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3반
오토다케 히로타다 지음, 전경빈 옮김 / 창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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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하이타니 겐지로가 오버랩됐다.  너무나 이상적인 교사로 내 머리에 콱 박혀버려서, 간절히 그런 교사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 교육은 한참 왜곡되어 교육의 본질을 잃은지 오래다. 오로지 공부로만 몰아가며 그 외에 다른 길은 터 주고 있지도 않고, 공부가 최고라 여기고 있다. 정말 그럴까? 공부만 교육이라는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의 교육은 지금보다 더 엇나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희망이란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하이타니 겐지로의 책에서나 오체불만족에서 나는 희망을 보았다. 그런 기대치를 가졌기에 무척이나 설레게 한 책이다. 그리고 실망시키지 않았다. 읽는 내내 뿌듯함에 기분이 기분이 좋았다.
제목의 '괜찮다'는 말,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말이지만 힘든 이에게 분명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오체 불만족>을 읽은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스테디셀러로 각광받고 있는 책이다. 표지의 띠지만 봐도 그의 장애 정도가 드러난다. 팔도 다리도 온전치 않아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도 웃는 얼굴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졌다는 것을 책을 읽지 않아도 쉽게 짐작 가능하다.
이제 그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친다. 젤 먼저 드는 생각이 어떻게 그 몸으로 가능할까? 우리나라에서는 절대로 불가능 할텐데....일본은 우리와 교육 시스템도 비슷하고 환경도 비슷한데 이런 점은 굉장히 다르구나, 하는 부러움이 밀려왔다.

표면에 드러난 내용은 아카오 선생님의 장애가 눈에 띄겠지만 학부모의 입장에서 아카오의 장애는 전혀 의식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이유가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님과 겹쳐서 일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오로지 아이들을 위한 것인가, 아닌가만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기준에 아카오는 선생이란 자리에 앉기엔 맞지 않다. 특히나 학교는 일반적인 것을 중시하는 곳이란 걸 우리는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하기도 무척이나 힘들고 더딘 집단이 바로 학교이기도 하다.
이렇게 세상의 판단에 묶이면 중증 장애가 아니라도 뭐든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신념이란 것 조차도 믿을 수 없는 것이되고 흔들릴 밖에. 그러나 아카오는 워낙에 굳은 신념을 가졌기에 그를 믿었다.

아야노가 친구들의 실내화를 감추는 사건을 통해 그 아이 내면에 잠재된 트라우마를 읽은 아카오는 어떻게 해서든 그 상처를 치유해 주려고 한다. 도덕 시간에 '일반적인 것'이 뭔가에 대한 생각을 끄집어내어 아이들과 토론식 수업을 한다. 사실 일반적이다 일반적이지 않다의 기준은 모호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모두가', '대부분의 경우에'란 말로 두루뭉술한 사고에 익숙하고 거기에 갖혀있기도 하고. 그런데 일반적인 것이 좋은 것인가, 아니면 일반적이지 않은 것은 좋지 않은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남과 다르면 일반적이지 않은 것이고 그것이 옳지 않거나 바보 취급을 당하거나 이상한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다운증후군을 앓는 언니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에 충격과 상처를 받은 아야노가 언니를 일반적이지 않다고 깨닫게 된다. 그것으로 괴로워 했던 아야노.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관계가 달라질 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미처 그것까지 헤아리기엔 어렸고 그런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부모조차 도와주지 못했다. 아니 그걸 미처 읽어내지 못했을런지도 모르고 애써 외면 했는지도 모른다.
그걸 아카오 선생님은 놓치지 않고 캐치해 낸다.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아니고서야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대했던 게 바로 이런 거 였다.

1등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 과정이 중요하다고들 하지. 그러나 아이들, 아니 나 조차 가끔은 간과했을지도 모르고 애써 모른 척 했을지도 모르는 부분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있다. 이 부분은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냥 마음을 먹지 않았을 뿐이야. 마음만 먹으면 언젠가 뭐든 할 거야.'하고 생각하면서 꿈이나마 계속 꿀 수 있는 것으로 위안을 가지지는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묻길 바란다. '나는 여기까지밖에 안 되나 봐'하면서 스스로의 한계를 짓지는 않았는지. 안될 것 같으니까 미리 포기한 건 아니고?
그리고 그런 말들이 아이들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기 위해 도전조차 할 수 없게 했던 것은 아닌가.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 외에도 더더더! 많지만 어른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는 가르치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때론 어른들과 단절의 벽을 쌓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가르치려드니 교육적이어야 하고 훈계조가 되기 쉽상이니까. 다시 처음으로 가면, 아카오 선생님의 인사말을 못마땅했던 아오야기 선생님이 참 불쾌했더랬다. 교사인 우리가 어째서 아이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냐고 했다. 이런 교만은 부모인 내가 우리 애들한테도 있었지 않았을까. 몇 번쯤이나 있었을까....수 없지 많았겠지.

지나치게 감동적이지도 않고 비현실적이게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분명 우리에게도 희망은 있겠지. 아카오 선생님이나 곤노 선생님, 교장 선생님 같은 진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은 분들을 만날 희망.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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