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왜 발발했으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양장)
미셸 아글리에타 지음, 서익진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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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을 이제야 읽으니 할 말이 없다. 어렵지도 그렇다고 두껍지도 않은 책을 해가 바뀌도록 쌓아만 놓았으니 말이다.

저자 아글리에타는 조절학파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조절학파는 모르더라도 경제 관심이 있다면 포디즘, 포스트포디즘이란 말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용어들이 조절학파에서 만든 개념들이다.

조절학파는 맑시즘 계열이지만 강단에 유배된 네오맑시스트들과 달리 비판을 위한 비판만 할 뿐인 공리공론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 경제운영에도 참여하는 사람답게 아글리에타의 글을 보면 현실과 거리를 두지 않는다. 이책 이전에 나온 ‘세계 자본주의의 무질서’를 읽어보면 저자의 현실성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를 다루는 이책 역시 저자의 현실성을 잘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이책의 내용은 왜 이번 위기가 일어났으며 그 경과는 어떠하고 앞으로 대책은 무엇이며 세계경제의 장기적 트렌드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이다.

이런 내용을 다룬 책이 위기 이후 몇 년간 쏟아졌고 아글리에타 만큼의 중량급 학자들의 책들도 많이 나와 잇다. 그러면 그 많은 책들 중에서 이책을 읽을 이유가 있는가? 더군다나 이책은 2008년에 쓰여졌다. 한참 위기가 정점을 지나는 시점에서 쓰여졌다는 말이다. 위기가 상당히 경과한 작년 시점에서 나온 중량급 저자들, 예를 들어 스티글리츠, 루비니 등의 책도 있는데 말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책을 사다 놓고 손이 안 갔었다. 사실 이책을 보면 그 후에 나온 중량급 저자들의 책들과 내용에서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책은 위기의 원인, 경과에 초점이 잇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정책대안에 더 관심이 있고 그 정책대안은 다른 중량급 저자들과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나름의 충분한 의미가 있다. 우선 조절학파의 매력인 논리적 정합성 위에 구축된 거시적 논리가 이책에도 충분히 살아있다. 둘째 이책은 이번 위기의 원인인 글로벌 불균형을 다룬 ‘세계 자본주의의 무질서’의 부록으로서 의미가 잇다. ‘세계 자본주의의 무질서’는 이번 위기 직전에 출판된 책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왜 이번 위기가 일어났는지를 다른 어떤 책들보다 더 매력적으로 설명한다. 조절학파 특유의 웅장한 논리구조 때문이다.

이 책의 논리는 전작에서 글로벌 불균형을 설명한 논리 위에서 왜 이번 위기가 일어났는가를 확인하는 부록의 성격이 강하다.

전작에서 저자가 글로벌 불균형을 설명하는 변수는 신흥경제의 디플레이션 압력과 주주가치 논리이다. 저자는 이책에서도 두 변수를 이용해 이번 위기를 설명한다. 우선 저자는 미시적 원인을 설명한다.

저자는 자본주의에서 금융위기는 내생적일 수 밖에 없고 그렇기에 위기를 예방한다는 것은 것은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번 위기는 별종일 수 밖에 없다고 저자는 본다. 그 규모가 너무 거대하기 때문이다. “현 위기의 강도가 예외적일 정도로 높은 까닭은 제공된 신용량이 과거 어느 때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신용팽창을 보통 탐욕이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 인센티브와 같은 논리로 접근한다. 그러나 저자는 다른 학자들과 달리 제도적으로 접근한다. 미시적으로 신용이 팽창한 이유는 지금까지 지적된 것처럼 우선 CDS와 시가평가, VaR 때문이엇다는 데서 저자는 시작한다.

