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 표지다.
 

피곳씨와 두 아들은 피곳부인의 집안일을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 게다가 피곳부인은 일하는 엄마. 학교와 회사에서 돌아온 부자는 "어이, 아줌마, 빨리 밥줘." 라고 저녁마다 외친다. 피곳 부인이 집안일을 하는 동안 이들 부자는 티비 앞에 앉아 발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너희들은 돼지야.' 라고 쓰인 쪽지만 남기고 피곳부인은 사라져 버린다. 피곳부인의 경멸에 찬 예언이 피곳씨와 두 아들을 돼지로 만들고, 그들은 정말 끔찍하고 더러운 돼지 같은 생활을 한다. 먹을게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 마침 나타난 피곳부인에게 부자는 "제발 돌아와 주세요."라는 굴욕적인 애원과 함께 집안일을 나누어 하기 시작한다. 피곳씨와 두 아들은 요리가 재밌어졌고, 피곳부인은 행복해졌다.

동화책을 읽어주는 엄마들에게 <돼지책>은 의미있는 아부다. '엄마는 차를 수리했습니다'로 끝맺으면서 과격할만치 여성의 편에 선다. 아이들의 동화책에서 성적 불평등의 영역은 진보적으로 탈바꿈했다. 앤서니 브라운은 자신의 일에 만족하는 엄마의 모습만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했나보다. 그래서 잔혹한 우화의 희생양이자 승리자로 여자를 그려낸다. 하지만 '엄마 일을 돕지 않으면 돼지가 될거야''엄마는 늘 힘들단다''아빠는 회사에서 돌아와 TV만 보지' 같은 메시지들은 어딘가 낯이 뜨거워지는 데가 있었다. (여성의 고정된 성역할 만큼이나) 





남편과 아이들이 집안 일을 돕는다면 '차를 수리할 수 있는' 기호에 맞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공평함이 굳이 헤롭다고 할 수도 없거니와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한 가지 문제는 동화책이 반복해서 지적하는 '쓸모없고 게으른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동문학을 근대화하기 위한 가장 큰 노력은 여성들과 소녀들에게 촛점이 맞춰져왔다. ..이 책들은 여성 등장인물을 부엌과 아이 방에서 끌어내어 그들에게 전문적인 직업과 책임을 부여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심지어 용어도 변화했다. 남성과 여성 모두가 이제 젠더 중립적인 방식으로 우편배달부mail carrier(postman이 아니다)또는 소방관firefighter(fireman이 아니다)으로 언급된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동일한 정형화된 노선을 따라 계속애서 묘사 되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집단이 있다. 그게 바로 아버지들이다. -<나쁜 아빠>에서 

권위적이거나 자녀를 돌보지 않거나 애정이 없거나 혹은 부재하는 아버지의 부적절함을 암시하는 동화책들이 적극적인 아버지 역할 모델을 담고 있는 책을 압도한다는 연구결과는 충격적이다. 누군가 '동화책은 현실을 과장해서 담는 법 아니겠어?'라고 반문한다면 <나쁜 아빠>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사실 현실 세계에서는 미국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불과 싸우는 120만 명의 사람들 중 단지 2%만이 여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어에서 '파이어맨'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모든 양육하는 부모의 2%를 훨씬 넘는 사람들이 남성들이며, 실제 수치로도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양육하는 다정한 아버지들이 여성 소방관들보다 훨씬 더 많이 존재한다. -<나쁜 아빠>에서

차별과 억압의 시간을 만회하려는 몸짓이겠지만 그것이 '역차별'의 형태로 재현되고 '나쁜 아빠' 신화를 확산하고 있다는 통계는 개운하지 못했다. 아빠들의 수난사 속에서 더없이 귀중한 책인 <나쁜 아빠:신화와 장벽>은 가정에서의 아빠의 퇴장을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강력한 주문으로, 어버지 육아의 무능력을 조장하는 원인들을 파헤치고, 아버지의 강점들을 재조명 한다.

더불어 나는 근래 쏟아진 '아빠 육아서'들을 돌아보기로 작정한다.



