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엄마처럼 살아갈까 - 엄마의 상처마저 닮아버린 딸들의 자아상 치유기
로라 아렌스 퓨어스타인 지음, 이은경 옮김 / 애플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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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엄마의 옷

<엄마를 부탁해>가 엄마 밖에서 엄마를 말하면서도 가장 엄마다운 엄마가 부각되는 점은 아이러니다. 박소녀라는 '엄마' 속에 존재하는 '키우는' 유전자는 비단 피붙이들에게만 발휘되는 게 아이었다. 집을 들고 나는 몸뚱이들, 시들어 가는 채마들, 심지어 엄마가 없는 아이들(고아원 후원)에게까지 입술 가까이 밥풀을 붙여 줄만한 실력을 뽐낸다. 더욱이 비릿한 연애의 주인공, 곰소의 사내도 미역국에 밀가루 반죽을 떼어줘야 하는 모성발휘의 대상이었지 않았나.
 
그러기에 엄마의 상실이 비탄할 만한 것이었고, 극적인 후회와 애통을 위해서 엄마는 부득불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비탄할 만한 일은 세상의 엄마들이 조금씩은 박소녀를 품고 있다고 해도 절대로 이 전형적인 모델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끝끝내 '희생'의 면모에 대해서는 거부했지만 백만이 넘는 독자들의 공감 영역에 '희생'을 제외한다면 '엄마 신드롬'을 어떤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 희미해진 감성에 불을 붙이고 톱아보게 한 중심이, 다른 사람이 부르는 엄마의 낯선 이름이 아닌 각자의 내면과 상상에서 불러온 '엄마'라는 고유명사였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이쯤해선, 지난해 한 작가가 낳았던 '엄마'라는 매끈한 달걀을 깨야할 차례다. 희생과 감내와 침묵과 외사랑이 아닌 질투와 이기와 비난과 강제의 엄마 말이다.
 
어디에 그런 엄마가 있냐고, 뉴스에나 나오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비운의 여인들을 말하는 거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되묻고 싶다. 당신의 엄마는 만족스러운가.

기브 앤 테이크라는 사회적 기준으로 볼 때 모녀의 관계는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들은 한 쪽으로 기울었을 때 더욱 안정적으로 보인다. 세상의 어떤 관계들은 무게가 달라야 삐걱거림이 없다. '화를 내더라도 사랑한다는 사실을 표명하라'는 육아의 코치는 곰이나 외계인을 만났을 때의 대처법 같기도 하다.




질투와 이기과 강제의 엄마
 
기본적으로 불공정한 관계의 함수가 <왜 나는 엄마처럼 살아갈까>라는 심리학 서적의 존재 이유다. 전폭적인 지지나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반대로 지나친 참견과 관심으로 딸과의 분리를 인정하지 못했을 때, 세상 모든 딸들은 엄마와의 관계에서 부득이하게 시소를 움직이는 수고를 치러야 한다. (세상 모든 엄마도 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책엔 바야흐로 수많은 엄마들이 등장한다. '박소녀 유형'은 제외되는 듯 하다. 하지만 <왜 나는 엄마처럼 살아갈까>에서도 <엄마를 부탁해> 만큼이나 '나의 엄마'가 쉴새 없이 뛰쳐 나온다.

자신이 받아왔던 외모에 대한 평가 때문에 딸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삶의 기준을 전달하는 엄마, 결핍에 대한 만족감을 위해 딸을 꼭두각시로 세우는 엄마, 자신과 딸을 일체시켜 딸의 독립을 가로막는 엄마, 주체적이지 못해 중요한 결정들을 남편에게 미루는 엄마, 쓸모있는 순간에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왜곡된 자아상을 형성시킨 엄마.  


딸을 부탁해

이 책이 그런 엄마들의 딸 이야기, 즉 피해자의 심리치료서라고 단정하진 말자. 앞서 괄호 안에서 말했듯이 이 엄마들도 '엄마의 딸'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 부분이 치료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가 왜 그랬는지'를 상상하고 자신과 연관지어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작업은 <엄마를 부탁해>같은 허구가 보여주는 '내력의 힘'이다.  

