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를 위한 모네 어린이를 위한 예술가
루돌프 헤르푸르트너 지음, 노성두 옮김 / 다섯수레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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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화가, 노년의 백내장, 백발의 할아버지, 수련, 기적소리가 들려오는 생 라자르 역, 루앙 대성당 연작, 포풀러 나무, 연필 한다스의 공용 아이디 monet, '모네'를 좋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는 딱 이만큼 입니다. 






그에 반해 피카소나 고흐의 일생과 그림, 영감을 담은 책들은 꽤나 여러 권 읽어보기도 했지만 모네만큼 사랑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화가 혹은 예술가의 삶이란 어떤 걸까, 궁금했나 봅니다. 이제서야 인터넷 서점을 뒤져보니 시리즈의 연작 말고는 모네의 단행본이 없군요. 모네가 국내 미술 출판계의 지형도에서 변방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있했습니다. 

모네가 왜 좋은지 묻는다면 제가 들이댄 증거만큼이나 군색합니다. 고흐를 왜 사랑하는지, 피카소는 왜 좋은지 묻는다면 이보다는 쉬울텐데요. 미술을 실험대 위에 올려놓은 피카소라면 그림 이면에 할 말이 더 많을테고, 고흐의 삶은 예술가의 경전처럼 반복해서 읽히는데다, 눈은 또 얼마나 의심없이 즐거운 가요. 아이러니 하지만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라지요. 

그러고 보면 모네에겐 스캔들이 부족한가 봅니다. 회자되는 대상이 그림이기도 하지만 화가의 삶이기도 하기에 조금 억울한 생각도 듭니다. 모네 이야길 듣고 싶어졌습니다. 재미있는 건, 검색된 모네 관련 책이 대게가 어린이를 위한 도서들 이었다는 점입니다.(물론 이 시리즈에는 피카소와 고흐가 포함되어 있을 테지만요) 어린이들에게는 모네가 필요한가요?



팔레트 위에서 색을 혼합하지 않고, 붓에 물감을 직접 묻혀 사용했다는 모네는 중요합니다. 이런 방식은 당시 배색, 조색의 기본 개념조차 무시하는 막무가내였다고 합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보색 관계에 있는 색들을 중간 단계 없이 맞붙여 두는 걸 고전주의 화가들은 끔찍하게 싫어했다지요. 

팔레트를 방불케 하는 캔버스 위에서 빨강, 파랑, 노랑 같은 원색의 무질서한 색점들이 아우성칩니다. 모네는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 물감 덩어리로 후려갈기듯이 그렸습니다.-<어린이를 위한 모네>에서

당연히 인물들의 얼굴과 표정은 사라지고, 대상의 윤곽도 색의 조화도 치밀하게 계산되었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가까이에서 본 <생 라자르 역>은 모호함과 혼돈이 지배하지만, 몇 걸음 떨어져서 관찰하면 눈부신 색감이 살아납니다.-<어린이를 위한 모네>에서

이젠 제가 왜 모네를 좋아하는 지 한 마디는 덧붙일 수 있겠습니다. 그 형태의 무너짐, 그리고 되살아나는 과정이 저를 사로잡았나 봅니다. 실물과도 같은 세밀화를 보고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 있을까?'를 묻는 순진한 관람객처럼 저는 미술의 마술을 모네로 경험했습니다. (경계를 가진 선이 아닌)뭉개진 붓자국이 만들어 내는 형상이 그저 놀라웠던 것이지요. 피카소의 영리함과 고흐의 멜랑콜리와는 분명히 구분되는 미술의 성취에 대한 순박한 사랑이었습니다.  

서둘러야 해. 아침이 밝으면 새벽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달아나 버리거든, 해님은 뭐가 그리 급해 서 발걸음을 서두르는 걸까? 모네 할아버지가 그리려고 했던 새벽 안개 속의 강변 풍경은 아차 하는 순간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지.-<어린이를 위한 모네>에서 


'인상파'라는 용어는 모네의 <인상, 해돋이>라는 그림에 대한 한 기자의 비아냥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게 언제든 기존의 가치를 무너뜨린 낯선 것들은 너그럽게 받아들여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천재'라는 지칭 앞에는 늘 '시대를 앞선', 고로 '비운한'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닙니다. 입체, 추상, 다다, 초현실, 포스트 모더니즘, 키치, 팝 아트 등등의 미술 사조를 차례대로 밟아 온 우리에게 모네의 그림은 전혀 파격적이지 않은 건 물론이고 외려 온순한 서정까지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 속에 깃든 미술사의 한 획은 달력의 풍경화를 넘어서 긴박함이 자리합니다. 빛이 색을 만들어 내는 짧은 순간의 노출에 붓과 영감을 일치시키는 현장 회화는, 목가적 풍경을 감상하는 느긋한 감상자와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습니다. 실제로 모네는 자연을 묘사한 모든 그림은 현장에서 실제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소재(素材) 앞에서가 아니면 단 한 번이라도 붓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서문당 컬러백과-모네> 에서)

이런 강력한 원칙하에 그려진 그림들이 거꾸로, 다듬어지지 않은 '미완'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모네가 일군 업적이 얼마나 용기있는 것이었나 되짚어보게 합니다. 그 용기가 실은 똑똑한 원리에 입각해 있다는 사실도 놀랍습니다. 


우리가 눈에 적절한 암시만 준다면, 눈은 우리가 거기 있다고 알고 있는 형태 전체를 만들어 준다. (<서문당 컬러백과-모네> 에서)

아마도 모네에게는 근시안의 비평가에게는 없는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모네 할아버지에게 인파를 그리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야. 세로로 붓질 한 번 하면 사람이 완성되니까. 또 가로로 두어 번 붓질하면 마차가 되지.-<어린이를 위한 모네>에서  

눈, 코, 입을 그려넣는게 더 엉터리라고 모네의 눈은 속삭였을 테지요. 얼핏 점과 선조차 사라진 '면'으로만 느껴지는 수련 연작들은 기자의 혹평처럼 '양탄자가 더 예술적으로 보일 수'도(수련 연작에 대한 언급은 아니었습니다) 있겠습니다. 아카데미 미술은 그림을 뜯어보길 요구했나 봅니다. 누가 더 잘 그리는가에 대한 내기는 모네에 의해서 무너져 버립니다. 역시 이제는 당연하지만 예술가 개인의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해진겁니다.                
  
예술가들이 그에게 진 무거운 빚을 생각한다면, 어린이 책으로 모네를 만난 건 오히려 다행입니다.    
 

그림 출처; <어린이를 위한 모네>/루돌프 헤르프루트너/다섯수레/2010.4 와 <서문당 컬러백과-모네>에서 직접 찍은 사진과 네이버 검색이 혼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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