시가평가에 대해선 많은 언급이 잇어왔으니 CDS로 넘어가자. 투자은행들은 CDS로 리스크를 제3자에게 떠 넘길 수 있었기 때문에 리스크에 대한 준비금을 쌓을 필요가 없었고 “리스크를 매도한 은행은 족쇄가 풀린 자본을 갖게 되고 그만큼 신용 레버리지를 증가시킬 수 잇다. 은행들 전체가 리스크를 다른 금융기관들로 이전시킨다면 이젠 은행 시스템 전체에서 신용 레버리지가 증대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대출 리스크 평가법이 신용팽창을 한 단계 더 부풀렷다고 말한다. “이제 은행은 신용 리스크 모델을 비롯한 통계적 방법을 사용하여 대출 여부를 결정한다. 이 모델은 다음과 같은 VaR(Value-at-Risk)의 원리에 입각해 잇다.” “그리고 은행은 시가 기준(mark to market)에 입각해 보유 자산의 가치를 항상 (재)평가하며 자신의 대차대조표에 등재된 자산들의 가치는 금융 사이클이 상승 국면에 있는 한 계속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손실 발생의 리스크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런 조건들이 있었다고 해서 반드시 신용팽창이 일어나야만 했던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신용팽창의 근원은 주주가치였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투자은행이 자산 구입을 목적으로 하는 투자자들에 대한 대출을 늘리면 늘릴수록 투자은행의 대차대조표 대변에 나타나는 자본 비율은 더 낮아진다.” 다시 말해 레버리지가 높아진다. 레버리지가 높아지면 기업으로서 은행의 재무구조는 취약해진다. 그러나 “자본의 경제적 수익성을 훨씬 상회하는 자기자본 수익률을 제공하라는 주주들의 지상명령은 차입 레버리지의 활용없이는 제대로 수행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투자은행의 주주들이 자본 수익률의 무한상승을 바라기 때문에 투자은행은 그만큼 더 차입을 늘리게 된다. 그런데 은행이 자본을 굴리면 굴릴수록 공여된 신용의 보장에 필요한 자본은 줄어드는 반면 자기자본 이익률은 더 상승한다.” 그러면 주가도 상승한다. “이처럼 자산 가격이 팽창하는 시기에 은행으로서는 대출을 늘려야 할, 따라서 차입을 늘려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잇는 셈이다.”

저자는 세계경제의 거시적 조건이 그러한 차입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조건이 만들어진 것은 아시아 위기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시아 위기를 “겪었던 나라들의 성장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경제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대외채무를 가능한 한 빨리 상환하기 위해 이 나라들은 중대한 구조적 조치들을 채택했고 그 결과 세계경제의 판도가 바뀌었다. 이 나라들은 내수 주도 성장모델에서 수출 주도 성장모델로 이행했고 그럼으로써 달러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변신했다. 왜냐하면 대외측자를 누리게 된 이 나라들은 국내 저축이 국내 투자를 훨씬 상회함으로써 당연히 자본 수출국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가 초래한 영향을 막대했다. 게다가 그와 동시에 중국과 인도의 대외무역이 급속하게 개방되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세계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디플레이션 압력이 강해졌고 인플레이션 우려가 사라지면서 금리가 떨어졌다.

이때 아시아 위기의 충격으로 미국의 닷컴버블이 터진다. “미국경제는 디플레이션이란 위험천만한 경사지로 미끄러져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린스펀은 애당초 구상했던 단기적 경기부양 정책을 계속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금리가 낮아지면서 우리가 알듯이 가계의 막대한 차입이 가능했다. “이것은 막대한 채무가 기업부문에서 가계부문으로 이전되었음을 의미한다.”

“아시아 나라들이 채택했던 성장체제는 환율 통제 능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달러 시스템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금을 미국에서 운용하는 것이 안전한 것으로 간주되엇다. 왜냐하면 미국의 금융은 대대적인 확장 국면에 있었고 또 미국의 투자은행들이 가장 수익성 높은 신용 모델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풍부한 유동성이 미국의 채권시장으로 계속 밀려들었고 이로 인해 리스크 프리미엄이 비합리적인 수준까지 폭락했다. 금융부문은 이를 활용하여 자산의 가치증식에 더욱 몰두햇다. 바로 이 새로운 현상이 미시경제적 차원에서 금융공학의 발전과 결합됨으로써 신용 증가가 과거 어느 금융 사이클에서보다 훨신 더 강력하게 또 훨씬 더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자가 이번 위기의 발생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논리는 위와 같이 요약된다. 저자는 그렇게 일어난 위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실제 정책적 차원에서 위기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며 단기적 대책, 장기적 대책 등을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최근의 스티글리츠의 책 두권을 보는 것을 더 추천한다.