그렇다고 엄마를 이해하는 관용을 베풀라는 지시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성급한 공감은 더욱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살인을 하게 된 어떤 핍박한 이유들도 범죄를 덮을 수는 없는 것처럼 '엄마를 이해하기'보다는 행위와 감정들을 제대로 꺼내보자는 취지다. 그런 연결고리가 생긴다면 엄마에게서 받은 상처로 인한 분노가 더이상 '자신을 향하는' 바보같은 일을 막을 수 있다. 게다가 엄마 역시도 할머니에게서 무의식적으로 물려받은 것들을 전해줄 가능성이 크다.   

또 이런 증상들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리라는 기대도 접어야 한다. 현재 자신의 편협한 관계망이나 왜곡된 자아상, 자신의 딸을 대하는 불안한 태도들이 거꾸로 엄마를 발견하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불행의 모든 연유를 과거나 타인에게서 찾는 것은 어리석지만 그것을 간과하는 것도 현명한 일은 아니다.

구체적인 치료의 과정들은 불가의 명상 수행법을 떠올리게 한다. 


문제를 바로 잡으려면 판단하거나 어떤 행동을 하려 하지 말고 이 분노 자체를 느껴봐야 한다. 그러면 분노를 더욱 잘 다스리게 되고, 이를 어떠한 방식으로 표출할지 아니면 아예 표출하지 않을지 결정할 수 있다. 분노는 우리가 똑바로 바라보기 전까지는 우리 곁을 계속 맴도는 유령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더는 분노가 두렵지 않을 것이다. -책에서

분노와 마찬가지로 사랑과 슬픔 역시도 '드러내기, 내버려두기, 밑바닥까지 느껴보기' 단계로 진행하라고 말한다. 분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반사적 행위들이 과장될수록 진실에서 멀어질 지도 모른다.


엄마옷 벗기
 
<엄마를 부탁해>가 엄마라는 존재를 진지하게 불러온 건 기쁜 일이지만 완벽하게 정형화된 엄마를 통해, 엄마를 급하게 용서하거나 미화할 가능성을 벗겨버리고 싶진 않다. 엄마는 있는 힘껏 자식을 위하지만, 작가가 직접 말했듯이 '그것이 동등하게 엄마를 기쁘게 한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된다. 엄마도 누군가의 영향력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을 배운 '딸'임은, 엄마의 왜곡된 목소리를 죄책감없이 가려낼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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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 김정남 소설
김정남 지음 / 북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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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뒤에는 남성, 이라는 화자와 남성,이라는 작가가 우뚝하게 서 있다. 평범한 언어로 예민하게 일상의 부조리를 끌어내는 '여성스러운' 화자들에게 지극히 공감해 왔다는 사실을 거꾸로 자각하게 해준 소설집.  

소란스럽고, 미묘하고, 간지러운 느낌이 '여성스러운' 소설의 단서라면 <숨결>은 앞의 모든 형용을 거세한 채 던져진 살덩이 같다. 상처에선 정확히 피가 흐르고, 한계의 구분선은 명징하고, 동물적인 욕망은 직선으로만 존재하는 세계에 발을 담근 기분이다.
 
아시다시피 남성작가들이 모두 이런 소설에 합류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해 마지 않는 영미 작가 레이먼드 카버는 부엌과도 같은 협소한 공간과 단순한 동선, 식탁과 침대에서의 대화, (거의 감지하기 힘든)약간씩 뒤틀린 관계만으로도 지속가능한 파장을 보여주었다. 그를 존경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도 굵직한 서사의 힘이라고는 할 수 없는 예민한 감각으로 무장하긴 마찬가지다. 반면 헝가리 여류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은 이만큼 잔인하게 남성화된 문체를 만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드는 작품이다.
 
