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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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문학 (幻想文學 fantastic literature)

초자연적 가공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사건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 
 

<화씨 451>을 읽고 검색한 정보다. 정확한 의미를 알아두고 싶었는데 결국 지금의 판타지나 SF의 할아버지말 인것 같다. '지금은 F. 카프카·E. 카네티·M. 쿤데라, 라틴아메리카 환상소설가 J.L. 보르헤스로부터 G. 마르케스 등의 작품에서 환상문학의 현대성을 볼 수 있다.'라고 설명한 걸 보니, 지금처럼 환상성을 기본으로 하는 예술장르의 선구적 작품들이 이에 속하나보다.
  

확실히 1950년에 <화씨451>의 초고 <방화수>가 씌여졌다는 건 선구적이고 예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2009년, 이 환상문학이 내 손으로 왔을 때는 이미 혁신성을 조금 잃은 뒤였다. 이미 많은 여타의 예술작품들이 그가 그린 세상을 리메이크 한 다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이 재생되는건 현대에 어떤 의미를 낳기 때문이리라. 그 의미를 찾는 일이 이 번 독서의 중요한 과제다. 

답은 사실 매우 쉽게 드러난다.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리는 작가의 대부분이 경고와 교훈을 염두하고 있을 것이다. 리얼리즘에 교훈을 담는 것보다 오히려 명확하고 자연스럽게 그 작업이 이루어진다. 리얼리즘이 설명하는 동안 판타스틱은 상상하면서, 재미와 교훈의 무게가 다른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 60년 전의 이 소설이 비교적 현대성을 갖는 이유다.
 

교훈이라는 건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어서 상상이 아무리 낡아도 우리는 같은 도덕성을 끌어올린다. 과연 레이 브래드버리가 상상한, 책을 불태우는 직업인'방화수'가 지금 어떻게 읽혀질까. 책을 불태우다니? 분서갱유도 아니고 이 뜬금없는 설정에 호기심이 발동해서 읽기 시작했었다. 현대와 혹은 펼쳐질 미래와 매치했을 때 비유나 상징으로 읽어도 무방할 것 같다.

이 책에서도 긴 설교를 통해 잃어가는 책의 의미와 사라지는 사유의 과정들을 직접적으로 통탄한다. 이미 우리는 지식보다 정보력이 앞섰던 걸 자주 경험한다. 깊은 생각의 골은 지루한 강의나 고전의 몫으로 밀어놓고 시간을 죽이기 위한 영상이나 가벼운 책들로 교양을 쌓는다. 진정성을 담은 책을 외면하는 일이 책을 태워없애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독자가 없으면 사라지는게 책의 운명이니까.
 

책 말고도 다양한 사회적 변화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한다. 주변의 자연과 사람, 사건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일이 도리어 반사회적인 장애가 되버리고, 정부의 표적이 되기까지하는 암울한 세상이 펼쳐진다. 결국 '인간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인물들은 세상과 싸우거나 사라져야한다.

"나는 열흘이면 아흐레 정도는 아이들을 학교에다 맡겨놓고 살아요. 그러니까 한달이면 사흘 정도는 아이들한테 부대낄 수밖에 없는데, 뭐 그렇게 견디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지요. 그저 거실에다 몰아넣곤 벽면 텔레비젼 스위치만 켜 주면 그만이니까. 세탁기 돌려서 빨래하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빨랫감들을 집어넣곤 뚜껑을 닫으면 그만이잖아요?"

저자가 상상한 '인간성'상실의 현장은 화들짝 놀랄만큼 우리 코 앞에 다가와있다. 이런 디스토피아적 환상이 60년 후 리얼리즘이 되었다면 차라리 그가 틀렸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사상 유래없이 책을 불태우는 '방화수'가 등장한 이 환상 소설이 더 이상은 아무것도 들어맞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당연히 저자의 의도와 일치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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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차려주는 자연밥상 -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먹을거리와 삶의 에세이. 내 몸이 건강해지는 다양한 채식 레시피
쯔루다 시즈카 지음, 손성애 옮김 / 여성신문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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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의 ~밥상 같은 책인 줄로만 알았다. 하나같이 간단한 요리법과 갖추기 쉬운 재료들로 친절하게 정리된 레시피.