저자가 앞으로 세계경제의 장기적 전망을 어떻게 보는가를 소개하면서 끝내려 한다. 저자는 이번 위기 해소의 열쇠는 아시아가 쥐고 있다고 본다. “자산 가격이 바닥을 칠 때 드래서 장차 자산가치가 상승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게 될 때 (아시아의) 국부펀드나 연기금 같은 장기 투자자들은 즉각 서구 경제의 자산에 막대한 투자를 재개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위기의 탈출이 시작된다고 저자는 본다. “위기의 출구는 결국 신흥국들이 국부펀드를 매개로 서구 세계에 직접투자 및 증권투자의 형태로 막대한 자금을 유입시키는 것에 의해 주어질 것이고 그 결과 지구상의 경제적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해갈 것으로 전망하는데는 합당한 근거가 있다. 아떤 경우든 현행의 세계 위기가 불러일으킬 반향은 양차대전 중간기으 위기와는 전혀 다를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구체적 그 다른 점을 세계화의 지속이라 말한다. “1929년의 위기는 세계경제의 완벽한 파열, 국제관계의 붕괴 및 각국의 민족주의로의 복귀로 귀착되었다. 이와는 달리 2008년의 위기로 두 번째ㅑ 세계화 과정이 종식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이 세계화 과정은 다른 형태로 지속될 것이다. 금융 흐름들이 역전되고 서구 나라들은 불황을 겪게 되겠지만 아시아 나라들과 몇몇 신흥국들에서는 경제 활동의 다소간의 둔화에도 불구하고 성장이 계속될 것이다./ 이에 따라 경제와 금융의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한느 경향이 나타날 것이다. 1929년 대공황의 사태 전개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세계화는 지속되리라는 것, 더구나 이러한 세계화의 지속이 지구상의 거의 모든 지도자들의 공동 의지를 반영하고 잇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가 그리 밝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 미래는 여전히 세계화로 하나가 되어가는 지구이겠지만 그 미래는 지금과는 다른 세계일 것이라 저자는 본다. 저자는 전작에서 세계경제가 디플레이션의 시대로 들어섰다고 진단한대로 “이제 아주 강력한 경제적 둔화 내지 후퇴의 시기로 진입했고 뒤이어 일련의 미약한 성장이 지속되는 시기가 올 것으로 단언 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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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인간의 영혼을 소유하다
피터 L. 번스타인 지음, 김승욱 옮김 / 작가정신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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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잉카인은 금과 은에 사로잡힌 유럽인의 지칠 줄 모르는 탐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안데스 산맥을 뒤덮은 눈이 온통 금으로 변한다 해도 이들은 만족을 모를 것이다.’ 잉카인들은 피사로와 그 일행에게 은이란 단순히 광택 나는 장식용 귀금속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는 사실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니얼 퍼거슨)

잉카인들이 망나니 스페인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돈 없이 살아왔기 때문이다. 돈이 무엇인지 모르던 그들은 금과 은이 화폐가 되고 가치를 저장하는 수단이 되며 원하는 무엇이든 가져다 주는 힘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역사상 최초의 골드러시는 스페인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스페인은 인디언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결코 지속적인 보상을 거두지 못했다. 금은 한쪽으로 들어와서 다른 한쪽으로 신속하게 빠져나갔다.

금이 대량으로 들어오기는 햇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생산보다는 소비에 더 능햇다. 쏟아져 들어온 금과 은은 사람들의 소비심리를 자극함과 동시에 생산의욕을 떨어트렸다. 스페인은 도박판에서 커다란 횡재를 하고 난 다음 자신에게 그런 행운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늘 따를 거라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16세기 말 스페인 의회는 ‘금이 더 많이 들어올수록 왕국이 보유하고 잇는 금이 더 적어진다. 우리 왕국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다. 왕국이 (금과 은이) 적들의 왕국으로 가는 데 다리 역할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발표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잉카인들이 모르는 돈의 위력을 알았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들은 진정한 부란 금과 은이 아니라 금과 은을 얻는 능력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페인의 피에 젖은 골드러시는 화폐공급량을 늘렸을 뿐이다. “화폐 공급량 증가는 화폐 발행을 독점하는 정부를 부유하게 해 줄지 몰라도 사회를 부유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통화 팽창은 단지 가격만 높일 뿐이다.” (퍼거슨)

