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하는 작별
룽잉타이 지음, 도희진 옮김 / 사피엔스21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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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시집. 이라면 누가 이 책에 돈을 지불하겠습니까. 문학과 지성사, 세계사, 민음사, 문학동네, 실천문학사 시집들은 지금 누가 사고 있지요? 저는 못 사고 있습니다.(가림토님과 참좋다님은 사 보시는 것 같습니다) 반은 핑계지만 요즈음은 통 시집을 사 볼 여력이 없습니다. 김언의 <소설을 쓰자>를 주문해 놓고 몇 주를 묵혀두고 있어요. 매 주 배달되는 신간들을 소화해야 하는 시기, 의무감에도 불구하고 제법 맛있는 식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독서편식으로 빈혈과 당뇨를 앓고 있는 허약한 지성에 지난 일 년간 서인영의 신상구두 컬렉션 모양으로 독서식탁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제 첫사랑은 '시' 입니다. 두근거려본 것도, 마음 조린 것도, 합방한 것도, 아파본 것도, 욕한 것도, 추억한 것도, 희망한 것도 모두 '시' 입니다. 부끄러운 고백을 태연히 하는 걸 보니 참, 제 변심 가증스럽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적인' 것, '시심'을 간직한 산문들을 보면서 시를 불러냅니다. 언젠가 시로 돌아가기 위하여 밑밥을 까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김언의 시집<소설을 쓰자>란 제목만 봐도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슬로건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미 소설이나 에세이들은 시인의 문장으로 의미의 축지와 도약을 꿈꿔왔습니다. '시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소설가 신경숙의 바램(인터뷰)이 발상 축에도 들지 않을 만큼 소설가들의 남모른 시사랑은 여러 문장으로 들통나곤 했습니다.
 
간혹 시의 긴장감을 견딜 수 없을 때 '풀어진 시'라는 착각이 들만큼 잘 깍인 문장과, 서사 없이도 서사를 대변하는 묘사에 응축된 사유들, 문장간의 거리가 새와 새장이 아닌 새가 올려다보는 하늘과도 같을 때, 비유의 탁월함에 무릎을 치며 놀랄 때, 시의 골격 없이도 시의 형상이 떠오를 때가 바로 '시적인 산문'과의 반가운 조우 임을 알게 됩니다. <눈으로 하는 작별>이 그랬습니다.

첫사랑을 닮은 누군가를 길에서 스쳤을 때의 덜컹 내려앉는 마음이 흐릿한 추억을 몰고오다가도, 어둠과 함께 이내 또렷해지는 달처럼 선명해지는 상반된 감정들. 기억이 반쯤은 타자의 식민지라는 듯, 막을겨를도 없이 첫사랑의 신체의 한 부위까지 머릿속을 침범해 옵니다. 발가락, 티눈, 점, 희미한 흉터, 들키지 않는 습관들. 룽잉타이의 산문이 나만 아는 표식인양 다가옵니다.

유머와 통찰, 지치지 않는 호기심이 내밀한 자기고백을 공공의 사유물로 내밉니다. 몇 구절을 옮기려고 시도해보았지만 별 의미 없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삭제 당한 노년, 아들에게 스팸으로 분류되는 엄마, 인생의 아이러니를 통째로 옮기기에 이 지면은 너무 작습니다. 양물과 터럭의 건초냄새, 즉, '거시기' 냄새를 모른다고 잡아떼는 엄마와의 한바탕 웃음보, 아들들을 대동하고 할아버지의 말문트기 내기를 시켰던 저자. 진짜 고수들은 사랑과 죽음과 이별을 입에 담지 않고도 꼭 그것을 향해 가는 법인가 봅니다.

"넌 어디서 왔니?"