나도 내 아이를 위해 이정도 쯤은! 하면서 쓱싹쓱싹 해낼 수 있는,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 보는 실용 도서 쯤으로 짐작하고 책을 훑는다.

그런데 요리사진보다 글씨가 많은게 수상쩍다. 
자연식 밥상의 재료와 레시피 전달이 주 목적도 아니고, 수필체의 글 속에서 저자가 엄마가 맞나 뒤져야할 정도다. 음식사진이 제목을 증명하고는 있다. 어느 풀숲을 뒤져 통나무 밑둥을 옮겨놓고 음식이 담긴 접시를 올린다. 하지만 요리의 색은 어둡고 근접 촬영방식도 아니어서 윤기도 없고 그저 빛깔 선선한 풍경사진 같다.

<엄마가 차려주는 자연밥상>은 제목에 비한다면 엉뚱한 구석이 많다. 결국 이 책의 정체를 깨알같이 작은 글씨의 부제에서 얻을 수 있다.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먹을 거리와 삶의 에세이. 내 몸이 건강해지는 다양한 채식 레시피.
일본인 저자는 이미 국내에 <베지테리안 세상을 들다>란 책으로 소개되었다. 나 역시 이 책의 인연으로 고르게 된 신간이다. 처녀적 비건 생활과 맞물려 이제는 엄마가 되었기에 아이의 먹을거리를 다룬 책에 솔깃하다. 기대를 무너뜨렸다고 할 수 있는 이 책이 결과적으로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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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요리와 재료들이라고 치부했던 음식들이 글과 함께 서서히 흡수되기 시작한 것이다. 수수한 글도 저자가 소개한 음식과 꼭 닮아 청아한 기운이 몸과 상상으로 퍼져간다. 일종의 귀농일지라고도 볼 수 있다. 사계를 통한 진정한 먹거리 이야기가 느릿하고 평온하게 이어진다. 오랜 채식생활인 답게 공격적으로 채식의 필요성을 전달하지도 않는다.(그런 목적도 아니었을 것이다) 시골생활의 일년의 패러다임을 통해 어떻게 자급자족하며 자연과 공존하고 이웃과도 함께할 수 있는지 보여줄 따름이다.

 

독창적 채식 음식들은 곳곳에 보석처럼 빛난다. 마치 그녀가 써내려간 글씨가 양배추 펜케잌이나 여름야채모듬튀김 같다. 가만보니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과 닮았다. 채식 레시피를 적은 것하며 요리에 대한 두려움이나 막힘이 없는 창조성이 자매처럼 비슷하다. 부부가 함께 시골에서 채식 생활을 하며 자연친화적 생활을 널리 알린다는 점도 일치한다. 아마 세상의 많은 베지테리언들에게 헬렌, 스콧 니어링 부부는 큰 역할 모델일 것이다.



일본식 요리와 재료들이라고 치부했던 음식들이 글과 함께 서서히 흡수되기 시작한 것이다. 수수한 글도 저자가 소개한 음식과 꼭 닮아 청아한 기운이 몸과 상상으로 퍼져간다. 일종의 귀농일지라고도 볼 수 있다. 사계를 통한 진정한 먹거리 이야기가 느릿하고 평온하게 이어진다. 오랜 채식생활인 답게 공격적으로 채식의 필요성을 전달하지도 않는다.(그런 목적도 아니었을 것이다) 시골생활의 일년의 패러다임을 통해 어떻게 자급자족하며 자연과 공존하고 이웃과도 함께할 수 있는지 보여줄 따름이다. 

