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로 칭찬 신드롬을 선사했던 켄 블랜차드가 이번엔 아이를 위한 칭찬 기술을 선전하고 나섰습니다. 이전의 베스트셀러는 왠지 모를 거부감 때문에 읽어보진 않았습니다. 칭찬, 긍정, 성공같은 구호들이 주는 압박에 알러지가 있기도 했고 현실의 불행을 직시하는 쪽에 더 무게를 두곤 했습니다. 이 책으로 전작을 추측해 보건데, 관계 속에서 비난이나 비판 말고 '칭찬'을 부각시키라는 것 맞나요? 베스트셀러 한 권으로 너도 나도 칭찬주의자가 되는 일이야 없겠지만, 아주 나쁘게 말해 누군가를 조종하기 위해 '칭찬'이 적당한 기술처럼 인식된다면, 감정이나 관계가 도식화 되는 일에 수긍하는 꼴이지 않을까, 멀찍이서 관망했습니다.
긍정강화 방식
육아의 역사에 접어든 제 인생이 이 책을 손에 들게 만들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한 채 말이죠. 참으로 엄마는 굴욕적입니다. '아기고래'에 무너진 거죠. '그래! 그냥 고래도 아니고 아기고래를 어떻게 춤추게 하는지 두고보자'는 식으로 책을 펼쳤죠. 책은 사실 아주 간단했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①성공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고, ②실패를 무시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관심을 전환하고, 마지막 ③칭찬에 필요한 소정의 기술을 귀띔해 주는 식입니다.
예비 범고래 조련사인 엄마가 씨월드에서의 노하우를 세 살배기 아들에게 대입하면서 행동변화를 확인하는 드라마적 구성입니다. 딱딱함은 없는 반면 과학성이나 전문성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의혹은 본문, 서문, 후기에 재차 강조되면서 동식물의 행태 속에서 인간의 원형적 특질을 이해하려는 쪽으로 해소되긴 합니다.
이 책에 제시된 자녀 교육의 방법들은 어린 시절의 막연한 기억이나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풍문에 의지한 것들이 아니다. 이 방법들을 확고하고 명백한 행동과학 법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저자후기에서)
하지만 저자도 고백하듯이 이 책은 해양동물 조련사들의 긍정강화방식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동물과 인간의 성장, 사고방식은 엄연히 다르지만 '행동과학'에서 만큼은 유사한 결과도출이 가능하다는게 이 시리즈의 혁신이자 한계입니다.
'말 잘듣는 고래'로 키우기 위한 해법이 '온순한 아이'로 키우기 위한 방법과 매치된다면, 거꾸로 '말 안듣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이 방법들은 모두 수포로 돌려야 합니다. 좀 과격하긴 했습니다만 '자유분방한 아이, 제 주장이나 마음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아이', '훈련되지 않은 망아지 같은 아이'이길 원한다면 이 책의 방법들은 당연히 쓸모가 없어집니다.
하지만 어떤 부모가 그런 아이를 원하겠습니까. 잠버릇도 좋고,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놀고, 자기 물건도 잘 나누고, 골고루 잘먹고, 똥 오줌도 척척 잘 가리고, 등등(책은 이 모든게 칭찬 기술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아이에게 바라는 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뭐든 좀 더 '잘'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게 부모의 역할 이기도 하지만 제 마음 속 깊은 곳에선 어쩐지 반대의 환청이 들립니다. '엄마의 요구에 '싫다'고 하렴. '아니요'라고 하렴. '왜요'라고 하렴.'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상황에서, 아이가 정말 요구를 납득하고 순순히 받아들이는지, 단지 '칭찬'이라는 만족감에 차오르기 위해 그렇게 행동하는 지 저는 잘 알 수 없었습니다.(제 감성을 탓해주세요) 하루가 평화롭게 흘러갔다해도 그 속에 무엇이 잠복되어있는지 저는 가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곪아 터지기 전에 예방이 가능한 거친 표출들을 속으로 갈구했던 겁니다. 칭찬으로 오물 상자의 뚜껑만 덮어버리는 건 아닌가도 한 편 걱정스러웠습니다.