 
<아빠 100배 즐기기>

문화 평론가이자 자녀 교육 전문가인 김지룡씨도 같은 걸 느낀다. '우리 사회의 아빠들 대다수는 아빠로 살아가는 즐거움은 느끼지 못하고 책임감에만 시달리며 살아간다. 그래서 아빠나 아버지를 주제로 쓴 책이나 영화를 보면 하나같이 어둡고 우울하다. 아빠로 사는 것이 무슨 형벌을 감내해야 하는 것처럼 책임감만 운운한다. 나는 아빠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말하고 싶다.' 

사회나 역사가 떠안긴 아빠를 향한 요구들이 아빠를 무기력하고 사랑받지 못하게 만들었음을 자각한다. <아빠 100배 즐기기>가 출장길, 20년만에 보는 제주 밤바다보다 매일 보는 아이들 얼굴이 더 보고 싶은 경지까지 아빠들을 설득하고 끌어올릴 수 있을까. 솔직히 무리한 요구 같았다. 그저 주말 반나절 만이라도 아이와 온전한 시간을 갖길 바라는 것이 내 가장 소박한 바램이었다. 

요행히도 이 책의 설득법은 아빠맞춤이다.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좀 도와줘'보다 '청소기로 과자부스러기 좀 치워줄래?'같은 구체적인 어법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왔다. 이 책은 '아이들과 부인을 사랑하라'가 아닌 직장이나 군대 생활에서의 관계의 도식을 가정에 대입함으로써 자발적인 행동지침들을 도출한다. 

이 방식은 이해하기도 쉽지만, 사회적인 능력을 가정에서 발휘하지 못했던 '나쁜 아빠'를 고무시킬만했다. 덧붙여 적지 않은 육아서들을 읽어내며 부모의 역할을 채비하는 엄마들이 자신있게 남편에게 권할 수 있는 육아서이자 아빠 자기계발서로 읽힐 수 있다. 사회적 성공 못지 않게 가정에서 사랑받는 아빠의 행복을 당당히 말한다.

육아서를 통해 흔해빠지게 들어왔던 육아의 기술들이 평범한 아빠의 목소리로 재생될 때도 의미있게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육아서의 고전이 된 푸름이 아빠 최희수의 <푸름이 이렇게 영재로 키웠다>는 아빠들의 가랭이를 찢어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또 육아서가 '유아의 이해'나 엄마의 행동방식에 국한되는 경우가 흔한데 <아빠 100배 즐기기>는 아빠만이 해줄 수 있는 독특한 충고들로 가득하다. 동화책 뿐 아니라 육아서에서도 아빠는 밀려나 있었다. 저자의 폭넓은 경험들과 통합된 시선은 행복한 아빠 가 되기 위한 감 잡기를 돕는다.     


<엄마가 모르는 아빠효과>

이 책의 부제가 '대한민국 엄마들을 위한 완전육아 지침서'라는데는 조금 언짢다. '아빠효과' 조차도 육아의 주도자로 엄마를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쉬움이 든다. 아빠효과는 무엇보다 아빠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엄마는 아빠의 재능을 믿고 육아의 자리를 선뜻 내어 주어야 한다. 

<나쁜 아빠>의 저자 로스 D.파크의 저작들을 비롯해 이 책은 수많은 인용으로 '아빠효과'를 증명한다. 실은 아이의 성장 발달에 미치는 아빠의 고유한 영향력을 '아빠 효과 Father Effect'로 명명한 것이 로스 D.파크다. 이는 <엄마가 모르는 아빠효과>가 별로 독창적이지는 못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아빠의 능력을 충실하게 보여줄 것임을 의미한다. 