 독창적 채식 음식들은 곳곳에 보석처럼 빛난다. 마치 그녀가 써내려간 글씨가 양배추 펜케잌이나 여름야채모듬튀김 같다. 가만보니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과 닮았다. 채식 레시피를 적은 것하며 요리에 대한 두려움이나 막힘이 없는 창조성이 자매처럼 비슷하다. 부부가 함께 시골에서 채식 생활을 하며 자연친화적 생활을 널리 알린다는 점도 일치한다. 아마 세상의 많은 베지테리언들에게 헬렌, 스콧 니어링 부부는 큰 역할 모델일 것이다.

감자전과 두유 소스,가지모듬 오일 구이, 꼬투리 콩 두부 샐러드, 메밀국수 샐러드, 가지버거, 호박 필로그, 고구마 밥, 당근과 밥으로 만든 크림 고로케, 브로컬리 마늘 소스 버무림, 두부 스테이크

이 책에 소개된 채식 요리 중 한 번 쯤 해먹고 싶은 것들만 골라봤다. 저자도 고기 요리법을 많이 응용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고기 요리에서 고기만 빼고 요리하는 법이 아니다. 다채로운 채식 맛내기의 비법으로 심심한 풀밭 밥상의 예상은 빗나간다. 채식에 대한 가벼운 정보들도 심심치않게 얻을 수 있었다. 예를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야자와 겐지가 채식주의자라는 것, 영국이 최대의 채식국가 라는 점, 재료들이 가진 세세한 영양정보 등,이 밥상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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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전과 두유 소스,가지모듬 오일 구이, 꼬투리 콩 두부 샐러드, 메밀국수 샐러드, 가지버거, 호박 필로그, 고구마 밥, 당근과 밥으로 만든 크림 고로케, 브로컬리 마늘 소스 버무림, 두부 스테이크

 

이 책에 소개된 채식 요리 중 한 번 쯤 해먹고 싶은 것들만 골라봤다. 저자도 고기 요리법을 많이 응용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고기 요리에서 고기만 빼고 요리하는 법이 아니다. 다채로운 채식 맛내기의 비법으로 심심한 풀밭 밥상의 예상은 빗나간다. 채식에 대한 가벼운 정보들도 심심치않게 얻을 수 있었다. 예를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야자와 겐지가 채식주의자라는 것, 영국이 최대의 채식국가 라는 점, 재료들이 가진 세세한 영양정보 등,이 밥상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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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wers delivery 2010-09-25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건강에 도움이 되는 좋은 책이겟어여
 
여름
이디스 워턴 지음, 김욱동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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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하면 떠오르는 소설은? 교과서에서 만났던 황순원의 소나기,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

어쩐지 내겐 사랑을 주제로한 소설의 목록이 빈약하다. 나름대로 다 컸다고 자부한 다음에는 가슴 말고 머리를 채우는 일에 몰두해왔다.
하루빨리 똑똑해지고 싶었나보다. 결국 적당히, 두루 아는 바보가 되버렸지만.
특히나 사랑이 중심에 선 소설은 시간이나 죽이자고 달려들지 않는 한 곁도 내주지 않았던 걸 요새와서 알게 되었다. 

20대에는 책밖의 사랑이 더 오묘했던 까닭도 있겠다. 이젠 어엿한 아줌마가 되어 사랑말고 가족애로 살고 있다보니 때늦은 연애 소설 한편 읽고 주책맞게 마음이 동하였다. 제목도 신선한<여름>. 여름의 열기와 나무그늘의 서늘함을 모두 간직한 첫사랑 이야기다. 

난 여전히 '비누냄새'를 첫사랑의 모태로 간직하고 있다. 강신재의<젊은 느티나무>에서 짝사랑하던 이복 오빠(정확한 설정이 기억나질 않는다)에게서 맡았던 비누냄새. 어렴풋이 첫사랑은 그 은은하고 촉촉한 '비누냄새'같을 거라고 상상해왔다. 가까이 다가가 맡을 수는 없지만 그의 향기를 느끼는 것! 첫사랑의 설레임은 후각을 동반하고 찾아왔다.

