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9일이 '한글날'이었다. 나라의 '국경일'이었지만 '법정 공휴일'은 아니었다. 2005년 12월, 근 15년 간 각계의 노력으로 '다시' 국경일로 지정 되었지만 '빨간 날'로 기념할 수 없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노는 날이 많으면 나라가 가난해 진다는 것. 한글날을 무심히 지나쳐버리면서 빨간 날의 위력을 새삼 느낀다. 대신 그 날을 즈음하여 쏟아진 도서들이 '한글날'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한달 간 쉬엄쉬엄 한글 관련 책들을 읽어내렸다. 홀로 자축한 한글날. 쓸쓸하고 풍성하다. 책을 돌아보기 전에 한글에 얽힌 역사와 국어사전 이야기를 잠깐 해본다.
한글날로 돌아보는 역사
'가갸날'
<훈민정음혜례>를 완성한 날(1446년 음력 9월)로부터 480주년(8회갑)을 맞은 1926년 9월 26일(음력) 조선어연구회는 기념 축하회를 열었다. 그 때 쓰인 이름이 '가갸날'이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글은 이미 온 백성이 쓰는 글자가 되었지만 한일합병으로 '한글의 규범화'가 정책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던 시기였다. 우여곡절 끝에 1929년 조선어 편찬회가 설립되어 국문연구소의 연구를 토대로 '한글맞춤법통일안'이 1933년 제정되었다.
국문연구소의 과업이었던 '조선어사전'은 일제의 탄압(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첫 간행에 실패하고, 해방 후 2년이 지난 뒤에야 최초의 한글 사전이 탄생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지 500년이 넘은 해였다. 그마저도 일제에 의해 압수되었던 사전 원고가 일본의 패전 직후 격성역(지금의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의 화물더미 속에서 발견 되었다니, 한글이 걸어온 길이 우리네 역사만큼 기구하다.
'한글날'
현재의 '한글날'(10월 9일)은 1945년에 처음 결정되었다.('한글날'이란 명칭은 1928년부터 쓰였다) 한글을 해설한 책인 <훈민정음해례>가 발견되면서 해례에 표기 된 '9월 상한'(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바꾸어 다시 정한다. 한글이 처음 완성되었다고 알려진 1443년이 아닌 <훈민정음해례>(1446년)가 완성된 날이 기준이 되었다. 북한은 반대로 한글이 완성된 날을 기준으로 '훈민정음 창제일'(1월15일)을 기념한다고 하니, 분단의 역사 역시 '한글' 안에 쓰여진다.
'공휴일'
1946년 훈민정음 반포(<훈미정음해례>가 완성된 날) 500돌을 맞아 처음 공휴일이 되었다가 1949년 '법정공휴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 시절 '공휴일이 너무 많아 경제 발전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1990년 공휴일에서 빠져 '기념일'로 전락한다. 그 이후로 15년 간 각계각층에서 '한글날 국경일 지정 운동'을 벌여 2006년 국민의 정부 때 다시 '국경일'이 되긴 했지만 '법정 공휴일'은 아니었다. 이와 관련해 올 해 취업포탈 '잡 코리아'가 '공휴일로 지정했으면 하는 날'을 묻는 설문조사를 벌여 '공휴일이 부족하다'고 답한 직장인들 중 70%가 넘는 응답자가 '한글날'을 꼽기도 했다. (한글날 즈음에 이루어진 설문이었다)
'겨레말큰사전'
최초의 한글 사전 첫 권(을유문화사)이 1947년 10월 힘겹게 태어나고 또 하나의 의미있는 사전 작업이 2006년부터 시작되었다.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 2005년 2월20일 故 노무현 대통령 시절 남과 북의 어학학자들이 금강산에 모여 민족어 공동사전을 편찬하기로 합의하고 그 이름을 '겨레말큰사전'이라고 했다. 이 사업은 남과 북이 공동으로 추진하여 남북의 언어적 차이를 극복하는 최초의 우리말 사전으로 <표준국어대사전>과 <조선말대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약 7만여 개의 새 어휘를 발굴하여 수록한다. 2009년 본 집필이 시작되 2013년 작업을 마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난 10월 4일 한글날을 앞두고 고은 시인은 ‘절반의 고개를 넘어온 <겨레말큰사전>사업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이기도 한 고은 시인은 ‘지난해 국회에서 의결되고 배정받은 기금 중에서 편찬사업비를 지원받지 못했다’며 <겨레말큰사전>사업의 위기를 알렸다.
