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 브레인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놀라운 무의식의 세계
샹커 베단텀 지음, 임종기 옮김 / 초록물고기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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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히든 브레인>/샹커 베단텀/초록물고기/2010.5

무의식적 편향

오로지 문학 장르에서만 '책'이란 걸 발견해왔다. 문학의 감수성과 직관과, 문학이 주는 영감과 공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독서는 순탄했다. 고전이라는 난항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불구의 독서를 자각하게 된 건 얼마되지 않은 일이다. 거의 최근에야 인문서를 조금씩 집어들게 되었고 지금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듯 힘겨워 하고있다. <히든 블레인>의 샹커 베단텀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어떻게 조류(潮流)가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겠는가?'

몸의 어딘가가 아플 때에야 비로소 몸의 부위를 또렷히 의식하게 된다. 그제야 몸에 대해 갖은 아양과 겸손을 떨며 몸을 보살피고,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날 밀어내는 물살과 마주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째서 문학 이외의 장르에 거의 손을 뻗지 않았는가. 문이건 마음이건 생각이건 열려 있어야 함을 이성적으로 판단했던 내가 왜 독서의 편향을 막지 못했는가. 아무도 '다른 책은 읽지 마라'라고 말하지 않았고, 심지어 '책'에 한에서 만큼은 확짝 열려 있었다고 확신했을까. 

상커 베단텀이 말한 '숨겨진 뇌'의 무의식적 편향은 이렇게 의식하지 못한 채로, 아주 작은 힘이지만 지속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 작용은 생각의 흐름을 주시하는 것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다.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통섭

초보 입문자 답게 '인문'이 가진 교양이나 지식이 '예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로 인문서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자연히 '통섭'의 책들이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고, 나아가 '문학'의 재미를 능가하기도 했다. 독서법을 지도하는 <독서의 즐거움>에서는 아얘 '통섭의 책을 읽는다'는 꼭지를 통해 최재천 교수의 <지식의 통섭>을 중심으로 <프로메테우스 인간의 영혼을 훔치다><문학으로 역사읽기, 역사로 문학읽기><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등등을 소개한다. 

대중문화로 철학하고, 문학으로 과학하고, 그림으로 음악을 듣는 일은 흩어진 지식들을 그러모아 적소에 배치하는 실용성을 띈다. 소재에도 한정이 없는만큼 지식의 확장에도 한몫한다. 인문학과 함께 부상한 '통섭'이란 이슈는 독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렵고도 반가운 손님이다.

<히든 브레인>을 펼쳤을 때 이 책이 소설적 기법으로 심리학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았다. 논제 안에 예시가 포함된 형태가 아니라 사건을 축으로 논리를 드러내는 식이다. 그 분량의 분배 못지 않게 스릴러를 방불케하는 소설적 구성이 이야기 자체로 의미있다. 테러리즘, 성폭행, 살인, 치매, 정치 이야기가 모두 사실에 근거하고 있어 '논픽션' 기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술되기에 이론이 방해받는 법은 없다. '천부적 이야기꾼'이라 불리는 상커 베단텀을 통해 논픽션과 심리학이 만난 지점에 선다.

..(숨겨진 뇌의 역할을 과장해서)윌에게는 숨겨진 뇌만 있다고 가정해보자. 윌을 사무실을 환하게 만드는 미소를 가진 영리하고 잘생긴 젊은이로 보는 대신, 웹(네트워크)의 중심점이라고 상상해보자. 그 중심으로부터 관계의 선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뇌로부터 나온 가는 실 하나가 그가 성장했고 부모가 지금도 살고 있는 뉴욕의 콜드 스프링 하버로 흘러간다. 또 하나의 가는 실이 가톨릭 사제인 그의 형이 살고 있는 인디애나 주의 사우스벤드로 향한다. ... 윌이 가는 곳이 어디든 새로운 케이블들이 사방으로 싹튼다. ...어떤 케이블은 윌이 직장으로 가면서 모르는 누군가를 스쳐지나감에 따라 순식간에 생겨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책에서

9.11테러 현장의 89층에 있었던 한 직원의 하루를 의도적 발상으로 쫓는 이 광경은, 관계망의 역학과 집단심리, 숨겨진 뇌가 어떻게 윌의 행불행을 나누었는지를 긴박하게 보여준다. 무척 특수하고 극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절제된 묘사를 통해, 평상시의 위기나 사소한 위험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식으로 도피하고 대응하는지 충분히 병치시켜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되었다. 저자가 의도한 바 아주 개인적인 사례에서부터 살인, 테러리즘, 정치로 동심원처럼 확장하고 있는 숨겨진 뇌의 작용들에 빨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숨겨진 뇌   

나는 왜 위기 속에서 집단의 동의를 얻길 원하는가. 아이에게 인종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같다는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눈썹 짙은 외국인 노동자가 다가오면 가슴이 움찔하는가. 길을 잃고 울고 있는 아이에게 보이는 동정은 왜 매일같이 굶주려가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향하지 못하는가. 나는 왜 응원해 마지않을 친구에게 속좁은 질투심을 느끼는가.