저자 이디스 워턴은 <순순의 시대>로 여성최초 퓰리처상까지 수상한 미국의 거장이다. 물론 <여름>으로 알게된 사실이다.
한 세기 전 첫사랑 이야기가 놀라웠던 점은 단연 감정묘사의 치밀함이었다. 묘한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의 감정을 단 한 올도 빼놓 않으려는 듯 다가선다. 이제는 무뎌져 떫고 아린 느낌만 남은 첫사랑이 번개처럼 다시 가슴을 쳤다. 사랑을 하고있을 때라면 공감하면서 읽겠지만 이렇게 사랑을 잃은 다음에도 효용성이 있으니 소설의 가치는 이어지는가 보다. 

'묘사의 힘'은 오감을 자극한다. 한 여름의 풀밭을 사랑하는 주인공 체리티는 그곳에 엎어져 영혼의 깊은 자리에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어떤 소녀가 그렇지 않을까. "지긋지긋해."를 입에 달고 사는 소녀의 숨겨진 방 문만 두드려 준다면! <여름>에 나타난 자연에 대한 묘사는 깔때기같은 밤하늘 이라느니, 꽃의 수액이 끓어 오른다느니, 꽃받침이 폭팔하듯 솟아올라 향기가 실려온다든지.하면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대자연 역시 사랑을 통해 태어나고, 사랑에 빠진 이라면 뭘 보든 사랑의 안경알을 통과할 것이며 작가 역시 자연의 묘사로 사랑(성적인 부분을 포함해)을 비유하려고 한 점이 눈에 띈다. 

 이런 우회적 접근과 더불어 직접적인 성애의 표현이 당시에는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 지금은 콧방귀 낄만한 이야기다. 아쉽게도 진한 구석이라곤 모두 상상력에 맡겨야할 판이었다. 그런 의도로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문학작품을 볼리도 없겠지만 내겐 그 물레방아도는 화면의 뒷편이 더욱 애뜻하게 느껴졌다. 세상이 앞으로만 나아가도 우린 어렸을 때 먹던 음식을 찾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몇 구절을 인용해 보려고 접었던 페이지를 다시 열었지만 소설의 흐름을 끊을 수가 없었다. 평론을 하겠다고 마음먹지 않고서야 <여름>의 몇 부분을 들어올리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도에 모래가 휩쓸리듯 문장이 소설이란 바다 속으로 조금씩 침전하는 열정적인 글쓰기가 독자에게 전해졌다. 

 <여름>이 삼각관계를 지켜보는 고전적인 재미를 우선으로 하지만 주인공 채리티의 '변화'을 느끼는 '성장소설'로 받아들이는 기쁨도 놓칠 수없다. 사랑을 통해 소녀가 '여성'이 되어가는 과정은 여류작가가 아니라면 이토록 치밀하게 다룰 수 없었을 것이다. 치밀함은 결국 깊은 공감을 유도하니 사랑의 설레임과 만족감과 굴욕감을 아낌없이 느낄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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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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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우는 스스로 가난한 자들의 친구이고, 내면으로 여행할 줄 아는 자들의 길손이다. 하지만 쓸모 없는 것을 모아두려고 돈버는데 정력을 쏟는 자의 적이고, 쉽게 고통을 잊고 신념을 잃고 사는 자에겐 매운 회초리다. 이 독특한 한 권의 책은 마치 수십 년을 이어 온 호밀빵의 발효종처럼 지금 이 땅, 이 시대에도 그 풍미를 잃지 않는다. 잘먹고 잘 살 자는 요즘 들어 그 맛은 더욱 품위 있다.