그럼 우리가 모르는 사이, 자녀의 성장발달에 독특한 영향을 미친다는 아빠효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빠는 엄마보다 신체적인 자극을 많이 줌으로써 엄마와 이루어지는 언어에 의한 정적인 상호작용을 보완해준다.
아이와 대화하거나 훈육할 때 좀 더 객관적인 아빠는 사회성과 논리적인 사고를 기르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이들은 엄마보다도 아빠에게 인정 받고 싶어한다. 
(로스 D.파크에 의하면) 아직 아빠가 안 된 남자 대학생도 자식이 없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울음들을 구별할 수 있다. 
아기를 목욕시키는 데는 아빠가 더 적합하다.
아빠와의 스킨십은 아기가 성장하면서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데 깊은 영향을 미친다. 등등 (책에서 정리)

이 책이 아빠효과에 주목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완전육아'라는 부제에 따라 신생아부터 5~6세 아이들의 육아 방침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육아에 적극적인 유형의 아빠들이 참고할만하다.   


<아빠, 엄마 반만큼만 해라>


12년간 외조부 밑에서 자란 머리 큰 아들과 동거를 시작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 책은 사춘기가 되어서야 아들과 함께 살 수 있었던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수기다. 불량아빠의 <아들 키우기> 15계명이 본문 사이에 격식을 갖추고 끼어들긴 하지만 다분히 경험에 의존한 해법에 가깝다. 

1. 아이가 싸웠다면 사실관계를 냉적이 따져라.
5. 강건하게 키우려면 스포츠를 가르쳐라.
7. 아들 성적관리, 아내에게 절대복종하라.
10. 아들을 아빠의 팬으로 만들어라.
13. 휴대폰 중독, Dr.이라부를 소개하라.(Dr.이라부는 오쿠다 히데오의 <인터풀>에 나오는 괴짜 정신과 의사다)

폭넒은 적용이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비전문적 견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은근한 자식자랑과 분명한 남 얘기에 얼마나 귀기울일 수 있을까. 블로거들의 자세를 상기시켜본다. 지극히 사적인 공간들이 일상의 환기제가 되고 사고의 기폭제가 되는, 블로깅의 즐거움이 요새 독서 시장을 적잖히 장악하고 있다. 아마추어가 전문가와 대중을 네트워킹 한다. 작가의 재능 못지않는 인디라이터들이 글밭을 일구고 있다. 예전 같으면 모르겠지만 이런 책들에 한참 너그러워졌다. 

전적으로 그런 의미에서 이 아빠가 할 수 있었던 아들키우기의 소스들을 돌아본다.

사춘기 아이들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에 대응하는 부모의 자세를 보고 가치의 기준을 세운다.
어릴적 자신을 키우는 과정에서 부모와 주위 어른들이 들인 고생과 수고는 아이에게 자주 되새김질 해줄 필요가 있다. 
촌스러운 우정이 아들의 지친 등을 떠밀어주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아이를 질책할 때는 무엇보다 타이밍이 중요하다.  ..시간은 짧을 수록 좋다. ..일단 시작하면 아이가 눈물을 쏙 뺄만큼 혼을 낸다. 그리고는 적당히 감정을 어루만져준 다음, 마지막에 협박성 멘트 한마디를 잊지 않고 날려준다. 



  
 
 

 

 

자식 키우기에 적극적인 아빠들을 만나고 나니, 마음 어딘가가 한결 든든해진다. 변화를 시도하는 건 힘든 일이지만, 바뀌길 바라는 염원만으로도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는데에 희망을 건다. 또 한 권 문뜩 떠오르는 책이 있다. 역차별의 형태가 노골적인 <돼지책>이 못내 마음에 걸렸나보다.

<쾅! 지구에서 7만광년>에는 실업자 아버지와 유능한 직장여성 어머니를 둔 주인공이 나온다. 이 부부에게는 아이들이 겪는 모험담 만큼이나 큰 변화가 일어난다. 실업으로 인해 무능하고 의기소침해보였던 아빠는 차츰 뒤바뀐 성역할을 받아들이고, 결국엔 그 변화의 과정들이 자신의 새로운 재능을 실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털썩성의 외계인을 제외하면 누구도 희생되지 않았던 유쾌한 판타지라고만 여겼지만 <나쁜 아빠:신화와 장벽>은 이 책을 좀 더 의미있게 되새김질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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