얼마 안되는 소설편력까지 끄집어 낸 건 이 단편들의 지독한 설정들 때문이다. 교통사고 가족이라 명명한 레커차 운전기사가 끝내 맞는 불운은 집 나간 부인의 시체를 아무것도 모른채 끌어 날랐던 지난 밤이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의 현대판일까?) 동영상 과외 강사로 절제된 식사와 충분한 정욕을 집안에서 모두 해결하는 정 박사는 절대 자기가 히키코모리가 아니라고 웅변한다. 서민의 한달치 월급봉투를 단번에 숍에 지불하는 사서와의 보름간의 희롱에 '어머니, 제 걱정일랑 하지 마세요. 서울에서 부잣집 딸 만나서 호의호식하고 있어요'라고 뇌까리고 마는 남자는 원룸텔로 돌아와 쓸쓸하다. 


생략의 생략을 거듭한 진술서들이 무척이나 불리해 보인다. 누굴 대변하고 누굴 비난하는 건지 쉽게 편들기가 힘들다. 물론 <숨결>의 모든 포즈는 시니컬이다. 주장을 담지 않고 '조명'하는 것만으로도 소설은 강력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르다. 도시의 꿉꿉한 삶을 다루는 것만으로 그의 시선은 만천하에 드러난 샘이다. 그러므로 '사회 비판'이라는 철지난 모토는 미뤄두자. 

문제는 그가 삶을 소화해내고 있는 방식이다. 다분히 직설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성적 서사의 진행은 소설 속의 삼류극장 간판 마냥 촌스럽고 동시에 아득하기도다. 비극의 무대에 올려진 주인공들은 고통을 향한 대사들을 응집하고 그외의 생의 이면들은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것만 같다.  

이 아주 오래된 소설적 기법이 새삼 낯설게 느껴지는 건, 여태 실은 다양하다고 할 수 없는 여성적 섬세함들이 지배하고 있는 소설들을 읽어왔기 때문이겠다. 지나친 자기 고백과 자아 성찰에서 한 걸음 물러나 '소설'이라는 '거짓말'을 되살리는 이 무뚝뚝한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 본다.
 
대단한 발견도, 중요한 변수도 아니지만 '이야기'를 마주하는 내 눈은 두 개의 동공만큼이나 균형을 잡고 싶어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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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누가와 - 鬼怒川
단이리 지음 / 나남출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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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한일전이 제일 재밌지' 아르헨티나 전을 보며 남편이 한 말이었습니다. 경술국치 백년.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백년이면 세월의 강물만도 억만겁은 흘러갔을테고, 우리에게 일말의 앙금이라고는 남아있지 않을법도 한데 '역사'는 전혀 그럴 의향이 없나봅니다. 


하긴 위안부의 삶을 처철히 재현한 권윤덕의 그림책 <꽃할머니>를 말끄러미 보고 있자니 흘러간 건 아무것도 없다,는 역사의 각인을 되새기게 됩니다. 해소되지 않은 치욕과 분노는 언제고 되살아 나 복수심을 일깨웁니다. 한일전이 재밌는 건 이겼을 때의 쾌감이 남다르기 때문이겠지요? 또 스포츠만이 선사할 수 있는 공정한 조건의 싸움이 일견 한일관계의 어긋난 부분을 보상해주기도 합니다.
 
네, 그러고보니 한일전이 진짜 재밌어보이기도 합니다. 한 번쯤의 승리에 찾아오는 우월감보다는 역사의 속내를 뒷주머니에 찔러넣고 누구나 앞마당에 모여 무기없이 알량한 조약 없이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이 세계는, 코 앞에 닥친 백년 전의 치욕에 비하면 너무도 평화로우니까요. 고통을 유희로 전환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분노의 처분법은 맨 먼저 분노를 응시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우월감인 용서는 분노를 덮어버리고 심지어 자괴감마저 들게 합니다. '일본은 없다'고 거부하는 것도, 일본의 위력을 깎아내려 우리를 추키는 것도 신나는 일은 아닙니다.