이 평범한 질문이 딸을 잊어버린 늙은 엄마가 하는 것이라면 문장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의미에서 벗어나 재조합되기 시작합니다. 무겁게 선언한 '시적'이란 느낌이 실은 특별한 시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수한 문장이 도드라지는데 있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수필가 E.B.화이트는 "인류나 인간(Man)에 대해 쓰지 말고 한 사람(a man)에 대해 쓰는 것"이 글을 잘 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이 아침 꽃비처럼 축복이>/장영희/샘터 에서 재인용) 이 한사람의 힘이 얼마나 센지 <눈으로 하는 작별>이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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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4대 비극에 발이 묶이셨다구요? 리어왕, 햄릿, 오델로, 맥베드. 끝도 없이 호명되는 그 이름에 이제 내가 널 좀 알아야겠다, 싶어 4대 비극을 뒤졌을 때가 자그마치 몇 년 전입니다. 


투비 오알 낫 투비, 댓 이즈 퀘스쳔. 

그를 알기도 전에 명성을 확인시켜준 이 대사가 눈앞에 펼쳐졌을 땐 어찌나 싱거웠던지요. 셰익스피어를 브로치 달듯 인용하는 저작들 때문에 좀 과장하면 가슴앓이 좀 했습니다. 지금은 반추하기 조차 힘든 4대 비극을 저는 언제쯤이면 학식과 교양좀 있다는 사람들처럼 손을 찔러 넣어 깊이를 잴 수 있을까요. 

벌써 지난 주에만 보란듯이 두 번의 언급이 있었습니다. 

'이 대사에서 우리의 시선에서 빠트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행위의 갈림길 사이에 놓여 있는 작은 글자, "또는 or"이 그것이다.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선택의 가능성은 자유를 뜻하지만, 동시에 망설임을 뜻한다. ..인간은 매번 선택해야만 하는 자유를 선고 받았다.' -<멜랑콜리의 미학>에서

이젠 하다못해 or까지 우려내는군요. '선택'이란 꼭지를 시작하는 첫 말이었습니다.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셰익스피어는 제왕 절개술에 대해 알고 있었다. ..<맥베스>에서는 스코틀랜드 던컨 왕의 부하 장군이 세 마녀를 만난다. 그들은 그가 왕이 될 것이며 '여인이 낳은 자는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맥베스와 맥더프가 벌인 최후의 전쟁에서 맥베스는 맥더프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맥더프는 여인이 낳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자궁을 찢고 나온'자였기 때문이다. -<엉터리 과학상식 바로잡기>에서

'제왕절개의 어원'으로 셰익스피어의 총명함을 증명할 거라고 어디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방심하면 튀어나오는게 고전입니다. 결국 고전을 필독할지 말지는 제게 빈약한 자유일 뿐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절 완벽히 사로잡지 못하더라도 오로지 제 탓으로 여기며, 제법 의미심장하게 셰익스피어전집 2차분 중 <좋을대로 하시든지>와 <헷갈려 코미디>를 연달아 읽었습니다. 십이야..,로미오와 줄리엣, 한여름밤의 꿈이 있었지만 당연한 듯 불모지에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2010년 독자의 눈에 두 작품은 현실성 없는 과장된 광대극이며, 말놀이의 향연이었습니다. 설정도 전개도 말이 안되기는 매 한가지로, '미혹을 쫓기로' 작정한게 아니라면 그저 노장의 풋풋함과 운명의 장난질을 맛보기에 알맞을 정도였습니다. 하긴 이것만으로도 충분할지도요. 허풍으로 일삼는 풍자와, 말놀이로 드러내는 사랑과 죽음과 권력과 시간에 대한 담론이 한 줄 한 줄 제 발목을 잡아매더군요. 만만해보이는 표제였지만 실은 힘겨웠습니다.
 
두 희곡 모두 단연 유머가 압권입니다. 당시 비비꼬인 운명의 바보짓에 더러 웃기도 했겠지요. 현대적으로 봤을 땐 무장해제 코미디는 아니었습니다. 결혼, 남과 여, 사랑, 권위, 욕망에 대한 조롱과 질타가 섞인 유머에 어떻게 찔리지 않고 웃을 수 있겠습니까.  
    