이 '칭찬 육아'가 틀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이가 훌륭히 해 낼 수 있게끔 환경을 조성하고 잘 해낸 걸 칭찬하는 일은 어른인 부모가 아이에게 주어야 할 '성공모드'일 것입니다. 잘 통제되고, 쉽게 수긍하고, 실패에 연연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이 참으로 긍정적이긴 합니다.
'부모 기준' 육아
하지만 이 육아 방식은 아무래도 아이가 아닌 부모 측에 여러가지 배려와 주의를 요구하는 '부모 기준'의 육아법으로만 보였습니다. (<무서운 심리학>에서) 부모의 역할과 의무만을 강조하다보면 육아법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자책이 크고 더 넓은 의미에서 아이를 강제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추천의 글'에도 등장한, 동물의 학습원리를 사람에게도 적용하려 했던 행동주의 심리학자 스키너의 '유아용 스키너 상자'만 보더라도 아이를 백지상태, 대상물로 바라보는 일방적 육아법의 끔찍한 상징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스키너에게 영향을 준 행동주의 주창자 존 브로더스 왓슨의 아래와 같은 말은 더없이 처참합니다.
(스키너 상자; 온도 조절이 가능하고 투명도가 높은 고강도 프렉시글라스로 사방을 둘러쌌다-당시 짧은 시간 동안 무려 1000여 개나 팔려나갔다고 한다)
나에게 건강하고 좋은 습관이 있는 아이 12명과 내가 원하는 육아 환경을 달라. 그러면 어떤 아이든 그 아니의 재능, 적성, 부모의 인종과 관계없이 의사, 변호사, 예술가는 물론 거지나 도둑으로도 만들어 보이겠다 -<무선운 심리학>에 인용된 왓슨의 말
물론 이런 정신을 <칭찬은 아기고래도 춤추게 한다>의 켄 블랜차드가 물려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칭찬(매게)'을 통해 '훈련(주입)'되는 과정은 결코 쌍방 육아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최근100년동안 공업화, 도시화와 함께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육아법의 전수가 감소했고, 젊은 세대의 육아에 대한 불안을 해소해 줄 전문가의 보증이 필요한 시대(<무서운 심리학>)이긴 하지만 육아법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어떤 가치가 우선인지를 따지는 것이 과연 과학적 증명으로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앞섭니다.
칭찬 중독
다시 책으로 돌아와 잘못한 일에 대해서 '무시'하라는 조언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겁니다. 비판이 나쁜 행동에 대한 강화라고 하는 데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좋은 반성은 굴욕이 아닌 성찰입니다. 반성 없이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면 그 과정은 조금 허술하지 않을까요? 이 부분은 제가 지나치게 결벽적인 마음상태를 지향하는 데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무엇이 더 옳은가를 따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칭찬의 효과는 무척 즉각적입니다. 아이의 함박 미소만으로도 부모는 충만해집니다. 하지만 칭찬으로 아이를 길들이는 일에는 확실히 동참할 수 없었습니다. 전 조금 인색한 엄마입니다. 실로 제가 두려운 건 칭찬을 위해 하게 될 의미없는 행동들입니다. 아이의 내적 주체성에 따라 행동이 자연스럽게 귀결(부모가 원치 않는 행동이라 해도)되는 쪽을 선호하기 때문에 '칭찬'은 매우 조심스러운 방침입니다.
<양육 쇼크>에서는 '칭찬 중독에서 벗어나라'고 외치며 지능이나 결과물에 대한, 자동 반사적인 칭찬을 경계합니다. 과정을 칭찬하라는 거죠. '잘했어''대단해'라는 말보다는 '정말 열심히 하는 구나''노력하는 모습이 보기좋아'라는 칭찬이 아이에게 더욱 이롭다는 것입니다.(처음엔 매우 어색하긴 합니다) 또 우리의 두뇌는 '좌절을 안겨주는 시간도 얼마든지 헤쳐나갈 수 있다는 것을 학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이가 결국 어떻게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도달하는 것보다 시도하는 것, 나아가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지나치게 잦은 보상이나 즉각적인 칭찬은 보상이라는 선물이 사라지면 그만둘 가능성도 내제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칭찬으로 자신을 길들이려 하는 부모를 발견할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유 없이 하는 일'이 정말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이란 점에 대해 동의하신다면 아이에게 칭찬이란 배지를 달아주는 순간, 혹시 아이의 몸은 지속적인 보상을 바라는 화학물질을 분비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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