지금껏 일제의 야욕만을 대한제국 점령의 유일한 이유로 설명하는 역사관에서 균형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로지 피해자의 권리만 학습하고 누차 억울한 마음을 고한다고 해서 피의자의 주장을 막아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전 <기누가와>라는 살인추리소설을 통해 일본의 극단적인 우파들이 견지하고 있는 자세를 엿봤습니다. 말하자면 미개한 조선을 개화시켰다는 자부심이 미화가 아닌 실화(주인공의 실화)로서 인간사에 누적되어 있었습니다. 


<기누가와>/단이리/나남/2010.4 

그가 한국인 국회의원을 죽인 살인자 인데다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사실은 지당한 비난과 분노에 역의심을 살만했습니다. 일제가 대한제국에 가한 폭력과 잔인성만으로는 경술국치 100년을 톱아보는데 큰 장애가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극단적인 살인현장에서 발견하는 상대의 '입장'은 현재 내가 미워하고 있는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 되묻게 합니다. 

한국의 국회의원 박민자는 민주투사이자 일본의 역사적 과오를 비판하는 정의파로 경술국치 100년, 동경에서 대규모 항의집회를 준비합니다. 순진한 계산법으로 정당한 주장이 적법하게 발휘되는 동시에 위기를 겪고, 한일전의 한판승마냥 잠시나마 위안을 얻는 전말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자 단이리가 인용했듯 '역사에는 교묘한 통로들과 까다로운 복도들과 문젯거리들이 있게'(T.S. 엘리엇) 마련입니다. 그는 이것을 '우리 자신이 직접 역사에서 꺼내오는 인식과 감정들'이라고 말했는데, 저는 비슷한 말로 실제의 '역사'와 '역사의 현상'의 충돌로 바라봤습니다. 

박민자에게 역사란 정치적 계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고, 이를데 없이 모순적인 행위를 낳기도 했습니다. 박민자의 아버지는 일제의 징용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일본에 귀화해서 성공한 재일교포로 박민자의 막대한 정치자금은 일본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더없이 가까운 일본인 이복자매를 두고 자신의 컴플렉스(음경선망-성기를 동경하는 심리)를 해소하는 장소로 한국이 아닌 그토록 날서게 비판한 일본을 선택했다는 사실 역시, 순수한 역사관으로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녀를 죽인 가즈야는 그의 핏속에 단 한 가지, 식민역사의 우월성만이 거침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증조부와 조부가 모두 조선총독부의 뛰어난 관료였다) 극단적으로 '역사'만으로 살인을 할 수 있는 건 오히려 박민자 일텐데 말이죠. 주검과 살인자는 이토록 다른 지점에 있습니다. '역사의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의 '역사'를 죽입니다. 하지만 공통점도 있습니다. 둘 다 가족에게서 물려받은 컴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이죠. 이 부분은 한일 공동의 과제처럼 들립니다. 

<기누가와>에는 사건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한국의 여형사 배영희를 등장시킵니다. 그녀는 가즈야 집안의 내력을 살피면서 통치자의 역사기록을 마주하게 됩니다. 배영희가 드러내는 사념, 고민, 혼란들을 지금 우리의 심중과 겹치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경술국치 100년 째, 또 다시 주검과 살인자로 만나 물밑으로 대립하는 한일간의 입장이 수사관의 중립적 견해로 정리됩니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 일본이라는 타국으로부터 식민통치를 당한 과거는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을 일본에서는 막연한 피해의식이라거나 우라미(원한)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과거의 일을 두고 한국과 일본 사람들이 충돌하는 가장 큰 요인은... 당시 서구세력이 아시아를 지배하고자 하므로 일본이 서구세력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하기로 '선택'하였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이는 지금도 일본의 많은 우익인사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라고 봅니다. 또 하나는 일종의 공리주의인데, 일본의 식민통치를 조선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결과적으로 일본의 통치가 조선의 근대화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주장이지요. 어떤 이들은 식민통치가 없었다면 조선은 러시아에 먹혀 버렸거나 오늘과 같은 발전이 없었다고 공공연히 말하지요."