화폐란 그리고 화폐로 통용되던 금과 은이란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받고 무엇을 내줄 때 의미가 있다. 서구인들이 오랫동안 화폐를 금속과 동일시했던 것은 역사적 우연일 뿐이다. 화폐는 금속이 아니다. 화폐는 신뢰를 새겨놓은 대상이다.” (퍼거슨)

금과 은은 언제나 희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금과 은의 희귀성은 부의 상징이 되었고 부의 저장수단이 되었으며 지불수단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귀금속이 화폐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저자는 아시아의 사례를 들면서 금화와 은화의 역사적 우연을 설명한다.

“재산의 저장은 보험에 가입하는 것과 비슷하다. 보험처럼 금을 저장하는 데도 비용이 든다. 이 쓸모없는 금속이 아무 것도 벌어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 하는 재난에 대비해서 일종의 대비책을 마련해놓았다는 생각을 하면 좀더 편안하게 잘 수 있다.”

귀금속을 교환수단으로 더 주목했던 유럽과 달리 아시아에선 가치저장수단 또는 보험의 기능에 더 주목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금과 은은 아시아에서 과시의 수단이자 폭동과 전쟁에 대비한 보험으로서 무한한 시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시아인의 이런 특성 때문에 금과 은은 “계속 동쪽으로만 흘러가고 향료와 비단 같은 유용한 소비재는 계속 서쪽으로만 흘러가던 이상한 평형상태”가 수천년동안 계속되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경제사가인 얼 해밀턴은 ‘동양은 로마시대부터 유럽의 보물의 무덤이엇다’거 지적햇다. 오늘날에도 인도는 세계 최대의 금 구매자이며 인도에서 금은 ㅜ아직도 이동이 용이한 재산으로서 가장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인도인들은 자동차, 바퀴가 두개 달린 교통수단, 냉장고 등을 사는데 쓰는 돈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금을 사들이는데 쓴다.”

저자는 아시아인들은 서구인들과 달리 금을 돈으로 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시아의 통치자들은 “금의 아름다움과 금이 상징하는 권력을 즐겼다는 점에서는 서구인들과 같았으나 더럽고 비천한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옮겨지는 화폐로 쓰기에는 금이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대중 사이에서 유통되도록 금을 방출하면 국가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본 것이다. 그 결과 중국에서 만들어진 대부분의 화폐 재료는 거의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금을 주화로 만들어 “금을 민주화시켰다”고 저자는 말한다.

금의 민주화는 정치의 민주화와 마찬가지 논리에서 발전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금과 은 같은 귀금속이 화폐가 된 이유는 후버 대통령의 말대로 “우리가 (돈을 찍는) 정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만들어낼 수 없는 귀금속을 화폐로 한다면 귀금속의 신용이 정부의 신용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케인즈는 금본위제의 부활에 반대하면서 귀금속이 화폐로 쓰이는 것을 “금융과 신용의 진화과정에서 초보적이고 과도기적인 단계의 유물에 불과하다.”고 말햇다.

그러면 왜 은 대신 금이 화폐로서 지배적이 된 것일까? 금본위제로 압축된 것 역시 역사적인 우연이었다.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화폐제도는 금과 은을 모두 사용하는 복본위제였다. 그러나 복본위제의 문제는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금과 은의 교환비는 나라에 따라 다르고 정부의 공시비율과 시장의 비율이 다르게 마련이다.

다른 비율은 차익거래의 기회를 만들어 싼 곳에서 비싼 곳으로 금이나 은을 흐르게 만든다. 그런 일이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났다. 뉴튼이 조폐국장을 하던 시절 뉴튼이 계산한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우연하게 은값을 싸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금을 조폐국에 팔아 은을 사서 해외로 수출했고 은화가 영국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당시 금의 공급이 충분했고 경제규모가 금을 교환수단으로 해도 충분할 정도로 커졌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고 영국은 복본위제에서 사실상 금본위제로 옮겨갔다. 참고로 19세기 초 미국에선 반대 현상이 일어나 미국은 사실상의 은본위제였다.

