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학교 1세대. 그들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대안학교의 자유로운 운영방식이나 인성교육, 과외활동, 입시문제 등등을 <이우학교>를 통해 슬쩍 엿봤다. 하지만 대안교육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협안에 적잖은 환상이 자리할 것이라는 일말의 의심을 어떤 형태로든 풀고 싶었다. 

방송이나 언론이 '천재'라는 이슈로 미래에 대한 커튼을 칠 때, <영재부모 오답백과>는 천재의 불운한 성장을 추적했고, 교과서와 백과사전이 입을 맞추어 위대한 대고구려의 군주-장수태왕의 화려한 역사 이력만을 편집했을 때 <한국사 인물통찰>은 중국을 향한 조공과 사대의 진실을 기술했다.  

뭐가 진실인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내가 믿고 있는 것들이 언제든 격파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할래야 안할 수가 없다. 무심결에 '대안교육'을 꿈꿔왔고, 내가 그 대안의 수혜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늦지 않았다, 내 아이가 있다, 돈은 좀 들까, 등급이나 경쟁보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무기가 되겠지, 입시지옥으로 인한 공부과열에서 탈출했으니 일반 고교보다는 힘들지 않겠지, 같은 근거없는 추측이 난무했다. 

대안학교 역사 10년. 1세대 졸업생 15명의 현재가 <나? 대안학교 졸업생이야!>로 묶였다. 아직 특정사례에 한정되는 결과물들이 우세할만한 시기지만, 대학교에 입학하고 사회로 진출한 일반코스의 고교생들과 비교해 보기에는 손색이 없다. 특별한 듯 평범한 듯 엇갈리고 다시 만나는 청춘들의 지점이 감질나는 맛보기를 해준다.

대안학교를 향한 편견과 실제
 
'대한학교?''문제아들''똥통학교''귀족교육''공부 안시키는 학교'가 그들이 종종 겪어야했던 대안학교에 대한 편견이었으니,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생한 기록이다. 또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사뭇 진지해서, 취업난과 영어실력 늘리기에 고심중인 요즘 청춘의 상징들이 단박에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들 사이의 삶의 질의 차이를 자로 재는 건 별로 유쾌하지도 윤리적이지도 않은 일이지만, 보다 가시적인 차이점은 그들이 했던 고민과 나름대로의 결론이다. 

그들은 이미 학교 입학 때부터 '자유'와 '자율'에 대해 고심했으며, 노동의 기쁨과 노고를 체험했고, 자신의 꿈을 시험해볼 수 있는 무대를 찾아나서거나 협력받았고, 선생님들에게 '공부'뿐만이 아닌 사랑과 존경을 배웠다. 그들 개개의 자질은 중점이 아니다. 거대한 삶 혹은 사회에서 격리된 듯한 일반의 교육현장에서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잡념들이 중심에 놓여있다는 사실이 선뜻 놀라웠다. 

수업거부를 하며, 별을 보며, 하고 싶은 동아리 활동을 하며, 스스로 축제를 준비하면서, 마음껏 방황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자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고, 엘리트보다는 더불어 사는 평민을 행복하게 선택할 수 있었고, 시키지도 않은 공부를 할 수 있었고, 학교에서 정을 때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었다.(다시 학교를 찾아갈 마음이 생긴다는 건 두말할것 없이 부러웠다.)

하지만 그 선택에 따르는 희생은 별로 달지 못하다. 뒤쳐진 공부를 몰아서, 죽어라 해야했으며, 대학교에서의 강의나 규율에도 적응하지 못해 그만두기가 부지기수 인데다, '사회적 성공'이라는 잣대로 쟀을 때 함량미달 축인 졸업생들이 절반이었다. 물론 그들의 가능성에 대해선 긍정적이지만 전체적인 성적표가 썩 좋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이 정도면 '대안학교'에 대한 과장된 해석이나 편견에 적당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대안학교의 입시

대안학교의 인성교육이 얼마나 참된지 알고 있는 부모라해도 포기할 수 없는 걱정거리 중 하나가 '입시 교육' 일 것이다. 대안학교가 입시에는 분명 비효율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대안학교에서 '공부'한 몇몇의 졸업생들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 스스로 세운 목표가 책임감을 만들었고 결국 '자기 주도적 공부'로 이끌었다고. 

<공부갈증-실컷 논 아이가 명문대 간다>는 '결국 공부는 혼자 하는 거야'란 통설을 넘어 부모가 사교육이나 입시에 매달리지 않는 길이 '명문대'가는 길이라는 역설적 이론을 내놓는다. 일반 인문계고의 선생님으로서 학생들과 자기 아이들에게 '놀게 해서 공부한다'는 철칙을 세우고 지켜나간 경험들이 좋은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과학적 연구결과나 심리적 접근 같은 객관적인 증명이 부족하긴 하지만 충분히 납득은 갔다. 말하자면 결핍이 낳는 욕구를 공부법에 대입한 샘인데, 이는 대안학교에서 '공부'하려고 마음먹은 아이들의 학습법과 거의 유사하다. 게다가 이 아이들의 부모에겐 현재 자신의 상태를 요구없이 받아들여주고 아이와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는 부모가 있었다. 

옆집언니                                      

사교육, 입시전쟁을 향한 비판의 칼날은 무뎌진지 오래다. 어짜피 다섯 살 아이에게 책읽기 과외와 학습지를 겸하는 옆집 언니를 비난하는 일밖엔 안된다. 옆집 언니의 심성은 얼마나 고운가. 박스로 과일이나 고구마를 사면 푸짐하게 나눠주고, 텃밭의 몇 포기 안되는 배추를 쑥쑥 뽑아준다. 어떻게 옆집 언니를 비판의 칼날 위에 올릴 수 있겠는가. 또 그녀는 얼마나 교육적인가. (사사로운 감정이 아얘 없다고는 말 못한다)

비판할 건 생각과는 다른 부모의 행동이며 그렇지 못해 부끄러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흩어져 있던 생각들을 '행동'에 옮기고자 마음먹는다. 아이를 (방치가 아닌)방목할 것이고, 충분한 놀이과 적절한 결핍으로 갈증을 선사할 것이고, 아이가 원치 않는 한 선행학습이나 사교육을 시키지 않을 것이며, 아이가 현 교육방침에 부당함을 느낀다면 대안학교도 고려할 것이다. 

책읽는 엄마, 노력하는 부모, 사과하는 어른, 틀리면 고치는 용기, 이야기 들어주는 사람, 비난이나 비판없는 가정은 아이에게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되어줄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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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31 23: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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