 

1845년 미국의 한 남자가 월든 호숫가에 홀로 집을 짓고 2년을 보낸다. 그가 구도자의 길을 걸었다가 하산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사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생활(生活)이다.  밥해먹고 불 때고 사람 만나고 생각하고, 먹고 자기 위해 노동했던 기록 말이다. 


숲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인생의 본질과 만나고 그것이 가르치는 바를 온전히 듣기 위해서는 주변의 목소리가 아닌 단련된 신념의 목소리를 따랐다고 말이다. 이 책은 그가 보여준 행동에 대한 지당함일 뿐이다. 따분한  설교와 홀아비의 고지식한 발상을 상상한다면 이 책의 무궁무진한 재미를 어서 풀고 싶은 마음이 급해진다.

은근하게 드러나는 소로우라는 인물에겐 친구 삼을 만한 유머와 솔직함이 넘친다. 곳곳에 자신의 약점을 밝히고도 모자라 독자들도 자신과 같거나 나을 것이 없을 거라고 장담하고, 묵직한 주제에 대해 절제하기 보단 수다스럽게 자신의 말을 이어간다. 그 친근함에 고집스런 주장에도 격이 없어진다.

 

무엇보다 ‘월든’은 약에 딸린 처방전처럼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안내서의 일종이다. 그가 숲에 들어간 것은 귀농의 한 형태로서, 도시가 안겨 주는 짐을 벗고 자신과 가족을 지키고 싶어 시골로 가려는 이들에게 정신적 실재적 바탕을 제공한다. 통나무집 한 채를 짓는데 드는 비용을 공개하고, 자신이 먹는 빵을 소개한다. 빵이라면 의당 들어가는 효모도 필요 없음을 중요한 소스로 제공하고, 가꾼 곡식을 돈에 넘기고 상점의 밀가루를 사다먹는 농부들의 폐해까지 지적하며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몸소 내보인다.

그의 환경 친화적 농법은 원시적이고 창의적이다. 그래서 흙의 힘을 이해하는 농부임은 물론이고 흙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연구하는 발명가처럼 느껴진다. 이 자연에 대한 애정 곧, 삶에 대한 이해는 혹여 미천해 보이는 노동을 가장 고귀하고 풍성하게 비춘다.

 

그에게 요리란 맛을 내어 만드는 어떤 것이 아닌 맛있게 먹는 어떤 것이어서 준비할 것은 적당한 노동에 바친 고픈 배 일 뿐이다. 그의 ‘채식’이란 선택은 당연한 수순처럼 보인다.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는 동시에 상상력에도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면서 꼭 동물을 잡아 도살해본 사람이 아닐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행복을 거슬러 가는 짓인지를 이야기한다. 자본주의가 낳은 무서운 산물은 바로 전쟁과 기아와 배부름의 병이다. 수입의 1할을 자선에 바치느니 9할을 바쳐 자선사업을 끝내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통쾌하고 과감한 대안을 내놓기도 한다. 



소로우는 반복되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움을 발견하는 깨이고 열린 눈의 소유자였다. 그에게 외로움은 허공에 띄워진 허상일 뿐 오히려 고독이 그를 부단히 깨어있게 한다. 그의시적 통찰력은 평화주의자의 강한 에너지가 깃들어 있다.

 

그가 책으로 보여준 영향력의 근본에는 동양의 철학이 굳게 자리한다. 공자의 논어를 반복해서 인용하고 인도 철학에 흠뻑 빠진 모습엔 때뭍지 않은 진지함이 있다. '근본에 대한 그리움으로 내부를 탐험하고 내부의 법칙을 따르라'고 다른 이에게도 종용한다. 논리보단 직관을 우호하고 타인과의 경쟁보다는 명상을 사랑하는 삶의 방식을 만들어 냈다. 사회 속에서 그의 투쟁은 싸움이 아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꺾지 못할 신념이기 때문이다.