이후 배영희는 '반일감정'의 불성실함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습니다. 일본의 호스트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우월감을 느끼려했던 박민자의 행동으로 공허한 신념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간과 쓸개를 걸어놓고 고통을 잊지 않도록 되새기는 것은 아닐겁니다. 

<기누가와>의 해법은 살인자가 의당 받아야 할 처벌(자살)과 어긋난 신념의 단절이었습니다. 동시에 일말의 계산과 위선, 절제되지 않은 복수심을 국가주의로 위장한 박민자 역시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역사의 신념을 변형없이 가두는 것도, 제식대로 풀어놓는 것도 모두 위험한 일처럼 보입니다. 이 양끝을 가로지르는 외줄에서 아슬아슬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한일관계는 분명한 판결을 기다릴 수 있는 살인사건은 아닙니다. 식민의 역사가 거대한 제국주의 속의 흐름이었음을 저는 우선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인 여형사 배영희의 말을 마지막으로 떠올려 봅니다. 

...동경의 한복판에 있는 일본경찰청의 책상에 앉아 100년 전에 조선에서 긴 세월을 보낸 한 일본인의 기록을 보면서, 자신이 마치 역사라는 상상의 공간 속에서 일탈하여 떠다니는 하나의 먼지라는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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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익문사 1 - 대한제국 첩보기관
강동수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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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익문사1,2>/강동수/실천문학사/2010.5


역사소설이라면 슬슬 피해다니는 제가 300여 페이지의 두 권을 흡입하듯 읽어내렸습니다. 초반부의 몰입이 쉽진 않았지만 일단 인물들의 동선을 파악하고나니 체스판에 옮겨지는 말을 보듯 경기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경기'라는 표현이 이 소설의 묵직함에 비하면 천박하긴 하지만 첩보의 수를 읽어내려는 고수들의 신경전이 <제국익문사>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입니다.

과연 이 재미가 없었다면 조선말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명성왕후 시해와 잇따른 암살, 고종시대 비밀정보기관 '제국익문사' 등, 제법 딱딱한 역사적 사료들이 술술 넘어갈 수 있었을지는 여전히 자신이 없습니다.

더구나 짧은 호흡과 감각적인 문장에 길들여진 제가 굵직한 서사와 고풍스런 우리말 어휘에 쉽게 달라붙진 못했는데, 이 또한 <제국익문사>의 외피로서 보기좋게 어우러지면서 어느덧 별다른 장애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경술국치 백 년을 맞아 '이유있는 독서'를 해보고자 두 번째 펼친 소설이 독서의 스펙트럼을 흔쾌히 넓힐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난제는 책과 여러부분 소통한 후 쓰는 독후감의 역량이 부족하군요. 그래서 그 어느때보다 예리하게 파고드는 소설가 조정래의 서평을 먼저 옮겨 봅니다. 


...우리는 자칫 일제강점기를 박제품과 같은 것으로 방치하는 오류를 범하기 쉬운데, 이 각별한 소설은 '지금, 여기'의 삶과 백년 전의 삶이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박제된 역사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장쾌한 서사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애국과 매국 사이에서의 갈등을 다루는 균형잡힌 시선에 신뢰가 간다. 가히 경술국치 밴 년만에 나온 '대한제국 멸망사'로 읽힐만한다.(중략)
 
맞습니다. <제국익문사>는 조선말 국가첩보기관의 애국사상을 담아내는 지당한 과정이 빠졌습니다. 오히려 큰 줄기의 서사는 매국노, 즉 국모시해에 연루된 인물 우범선의 뼈아픈 감정기록입니다. 작가가 말했듯 '우범선은 한 개인이면서 동시에 당대 개화당의 이념이 뭉뚱그려져 육화된 인물'입니다. 피해자를 자처하는 애국자라면, 목숨을 버리고라도 한 나라의 왕과 왕후를 지켜내야하는 수구당의 첩보기관이라면 '죽일 수밖에 없었던' 절절한 이유를 마주하는 심정이 분노로만 설명될 순 없을 것입니다. 