이전엔 의심의 여지도 없었던, 어쩌면 더 생각하기 싫은 질문들이었지만 '숨겨진 뇌'의 존재는 이 무형의 감정들을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숨겨진 뇌는 절대 우리의 재능을 능가해 똑똑함을 발휘한다든가 어려운 일들을 해결해주는 새로운 능력자가 아니다.

의식적인 마음은 합리적이며, 신중하고, 분석적이지만 숨겨진 뇌는 일상적이고,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들을 하기 위해 마음의 지름길을 잘 이용한다. 의식적 뇌는 느리고 신중하지만, 숨겨진 뇌는 빠르게 활동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숨겨진 뇌는 속도을 얻기 위해 정교함을 희생한다. 숨겨진 뇌는 간결하지만, 예리하지는 못하다. 숨겨진 뇌는 우리를 세계에 신속하게 동화시키고, 우리가 빠른 결정을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일련의 간결한 도구들을 준다. (책에서 정리)  
 
숨겨진 뇌의 이런 행동방식을 통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이성적인 판단을 거스르면서까지 세상과 단절된 터널을 유의미하게 통과할 수도 있다. 물론 그 터널 안에서는 터널밖의 규범이 이단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불합리한게 뻔한 다단계 판매나 사이비 종교 집단에 편입되는 것 또한 '숨겨진 뇌'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실은 전혀 이상하거나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경험할 때, 그들을 '미치광이'로 부르는 건 그들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내가 책을 읽는 건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서다. '숨겨진 뇌'는 <존 말코비치 되기>의 7과 1/2층 같았다. 

오히려 '우리는 왜 의식적인 뇌가 있을까.'라고 묻고 있는 이 지적이면서 감수성 넘치는 책에 대한 호평 대신 <히든 브레인>의 마지막 구절을 그대로 옮겨본다.

이 책은 합리적 마음이 얼마나 숨겨진 뇌의 교묘한 책략을 감당해내기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또 이성이 편향을 극복할 수 있는 우리의 유일한 보루라고 주장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성은 우리의 등대이며, 우리의 구명조끼이다. 이성은 양심의 목소리이다. 그게 아니면, 양심의 목소리여야만 한다.   


숨겨진 뇌와 무의식
         

숨겨진 뇌, 무의식적 편향이 <히든 브레인>의 핵심 코드이기에 앞서 프로이트가 명명한 무의식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야했다. 

억압된, 허용되지 못하는 욕구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세계만으로는 의도와는 다른 행동들을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 최면, 자각, 꿈에 의해서 무의식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다면 이 숨겨진 뇌로의 접근법은 전혀 다르다. '이기적 유전자'에 가깝다는 저자의 말을 참고 한다면 유전자가 자기복제하기 위해 종과 무관하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듯이 숨겨진 뇌 역시도 어떤 가치의 지향 없이 다양하게 확산 되기만을 기다리는 독립적 정신활동이다. 무의식, 잠재 의식, 암시성과 같은 개념들이 숨겨진 뇌 안에 포괄된다고 하니, 더 이상 미천한 증명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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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 표지다.
 

피곳씨와 두 아들은 피곳부인의 집안일을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 게다가 피곳부인은 일하는 엄마. 학교와 회사에서 돌아온 부자는 "어이, 아줌마, 빨리 밥줘." 라고 저녁마다 외친다. 피곳 부인이 집안일을 하는 동안 이들 부자는 티비 앞에 앉아 발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너희들은 돼지야.' 라고 쓰인 쪽지만 남기고 피곳부인은 사라져 버린다. 피곳부인의 경멸에 찬 예언이 피곳씨와 두 아들을 돼지로 만들고, 그들은 정말 끔찍하고 더러운 돼지 같은 생활을 한다. 먹을게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 마침 나타난 피곳부인에게 부자는 "제발 돌아와 주세요."라는 굴욕적인 애원과 함께 집안일을 나누어 하기 시작한다. 피곳씨와 두 아들은 요리가 재밌어졌고, 피곳부인은 행복해졌다.

