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로 칭찬 신드롬을 선사했던 켄 블랜차드가 이번엔 아이를 위한 칭찬 기술을 선전하고 나섰습니다. 이전의 베스트셀러는 왠지 모를 거부감 때문에 읽어보진 않았습니다. 칭찬, 긍정, 성공같은 구호들이 주는 압박에 알러지가 있기도 했고 현실의 불행을 직시하는 쪽에 더 무게를 두곤 했습니다. 이 책으로 전작을 추측해 보건데, 관계 속에서 비난이나 비판 말고 '칭찬'을 부각시키라는 것 맞나요? 베스트셀러 한 권으로 너도 나도 칭찬주의자가 되는 일이야 없겠지만, 아주 나쁘게 말해 누군가를 조종하기 위해 '칭찬'이 적당한 기술처럼 인식된다면, 감정이나 관계가 도식화 되는 일에 수긍하는 꼴이지 않을까, 멀찍이서 관망했습니다.

긍정강화 방식
 

육아의 역사에 접어든 제 인생이 이 책을 손에 들게 만들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한 채 말이죠. 참으로 엄마는 굴욕적입니다. '아기고래'에 무너진 거죠. '그래! 그냥 고래도 아니고 아기고래를 어떻게 춤추게 하는지 두고보자'는 식으로 책을 펼쳤죠. 책은 사실 아주 간단했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①성공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고, ②실패를 무시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관심을 전환하고, 마지막 ③칭찬에 필요한 소정의 기술을 귀띔해 주는 식입니다. 

예비 범고래 조련사인 엄마가 씨월드에서의 노하우를 세 살배기 아들에게 대입하면서 행동변화를 확인하는 드라마적 구성입니다. 딱딱함은 없는 반면 과학성이나 전문성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의혹은 본문, 서문, 후기에 재차 강조되면서 동식물의 행태 속에서 인간의 원형적 특질을 이해하려는 쪽으로 해소되긴 합니다.       

이 책에 제시된 자녀 교육의 방법들은 어린 시절의 막연한 기억이나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풍문에 의지한 것들이 아니다. 이 방법들을 확고하고 명백한 행동과학 법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저자후기에서)
 
하지만 저자도 고백하듯이 이 책은 해양동물 조련사들의 긍정강화방식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동물과 인간의 성장, 사고방식은 엄연히 다르지만 '행동과학'에서 만큼은 유사한 결과도출이 가능하다는게 이 시리즈의 혁신이자 한계입니다.

'말 잘듣는 고래'로 키우기 위한 해법이 '온순한 아이'로 키우기 위한 방법과 매치된다면, 거꾸로 '말 안듣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이 방법들은 모두 수포로 돌려야 합니다. 좀 과격하긴 했습니다만 '자유분방한 아이, 제 주장이나 마음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아이', '훈련되지 않은 망아지 같은 아이'이길 원한다면 이 책의 방법들은 당연히 쓸모가 없어집니다. 

하지만 어떤 부모가 그런 아이를 원하겠습니까. 잠버릇도 좋고,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놀고, 자기 물건도 잘 나누고, 골고루 잘먹고, 똥 오줌도 척척 잘 가리고, 등등(책은 이 모든게 칭찬 기술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아이에게 바라는 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뭐든 좀 더 '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게 부모의 역할 이기도 하지만 제 마음 속 깊은 곳에선 어쩐지 반대의 환청이 들립니다. '엄마의 요구에 '싫다'고 하렴. '아니요'라고 하렴. '왜요'라고 하렴.'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상황에서, 아이가 정말 요구를 납득하고 순순히 받아들이는지, 단지 '칭찬'이라는 만족감에 차오르기 위해 그렇게 행동하는 지 저는 잘 알 수 없었습니다.(제 감성을 탓해주세요) 하루가 평화롭게 흘러갔다해도 그 속에 무엇이 잠복되어있는지 저는 가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곪아 터지기 전에 예방이 가능한 거친 표출들을 속으로 갈구했던 겁니다. 칭찬으로 오물 상자의 뚜껑만 덮어버리는 건 아닌가도 한 편 걱정스러웠습니다.

이 '칭찬 육아'가 틀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이가 훌륭히 해 낼 수 있게끔 환경을 조성하고 잘 해낸 걸 칭찬하는 일은 어른인 부모가 아이에게 주어야 할 '성공모드'일 것입니다. 잘 통제되고, 쉽게 수긍하고, 실패에 연연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이 참으로 긍정적이긴 합니다. 

