 있다는 사실 또한 종교의 깊이를 재는데 중요한 재료가 됩니다.

점 하나를 찍고 시작하는 두 번째 꼭지는 인상적입니다. 현대 수학에서의 점, 선, 면의 서술이 불교의 연기법과 상통합니다. "이것이 있으니 저것도 있고, 이것이 생기니 저것도 생기고, 이것이 없기에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니 저것도 사라진다."의 상호관계가 점이 없으면 선을 말할 수 없고, 선이 없으면 점을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이것은 바닥을 걷는 발바닥이 바닥과 하나이면 걸을 수 없고, 둘이면 디딜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점 하나로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를 설득하기도 합니다. 


이 책의 클라이막스는 '세기의 라이벌들'이라는 타이틀로 이순신과 원균의 째째한 신경전에 대해 입을 떼며 시작합니다. 석가모니vs데바닷타, 아난vs가섭, 원효vs의상, 지눌vs성철이라는 대결구도는 불교의 과거 현재, 미래를 톱아보게 하는 빅매치입니다. 무엇보다 세심한 '세심사 가는길'이라는 마지막 꼭지는 절에 가서 남모르게 답답했던 마음을 해소하기에 좋았습니다. 세심사라는 가상절을 마련해서 절간의 초입부터 앞뜰과 뒷뜰을 샅샅히 뒤져보며, 일주문, 사대천왕, 비로전, 대웅전 등등에 새겨진 의미를 숙지할 수 있었습니다.

답은

야단법석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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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과학 상식 바로잡기 2 -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과학 상식의 오류들 엉터리 과학상식 바로잡기 2
칼 크루스젤니키 지음, 안정희 옮김 / 민음인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피라니아는 위험한 물고기 일까?


피라니아는 몇 센티미터부터 60센티미터까지 몸길이가 다양하다. 그리고 실제로 끝이 뽀족한 세모꼴의 무섭게 보이는 이빨을 가지고 있다. 몇몇 종은 채식성이지만 대부분은 육식을 한다. 대부분의 육식 피라니아는 다른 물고기를 그저 풀처럼 뜯어먹는다. 이를테면 지느러미나 비늘 같은 곳을 조그맣게 반원형으로 한 입씩 뜯어먹는데, 상처 입은 물고기가 멀어져가면 그냥 내버려 둔다. 지느러미나 비늘은 35~85퍼센트가 단백질로 되어 있어서 영양분이 아주 풍부하다. ..피해 물고기의 지느러미나 비늘은 몇 주면 다시 돋아나기 때문에 피라니아에게는 다시 먹이가 생기는 셈이다. 피라니아는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풀의 일부만을 부드럽게 뜯어 먹고 사는 소 떼와 비슷하다. -<엉터리 과학상식 바로잡기>에서
 
피라니아가 단 몇 분만에 사람을 뼈만 남기고 다 뜯어먹는 장면이 종종 영화에 사용되면서 피라냐는 작지만 사나운 물고기로 각인 되었다. 그래서 아래의 비유가 가능했다.  


2008년 촛불 시위를 폭력시위라고 말하는 이들이 이렇다. 그들 중 대다수는 시위 초기 별다른 반응이 없다, 
폭력적 저항이 일어나자 앞 뒤 똑 떼어내고 피라냐처럼 달려드는 이들이다. -참좋다 님의 <미국민중사2>서평 중에서 발췌(참고로 이건 매우 멋진 서평이었습니다.) 

하지만 <엉터리 과학상식 바로잡기2>는 대부분의 피라냐가 잔인하고 야만적인 속설의 무고한 피해자라고 정리한다. 오히려 예문에 의하면 매우 평화로운 어종 중의 하나로까지 비춰진다. 그렇다. 일반적으로 꽤 온순하다는 것이다. 익사체의 살점을 뜯어먹기는 하지만 제임스본드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악당이 산 채로 뜯기는 일은 없다. 
댐이 생긴 후로 피라냐의 공격사고가 증가한 사례도 있었지만 그것조차 모두 피라냐가 새끼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인간은 피라냐를 두~번 죽인 샘이다.
 
<정재승의 도전 무한지식>에서 말했듯이 잡학 상식은 확실히 힘이 세다. 그러나 '과학'이 많은 것을 알려주지만, 모든 것을 말해줄 수는 없다는 귀착은 예정되어 있었다. 책을 통해 정보를 얻는 일은 저녁 찬거리를 위한 장보기나 다름없다. 책으로 지식의 버무림, 즉 지혜와 가치, 교양을 얻는 일에 더 중점을 둔다면,

닭 가슴살이 커진 이유를 보기좋게 설명하지만 얼마나 헤로울지에 대해서는 중립을 꿰하는,
껌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하면서 폴리비닐 아세테이트의 끔찍함에 대해서는 슬쩍 외면하는,
바나나가 바나나 나무에서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면서도 노동의 착취와 바나나의 기형적 생산량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엉터리 과학상식 바로잡기>는 우리가 새로 요리해야 할 신선한 재료일 뿐이다. (전기의자 이야기나 당근, 종이접기에 대한 과학상식의 오류들은 무척 흥미로웠다.) 그런 점에서 비슷한 잡학상식 책으로 '생각하는 교양'을 슬로건으로 내 건 <정재승의 도전 무한지식> 쪽에 슬쩍 손을 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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