동화책을 읽어주는 엄마들에게 <돼지책>은 의미있는 아부다. '엄마는 차를 수리했습니다'로 끝맺으면서 과격할만치 여성의 편에 선다. 아이들의 동화책에서 성적 불평등의 영역은 진보적으로 탈바꿈했다. 앤서니 브라운은 자신의 일에 만족하는 엄마의 모습만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했나보다. 그래서 잔혹한 우화의 희생양이자 승리자로 여자를 그려낸다. 하지만 '엄마 일을 돕지 않으면 돼지가 될거야''엄마는 늘 힘들단다''아빠는 회사에서 돌아와 TV만 보지' 같은 메시지들은 어딘가 낯이 뜨거워지는 데가 있었다. (여성의 고정된 성역할 만큼이나) 





남편과 아이들이 집안 일을 돕는다면 '차를 수리할 수 있는' 기호에 맞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공평함이 굳이 헤롭다고 할 수도 없거니와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한 가지 문제는 동화책이 반복해서 지적하는 '쓸모없고 게으른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동문학을 근대화하기 위한 가장 큰 노력은 여성들과 소녀들에게 촛점이 맞춰져왔다. ..이 책들은 여성 등장인물을 부엌과 아이 방에서 끌어내어 그들에게 전문적인 직업과 책임을 부여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심지어 용어도 변화했다. 남성과 여성 모두가 이제 젠더 중립적인 방식으로 우편배달부mail carrier(postman이 아니다)또는 소방관firefighter(fireman이 아니다)으로 언급된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동일한 정형화된 노선을 따라 계속애서 묘사 되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집단이 있다. 그게 바로 아버지들이다. -<나쁜 아빠>에서 

권위적이거나 자녀를 돌보지 않거나 애정이 없거나 혹은 부재하는 아버지의 부적절함을 암시하는 동화책들이 적극적인 아버지 역할 모델을 담고 있는 책을 압도한다는 연구결과는 충격적이다. 누군가 '동화책은 현실을 과장해서 담는 법 아니겠어?'라고 반문한다면 <나쁜 아빠>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사실 현실 세계에서는 미국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불과 싸우는 120만 명의 사람들 중 단지 2%만이 여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어에서 '파이어맨'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모든 양육하는 부모의 2%를 훨씬 넘는 사람들이 남성들이며, 실제 수치로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양육하는 다정한 아버지들이 여성 소방관들보다 훨씬 더 많이 존재한다. -<나쁜 아빠>에서

차별과 억압의 시간을 만회하려는 몸짓이겠지만 그것이 '역차별'의 형태로 재현되고 '나쁜 아빠' 신화를 확산하고 있다는 통계는 개운하지 못했다. 아빠들의 수난사 속에서 더없이 귀중한 책인 <나쁜 아빠:신화와 장벽>은 가정에서의 아빠의 퇴장을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강력한 주문으로, 어버지 육아의 무능력을 조장하는 원인들을 파헤치고, 아버지의 강점들을 재조명 한다.

더불어 나는 근래 쏟아진 '아빠 육아서'들을 돌아보기로 작정한다.



 
<아빠 100배 즐기기>

문화 평론가이자 자녀 교육 전문가인 김지룡씨도 같은 걸 느낀다. '우리 사회의 아빠들 대다수는 아빠로 살아가는 즐거움은 느끼지 못하고 책임감에만 시달리며 살아간다. 그래서 아빠나 아버지를 주제로 쓴 책이나 영화를 보면 하나같이 어둡고 우울하다. 아빠로 사는 것이 무슨 형벌을 감내해야 하는 것처럼 책임감만 운운한다. 나는 아빠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말하고 싶다.' 

사회나 역사가 떠안긴 아빠를 향한 요구들이 아빠를 무기력하고 사랑받지 못하게 만들었음을 자각한다. <아빠 100배 즐기기>가 출장길, 20년만에 보는 제주 밤바다보다 매일 보는 아이들 얼굴이 더 보고 싶은 경지까지 아빠들을 설득하고 끌어올릴 수 있을까. 솔직히 무리한 요구 같았다. 그저 주말 반나절 만이라도 아이와 온전한 시간을 갖길 바라는 것이 내 가장 소박한 바램이었다. 

요행히도 이 책의 설득법은 아빠맞춤이다.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좀 도와줘'보다 '청소기로 과자부스러기 좀 치워줄래?'같은 구체적인 어법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왔다. 이 책은 '아이들과 부인을 사랑하라'가 아닌 직장이나 군대 생활에서의 관계의 도식을 가정에 대입함으로써 자발적인 행동지침들을 도출한다. 

이 방식은 이해하기도 쉽지만, 사회적인 능력을 가정에서 발휘하지 못했던 '나쁜 아빠'를 고무시킬만했다. 덧붙여 적지 않은 육아서들을 읽어내며 부모의 역할을 채비하는 엄마들이 자신있게 남편에게 권할 수 있는 육아서이자 아빠 자기계발서로 읽힐 수 있다. 사회적 성공 못지 않게 가정에서 사랑받는 아빠의 행복을 당당히 말한다.