가장 낮고 소박한 시선으로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을 풀어놓고 그것이 독자의 마음에 가 닿기를 원하는 모습엔 어떤 점잔도 과시욕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가 우리를 버리고 방해받고 ‘어쩔 도리 없다’라고 말하고 싶어하지만 그는 단호하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한 목표는 무엇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을 뿐더러 더 높은 것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돈이나 능력으로 자신을 높이려는 현대인의 당연한 과제에 한 번쯤 회의를 느낀다면  그 땐, ‘자기 자신의 천재성에 충실히 따르는 사람은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는다’는 등불 같은 그의 말을 들어보자. 그가 말한 세계인(世界人)으로 변모할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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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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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을 떠올리면 배가 고프다.

술자리의 사명을 다하고 새벽 미명아래 자취방으로 기어들면 오후의 기울어진 햇빛에 겨우 눈을 떠 종종 마른 라면을 부셔먹는 일은 낯익은 대학시절 풍경이다. 청춘에게 내일이란 끝없는 오늘의 연장이었다. 그곳은 세월이 흐르는 흔적도, 주름살만큼 깊게 패일 고민도 없는 무봉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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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의 <스무 살, 도쿄>(이하 도쿄)는 그저 따분한 동네 나고야를 뜨기 위해서 도쿄로 올라온 재수생 히사오의 청춘 이야기다.  

여섯 개의 독립된 이야기는 히사오의 12년을 이어주는 점선이다. 그 여섯 날은 히사오의 청춘을 대표할 만한 특이한? 사건이 일어난 날이자 존레논이 죽은 날이기도 하고, 서울과의 경합에서 일본의 나고야가 올림픽에서 밀린 날이기도 하며, 베른린 장벽이 붕괴된 날이기도, 일본 유명 가수의 은퇴 공연일이기도 하다. 

성장소설에서 빠질 수없는 연애담은 “달콤한 기분이 되는”정도로 남겨진다. 하지만 풋풋하기 보단 당황스러울 만큼 리얼하다. <도쿄>의 미덕은 이런 담백한 리얼리티에 있다.

마음의 허기만큼이나 진짜 배를 곯게 되기도 하는게 청춘이라지만 <도쿄>는 ‘늘 식사 때를 놓쳐 배고픈 청춘’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식어빠진 돈까스 곱배기나 햄버거 두 개로 왕성한 식욕을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 청춘 이라니! 함께 탄식하게 만들면서.  

그러면서도 음악과 패션에서만큼은 자존심을 지켜내는 센스까지. 예술이 밥 먹여 주지 않아도 좋았던 시절은 역시 그 때 뿐이다.   

59년생 작가의 히사오와 유사한 다른 이력들을 비교해보지 않아도 <도쿄>가 자전적인 소설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소소한 일상을 촘촘하고 애정어리게 꾸며낸 솜씨며 간간히 등장해 헛웃음을 주는 장난기어린 혼잣말에서 오쿠다 히데오를 아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

도쿄의 에너지는 수많은 사람의 에너지라고 히사오가 말한 것처럼 청춘의 에너지도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두근거리는 첫사랑, 못난 친구, 인생의 쓴맛을 보여주는 직장상사, 맞선자리의 엉뚱녀, 세상사에 닳아빠진 고독한 졸부, 이 모두가 지금의 히사오를 만들었다. 

<도쿄>에서의 배고픔은 곧 삶, 젊음을 의미한다. 굶주렸던 어떤 날이 다른 날들을 꽉꽉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청춘은 그렇게 가득 찬, 그리고 자주 비워지는 왕성한 소화력의 뱃속 같은 것일까. 무슨 일이 닥치든 꿀꺽꿀꺽 삼켰던 한때가 모두 운명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내 청춘이 역사와 만나고 심지어 충돌하기도 했었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히사오의 이야기는 지금도 이어진다. 유명한 소설가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도쿄>는 소설 밖에서 해피엔딩인 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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