터치스톤  황소가 멍에를 지듯, 선생. 말이 재갈에, 그리고 사냥매가 종에 매였듯, 인간은 성욕을 달고 다니는 거요. 그리고 비둘기가 서로 부리를 부비듯, 결혼도 조금씩 서로를 갉아먹자는 거죠.

로잘린드  아냐. 비너스의 그 못된 사생아. 생각이 씨가 되고, 변덕이 임신하고, 광증이 출산한, 자기 눈이 멀었으니 온갖 사람의 눈을 속이는 그 눈먼 악동, 큐피드에게 물어봐, 내 사랑 얼마나 깊은지. -<좋을 대로 하시든지>


문학사적인 의미를 반추하기에 제 지식은 너무 얇아서 이렇게 인상평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뭘 몰라 용감한 거라고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아무리 흠집을 내려고 해도 그의 단단한 명성에는 아무런 해가 없다는 계산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런저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의 공력은 변함없습니다.  

특히 <헷갈려 코미디>는 코담배 피던 시절 대학로에서 보았던 '라이어'(지금도 전국을 순회중이더군요)를 연상시킬만큼 속도감있는 전개로 익살스런 상황을 꼬집어 내고 있습니다. 이번 전집의 번역자 김정환 시인에 의하면 '현대적 장르'의 시초입니다. 관객을 완벽한 전지자로 두고 모든 상황을 장악하게 만드는 느긋한 웃음을, 셰익스피어가 처음 선사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좋을 대로 하시든지>에서도 대범함과 통찰로 시절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현대적 발원지의 거인을 만납니다.  
 


터치스톤  어떤 기사분이 '그의 명예를 걸고' 팬케이크가 맛있다고 맹세하고, '그의 명예를 걸고'겨자는 엉터리다 맹세하대요. ..하지만..그 기사분도 거짓 맹세는 아닌것이, 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한댔는데, 그는 명예같은 거 있어 본 적이 없거든, 혹시 명예가 있었더라도, 그 팬케이크니 겨자 따위 보기 전에 맹세로 날려 보냈더라. 

선임공작  자네들 보다시피 우리만 불행한 것은 절대 아냐. 이 드넓은 우주 극장은 보여주지. 우리가 출연 중인 장면보다 더 불쌍한 광경들을.



두 작품 모두 유머코드로 빛나는 동시에 운명의 시험장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합니다. 버림받은 자들이 벌이는 일심 단결의 사랑,(좋을 대로 하시든지) 제멋대로 갈라놓고 다시 만나게 하는 운명의 극단(헷갈려 코미디). 특히 운명과 결부된 시간의 비유가 즐겁습니다. 가진 재산보다 빚이 많은 '시간'은 파산상태요, 사랑의 범법자를 심판하는 오래된 판관이지만 셰익스피어에게 시간은 복리 이자요, 유능한 변호사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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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과학 상식 바로잡기 2 -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과학 상식의 오류들 엉터리 과학상식 바로잡기 2
칼 크루스젤니키 지음, 안정희 옮김 / 민음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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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니아는 위험한 물고기 일까?


피라니아는 몇 센티미터부터 60센티미터까지 몸길이가 다양하다. 그리고 실제로 끝이 뽀족한 세모꼴의 무섭게 보이는 이빨을 가지고 있다. 몇몇 종은 채식성이지만 대부분은 육식을 한다. 대부분의 육식 피라니아는 다른 물고기를 그저 풀처럼 뜯어먹는다. 이를테면 지느러미나 비늘 같은 곳을 조그맣게 반원형으로 한 입씩 뜯어먹는데, 상처 입은 물고기가 멀어져가면 그냥 내버려 둔다. 지느러미나 비늘은 35~85퍼센트가 단백질로 되어 있어서 영양분이 아주 풍부하다. ..피해 물고기의 지느러미나 비늘은 몇 주면 다시 돋아나기 때문에 피라니아에게는 다시 먹이가 생기는 셈이다. 피라니아는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풀의 일부만을 부드럽게 뜯어 먹고 사는 소 떼와 비슷하다. -<엉터리 과학상식 바로잡기>에서
 