이후 통일부가 2억 9000만원을 지원하겠다고 발표 했으나 북측편찬사업보조비 6억원 등이 빠져 있어 '생색용 지원'에 그쳤다. 고은 시인은 ‘독일은 분단 상황에서도 동서독이 힘을 합쳐 <괴테사전>을 만들었고 중국과 대만은 <양안사전>을 만들어 말의 길을 열어가면서 통일의 순간을 기다렸다’며 ‘남북관계의 긴장과 상관없이 학술적이며 사전학적인 의미로 집필사업이 지속되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현 정부 이후로 불편했던 남북관계의 영향이 의미 있는 민족어 공동사전 사업 마저 삐그덕 거리게 만든 것은 아닐까.
한글날 즈음부터 읽기 시작한 4권의 책.
<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로의 여행>
이바라기 노리코/뜨인돌/2010.10.5
윤동주를 사랑한 일본 여류작가, 한글로 한국을 말하다.
일본작가의 한국어 공부를 담은 책이다. 전후 일본문단을 대표하는 여류작가 이바라키 노리코(1926-2006)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는 시로 국내에서 이미 유명세(?)를 얻었다. 공선옥 소설의 표제로 쓰였고, 이 시의 형식을 패러디한 작품이 유형진 시인의 등단작이 되기도 했다. 다만 원작이나 원작자의 모습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는데, 거꾸로 그가 '한글'과 '한국문화' '한국인'을 이야기 한다.
작가의 한글 공부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50세에 남편을 잃은 이바라기 노리코는 한글을 공부하며 사별의 슬픔을 달랜다. 그 즈음 발표한 에세이집이 <한글로의 여행>(1986)이었는데 그 중 '윤동주'라는 수필이 일본 고교 검정 교과서에 실렸고, 1995년 이를 소재로 한 <윤동주 특집> 프로그램이 NHK TV를 통해 방송되면서 양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이번 <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로의 여행>은 이 에세이집의 번역작이자 '아사히 신문'에 연재 되었던 칼럼을 모은 것이다. 신문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글이라 그런지 쉽고 편안하게 쓰여졌다. 무엇보다 명랑하고 재기발랄 하다. 한글 공부의 동기와 난관, 과정들을 술회하는 첫번 째 장 부터 '일본에서 한국어를 배운다는 것'의 아이러니를 재치있게 보여준다. 왜 하필 한국어냐는 숱한 질문에 작가는 '이웃 나라 말이잖아'라고 눙쳐보지만, 여전히 일본인들을 아리송해 한다. 작가만큼은 '무난한' 대답임을 강조하지만.(일본 열도에 한류 바람이 불고 있는 지금과는 사정이 다르다)
당시 50세가 넘었던 작가의 나이나, 문학계에서의 위상을 고려해 본다면 지식인의 뻣뻣함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놀랍다. 오히려 한글, 한국에 대한 호기심은 아이와 같이 빛이 난다. 쉬운 단어와 소박함이 있는 '이웃나라 민요의 멋'을 알았던 소녀시절을 회상하기도 하고, 조선시대 방랑 화가들이 그린 민화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기도 한다. 그만의 애정으로 혹은 이방인의 눈으로 비춰지는 한글과 한국은 새삼스러운 데가 있다. 되려 '우리가 이런가?'라고 되묻게 된다. '한국어의 울림만큼 낭랑하고 아름답게 여겨지는 언어가 없다' 이 같은 낯 간지러운 구절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신선한 이유 중 하나다.