'부모 기준' 육아


하지만 이 육아 방식은 아무래도 아이가 아닌 부모 측에 여러가지 배려와 주의를 요구하는 '부모 기준'의 육아법으로만 보였습니다. (<무서운 심리학>에서) 부모의 역할과 의무만을 강조하다보면 육아법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자책이 크고 더 넓은 의미에서 아이를 강제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추천의 글'에도 등장한, 동물의 학습원리를 사람에게도 적용하려 했던 행동주의 심리학자 스키너의 '유아용 스키너 상자'만 보더라도 아이를 백지상태, 대상물로 바라보는 일방적 육아법의 끔찍한 상징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스키너에게 영향을 준 행동주의 주창자 존 브로더스 왓슨의 아래와 같은 말은 더없이 처참합니다. 


 
(스키너 상자; 온도 조절이 가능하고 투명도가 높은 고강도 프렉시글라스로 사방을 둘러쌌다-당시 짧은 시간 동안 무려 1000여 개나 팔려나갔다고 한다)

나에게 건강하고 좋은 습관이 있는 아이 12명과 내가 원하는 육아 환경을 달라. 그러면 어떤 아이든 그 아니의 재능, 적성, 부모의 인종과 관계없이 의사, 변호사, 예술가는 물론 거지나 도둑으로도 만들어 보이겠다 -<무선운 심리학>에 인용된 왓슨의 말

물론 이런 정신을 <칭찬은 아기고래도 춤추게 한다>의 켄 블랜차드가 물려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칭찬(매게)'을 통해 '훈련(주입)'되는 과정은 결코 쌍방 육아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최근100년동안 공업화, 도시화와 함께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육아법의 전수가 감소했고, 젊은 세대의 육아에 대한 불안을 해소해 줄 전문가의 보증이 필요한 시대(<무서운 심리학>)이긴 하지만 육아법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어떤 가치가 우선인지를 따지는 것이 과연 과학적 증명으로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앞섭니다. 

칭찬 중독 

다시 책으로 돌아와 잘못한 일에 대해서 '무시'하라는 조언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겁니다. 비판이 나쁜 행동에 대한 강화라고 하는 데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좋은 반성은 굴욕이 아닌 성찰입니다. 반성 없이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면 그 과정은 조금 허술하지 않을까요? 이 부분은 제가 지나치게 결벽적인 마음상태를 지향하는 데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무엇이 더 옳은가를 따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칭찬의 효과는 무척 즉각적입니다. 아이의 함박 미소만으로도 부모는 충만해집니다. 하지만 칭찬으로 아이를 길들이는 일에는 확실히 동참할 수 없었습니다. 전 조금 인색한 엄마입니다. 실로 제가 두려운 건 칭찬을 위해 하게 될 의미없는 행동들입니다. 아이의 내적 주체성에 따라 행동이 자연스럽게 귀결(부모가 원치 않는 행동이라 해도)되는 쪽을 선호하기 때문에 '칭찬'은 매우 조심스러운 방침입니다. 


<양육 쇼크>에서는 '칭찬 중독에서 벗어나라'고 외치며 지능이나 결과물에 대한, 자동 반사적인 칭찬을 경계합니다. 과정을 칭찬하라는 거죠. '잘했어''대단해'라는 말보다는 '정말 열심히 하는 구나''노력하는 모습이 보기좋아'라는 칭찬이 아이에게 더욱 이롭다는 것입니다.(처음엔 매우 어색하긴 합니다) 또 우리의 두뇌는 '좌절을 안겨주는 시간도 얼마든지 헤쳐나갈 수 있다는 것을 학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이가 결국 어떻게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도달하는 것보다 시도하는 것, 나아가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지나치게 잦은 보상이나 즉각적인 칭찬은 보상이라는 선물이 사라지면 그만둘 가능성도 내제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칭찬으로 자신을 길들이려 하는 부모를 발견할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유 없이 하는 일'이 정말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이란 점에 대해 동의하신다면 아이에게 칭찬이란 배지를 달아주는 순간, 혹시 아이의 몸은 지속적인 보상을 바라는 화학물질을 분비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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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천재시인 존 키츠는 그의 시 <라미아>에서 '과학은 차갑고, 모든 매력을 달아나게 하며, 천사의 날개를 묶어 버리고, 규칙과 정렬로 모든 신비를 정복한다'고 말했다. '무지개를 풀어 헤쳐라'로 뉴턴, 즉 과학자가 모든 시정(詩情)을 말살했다는 무거운 비난까지 감행하면서. 

진화생물학자이자 <무지개를 풀며>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키츠의 생각을 반박하며 오히려 '과학은 위대한 시적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뉴턴의 분광학으로 우리가 자연의 비밀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우리는 실제적인 우주의 아름다움에 근접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노벨 물리학 상을 받은 리처드 파인만은 한 발 더 나아가 시인을 질책한다.