완벽한 피해자도 승리의 감격도 얻지 못하는 역사의 딜레마를 겪는 첩보요원, 이인경은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입니다. 명성왕후 시해 이후 또 다시 고종을 겨눈 총구를 수색하는 그의 첩보전이 역사소설 밖의 현란한 스릴을 선물합니다. 이 허구는 김옥균의 삼일천하로 불발된 개화파 정권이 다시 부활을 꿈꾼다는, <제국익문사>의 가장 발칙한 역사적 가정을 안고 있습니다.
 
한 때는 동지였던 개화파와 수구파 대표인물들의 라이벌전을 통해서 독자는 세계관의 대립을 구체적으로 목도할 수 있습니다. 나라로 상징되는 국왕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의롭고 이로운 일이라고 믿어왔던 역사관에 의한다면, '매국노, 반란'이라고 단정짓기 편하겠지만 그들 역시 '나라를 구하는 길'을 반대로 상정한 것에 다름없었습니다. 

왜와 청국과 아라사 사이에 끼여 나라의 명운이 풍전등화 같은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아직도 반상만 따지는 저 북촌 세도가 무리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민씨네 척족들이 말하는 개화라는 것은...진실로 나라를 지키고 부강케하여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니라 저네들의 권세와 부귀를 잃지 않기 위해 또 다른 권력의 울타리를 치려는 것임을,(중략)-소설 속 우범선의 비망록에서 

이것이 '갈등을 다루는 균형잡힌 시선'이며 '명성왕후로 대표되는 수구당이 과연 올바른 노선을 밟았는가'란 작가의 의문일것입니다. 덧붙여 그들 모두의 실패는 역사적으로 예견된 것이었지만 그 이유, 즉 한계를 직시하는 것이 독자의 몫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진보적인 명분으로 합중공화를 꿈꿨던 개화파나 봉건세력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던 수구파 모두 각각 일본과 청, 즉 외세의 힘을 빌었다는 점이 '대한제국 멸망'의 가장 큰 요인으로 드러납니다. 게다가 봉건세력은 세계사의 흐름에 둔감하여 새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거의 되있지 않았습니다.

거참, 그래서 박영효가 미국을 본떠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이로군. 나라라는 것은 세세연년 이어진 왕통이 있어 위로는 하늘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 창맹을 돌보는 게 아닌가. 여기 왜국도 총리대신 국사를 받들지만 천황에게서 통치권을 위임받은 게 아닌가. 창맹들이 세상물정을 어찌 알아서 임금을 뽑는 다는 거지?" -제국익문사 요원 유석하의 말.

경술국치 백 년에 필요한 것이 민족감정을 앞세운 애국심의 고취도 아니고, 야욕을 품은 외세에 대한 비난 역시도 아니었습니다.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던 약소국의 처지를 비탄하고 피해를 곱씹기 전에, 우리가 이미 독립을 잃은 객체였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익히 습득해왔던 진정한 애국도, 매국노의 그들만의 우국(優國)도 진짜 핵심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한치 앞이 낭떠러지라고 해도 다른 패는 없었지만, 후대는 객관적 역사 돌아보기를 통해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수순처럼 들이닥친 주권침탈, 저홀로 고독한 테러리스트가 된 첩보요원 이인경의 독백을 들어봅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잘못했던 것일까……. ... 장동화의 길도, 우범선의 길도 결국엔 나라를 지켜낼 수 없었다면, 그 답을 찾아내기 위해선 참으로 혹독한 시간을 견뎌내야 할 것이었다. 시베리아의 겨울과 같은 인고의 시간이 지나야만 그 해답의 실마리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지난 백년 참으로 혹독한 시간을 견뎌내온 우리의 답이 '애국'만은 아니길 바라면서 <제국익문사>를 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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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의 고수 - 신 변호사의 법조 인사이드 스토리
신주영 지음 / 페이퍼로드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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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주변이 오글거립니다. 먼 함성이 창에 불 켜진 여러 집을 합친 건지, 어디 특별 행사장의 모둠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네요. 지금 우리는 이기고 있습니까. 이 새벽에 배달차 소리가 산발적으로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합니다. 동네에 촘촘한 수비망을 형성한 치킨집 사장님들의 승리군요.  