피라니아가 단 몇 분만에 사람을 뼈만 남기고 다 뜯어먹는 장면이 종종 영화에 사용되면서 피라냐는 작지만 사나운 물고기로 각인 되었다. 그래서 아래의 비유가 가능했다.  


2008년 촛불 시위를 폭력시위라고 말하는 이들이 이렇다. 그들 중 대다수는 시위 초기 별다른 반응이 없다, 
폭력적 저항이 일어나자 앞 뒤 똑 떼어내고 피라냐처럼 달려드는 이들이다. -참좋다 님의 <미국민중사2>서평 중에서 발췌(참고로 이건 매우 멋진 서평이었습니다.) 

하지만 <엉터리 과학상식 바로잡기2>는 대부분의 피라냐가 잔인하고 야만적인 속설의 무고한 피해자라고 정리한다. 오히려 예문에 의하면 매우 평화로운 어종 중의 하나로까지 비춰진다. 그렇다. 일반적으로 꽤 온순하다는 것이다. 익사체의 살점을 뜯어먹기는 하지만 제임스본드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악당이 산 채로 뜯기는 일은 없다. 
댐이 생긴 후로 피라냐의 공격사고가 증가한 사례도 있었지만 그것조차 모두 피라냐가 새끼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인간은 피라냐를 두~번 죽인 샘이다.
 
<정재승의 도전 무한지식>에서 말했듯이 잡학 상식은 확실히 힘이 세다. 그러나 '과학'이 많은 것을 알려주지만, 모든 것을 말해줄 수는 없다는 귀착은 예정되어 있었다. 책을 통해 정보를 얻는 일은 저녁 찬거리를 위한 장보기나 다름없다. 책으로 지식의 버무림, 즉 지혜와 가치, 교양을 얻는 일에 더 중점을 둔다면,

닭 가슴살이 커진 이유를 보기좋게 설명하지만 얼마나 헤로울지에 대해서는 중립을 꿰하는,
껌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하면서 폴리비닐 아세테이트의 끔찍함에 대해서는 슬쩍 외면하는,
바나나가 바나나 나무에서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면서도 노동의 착취와 바나나의 기형적 생산량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엉터리 과학상식 바로잡기>는 우리가 새로 요리해야 할 신선한 재료일 뿐이다. (전기의자 이야기나 당근, 종이접기에 대한 과학상식의 오류들은 무척 흥미로웠다.) 그런 점에서 비슷한 잡학상식 책으로 '생각하는 교양'을 슬로건으로 내 건 <정재승의 도전 무한지식> 쪽에 슬쩍 손을 들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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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동네 과학 왕 나는 과학왕 시리즈
요한나 본 호른 지음, 최정근 옮김, 요나스 부르만 그림 / 북스토리아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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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대한민국은 공사중이죠? '도시 미관사업'(짚 앞 공원에 무분별하게 설치된 나무조명에 대한 문의로 시청에서 직접 해명한 말입니다)이란 취지 아래 멀쩡한 교가나 보도블럭이 매년 연말이면 교체된다는 사실은 나랏님만 빼고는 다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눈쌀 찌푸려져도 '전국적인 정책'(이것도 직접 들은 말입니다)이라는, 시민을 잘 달래야 하는 공무원들에게 뭘 더 따질 수 있겠습니까. 서로 괴로운 훈계나 원칙만 고집할 뿐이죠. 