그리고 19세기 영국에서 금본위제는 은행제도와 결합하여 새로운 도약을 이룬다. “영국의 화폐ㅔ제도는 영국의 정치제도와 마찬가지로 시행착오를 통해 발전해왔다. 영국에서는 공적인 화폐와 개인화폐가 함께 유통되면서 서로를 강화했다. 정부의 돈은 주화였으며 그중 대부분이 기니 금화였다. 그러나 1979년의 위기가 일어나기 100여 년 전부터 개인적으로 발행된 지폐가 대규모 거래에서 주화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18세기 내내 은행이 빠른 속도로 성장했으며 은행이 대출금을 약속어음의 형태로 지불하는 것이 관례엿다는 점이다. 이 은행권은 기업들 사이에서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돈처럼 유통되었다. 이처럼 계획 없이 성립된 구조의 결과는 엄청난 것이엇다. 많은 은행권이 정부가 발행한 주화를 대신하게 되자 돈의 공급량은 이제 은행의 신용대출금의 양과 직접 연결되었다.”

그러나 민간이 발행하는 지폐는 정부가 발행한 금화와 언제든 교환된다는 전제가 있기에 유통될 수 있었고 신용을 얻을 수 있었다. “다양한 형태의 개인지폐-환어음, 금세공인의 영수증, 영국 전역의 은행들이 발행한 은행권-는 언제나 (사실상의 중앙은행이 되어버린) 잉글랜드 은행의 은행권과 교환될 수 있었으며 잉글랜드 은행의 은행권은 언제나 금, 즉 정화로 교환될 수 있었다.”

굳이 이 은행권을 금화로 바꾸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은행권과 금의 가치가 바뀔 때는 사정이 달라졌다. “경제가 호황을 누리고 금의 시장가격이 상승하거나 외환시장에서 파운드화의 가치가 떨어질 때면 기니 금화 200개는 시티의 시장에서 210 파운드 이상의 가치를 지닐 수 있었으며 해외의 금융시장에서도 201파운드 이상에 상당하는 가치를 가질 수 있었다ㅓ. 이럴 때는 금융시장에서도 201파운드 이상의 가치를 지닐 수 있었다. 이럴 때는 은행권 210파운드를 기니 금화 200개로 바꾼 다음 금융시장에서 기니 금화를 더 많은 액수의 돈과 바꾸면 더 높은 이윤을 올릴 수 있었다.” 이것은 비공식적이지만 강력한 통제 시스템이 되었다. 저자는 이것을 ‘금의 견제효과’라 부른다.

금의 견제효과 때문에 영국의회의 보고서는 금은 단순히 국내의 화폐만을 위한 기본이 아니라 선언한다. “금은 자국 화폐와 외환 환율의 가치를 모두 결정하는 진정한 조정자다.” 그렇기 때문에 “잉글랜드은행은 금값의 상승과 외환시장에서 파운드화의 약세현상이 보내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신호에 반응해야 한다. 이런 신호가 나타나면 잉글랜드은행은 신용대출을 즐여서 화폐 공급량의 증가를 제한해야 한다.” 중앙은행의 역할은 금본위제의 규칙에 따라 통화의 가치를 수호하는 것이란 말이다. “금값이 오르는 것은 돈의 양이 지나치게 많은 증거이다”

“금본위제의 근본은 자유시장이 금값의 변화를 통해 이 복잡한 작업을 정책 입안자들보다 더 잘 수행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엇다. 이런 구조 속에서 금은 통화량의 과잉이나 부족이 결코 발생하지 않도록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을 떠받치는 것이어야 햇다.”

