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천재시인 존 키츠는 그의 시 <라미아>에서 '과학은 차갑고, 모든 매력을 달아나게 하며, 천사의 날개를 묶어 버리고, 규칙과 정렬로 모든 신비를 정복한다'고 말했다. '무지개를 풀어 헤쳐라'로 뉴턴, 즉 과학자가 모든 시정(詩情)을 말살했다는 무거운 비난까지 감행하면서.
진화생물학자이자 <무지개를 풀며>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키츠의 생각을 반박하며 오히려 '과학은 위대한 시적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뉴턴의 분광학으로 우리가 자연의 비밀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우리는 실제적인 우주의 아름다움에 근접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노벨 물리학 상을 받은 리처드 파인만은 한 발 더 나아가 시인을 질책한다.
시인들은 과학이 별의 구조를 분해하여 고유의 아름다움을 빼앗아간다고 불평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우주에 대한)질문에 대한 해답을 조금 안다고 해서 우주의 신비함이 조금도 손상을 입지는 않는다. 진리란 과거의 어떤 예술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경이롭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시인들은 왜 이런 것을 시의 소재로 삼지 않는가?
-<과학 인문학>에 인용된 리처드 파인만의 말
두 리처드가 낭만주의 시인을 궁지로 몰아넣고 자신들의 상상력이 '차갑고' '매정하고' '천사를 옭아매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통에 헷갈리긴 했지만 내 생각은 확고하다. 과학에 대한 시인의 비난에는 수긍할 수 없지만 '과학이 시적 영감의 원천이라거나, 과학적 사실을 시의 소재로 삼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 시의 토양에 부족했을지 모르는 자연과학적 통찰이 시인의 영감에 따라 작품에 드러나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지만 그것이 과학의 밑거름을 통한다면 과학과 문학이 어깨를 견주며 나아가는 일은 불가능 할 것이다. '인식의 첫발자국은 과학이 찍어도 좋고 문학이 찍어도 좋다'고 <과학 인문학>의 물리학도 시인 김병호는 말했다. <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만나 영화관에 가다>는 예술이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음에도 독자적으로 같은 세계를(증명이 필요한 과학보다 오히려 한발 앞 서) 구현해 낸 데에 대해, 각자의 창조력으로 시대적 물음에 부응했음을 보여 주었다.
만약 키츠가 '아인슈타인과 허블, 호킹의 우주를 알았더라면 더욱 가슴 뛰었을' 거라는 리처드 도킨스의 말은 난센스다. 나 역시도 과학이 발견한 신비에 심장이 방망이질 칠 정도로 자극 받지는 못한다고 말하면 너무 편협한가. 오히려 김언의 시에서 발견하는 사람 사이의 점과 선, 내 몸에서 우주를 깨닫는 선(禪)이야말로 나에게는 더 가슴뛰는 일이다.
기하학적인 삶(일부)
미안하지만 우리는 점이고 부피를 가진 존재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칭을 이루고 양쪽의 얼굴이 서로 다른 인격을 좋아한다. ..우리의 지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고향에 있는 내 방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간다. 거기 누가 있는 것처럼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한 점을 찾는다.
무지개는 여전히 만지고 싶은 아름다움이며,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도보하는 발은 믿지 않는다. 몸을 기댄 벽이 나를 밀고 있다는 관성은 쉽게 체화되지 못했다. 과학이 아무리 야무지게 현상을, 내 몸을 해부해도 나는 흠집 하나 없이 그대로다. 거꾸로 과학이 증명하지 못한 사랑의 에너지에 따라 나는 막무가내로 이동한다. 과학의 언어는 옳지만 도무지 詩화 되지 못한다. <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만나 영화관에 가다>는 오히려 과학자가 시인이 되지 못함을 아쉬워 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시인의 직관을 과학자의 공식보다 사랑한다해도 아얘 무시할 수는 없다. 현대의 과학은 시처럼 내 몸과 이 별을 긴밀히 연결해주는 통로다. 과학이 풀어 헤치는 무지개에 나는 불만이 없다. <내 몸의 사생활>로 인간의 24시를 해부한 저자도 '과학적 발견은 신비를 더욱 신비롭게 한다'며 키츠의 말을 반박한다. 이쯤 되니 키츠가 단단히 꼬투리를 잡힌것 같긴 하다. 그렇다해도 시인의 물리적 화학적 직관에 과학이 앞서야 한다는 건 인정할 수 없다.