육아서를 통해 흔해빠지게 들어왔던 육아의 기술들이 평범한 아빠의 목소리로 재생될 때도 의미있게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육아서의 고전이 된 푸름이 아빠 최희수의 <푸름이 이렇게 영재로 키웠다>는 아빠들의 가랭이를 찢어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또 육아서가 '유아의 이해'나 엄마의 행동방식에 국한되는 경우가 흔한데 <아빠 100배 즐기기>는 아빠만이 해줄 수 있는 독특한 충고들로 가득하다. 동화책 뿐 아니라 육아서에서도 아빠는 밀려나 있었다. 저자의 폭넓은 경험들과 통합된 시선은 행복한 아빠 가 되기 위한 감 잡기를 돕는다.     


<엄마가 모르는 아빠효과>

이 책의 부제가 '대한민국 엄마들을 위한 완전육아 지침서'라는데는 조금 언짢다. '아빠효과' 조차도 육아의 주도자로 엄마를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쉬움이 든다. 아빠효과는 무엇보다 아빠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엄마는 아빠의 재능을 믿고 육아의 자리를 선뜻 내어 주어야 한다. 

<나쁜 아빠>의 저자 로스 D.파크의 저작들을 비롯해 이 책은 수많은 인용으로 '아빠효과'를 증명한다. 실은 아이의 성장 발달에 미치는 아빠의 고유한 영향력을 '아빠 효과 Father Effect'로 명명한 것이 로스 D.파크다. 이는 <엄마가 모르는 아빠효과>가 별로 독창적이지는 못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아빠의 능력을 충실하게 보여줄 것임을 의미한다. 

그럼 우리가 모르는 사이, 자녀의 성장발달에 독특한 영향을 미친다는 아빠효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빠는 엄마보다 신체적인 자극을 많이 줌으로써 엄마와 이루어지는 언어에 의한 정적인 상호작용을 보완해준다.
아이와 대화하거나 훈육할 때 좀 더 객관적인 아빠는 사회성과 논리적인 사고를 기르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이들은 엄마보다도 아빠에게 인정 받고 싶어한다. 
(로스 D.파크에 의하면) 아직 아빠가 안 된 남자 대학생도 자식이 없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울음들을 구별할 수 있다. 
아기를 목욕시키는 데는 아빠가 더 적합하다.
아빠와의 스킨십은 아기가 성장하면서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데 깊은 영향을 미친다. 등등 (책에서 정리)

이 책이 아빠효과에 주목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완전육아'라는 부제에 따라 신생아부터 5~6세 아이들의 육아 방침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육아에 적극적인 유형의 아빠들이 참고할만하다.   


<아빠, 엄마 반만큼만 해라>


12년간 외조부 밑에서 자란 머리 큰 아들과 동거를 시작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 책은 사춘기가 되어서야 아들과 함께 살 수 있었던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수기다. 불량아빠의 <아들 키우기> 15계명이 본문 사이에 격식을 갖추고 끼어들긴 하지만 다분히 경험에 의존한 해법에 가깝다. 

1. 아이가 싸웠다면 사실관계를 냉적이 따져라.
5. 강건하게 키우려면 스포츠를 가르쳐라.
7. 아들 성적관리, 아내에게 절대복종하라.
10. 아들을 아빠의 팬으로 만들어라.
13. 휴대폰 중독, Dr.이라부를 소개하라.(Dr.이라부는 오쿠다 히데오의 <인터풀>에 나오는 괴짜 정신과 의사다)

폭넒은 적용이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비전문적 견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은근한 자식자랑과 분명한 남 얘기에 얼마나 귀기울일 수 있을까. 블로거들의 자세를 상기시켜본다. 지극히 사적인 공간들이 일상의 환기제가 되고 사고의 기폭제가 되는, 블로깅의 즐거움이 요새 독서 시장을 적잖히 장악하고 있다. 아마추어가 전문가와 대중을 네트워킹 한다. 작가의 재능 못지않는 인디라이터들이 글밭을 일구고 있다. 예전 같으면 모르겠지만 이런 책들에 한참 너그러워졌다. 

전적으로 그런 의미에서 이 아빠가 할 수 있었던 아들키우기의 소스들을 돌아본다.

사춘기 아이들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에 대응하는 부모의 자세를 보고 가치의 기준을 세운다.
어릴적 자신을 키우는 과정에서 부모와 주위 어른들이 들인 고생과 수고는 아이에게 자주 되새김질 해줄 필요가 있다. 
촌스러운 우정이 아들의 지친 등을 떠밀어주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아이를 질책할 때는 무엇보다 타이밍이 중요하다.  ..시간은 짧을 수록 좋다. ..일단 시작하면 아이가 눈물을 쏙 뺄만큼 혼을 낸다. 그리고는 적당히 감정을 어루만져준 다음, 마지막에 협박성 멘트 한마디를 잊지 않고 날려준다. 