시인들은 과학이 별의 구조를 분해하여 고유의 아름다움을 빼앗아간다고 불평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우주에 대한)질문에 대한 해답을 조금 안다고 해서 우주의 신비함이 조금도 손상을 입지는 않는다. 진리란 과거의 어떤 예술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경이롭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시인들은 왜 이런 것을 시의 소재로 삼지 않는가? 

-<과학 인문학>에 인용된 리처드 파인만의 말





두 리처드가 낭만주의 시인을 궁지로 몰아넣고 자신들의 상상력이 '차갑고' '매정하고' '천사를 옭아매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통에 헷갈리긴 했지만 내 생각은 확고하다. 과학에 대한 시인의 비난에는 수긍할 수 없지만 '과학이 시적 영감의 원천이라거나, 과학적 사실을 시의 소재로 삼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 시의 토양에 부족했을지 모르는 자연과학적 통찰이 시인의 영감에 따라 작품에 드러나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지만 그것이 과학의 밑거름을 통한다면 과학과 문학이 어깨를 견주며 나아가는 일은 불가능 할 것이다. '인식의 첫발자국은 과학이 찍어도 좋고 문학이 찍어도 좋다'고 <과학 인문학>의 물리학도 시인 김병호는 말했다. <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만나 영화관에 가다>는 예술이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음에도 독자적으로 같은 세계를(증명이 필요한 과학보다 오히려 한발 앞 서) 구현해 낸 데에 대해, 각자의 창조력으로 시대적 물음에 부응했음을 보여 주었다. 

만약 키츠가 '아인슈타인과 허블, 호킹의 우주를 알았더라면 더욱 가슴 뛰었을' 거라는 리처드 도킨스의 말은 난센스다. 나 역시도 과학이 발견한 신비에 심장이 방망이질 칠 정도로 자극 받지는 못한다고 말하면 너무 편협한가. 오히려 김언의 시에서 발견하는 사람 사이의 점과 선, 내 몸에서 우주를 깨닫는 선(禪)이야말로 나에게는 더 가슴뛰는 일이다.




기하학적인 삶(일부)

미안하지만 우리는 점이고 부피를 가진 존재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칭을 이루고 양쪽의 얼굴이 서로 다른 인격을 좋아한다. ..우리의 지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고향에 있는 내 방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간다. 거기 누가 있는 것처럼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한 점을 찾는다.
 


  

 

무지개는 여전히 만지고 싶은 아름다움이며,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도보하는 발은 믿지 않는다. 몸을 기댄 벽이 나를 밀고 있다는 관성은 쉽게 체화되지 못했다. 과학이 아무리 야무지게 현상을, 내 몸을 해부해도 나는 흠집 하나 없이 그대로다. 거꾸로 과학이 증명하지 못한 사랑의 에너지에 따라 나는 막무가내로 이동한다. 과학의 언어는 옳지만 도무지 詩화 되지 못한다. <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만나 영화관에 가다>는 오히려 과학자가 시인이 되지 못함을 아쉬워 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시인의 직관을 과학자의 공식보다 사랑한다해도 아얘 무시할 수는 없다. 현대의 과학은 시처럼 내 몸과 이 별을 긴밀히 연결해주는 통로다. 과학이 풀어 헤치는 무지개에 나는 불만이 없다. <내 몸의 사생활>로 인간의 24시를 해부한 저자도 '과학적 발견은 신비를 더욱 신비롭게 한다'며 키츠의 말을 반박한다. 이쯤 되니 키츠가 단단히 꼬투리를 잡힌것 같긴 하다. 그렇다해도 시인의 물리적 화학적 직관에 과학이 앞서야 한다는 건 인정할 수 없다. 

문학과 과학(<과학 인문학>), 미술과 과학(<아인슈타인과 피카소~>)에 이어 개와 늑대의 '시간'(땅거미가 지고 사물의 윤곽이 어렴풋해지는)과 과학이 만난 <내 몸의 사생활>은 몸의 드라마와 문학, 의학, 과학을 오버랩 한다. 아침, 한 낮, 오후, 저녁, 밤으로 인간의 생체시간을 나누고 그 시간에 벌어지는 활동과 휴식, 운동, 욕구를 한 편의 드라마처럼 구성했다. 내 몸의 시, 내 몸의 과학을 잠시 들여다 보자.