문학과 과학(<과학 인문학>), 미술과 과학(<아인슈타인과 피카소~>)에 이어 개와 늑대의 '시간'(땅거미가 지고 사물의 윤곽이 어렴풋해지는)과 과학이 만난 <내 몸의 사생활>은 몸의 드라마와 문학, 의학, 과학을 오버랩 한다. 아침, 한 낮, 오후, 저녁, 밤으로 인간의 생체시간을 나누고 그 시간에 벌어지는 활동과 휴식, 운동, 욕구를 한 편의 드라마처럼 구성했다. 내 몸의 시, 내 몸의 과학을 잠시 들여다 보자.
아침의 기상. 각성과 수면의 어중간한 상태, 즉 일어난 직후 첫 30분 동안의 두뇌 기능은 24시간동안 잠을 자지 않았을 때보다 더 형편없다. 과학은 일찍 일어난다고 해서 건강이나 금전적인 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게 반드시 정신적으로 건강한 증거는 아니라고 말한다.
오후의 운동. 의자에서 더 적은 시간을 보내고 더 자주 정수기로 왔다 갔다 하면 비만을 예방할 수 있다 (체계적인 운동으로만 에너지 소비량을 높이고자 하는 다이어트 공식에 반박하며). '다리를 쓰시게. 다리를 움직이시게.'(<십이야>) 달리기가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도 좋지만 스트레스와 불안감에 관한 한 최고의 치료책이다. 더불어 30분 동안 활기차게 낙엽을 긁어모으거나 일주일에 몇 번 잔디를 깎는 것도 적당한 강도의 운동이다.
오후의 피로. 하품. 전염성 하품을 하는 사람들은 자아인식이 높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얼굴을 관찰하여 그들의 생각을 읽는 데 능숙하다.
저녁의 술. '세 번째 잔은 마시지 말라. 일단 그대 안에 들어가면 길들이지 못 할테니'(시인 조지 허버트) 여자는 맥주나 와인 한 잔 남자는 두 잔을 권한다.
통설에 대한 뒤집기도 재미있지만 특히 이 책의 비유와 용어들은 시적 감성을 자극한다. 몸의 리듬을 감독하는 어미 시계, 작은 날개 모양의 조직 한 쌍-시상하부, 조그만 양파같은 혀의 맛 봉오리, 11주 된 태아가 시작하는 하품, 밤에 아무때고 일어나 콧노래를 부르거나 엄지손가락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에페족이 드러내는 수면의 패턴 등, 마치 몸이 일필 휘지의 붓질이라도 하는 듯 몸의 언어에 대한 구사가 다채롭다.
우리 몸과 우리의 별은 과학과 시의 재료다. <내 몸의 사생활>로 인해 과학이 증명해낸 것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찬탄하기 보단, 의미없이 행하는 일간의 행동들이 지닌 원형을 탐험하는 호기심이 모두 과학과 시의 재산이었음을 발견하는 것이 즐거웠다. 우리도 사실 과학이 얼마나 영특한지, 또한 얼마나 딱딱한지 키츠보다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다.
사랑에 빠진 여성이 더욱 대담해지는 이유가 굳이 테스토스테론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더라도 사랑은 몸을 들뜨게 한다.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피카소의 작품은 영감을 준다. 아이들이 쓴맛을 싫어하는 게 진화적 장치에 의해서라고 해도 우리는 아이들이 사탕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 과학자들이 들고 일어설만한 키츠의 시가 아무리 반박하기 좋다해도 인류를 기억하는 내 몸 앞에서 과학과 시의 대결은 대게 무의미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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