  
 
 

 

 

자식 키우기에 적극적인 아빠들을 만나고 나니, 마음 어딘가가 한결 든든해진다. 변화를 시도하는 건 힘든 일이지만, 바뀌길 바라는 염원만으로도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는데에 희망을 건다. 또 한 권 문뜩 떠오르는 책이 있다. 역차별의 형태가 노골적인 <돼지책>이 못내 마음에 걸렸나보다.

<쾅! 지구에서 7만광년>에는 실업자 아버지와 유능한 직장여성 어머니를 둔 주인공이 나온다. 이 부부에게는 아이들이 겪는 모험담 만큼이나 큰 변화가 일어난다. 실업으로 인해 무능하고 의기소침해보였던 아빠는 차츰 뒤바뀐 성역할을 받아들이고, 결국엔 그 변화의 과정들이 자신의 새로운 재능을 실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털썩성의 외계인을 제외하면 누구도 희생되지 않았던 유쾌한 판타지라고만 여겼지만 <나쁜 아빠:신화와 장벽>은 이 책을 좀 더 의미있게 되새김질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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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모네 어린이를 위한 예술가
루돌프 헤르푸르트너 지음, 노성두 옮김 / 다섯수레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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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화가, 노년의 백내장, 백발의 할아버지, 수련, 기적소리가 들려오는 생 라자르 역, 루앙 대성당 연작, 포풀러 나무, 연필 한다스의 공용 아이디 monet, '모네'를 좋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는 딱 이만큼 입니다. 






그에 반해 피카소나 고흐의 일생과 그림, 영감을 담은 책들은 꽤나 여러 권 읽어보기도 했지만 모네만큼 사랑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화가 혹은 예술가의 삶이란 어떤 걸까, 궁금했나 봅니다. 이제서야 인터넷 서점을 뒤져보니 시리즈의 연작 말고는 모네의 단행본이 없군요. 모네가 국내 미술 출판계의 지형도에서 변방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있했습니다. 

모네가 왜 좋은지 묻는다면 제가 들이댄 증거만큼이나 군색합니다. 고흐를 왜 사랑하는지, 피카소는 왜 좋은지 묻는다면 이보다는 쉬울텐데요. 미술을 실험대 위에 올려놓은 피카소라면 그림 이면에 할 말이 더 많을테고, 고흐의 삶은 예술가의 경전처럼 반복해서 읽히는데다, 눈은 또 얼마나 의심없이 즐거운 가요. 아이러니 하지만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라지요. 

그러고 보면 모네에겐 스캔들이 부족한가 봅니다. 회자되는 대상이 그림이기도 하지만 화가의 삶이기도 하기에 조금 억울한 생각도 듭니다. 모네 이야길 듣고 싶어졌습니다. 재미있는 건, 검색된 모네 관련 책이 대게가 어린이를 위한 도서들 이었다는 점입니다.(물론 이 시리즈에는 피카소와 고흐가 포함되어 있을 테지만요) 어린이들에게는 모네가 필요한가요?



팔레트 위에서 색을 혼합하지 않고, 붓에 물감을 직접 묻혀 사용했다는 모네는 중요합니다. 이런 방식은 당시 배색, 조색의 기본 개념조차 무시하는 막무가내였다고 합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보색 관계에 있는 색들을 중간 단계 없이 맞붙여 두는 걸 고전주의 화가들은 끔찍하게 싫어했다지요. 

팔레트를 방불케 하는 캔버스 위에서 빨강, 파랑, 노랑 같은 원색의 무질서한 색점들이 아우성칩니다. 모네는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 물감 덩어리로 후려갈기듯이 그렸습니다.-<어린이를 위한 모네>에서

당연히 인물들의 얼굴과 표정은 사라지고, 대상의 윤곽도 색의 조화도 치밀하게 계산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가까이에서 본 <생 라자르 역>은 모호함과 혼돈이 지배하지만, 몇 걸음 떨어져서 관찰하면 눈부신 색감이 살아납니다.-<어린이를 위한 모네>에서

이젠 제가 왜 모네를 좋아하는 지 한 마디는 덧붙일 수 있겠습니다. 그 형태의 무너짐, 그리고 되살아나는 과정이 저를 사로잡았나 봅니다. 실물과도 같은 세밀화를 보고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 있을까?'를 묻는 순진한 관람객처럼 저는 미술의 마술을 모네로 경험했습니다. (경계를 가진 선이 아닌)뭉개진 붓자국이 만들어 내는 형상이 그저 놀라웠던 것이지요. 피카소의 영리함과 고흐의 멜랑콜리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미술의 성취에 대한 순박한 사랑이었습니다.  

