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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익문사 1 - 대한제국 첩보기관
강동수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제국익문사1,2>/강동수/실천문학사/2010.5
역사소설이라면 슬슬 피해다니는 제가 300여 페이지의 두 권을 흡입하듯 읽어내렸습니다. 초반부의 몰입이 쉽진 않았지만 일단 인물들의 동선을 파악하고나니 체스판에 옮겨지는 말을 보듯 경기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경기'라는 표현이 이 소설의 묵직함에 비하면 천박하긴 하지만 첩보의 수를 읽어내려는 고수들의 신경전이 <제국익문사>의 빼놓을 수 없는 재미입니다.
과연 이 재미가 없었다면 조선말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명성왕후 시해와 잇따른 암살, 고종시대 비밀정보기관 '제국익문사' 등, 제법 딱딱한 역사적 사료들이 술술 넘어갈 수 있었을지는 여전히 자신이 없습니다.
더구나 짧은 호흡과 감각적인 문장에 길들여진 제가 굵직한 서사와 고풍스런 우리말 어휘에 쉽게 달라붙진 못했는데, 이 또한 <제국익문사>의 외피로서 보기좋게 어우러지면서 어느덧 별다른 장애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경술국치 백 년을 맞아 '이유있는 독서'를 해보고자 두 번째 펼친 소설이 독서의 스펙트럼을 흔쾌히 넓힐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난제는 책과 여러부분 소통한 후 쓰는 독후감의 역량이 부족하군요. 그래서 그 어느때보다 예리하게 파고드는 소설가 조정래의 서평을 먼저 옮겨 봅니다.
...우리는 자칫 일제강점기를 박제품과 같은 것으로 방치하는 오류를 범하기 쉬운데, 이 각별한 소설은 '지금, 여기'의 삶과 백년 전의 삶이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박제된 역사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장쾌한 서사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애국과 매국 사이에서의 갈등을 다루는 균형잡힌 시선에 신뢰가 간다. 가히 경술국치 밴 년만에 나온 '대한제국 멸망사'로 읽힐만한다.(중략)
맞습니다. <제국익문사>는 조선말 국가첩보기관의 애국사상을 담아내는 지당한 과정이 빠졌습니다. 오히려 큰 줄기의 서사는 매국노, 즉 국모시해에 연루된 인물 우범선의 뼈아픈 감정기록입니다. 작가가 말했듯
'우범선은 한 개인이면서 동시에 당대 개화당의 이념이 뭉뚱그려져 육화된 인물'입니다. 피해자를 자처하는 애국자라면, 목숨을 버리고라도 한 나라의 왕과 왕후를 지켜내야하는 수구당의 첩보기관이라면 '죽일 수밖에 없었던' 절절한 이유를 마주하는 심정이 분노로만 설명될 순 없을 것입니다.
완벽한 피해자도 승리의 감격도 얻지 못하는 역사의 딜레마를 겪는 첩보요원, 이인경은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입니다. 명성왕후 시해 이후 또 다시 고종을 겨눈 총구를 수색하는 그의 첩보전이 역사소설 밖의 현란한 스릴을 선물합니다. 이 허구는 김옥균의 삼일천하로 불발된 개화파 정권이 다시 부활을 꿈꾼다는, <제국익문사>의 가장 발칙한 역사적 가정을 안고 있습니다.
한 때는 동지였던 개화파와 수구파 대표인물들의 라이벌전을 통해서 독자는 세계관의 대립을 구체적으로 목도할 수 있습니다. 나라로 상징되는 국왕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의롭고 이로운 일이라고 믿어왔던 역사관에 의한다면, '매국노, 반란'이라고 단정짓기 편하겠지만 그들 역시 '나라를 구하는 길'을 반대로 상정한 것에 다름없었습니다.
왜와 청국과 아라사 사이에 끼여 나라의 명운이 풍전등화 같은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아직도 반상만 따지는 저 북촌 세도가 무리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민씨네 척족들이 말하는 개화라는 것은...진실로 나라를 지키고 부강케하여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니라 저네들의 권세와 부귀를 잃지 않기 위해 또 다른 권력의 울타리를 치려는 것임을,(중략)-소설 속 우범선의 비망록에서
이것이 '갈등을 다루는 균형잡힌 시선'이며 '명성왕후로 대표되는 수구당이 과연 올바른 노선을 밟았는가'란 작가의 의문일것입니다. 덧붙여 그들 모두의 실패는 역사적으로 예견된 것이었지만 그 이유, 즉 한계를 직시하는 것이 독자의 몫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진보적인 명분으로 합중공화를 꿈꿨던 개화파나 봉건세력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던 수구파 모두 각각 일본과 청, 즉 외세의 힘을 빌었다는 점이 '대한제국 멸망'의 가장 큰 요인으로 드러납니다. 게다가 봉건세력은 세계사의 흐름에 둔감하여 새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거의 되있지 않았습니다.
거참, 그래서 박영효가 미국을 본떠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이로군. 나라라는 것은 세세연년 이어진 왕통이 있어 위로는 하늘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 창맹을 돌보는 게 아닌가. 여기 왜국도 총리대신 국사를 받들지만 천황에게서 통치권을 위임받은 게 아닌가. 창맹들이 세상물정을 어찌 알아서 임금을 뽑는 다는 거지?" -제국익문사 요원 유석하의 말.
경술국치 백 년에 필요한 것이 민족감정을 앞세운 애국심의 고취도 아니고, 야욕을 품은 외세에 대한 비난 역시도 아니었습니다.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던 약소국의 처지를 비탄하고 피해를 곱씹기 전에, 우리가 이미 독립을 잃은 객체였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익히 습득해왔던 진정한 애국도, 매국노의 그들만의 우국(優國)도 진짜 핵심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한치 앞이 낭떠러지라고 해도 다른 패는 없었지만, 후대는 객관적 역사 돌아보기를 통해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수순처럼 들이닥친 주권침탈, 저홀로 고독한 테러리스트가 된 첩보요원 이인경의 독백을 들어봅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잘못했던 것일까……. ... 장동화의 길도, 우범선의 길도 결국엔 나라를 지켜낼 수 없었다면, 그 답을 찾아내기 위해선 참으로 혹독한 시간을 견뎌내야 할 것이었다. 시베리아의 겨울과 같은 인고의 시간이 지나야만 그 해답의 실마리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지난 백년 참으로 혹독한 시간을 견뎌내온 우리의 답이 '애국'만은 아니길 바라면서 <제국익문사>를 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