(그 사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네이버 실시간 중계를 띄워놓고 있었습니다. 작업은 물건너 갑니다)

경기장이 법정이라면 어떨까요. 후반 추가 수혈된 김남일의 지나친 혈기가 실추한 패널티 킥에, 변호사가 고용된다면? 어쨌든 16강 진출이라는 큰 목적을 달성했기에 과실이긴 하지만 치사는 아니었다. 과장없이 변호할 수 있겠습니다. <법정의 고수>에 의한다면 말이죠.



긍정적인 기운으로 가득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법이 불행에 둥지를 튼다는 사실 만큼은 확실해집니다. 반대로 '단 한 사람'의 불행을 막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행복의 수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하기도 합니다.     

늘 억울합니다. 차인것도, 탈락한 것도, 주머니가 가벼운 것도 모두 내 탓이 아니길 바랍니다. 교통사고도, 사랑도, 다툼도, 내가 옳았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바쁩니다. 내 억울함을 증거할 단서들이 어디든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법정은 철저한 증거주의 입니다. 이의 반대기조인 자유심증주의도 안전장치로 증거능력 안에서 자유심증합니다. 현대의 증명적 사고는 법정과 맞닿아 있는것 같습니다.

좀 더 합리적으로, 단 사진 한 장 이라도, 단 한 줄의 인용이라도, 공인된 인물의 권위를 빌어서 나의 주장을 증명하려는 증거주의 사고가 널리 통용됩니다. 진실이 진실 스스로의 힘으로 드러나는게 아니라 밝혀야만 되는 어떤 주장들 속에서 뒤져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관계에 집착하는 부득불 씁쓸한 곳에 사람냄새 물씬 나는 변호사가 떴습니다. 법정을 삶터로 바꿔 씁니다. <법정의 고수>는 법조계의 숨겨진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승소와 유불리, 증인, 증거, 판례, 법조항, 날카로운 칼날을 쥔 직업인이 차가운 세상을 비비는 내용입니다. 편하고 재밌습니다. 소설 한 편만큼 잘 읽힙니다. 고민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공격적인 변론서라기보다는 감정적인 탄원서에 가깝습니다.  

법조계의 드라마틱한 성공사례나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사건 보다는,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교통사고, 이혼, 간통, 사기, 연대보증 같은 평범한 사건들을 다룹니다. 십년차 변호사가 괴나리 봇짐을 이고 떠나는 자아여행 같습니다. 전혀 과장된 몸부림도, 목적지가 분명한 여행도, 감격스런 현장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속에 잠복되어 있는 보편적인 고민이 법과 만나는 지점이 이상하리만치 다정합니다.  

부모님이 당했던 사기로 노무현, 이성암 변호사를 차례로 만난 어린시절 이야기로 행복한 시동을 겁니다. 돈을 주고 사야하는 변론에 약간의 온도차를 주기 시작합니다. 이후로 줄줄이 이어지는 법정의 사례들은 신주영 변호사(저자)의 보온으로 따숩습니다. 피고와의 적극적인 공감, 연민부터 사법연수생들의 고충, 법조인의 업무환경, 법정 고수들의 역전되는 수, 실패한 변론들, 신나는 승리보다 신명나는 고민들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판사를 설득하려면 판사의 말을 써야한다는 조언처럼 그녀는 독자의 말을 몸으로 익혀 흔들리는 인간의 변호사가 됩니다. 그녀도 세상의 법을 익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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