서둘러야 해. 아침이 밝으면 새벽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달아나 버리거든, 해님은 뭐가 그리 급해 서 발걸음을 서두르는 걸까? 모네 할아버지가 그리려고 했던 새벽 안개 속의 강변 풍경은 아차 하는 순간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지.-<어린이를 위한 모네>에서 


'인상파'라는 용어는 모네의 <인상, 해돋이>라는 그림에 대한 한 기자의 비아냥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게 언제든 기존의 가치를 무너뜨린 낯선 것들은 너그럽게 받아들여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천재'라는 지칭 앞에는 늘 '시대를 앞선', 고로 '비운한'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닙니다. 입체, 추상, 다다, 초현실, 포스트 모더니즘, 키치, 팝 아트 등등의 미술 사조를 차례대로 밟아 온 우리에게 모네의 그림은 전혀 파격적이지 않은 건 물론이고 외려 온순한 서정까지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 속에 깃든 미술사의 한 획은 달력의 풍경화를 넘어서 긴박함이 자리합니다. 빛이 색을 만들어 내는 짧은 순간의 노출에 붓과 영감을 일치시키는 현장 회화는, 목가적 풍경을 감상하는 느긋한 감상자와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습니다. 실제로 모네는 자연을 묘사한 모든 그림은 현장에서 실제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소재(素材) 앞에서가 아니면 단 한 번이라도 붓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서문당 컬러백과-모네> 에서)

이런 강력한 원칙하에 그려진 그림들이 거꾸로, 다듬어지지 않은 '미완'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모네가 일군 업적이 얼마나 용기있는 것이었나 되짚어보게 합니다. 그 용기가 실은 똑똑한 원리에 입각해 있다는 사실도 놀랍습니다. 


우리가 눈에 적절한 암시만 준다면, 눈은 우리가 거기 있다고 알고 있는 형태 전체를 만들어 준다. (<서문당 컬러백과-모네> 에서)

아마도 모네에게는 근시안의 비평가에게는 없는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모네 할아버지에게 인파를 그리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야. 세로로 붓질 한 번 하면 사람이 완성되니까. 또 가로로 두어 번 붓질하면 마차가 되지.-<어린이를 위한 모네>에서  

눈, 코, 입을 그려넣는게 더 엉터리라고 모네의 눈은 속삭였을 테지요. 얼핏 점과 선조차 사라진 '면'으로만 느껴지는 수련 연작들은 기자의 혹평처럼 '양탄자가 더 예술적으로 보일 수'도(수련 연작에 대한 언급은 아니었습니다) 있겠습니다. 아카데미 미술은 그림을 뜯어보길 요구했나 봅니다. 누가 더 잘 그리는가에 대한 내기는 모네에 의해서 무너져 버립니다. 역시 이제는 당연하지만 예술가 개인의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해진겁니다.                
  
예술가들이 그에게 진 무거운 빚을 생각한다면, 어린이 책으로 모네를 만난 건 오히려 다행입니다.    
 

그림 출처; <어린이를 위한 모네>/루돌프 헤르프루트너/다섯수레/2010.4 와 <서문당 컬러백과-모네>에서 직접 찍은 사진과 네이버 검색이 혼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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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쓰는 아이 심리백과
도리스 호이엑-마우스 지음, 이재금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긍정적인 발달단계로서의 떼쓰기

떼쟁이 단계, 더 적절하게 표현하면 의지 발견과 자아 발견의 단계는 원래 긍정적인 발달단계다. 왜냐하면 화를 내고, 실망하며, 자신을 방어하는 능력은 아이가 자신을 인격체로 느끼는 것을 배운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주기 때문이다. ...두 살부터 유아는 좌절에 대한 저항력도 점점 쌓여나간다. 아이는 이제 꽤 오랫동안 심리적인 긴장을 견뎌낼 줄 안다. ...두 살부터 아이의 의사표현은 점점 더 목표와 사람에 방향을 맞춘다. 또, 아이는 자기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언어와 능동적인 공격력을 더 자주 사용하게 된다. -<떼쓰는 아이 심리백과>에서
 
달래고, 윽박지르고, 조곤조곤 설명도 해보고, 그래도 '떼쓰기' 는 낳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엄마들끼리 하는 말이 있죠. '요즘 한참 떼 쓸 때야.' 두 돌 무렵부터 이 놈이 찾아왔죠. 그러고보니 <떼쓰는 아이 심리백과>가 쪽집기 과외 같군요. 