''당신'일까 '선생님'일까'라는 꼭지에서는 우리나라의 호칭문화가 슬쩍 드러난다. 상대방을 칭하는 대명사 '당신'이 부부사이에서는 허락되지만 연상에게는 무례한 칭호다. 성씨 뒤에 붙는'~씨' 역시 풀네임 뒤에는 가능하지만 성 뒤에 붙여 부르면 실례가 된다. 그래서 '저 나라에서는 선생님이 마구 오간다'는 내용이다. 그러고 보니 책 서평을 부탁하는 출판사로부터 필자도 왕왕 '선생님'이란 호칭을 듣기도 한다.
작가는 이런 한글 표현법과 일본어 사이의 연관점, 차이점을 찾아낸다.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두 나라간의 격차와 뼈아픈 역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각 민족마다 발성기관의 고유한 특징이 있음을 역이용 해 '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인을 잡아들여 학살한 일, 일본인이 '조선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 한국의 미술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만들어낸 민족에 대해 냉담한 현실을 응시한다. 한글을 배워줘서 고마울 정도다. '한글'이라는 외형적 기능적 아름다움을 사랑하기보다 한글을 쓰는 민족을 이해하려는 마음씀이 뜨겁다.
그녀는 대표작에서도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단순한 시구를 반복하며 패전 후 일본인들의 무력감과 상실감을 담아냈다. 시대의 아픈 곳에 서 있고자 했다. 시를 사랑하는 만큼, 언어를 대하는 예민함을 작가는 '한글 공부'에서도 발휘한다. 학자나 전문가의 논리는 없지만 직관과 감성이 대신한다. 무엇보다 '이웃 나라'에 대한 애정이 깊으면서 단순하고, 단순하면서도 결이 곱다. 물고기가 물을 대하듯 한글을 쓰고 있는 우리에게 새삼 한글 속을 헤엄치게 하는 책이다. 굳이 한글의 우수성을 되새기기보다, 이바라기 노리코처럼 '관계' 속에서 언어를 여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이밖에 '일상 속 한국어 염탐기'라는 두번 째 장에서는 우리나라의 속담, 기발한 일상어들, 세계 유래없는 '모국어의 날'을 만들어 기념하는 한국 이야기를 들려 준다. 또 네번 째 '여행길에 마주친 풍경'에서는 제목처럼 한국 여행길의 에피소드 들을 만날 수 있다. 마지막 장의 '역사에 깃든 한국문화의 표상들'에서는 묵직한 주제들을 다룬다. 숫자로 대신하는 우리나라의 두 기념일인 8.15와 6.25, 일제시대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이야기, '윤동주'라는 수필로 일본 문학 교과서에 소개되었던 '비운의 청년 시인, 윤동주'등이 실렸다. 작가는 마지막 꼭지에서 윤동주가 '일본 검찰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으므로 '일본인 스스로 그 죽음의 전모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어 윤동주의 아우 '일주'씨 와의 만남, 시인의 작품세계, 그에 대한 애틋함을 담았다. 덧붙여 윤동주의 시가 다치하라 미치조의 시와 닮았음을 꼬집기도 한다.
(사진은 <다 알지만 잘모르는 11가지 한글 이야기>에서)
<도사리와 말모이, 우리말의 모든 것>
장승욱/하늘연못/2010.10.1
찰진 우리말 뒤엉킨 도사리 장터
글쓴이 장승욱은 알아주는 한글 전문가다. 한글문화연대가 선정한 '우리말글작가상' 수상작가로 지난 해 한글날 즈음에서 <우리말은 재미있다>를 펴내기도 했다. 이번 책은 우리말의 '도사리'를 모아 풀어 쓴 사전 형식이다. 책의 절반은 아예 사전처럼 꾸며 '말모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도사리'란 익는 도중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를 말하는데 이 책을 내면서 '도사리를 한 광주리 모아 팔겠다고 시장 귀퉁이에 나앉아 있는 촌부의 심정'이라고 했다. <우리말은 재미있다>가 집대성된 형태인 듯 하다.