아침의 기상. 각성과 수면의 어중간한 상태, 즉 일어난 직후 첫 30분 동안의 두뇌 기능은 24시간동안 잠을 자지 않았을 때보다 더 형편없다. 과학은 일찍 일어난다고 해서 건강이나 금전적인 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게 반드시 정신적으로 건강한 증거는 아니라고 말한다.

오후의 운동. 의자에서 더 적은 시간을 보내고 더 자주 정수기로 왔다 갔다 하면 비만을 예방할 수 있다 (체계적인 운동으로만 에너지 소비량을 높이고자 하는 다이어트 공식에 반박하며). '다리를 쓰시게. 다리를 움직이시게.'(<십이야>) 달리기가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도 좋지만 스트레스와 불안감에 관한 한 최고의 치료책이다. 더불어 30분 동안 활기차게 낙엽을 긁어모으거나 일주일에 몇 번 잔디를 깎는 것도 적당한 강도의 운동이다.

오후의 피로.
하품. 전염성 하품을 하는 사람들은 자아인식이 높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얼굴을 관찰하여 그들의 생각을 읽는 데 능숙하다. 

저녁의 술. '세 번째 잔은 마시지 말라. 일단 그대 안에 들어가면 길들이지 못 할테니'(시인 조지 허버트) 여자는 맥주나 와인 한 잔 남자는 두 잔을 권한다. 

통설에 대한 뒤집기도 재미있지만 특히 이 책의 비유와 용어들은 시적 감성을 자극한다. 몸의 리듬을 감독하는 어미 시계, 작은 날개 모양의 조직 한 쌍-시상하부, 조그만 양파같은 혀의 맛 봉오리, 11주 된 태아가 시작하는 하품, 밤에 아무때고 일어나 콧노래를 부르거나 엄지손가락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에페족이 드러내는 수면의 패턴 등, 마치 몸이 일필 휘지의 붓질이라도 하는 듯 몸의 언어에 대한 구사가 다채롭다.  

우리 몸과 우리의 별은 과학과 시의 재료다. <내 몸의 사생활>로 인해 과학이 증명해낸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찬탄하기 보단, 의미없이 행하는 일간의 행동들이 지닌 원형을 탐험하는 호기심이 모두 과학과 시의 재산이었음을 발견하는 것이 즐거웠다. 우리도 사실 과학이 얼마나 영특한지, 또한 얼마나 딱딱한지 키츠보다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다. 

사랑에 빠진 여성이 더욱 대담해지는 이유가 굳이 테스토스테론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더라도 사랑은 몸을 들뜨게 한다.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피카소의 작품은 영감을 준다. 아이들이 쓴맛을 싫어하는 게 진화적 장치에 의해서라고 해도 우리는 아이들이 사탕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 과학자들이 들고 일어설만한 키츠의 시가 아무리 반박하기 좋다해도 인류를 기억하는 내 몸 앞에서 과학과 시의 대결은 대게 무의미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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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인생을 배웠다고 감히 자부하는 저는 아이에게도 시집을 건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기도 했지만 이야기책보다 지루하지는 않을까 늘 염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책을 지겨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는 사실 어른들의 두려움만 담겨있지만, 제가 읽기에도 즐거울 동시였으면 하고 바랬습니다. 말소리보다 리듬과 반복을 먼저 익히는 아이들의 특성에 따르자면 시만큼 좋은 언어의 기폭제도 없겠습니다. 


첫 돌 이후 첫 번째 동시집은 동시의 고전이 많은 책을 골랐습니다. 유아가 읽기에 적당할 창작 동시집을 그 때까진 발견하지 못했거든요. 판본도 크고 당연히 그림도 동반된, 익숙하고 발랄한 언어로 가득한 책은 생각보다 쉽게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생각까지 예뻐지는 동시>가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저희 어렸을 때 들었던 말노래의 원본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원숭이 똥구멍~으로 시작하는 '말엮기 노래'나 꼭꼭 숨어라~로 시작하는 전래동요, 또 우리가 익히 동요로 불렀던 동시의 진본이 여기저기 숨어 있습니다. '파란 마음 하얀 마음''나무야 나무야' '구슬비''도토리' 등 노래로 불러주기에 딱 좋을 악보가 되어주니 그것 역시 반가웠습니다. 또 동시의 힘을 여실히 증명한 윤석중, 정지용, 강소천, 이상교, 이문구 님의 시들로 가득했습니다. 윤동주
의 동시가 빠진게 아쉽다면 아쉬웠지요.
 