이제 엄마경력 29개월. 이제 생각해보면 '아이를 어떻게 요리할까' '어떻게 제압할까' 같은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 같네요. 그토록 수많은 육아서로 '부모 교육' 받기를 겸허히 자청했건만 제가 맞닥뜨린건 제 멋대로 하려는, 한계를 모르는, 울음을 무기로 엄마를 괴롭히는 막무가내 아이였습니다. (이제와 생각하니 아이로서는 정당하고 사춘기만큼이나 당연한 터널이었지만요)

몇 년 전이 아닌, 바로 지난 달 일이었죠. '내가 뭘 얼마나 잘못했지?'라는 자괴감에 빠질만큼 괴로웠습니다. 이론적으로 '유아에게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 별 의미 없다 하더라도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죠. 잠자는 시간을 빼곤 한 시도 떨어져 지낼 수 없었던 환경이 주는 스트레스도 컸겠지만(둘 다에게), 때맞춰 읽은 <떼쓰는 아이 심리백과>는 객관적인 평가를 내려주었습니다. 

떼쓰기가 '엄마'라는 특정 대상에게 퍼붓는 공격성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이의 자율신경 체계에 의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못박습니다. 자율신경 체계까지 이해해야할 필요는 없겠지만, 중요한 건 떼쓰기 행동을 아이의 인격으로부터 떼어놓고 보고, 가능한 한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정도 선행만 있으면 떼쓰기 막기에 주력하면서 용쓸 필요 없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런 경지까지는 거의 불가능하고 옳지도 않겠지만) 작은 분노의 불꽃이 점점 거세지다가 사그러드는 일련의 과정을 모니터할 수 있습니다. 진즉에 알았다면 '엄마가 뭘 잘못 했다고 이래?' '서영이 때문에 힘들어' 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죠. 

이 책으로 '떼쓰기에 대처하는 엄마의 자세'같은 이론과 적용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실은 '위로' 받았다는 편이 더 어울립니다. 일상적인 사례들을 통해 내게만 닥치는 시련이 아니란 걸 알고 안심하게 되는거죠. 게다가 전에 없던 아이의 공격성이 '좌절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좀 더 아이 입장에 서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아이는 사회적인 한계를 실험하고 있으며, 바로 지금이 적절한 통제를 경험하고 정당한 요구에 대해 이해받을 수 있음을 배울 수 있는 시기라는 전화위복의 발상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부모를 위한 떼쓰기 극복방법 12가지-책에서


떼쓰기 발작에는 벌을 주지 않는다. 
떼쓰기를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에 말을걸자  

(엄마의 감정을 한 번쯤 밖으로 표출하라는 얘긴데요, '나의 메시지'법을 권유합니다. 이를테면 "엄마는 지금 정말 기분이 안 좋아""화가 나" 같이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혼내지 않는 방법입니다.)
절대로 손찌검을 하지 않는다
떼쓰기를 관심의 중심에 놓지 말자
떼쓰기 발작을 중단시키지 말자
일관성을 유지하자
지지대를 마련해주자
(발작이 끝나고 나면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아이마다 떼쓰는 양상이 다르다는 것을 알자
주위의 도움을 받자
자기가 떼쟁이였을 때를 기억하자
유머로 상황을 바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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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 1세대. 그들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대안학교의 자유로운 운영방식이나 인성교육, 과외활동, 입시문제 등등을 <이우학교>를 통해 슬쩍 엿봤다. 하지만 대안교육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협안에 적잖은 환상이 자리할 것이라는 일말의 의심을 어떤 형태로든 풀고 싶었다. 

방송이나 언론이 '천재'라는 이슈로 미래에 대한 커튼을 칠 때, <영재부모 오답백과>는 천재의 불운한 성장을 추적했고, 교과서와 백과사전이 입을 맞추어 위대한 대고구려의 군주-장수태왕의 화려한 역사 이력만을 편집했을 때 <한국사 인물통찰>은 중국을 향한 조공과 사대의 진실을 기술했다.  

뭐가 진실인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내가 믿고 있는 것들이 언제든 격파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할래야 안할 수가 없다. 무심결에 '대안교육'을 꿈꿔왔고, 내가 그 대안의 수혜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늦지 않았다, 내 아이가 있다, 돈은 좀 들까, 등급이나 경쟁보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무기가 되겠지, 입시지옥으로 인한 공부과열에서 탈출했으니 일반 고교보다는 힘들지 않겠지, 같은 근거없는 추측이 난무했다. 

대안학교 역사 10년. 1세대 졸업생 15명의 현재가 <나? 대안학교 졸업생이야!>로 묶였다. 아직 특정사례에 한정되는 결과물들이 우세할만한 시기지만, 대학교에 입학하고 사회로 진출한 일반코스의 고교생들과 비교해 보기에는 손색이 없다. 특별한 듯 평범한 듯 엇갈리고 다시 만나는 청춘들의 지점이 감질나는 맛보기를 해준다.