하지만 이 공사현장, 아이와 저를 심심치 않게 하네요. 서영이를 업고 다닐 때부터 공사현장의(일부러는 아니지만 찾아다닐 필요도 없을만큼 어디나 공사중 입니다) 포크레인이며, 흙구덩이, 철근, 모래, 레미콘, 용접, 절단 등을 구경했습니다. 기중기가 콘크리트 더미를 가볍게 옮겨 놓고, 용접기가 불꽃을 튀고, 아저씨들 여럿이서 모래를 곱게 고른 땅에 블록 맞추기라도 하면 아얘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그곳엔 구경거리, 이야기거리도 있었고, 땀과 노동으로 가득찼습니다. 도시의 원시와 완성품도 있었습니다. <나는 우리동네 과학왕>을 보니 과학도 있었군요. 오늘도 용접 불꽃이 튀는 걸 멀찌감치 바라보다 아이가 묻습니다.

"아저씨가 왜 모자(용접용 헬멧)를 쓰고 계시지?" 저는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아이가 말합니다.
"저건 집 짓느라 그런거야." 대단한 대답도 아니고 멋진 질문도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늘 물었던 것처럼 아이가 이제 엄마를 상대로 묻습니다. 물을 때도 대답할 때도 제가 늘 꺼렸했던 '정답'을, 저혼자 묻고 저혼자 그럴듯한 결론으로 도출합니다. 정말 공사현장, 일상, 우리동네에서 과학을 뒤적거릴 수 있을까요?

<나는 우리동네 과학왕>에 등장하는 도시의 소품들은 엘리베이터, 도로, 신호등, 맨홀뚜껑, 터널, 지하철, 현금 인출기 등등 
 입니다. 


거리와 광장에 있는 이것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그림과 함께 설명합니다. 속설에 대한 진실도 언급하고 궁금했던 상식들도 가르쳐 줍니다. 물론 어른인 저도 절대! 몰랐던, 실은 궁금해 하지도 않았던 지식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 아이만은 호기심이 꺾이지 않게 적당한 지식공세를 해주려는 뭍 엄마들과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책 속의 궁금증들

엘리베이터는 어떻게 움직일까요?
아스팔트란 무엇인가요?
신호등 색깔
용도가 다른 맨홀뚜껑들
터널에서 빠져 나가기
에스컬레이터의 손잡이
가로등은 언제 켜질까요?
...

아이가 조금 더 크걸랑 저혼자 물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궁색해 질 즘, 그래서 더욱 긍금해 질 즘, 보여주려고 합니다. 이미 공사 마실을 다녀본 가락으로 말이죠. 과학이란 이름이어도 좋고 그저 호기심이어도 충분합니다. 그 다음 아이가 이런 질문도 해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엄마. 고장나지도 않은 다리는 왜 고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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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 - 2,600년 동안 파묻혔던 붓다 본연의 가르침
바스나고다 라훌라 지음, 이나경 옮김 / 아이비북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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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사의 문고본으로 나온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애타게 찾아봤지만 역시 사라지고 없네요. <무소유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를 말하기 위해선 '무소유'에 대한 확인이 필요할텐데 말이죠. 아쉬우나마 몇 주전 도착한 김세중의 <무소유>를 펼쳤습니다.
 
어쩌면 이보다 좋은 대거리도 없겠습니다. 불교, 즉 붓다가 설파했다는 '무소유'가 종교계나 종교의 시혜를 입고 있는 대중에게 어떤 가치로 변모되었는지 확인하는 것 말입니다. <무소유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불교의 교리가 주관적으로 해석되고 있음을 온 몸으로 말합니다. 김세중의 <무소유>가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에게서 빌려온 가치들은 대게가 '물질적 소유'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우리는 두 스님이 얼만큼 청빈하고 숭고하신 삶을 살다가셨는지 어림짐작 합니다. 편생 한 벌의 누더기와 고무신으로 삶을 축약했던 성철 스님, 방에 남은 것이라곤 순수함을 일깨우는 <어린왕자>같은 책들 뿐이었다는 법정 스님. 저자 김세중은 '적당한 소유와 알맞을 정도의 욕망을 누리면서는 결코 진리의 참 모습을 볼 수 없음'을 스님들의 삶으로써 몸소 보여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무소유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붓다가 '적당한 소유와 알맞을 정도의 욕망'을 재가자(출가를 하지 않고 일상 생활을 하면서 불교를 믿는 신도)에게 가르치려 했음을 증명하는 것일까요. 재가자들을 위한 부귀영화!와 지혜,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방법들이 이 책의 핵심입니다. 