이 동시집은 아이와 노는 방에 그저 한 쪽을 펼쳐놓고 관심을 기울이면 노래를 불러주거나 읽어주거나 했습니다. 하지만 곧 이야기 책들에 뭍혀 한 동안 책장에 꽂혀있는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사실, 이번 이상교 님의 창작 동시집에 비한다면 그림이나 시적 모티브가 좀 오래된 냄새가 나기도 합니다. 위의 책이 좋은 동시들을 엮기는 했지만 통째로 한 권의 동시집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던데 반해 이 번 책은 한 달음에 한 권을 볼 정도로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습니다. 끊어짐 없이 이어지는 소재나 주제의 흐름, 신기한 반입체 그림들, 통통거리는 언어, 이 모든 것이 그런 힘을 발휘합니다.

 















<소리가 들리는 동시집>의 그림들은 하나같이 기발하면서도 일상의 친숙함을 상징적으로 전달합니다. 그림 속에 자리한 시의 구성도 참 아름답습니다. 의성어 의태어도 즐겁지만 보기에 즐거운 책입니다. 고전 동시처럼 짜임새가 완벽하고 긴 호흡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소재에 대한 발상을 간략히 드러내는게 강점입니다. 


예를 들어 <불> 이라는 시는 '장작에/활활/불이 붙었다./넘실넘실/춤추는 것 같다.' 라고 썼습니다. <김밥>이라는 시에는 '하얀 밥/분홍 소시지/노란 단무지/초록 시금치/노르스름 계란말이/까만 김 한 장이/도르르르 안아 주었어요'라고 쓰여져 있구요. <소> 라는 시에는 "밥 벅었니?"/물어봐도 눈만 끔적끔적/"송아지가 보고 싶니?"/물어봐도/입만 우물우물. 이라고 읽기에도 듣기에도 즐거운 말놀이 들이 이어집니다.(아이는 소가된 양  대답을 합니다) 

시들은 주제별로 나뉘어져서 물 흐르듯 시들이 흘러 갑니다. 아침, 학교, 거리풍경, 혼자 집보기 등으로 대여섯개의 시들이 둥그마니 모여 있으니 이야기 책으로서의 기능도 충분히 달성합니다. 소단락이 끝날 때마다 등장하는 의성어 의태어 잎을 단 나무 그림은 책이 끝날 즈음 초록 잎으로 가득 합니다.

아이는 이게 버튼이라면서 삑삑 누르는 시늉을 합니다. 그러면 엄마는 부저 소리를 내주고 나뭇잎 안에 자리한 우리말을 읽어주었습니다. 제법 두꺼운 책을 한 달음에 읽은 건 '어떤 그림이 나올까, 어떤 내 이야기가 나올까' 하는 아이의 호기심을 이 동시집이 충분히 채워주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그림을 만져보는 아이의 손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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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보이는 것'을 그릴까. '생각하는 것'을 그릴까.






카시미르 말레비치, 칸딘스키, 데이빗 봄버스, 파울클레(시계방향으로 화가이름만), <20세기의 미술>/노버트 린튼/예경,에서

추상적인 작품에 수없이 노출된 우리에게 그림은 원래 '아름답'기도 하지만 '어렵'기도 하다. 색의 조화, 형태는 아름답지만 '의미'에 대해서는 골머리를 썩는게 당연하다. '생각'을 그린 그림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익숙한 것 만은 확실하다. 그림이 '재현'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여겼던 시대에 살았던 건 내가 아니라 피카소다.  

하지만 '생각하는' 과학 만큼은 다르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말했던 선구자들이 목숨을 잃고, 뉴턴의 중력이나 딱딱한 유클리드 수학이 세계를 설명할 수 없고, 시간과 공간을 떼어 놓을 수 없는 시공간 속에 살고 있다해도, 나는 여전히 태양이 뜨고 진다고 말하며 8분전의 별을 지금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보이는 것을 대체로 믿고 있는, 과학의 내면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일상을 불편함 없이 영위하고 있다.  

예술은 가깝고 과학은 멀다. 그림 앞에선 눈 두개만(실상은 그렇지 않을지라도)있으면 되지만 과학의 언어는 붓질보다 난해하다. 이런 과학을 그림을 통해 이해한다?   