'사전' 같은 딱딱함은 없다. 우리말 하나하나를 투박한 듯 세심하게 어루만지는 말 맛이 일품이다. 꾸밈 없고 시원시원한 문장에 속도감이 있다. 생소하면서도 낯익은 우리말들을 한눈에 구경할 수 있는 장터는 흔치 않다. '사전'의 탈을 쓰고 저자가 떠는 '익살'을 즐거이 감상하는 동안 찰진 우리말이 뒤엉킨다. 가령 '총각김치과 홀아비김치'라는 꼭지에서는 '처녀김치가 없으므로 영원히 총각신세를 면할 가망이 없는 총각김치도 있다'고 운을 떼며 '홀아비 김치'를 소개한다. 거기다 '총각이 어떻게 홀아비가 되었는지 시간이 넉넉한 사람이라면 한 번 연구해 볼 일이다'고 덧붙이며 ' 써레기김치, 섞박지, 덤불김치, 얼갈이김치, 지레김치, 둥둥이김치 등을 차례로 소개 한다. 마지막에는 수수께끼도 낸다. '김치 가운데 가장 맛이 없는 김치는?' 답은 '기무치'다. 이렇게 생활, 세상, 자연, 사람, 언어 속의 우리말들을 175꼭지에 걸쳐 소개한다.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문장편
김철호/유토피아/2010.10.15
한글을 제대로 쓰기 위한 실용서다. 이미 <국어실력~>시리즈로 '국밥'이라는 별칭을 얻은 책의 '문장편'이다. 20년 동안 글쟁이로, 번역자로, 텍스트 편집자로 살아 온 저자가 낱말편에 이어 이번엔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저자는 책에서 좋은 문장의 세가지 조건으로 '의미의 명확성''표현의 경제성''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글맛'을 든다. 또 이 각각의 목표를 실현한 또렷한 문장, 찰진 문장, 맛있는 문장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알려준다.
'은/는' '이/가'로 대표되는 조사의 사용법, 헷깔리는 조사와 연결어미들의 미세한 차이를 다양한 예문과 연습문제를 통해 설명한다. 내몸처럼 쓰고 있는 한글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또 문장을 쓸 때 흔히 저지르기 위운 중복과 쓸데없는 표현들을 걸러내는 방법을 비롯해, 꾸밈말, 문장성분의 호응 등을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한다. 특히 구어체와 문어체에 대한 탐구 편을 통해 '어떻게 쓸 지'에 대한 방향을 잡아 주고, '번역문'에 대한 오류와 실례를 들어 문장 공부의 필요성을 더한다.
<다 알지만 잘 모르는 11가지 한글 이야기>
배유안/책과함께어린이/2010.10.9
어른들도 '잘 모르는' 한글 이야기
글쓴이 배유안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소설로 쓴 <초정리 편지>로 창비 '좋은 어린이책' 대상을 받은 바 있다. 게다가 작가는 학교 선생님이었다. 이 책을 쓰기에 좋은 조건이다. '한글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지식, 그리고 오늘의 한글이 있기까지 험난했던 역사'를 돌아본다. 게다가 한 일본인에게 5년 넘게 한글을 가르쳤다니 이보다 더 한글을 '잘 가르쳐 줄' 사람이 있을까?
책은 조카와 조카가 데리고 온 일본인 친구에게 한글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썼다. 만화가 정우열씨가 그림을 그려 흥미를 돗운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다지만 책의 표제처럼 어른들도 '잘 모르는' 내용이 수두룩하다. 한글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한글이 만들어지고 크게 반발했던 쪽이 실은 집현적 학자들이었다는 사실. 문자를 가지고 있는 100여 개의 언어 중창제자가 밝혀진 문자가 손에 꼽힐 정도이며, 그 중 일상에서 쓰이고 있는 문자로는 한글이 유일하다는 점. 사라진 옛글자에 대한 발음과 사용 설명 등, 두꺼운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사실(史實)들이 풍성하다. 모두 역사적 사료들을 바탕으로 들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의 기반이 튼튼한 이유는 아마도 원저에 있을 것이다. 2008년 한글날 즈음 나온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책과 함께)이라는 인문서를 바탕으로 쓰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