두 스님의 고행은 존경해마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가 닮을 수도 없는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산중의 절간처럼 우리의 마음을 적막하게 했습니다. 김세중처럼 '소유할 것과 나눠야 할 것을 구분하며 살아야 한다'는 적당한 교훈을 도출해 내는 것이 대게의 태도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문화적 필터를 벗겨낸 붓다의 본래 가르침에는 잘 소유하는 것과 욕망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고 있습니다.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까지 빌려 인간의 욕망을 경계하려 하고, 극단적으로는 '부자가 되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인식을 재확산 하고 있는 김세중의 <무소유>는 <무소유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와 대척점에 있어 보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이 선하고 신성한 것일지언정 일상생활에 적용하기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은 '부'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하지만 붓다조차 교단의 존속이 신도들의 경제적 번영에 달렸던 만큼, 신도들에게 세속적 성공의 길을 불교 교리과 접목시키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또 하나의 뿌리 깊은 오해는 붓다가 속세의 행복(예를들면 오욕락)을 거세하거나 부정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붓다는 '영적인 행복'이 더 좋다고는 했을지언정 행복하고 부유하게 살고 싶은 신도들에게 그것을 강제하지 않았습니다. 아얘 그들을 위한 설법을 따로 준비했습니다.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은 '출가 하려는 신도'들에게는 매우 중대했으므로, 붓다의 설법을 보존한 그들이 자신들에게 유용한 내용을 기록하여 보존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가 만나야 할 중도의 설법, 즉 중생을 위한 가르침은 많이 소실되었습니다. <무소유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불교로 만날 수 없었던 '성공과 행복'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있어 보입니다.               

책 속에서 붓다의 세련됨을 만납니다.


하인의 복지
힘과 능력에 맞는 일을 맡겨라/합당한 임금을 지급하고/병들면 치료해주고/좋은 음식을 제공하며/ 재때에 일손을 놓을 수 있도록 하라.

수입의 사분법
붓다는 수입을 네 등분하여 쓰라고 권장했다. 반은 투자하고 사분의 일은 저축하며, 나머지 사분의 일로 생활하라는 "사분법"의 가르침이 그것이다. 붓다는 사람들이 보시나 소비로 재산을 다 날려버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붓다는 저축을 중시했는데 '저축은 예기치 못한 비국이나 불운이 생겼을 때 쓸 수 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지켜야 할 다섯가지 덕목
아내를 존중하라.(여성의 권리와 존엄성이 완전히 무시되던 시대였음에도)
아내에게 상처주는 말은 삼가라
아내 이외의 여인을 유혹하지 마라
아내에게 권위를 주어라
미를 추구하는 마음을 존중하라 
                  -오늘 당장 남편에게 불교의 교리를 설법해야겠군요!

설득의 기술
오늘날 사용되는 설득기술은 주로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에 중점을 둔다. ..예를 들어 슬픈 일을 경험한 사람과의 대화에서 우선 이야기를 잘 들어준 후 "정말 힘드셨죠"라고 말하라는 식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보다 심오하다. 말을 할 때는 그 말의 내용과 일치하는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코칭 육아의 진심어린 기술이군요!  

소통
민감한 주제를 놓고 논쟁하지 마라(형이상학적 주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느니 한발 물러나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쪽이 훨씬 의미있다)
결점을 못 고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라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줘라
평화로운 결별을 선택해야 하는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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