과학의 붓으로 그리는 예술

<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만나 영화관에 가다>(에른스트 페터 피셔/들녘/2010.3)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지식에 대한 이해가 목적이라면, 다른 길을 통해서 그것을 달성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 길 중 하나는 예술을 통해 열린다. 물리학자는 -실험과 수학을 통해-원자의 성질을 알아낼 수는 있어도, 그들이 이해한 것을 일상어로 이야기 하지는 못하다.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원자에 대한 지식은 회화적 용어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즉, 과학자가 자신의 설명에 시적인 형식을 부여해 청중을 유혹하는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 인문학>에 인용된 과학자 리처드 파인만도 시인들이 과학적 진실을 왜 시로 노래하지 않느냐는 강력한 주문을 내놓았다. 이 책은 그에 대한 한 권의 화답 같았다. 문학과 철학을 통해 바라보는 김병호 시인의 물리학 수업에서, 저자의 작품을 포함해 과학적 주제를 다룬 시들을 몇 편 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과학적 진실을 아름답게 구현한 안정감 있는 작품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시에 자연과학적 통찰이 부족했던 건 일면 사실이지만 시의 눈을 통해 과학을 바라보는 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출발부터 뭔가 어긋났을지도 모른다. 예술이 과학적 영감을 내포하는 것과 과학을 시의 소재로 삼는 것은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런 시도 자체를 폄하할 수는 없다. 과학적 인지를 토대로 시적 영감이 독립적으로 발산된다면 피카소와 몬드리안이 그랬듯 그들은 독립적인 문예의 창조적 발상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으로 과학적 사실을 구현한다? 이말은 틀리다. 피카소와 아인슈타인이 시대의 변화에 영감을 얻고 각 분야에서 동일한 결과물을 내놓긴 했지만 그들이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만나 영화관에 가다>는 그들이 각각 얼마나 비슷한 행보와 동일한 질문을 각자의 영역에 동시적으로 발현했는가에 대해 다을락 말락한 접점을 찾는다.       

이런 시도가 아주 낯선것만은 아니다. <20세기의 미술>의 저자는


(미술에서의)새로운 관행들은 때때로 물리학에 있어서의 발전과 관련된 것으로 설명된다. 이는 특히 원자가 종국적으로 물질의 최소단위가 아니라 그 자체가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전자, 양자, 중성자의 덩어리라는 사실의 발견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및 질량과 에너지를 동일시 하는 이론과 관련되고 있다.

고 했다. 칸딘스키도 그의 회고록에서(<20세기의 미술>에서 발췌)

"원자의 분열은 나에게 있어 전세계의 붕괴와 같다"

라고 한 점을 든다면 당시 미술계는 과학적 입장 변화에 무척 민감했고 또한 열려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18세기 뉴턴의 등장 이후로 유럽은 과학에 열광했다.

뉴턴 시대 이전의 사람들과 이후의 사람으로 나뉠 수 있는 것은 과학이 사람들의 생각을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뉴턴 이후 사람들은 과학이 대중의 생각을 지배하던 시대였다. 또한 과학은 신학의 한 모서리를 담당하던 시대를 뛰어넘어 신이 하지 못한 일까지 할 수 있었다. -<생각의 진화>(김용관/국일 미디어/2010.1) 에서

하지만 예술가들이 피카소가 말했던 '새로운 표현방법의 모색'이라는 이유로 변화를 주도 했다는 분명한 사실로 인해 예술과 과학과의 섵부른 연계는 한정지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만나 영화관에 가다>는 그런 연결점에 더욱 구체적인 증거를 찾아내는 것으로 다가간다. 화가들이 사실은 새로운 표현양식에 더욱 몰두 했음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한 시대를 살았던 과학자와 예술가들의 선긋기를 멈춰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아비뇽의 처녀들





 

얼마전 <아프리카-사라져가는 세계 부족문화>라는 어린이 교양도서에서 원주민의 가면을 유심히 볼 기회가 있었다. 문득 아비뇽의 여인의 얼굴 중 하나로 가면을 채택한 피카소의 심미안에 대해 어렴풋이 이해했다는 자신이 들었으나, 그 그림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가운데 미적인 기준을 넘어선 연구적 결과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실제 피카소도 자신의 구상과 스케치를 '연구'라고 불렀다.   

아프리카 원주민의 가면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편견이 지워진 시대에 살고 있지만 왜 그것이 아름다운가를 물을 때 답은 명확하지 않았다. 피카소는 아마도 그것의 가장 단순한 기하학적 구조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것을 미술계에선 '원시주의'라 부르기도 하고 피카소와 아인슈타인의 동일 명제인 '모든 것은 기하학이다' 로 도출되기도 한다.

세잔의 풍경화가 장면을 모사하지 않고 자연물 개별의 기하학적 구성을 독립적으로 그려낸 것처럼 <아비뇽의 처녀들>은 배경과 인물의 따로됨이 아니라 한데 뒤섞여 따로 구분지을 수 없을 정도의 종합적 입체주의로 나아가기 직전의 원형을 드러낸다. 그것은 결국 아인슈타인이 말한 시간과 공간을 떼어놓을 수 없는 시공간 개념을 구축한 것으로 읽힌다.    