대안학교를 향한 편견과 실제
 
'대한학교?''문제아들''똥통학교''귀족교육''공부 안시키는 학교'가 그들이 종종 겪어야했던 대안학교에 대한 편견이었으니,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생한 기록이다. 또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사뭇 진지해서, 취업난과 영어실력 늘리기에 고심중인 요즘 청춘의 상징들이 단박에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들 사이의 삶의 질의 차이를 자로 재는 건 별로 유쾌하지도 윤리적이지도 않은 일이지만, 보다 가시적인 차이점은 그들이 했던 고민과 나름대로의 결론이다. 

그들은 이미 학교 입학 때부터 '자유'와 '자율'에 대해 고심했으며, 노동의 기쁨과 노고를 체험했고, 자신의 꿈을 시험해볼 수 있는 무대를 찾아나서거나 협력받았고, 선생님들에게 '공부'뿐만이 아닌 사랑과 존경을 배웠다. 그들 개개의 자질은 중점이 아니다. 거대한 삶 혹은 사회에서 격리된 듯한 일반의 교육현장에서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잡념들이 중심에 놓여있다는 사실이 선뜻 놀라웠다. 

수업거부를 하며, 별을 보며, 하고 싶은 동아리 활동을 하며, 스스로 축제를 준비하면서, 마음껏 방황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고, 엘리트보다는 더불어 사는 평민을 행복하게 선택할 수 있었고, 시키지도 않은 공부를 할 수 있었고, 학교에서 정을 때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었다.(다시 학교를 찾아갈 마음이 생긴다는 건 두말할것 없이 부러웠다.)

하지만 그 선택에 따르는 희생은 별로 달지 못하다. 뒤쳐진 공부를 몰아서, 죽어라 해야했으며, 대학교에서의 강의나 규율에도 적응하지 못해 그만두기가 부지기수 인데다, '사회적 성공'이라는 잣대로 쟀을 때 함량미달 축인 졸업생들이 절반이었다. 물론 그들의 가능성에 대해선 긍정적이지만 전체적인 성적표가 썩 좋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이 정도면 '대안학교'에 대한 과장된 해석이나 편견에 적당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대안학교의 입시

대안학교의 인성교육이 얼마나 참된지 알고 있는 부모라해도 포기할 수 없는 걱정거리 중 하나가 '입시 교육' 일 것이다. 대안학교가 입시에는 분명 비효율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대안학교에서 '공부'한 몇몇의 졸업생들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 스스로 세운 목표가 책임감을 만들었고 결국 '자기 주도적 공부'로 이끌었다고. 

<공부갈증-실컷 논 아이가 명문대 간다>는 '결국 공부는 혼자 하는 거야'란 통설을 넘어 부모가 사교육이나 입시에 매달리지 않는 길이 '명문대'가는 길이라는 역설적 이론을 내놓는다. 일반 인문계고의 선생님으로서 학생들과 자기 아이들에게 '놀게 해서 공부한다'는 철칙을 세우고 지켜나간 경험들이 좋은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과학적 연구결과나 심리적 접근 같은 객관적인 증명이 부족하긴 하지만 충분히 납득은 갔다. 말하자면 결핍이 낳는 욕구를 공부법에 대입한 샘인데, 이는 대안학교에서 '공부'하려고 마음먹은 아이들의 학습법과 거의 유사하다. 게다가 이 아이들의 부모에겐 현재 자신의 상태를 요구없이 받아들여주고 아이와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는 부모가 있었다. 

옆집언니                                      

사교육, 입시전쟁을 향한 비판의 칼날은 무뎌진지 오래다. 어짜피 다섯 살 아이에게 책읽기 과외와 학습지를 겸하는 옆집 언니를 비난하는 일밖엔 안된다. 옆집 언니의 심성은 얼마나 고운가. 박스로 과일이나 고구마를 사면 푸짐하게 나눠주고, 텃밭의 몇 포기 안되는 배추를 쑥쑥 뽑아준다. 어떻게 옆집 언니를 비판의 칼날 위에 올릴 수 있겠는가. 또 그녀는 얼마나 교육적인가. (사사로운 감정이 아얘 없다고는 말 못한다)

비판할 건 생각과는 다른 부모의 행동이며 그렇지 못해 부끄러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흩어져 있던 생각들을 '행동'에 옮기고자 마음먹는다. 아이를 (방치가 아닌)방목할 것이고, 충분한 놀이과 적절한 결핍으로 갈증을 선사할 것이고, 아이가 원치 않는 한 선행학습이나 사교육을 시키지 않을 것이며, 아이가 현 교육방침에 부당함을 느낀다면 대안학교도 고려할 것이다. 

책읽는 엄마, 노력하는 부모, 사과하는 어른, 틀리면 고치는 용기, 이야기 들어주는 사람, 비난이나 비판없는 가정은 아이에게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되어줄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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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31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