수 년전 <아비뇽의 처녀들>을 처음 만났을 때만해도 그림이 품고 있는 시간성에 대해 의아하기만 했다. 뒤틀리고 뒤죽박죽이 된 형태들이 무의식적으로 눈을 잡아 끌긴했지만 그림이 '생각하고 있는' 의도에 대해서는 수동적인 짐작만 가능할 뿐이었다. 게다가 그림이라면 '느끼는' 것으로 족하다고 여겼다. 화가가 아무리 획기적인 시도로 예술사에 남을 만한 공을 세웠던 간에 내적인 아름다움이 상으로 맺힌다면 굳이 심각하게 들어가서 해부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거만을 떨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것이 무언지도 모르는 과격한 방어일 뿐이었다. 게다가 추상적이지 않은 그림에서 난해함을 느끼기란 아주 애매한 것이기도 했다. 우리가 시간을 두고 누군가를 지켜볼 때의 전신의 모든 방향이 정면을 향했다는 처녀들의 뒤틀림은 기실 그림에 담은 시간성이란 문제에 대해 매우 색다른 영감을 줄 뻔도 했지만 무지의 소치로 그림은 가려지고 말았다. 과학도 그렇지만 예술의 내면화도 나에겐 아직 먼 일이다.

<아비뇽의 처녀들>의 배경은 마치 구겨진 커튼처럼 아가씨들을 애워싸고 있으면서 스스로 배경임을 거부한다. 그 구겨짐으로 우리는 2차원의 평면에서 인물이 뒤로 밀리거나 배경이 튀어나오거나 하는 공간적 질감과 기하학적 구성을 염두하게 된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마치 '공간이 오히려 인물들의 형상을 결정하는 것'은 상대성이론의 기본 통찰과 통한다고 한다. 여전히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는 거의 감이 오지 않고 있으나 피카소를 통해 바라보는 시공간의 전면적 도출은 감히 느껴진다고 말할 수 있다. 해부되고 해석되는 그림에서 아름다움은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은 이제 사라졌다. 물리학적 표현으로 피카소의 그림이 '동시성이 존재하는 좌표체'라고 한 저자의 말을 지금 당신이라도 이해하길 바래본다.





-<서양 미술사>/곰브리치/예경,에서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생각하는 것'을 그린 그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옆얼굴과 정면 몸통, 투시 연못, 물고기의 옆모습, 눕혀진 나무를 그린 이집트의 벽화가 가장 보여지기 좋게 그려지기도 했지만 그들이 인지하는 것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피카소도 알았을 것이다. 결국 피카소는 원시주의와 시대적 변화의 바람과 시대의 탐구 과제를 그림에 녹여내는 비상한 재주를 보여주었다.

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만나 영화관에 가다





아인슈타인과 피카소는 세계선을 공유할 수 없었지만 그들이 멀고 멀게 주고 받은 영향은 아주 가까웠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단 한번도 부딪힌 적이 없고, 만난척도 하지 않으며, 시시한 가정이나 비유로 <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만나 영화관에 가다>라는 제목이 탄생한 건 아니었다. 책이 강요한 그들의 만남이 당시 흔했던 예술가들의 카페나, 학술적인 파티에서가 아니라 '영화관'일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는, '시간'이라는 4차원을 경험하게 하기에 딱 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획기적인 장르가 그들 공동의 은유적 모티브가 되어주었다. 영화가 시간의 예술이라는데는 더이상의 설명은 불필요 하다.

상대성이론이 입체주의와 어떻게 짝을 이룰 수 있는가는 우리와 멀고도 먼 과학과 예술의 이야기지만, 저자는 과학이 지금 우리의 이야기가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그럴만한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이 반갑다. 우리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과학적 지능과 예술적 지능을 구별하는 이분법에 너무나 오래 익숙해져 있다. 저자는 이 점을 예술작품의 신비로움에 매혹되듯이 과학의 수수께끼로도 관람객들을 유혹할 수 있다고 풀어낸다. 과학적인 폐쇠성이 예술로 발빠르게 구현되었을 때 우리가 예술작품을 보면서 과학적인 시각을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일지도 모른다는 걸 말이다. 

피카소가 약 8년이 지나서, 그것도 상대성 이론까지 등에 업고 내게 왔듯이 그 언젠가 아인슈타인이 스며들 날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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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평범하지 않은 사례에서 그 작용의 신비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7세기 영국의 해부학자 토머스 윌리스의 말입니다. <내 몸의 사생활>은 사라진 입맛에서 공복감의 화학적 요소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얼굴을 인식하지 못한 데에서 얼굴 지각의 기적에 대해 새로운 식견을 얻었고, 촉감을 잃은 사람에게서 애무의 생물학을 알게 되었다고 정리합니다.

실제로 본문에 등장하는 현대인, 즉 우리처럼 밤에 잠을 몰아자지 않는 에페족에 대한 독특한 이야기는 밤의 패턴을 연구하는 데 좋은 실예가 되어주었습니다. 요즘의 수면 습관이 현대생활의 인위적인 결과라고 추측할 만한 실험을 더하면서 우리의 몸이 실은 선사시대에 빚을 지고 있음에도 잠을 줄이고 통합했다고 말이죠. 

그러면서 현대인들이 '신화와 판타지의 원천과 멀어지고, 생리 기능에 잠재하는 다양한 대안 방식을 깨닫지 못한다'는 야릇한 결론을 향합니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서 사실 저는 할 말이 없지만 <진화에 정답이 어딨어?>로 추측되는 진화론은 이른바 '우성'만이 진화의 승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것을 뒤집으려 하고 있습니다. 가장 약삭빠르고 강한 동물만이 진화의 승자가 되고, 가장 합리적인 습관들이 우리의 유전자에 기록된다는 진화론이 이 두 책에 의해 힘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밤의 패턴을 인위적으로 바꾸어 우둔해진 영혼이나 진화에 실패한 듯 보이는 동물들의 생태계도 진화의 결과물이라면, 합리적인 적자생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정신적, 신체적 후퇴가 수반되는 삶이 과연 앞섰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진화'라는 말로 그려지는 그림은 마치 높은 곳을 향해 오르는 사다리타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생각의 진화>의 주인이었던 '생각' 역시도 항상 발전적인 모습으로 진화할 것이란 기대가 그저 기대뿐이라고 말합니다. 선사시대, 과학의 시대, 영감의 시대를 지나쳐 우리가 고도로 진화된 영장물이라는 환상은 원래의 뇌의 크기를 현재와 비교하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그것이 유익하게 진보적으로 비대해진 뇌라고 말하는 데서 머뭇거리게 됩니다. 혹시 진화가 옆으로 풍성해지고 분화되는 가지는 아닐까요?  

진화의 실패작같은 동물들이 불완전한 몸을 이끌고 버티는 생태계는 인간이 지칭한 '진화'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잠들었다가도 무언가 흥미로운 소리(대화나 음악)을 들으면 망설임 없이 깨어나고 밤에 아무때고 일어나 콧노래를 부르거나 엄지 손가락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행위, 밤에 집회를 열고 잡담하고 그밖의 사회활동을 하면서 보내는 킹족과 에부시족. 만일 현대인의 밤 패턴보다 이것이 영감어린 습관이라면 우리가 진화의 혜택을 제대로 보고 있는 고등한 인류가 맞습니까? 라고 묻고 싶어집니다. 


더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진화론에 맞장 뜰만한 바다게나 달팽이, 개구리의 짝찟기 습성은 엄연한 사기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힘이 더 세다고 약한 놈보다 기회가 많지 않다는 사실들이 다윈을 반박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따라옵니다. 암컷에게 능력을 과시하며 구애하는 대신 패자처럼 숨죽이고 있다가 암컷이 나타나면 갑자기 보충한 에너지를 쏟아붙는 이놈들의 영리함이, 원래 힘보다 나은 것은 아닐른지요. 말하자면 이런 동물들의 습성이 진화론을 뒤집을만한 정확한 예가 되는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환경에 더 잘 적응한 개체가 살아남아야 하는데 <진화에 정답이 어딨어?>가 불러모은 동물들은 인간이 구분한 열등에 무척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는 거죠. 도퇴되었어야 마땅한 척박한 현실에 그들은 여보라는 듯이 잘 살고 있는 겁니다.  

다윈의 진화론까지 섭렵해봐야 진위를 가릴 수 있겠지마는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를 떠올리게 만드는 동물들의 희귀한 습성을 진화의 수순이 아닌 우연이나 아름다운 실수로 치환하면서 진화론을 반박할 수 있는지는 두고봐야 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화론과 관련을 맺건 말건 간에 지극히 평범하지 않은 사례에서 자연의 신비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해마가 창조주께서 술 한잔 걸치고 만든 우연의 산물이라고 해도, 수컷들의 허풍이 똑똑해질 줄 모르는 러닝개그 중이라도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 졌습니다. 어쩌면 진화론 자체보다는 진화의 엘리트주의를 반박하는 익살스런 모함같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뜬금없이 이 과학책은 정치인문 도서에서나 등장할 서민우대정책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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