“1800년대 초에 영국이 금본위제를 향해 첫발을 내디딘 후 금본위제가 점점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재산 축적을 위한 금의 수여는 엄청나게 늘었다. 그리고 이때 재산 축적용으로 금을 원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중앙은행들과 미국 재무부 등이었다. 금을 비축해 두는 것은 투자자본의 갑작스런 유입이나 다른 금융센터로의 갑작스러운 유출에 대비하기 위한 중요한 방어수단이었다. 경제활동과 국제 무역 및 투자가 엄청나게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금을 비축하는 것은 국가가 행동의 자유를 확보하고 새로운 자본을 자국으로 끌어들이는데 필수적이었다. 창구에 와서 금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즉시 금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은 ‘안전한 돈’과 ‘안전한 은행’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금을 벌어들이는 나라는 높은 평판을 얻은 반면 금을 잃는 나라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 곳으로 여겨졌다.”

금을 얻고 잃는 것은 요즘식으로 말하면 무역적자를 내는가 흑자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그 나라의 경제력과 신용의 척도로 여겨진 것이다. 금본위제는 영국이 만든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시행착오의 우연을 통해 창조되었다. 그러나 그 우연의 창조물은 일단 자리를 잡은 후엔 일종의 종교가 되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가 유럽의 정체성을 상징했듯이 금본위제는 유럽의 정체성이 되었으며 유럽의 번영을 보장하는 축복이며 번영을 위해선 지켜야만 하는 교리가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금본위제를 채택한 국가들은 일종의 친목회 같은 것으로 발전했다. 이 그룹은 회원들이 국경 너머에 있는 세상이 강요하는 위험과 불확실성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해주는 배타적이고도 부러운 집단이었다. 영국은 이 그룹에서 특권을 가진 회원이었다. 아니 이 그룹을 만든 나라였다.”

이 클럽이 만들어진 과정은 이런 식이엇다. “독일은 대영제국의 식민지로부터 수입하는 원자재 대금을 지불하는데 점점 더 많은 파운드화가 필요해지자 이 수요를 맞추기 위해 영국과 똑 같은 시스템을 채택하고 싶어햇다. ‘우리는 금을 선택햇다. 금이 금이기 때문이 아니라 영국이 영국이기 때문이다'”

“화페들은 특정 무게의 금에 붙여진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화폐는 국경을 넘어 아무 문제없이 유통될 수 잇었고 화폐를 따라 상품과 사람이 자유롭게 어디든 이동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를 말할 때 세계화란 말을 쓴다.

금은 1차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계경제를 관리했다. “정부가 아무런 안전망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체제 속에서 금본위제가 투기, 과잉투자, 지나친 경쟁으로 인한 불가피한 위기의 확산을 막아주었다. 금의 유출은 위험 신호 역할을 해서 중앙은행들이 곧 금리를 올리는 방어적인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만약 이런 조치가 상황을 제어하는 데 실패하면 중앙은행들이 개입해서 서로를 돕는 경우가 비일비재햇다. 신용에 대해선 의문을 품을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기 전에 다른 나라들이 신용대출을 해주겠다고 나선다는 것을 의미햇다. 그 결과 위기가 완화되면 이러한 대출금을 되갚는 것이 가능해졋고 시스템 전체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앙은행들이 “서로 협조한 것은 고정된 교환율로 태환성을 유지하는 것이 경제정책의 기초하는 전제 때문이었다. 이 전제 앞에서는 다른 모든 문제들이 일단 뒤로 물러나야 햇다. 금본위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신용도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한 나라가 금본위제를 버리거나 금의 등가성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믿음-와 그러한 신용도가 보증하는 협조에 대한 믿음이엇다.”

당시를 말하는 벨르 에포크(Belle Epoch)란 말 그대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시스템은 국가의 통화량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사람보다 금을 위에 놓은 것”이라 말한다.

“만약 한 나라의 금이 외부로 유출된다면 외국의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금리를 올려야 하고 수입을 감소시키기 위해 국내경제를 억눌러야 한다.” 금이 유출된다는 것은 적자를 보고 있다는 말이다. 외환위기를 겪었을 때 IMF의 처방은 바로 적자를 보면서 흘러나가는 준비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금본위제 시대부터의 처방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겪었듯이 “여기에는 어떤 안전망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이윤이 급속하게 줄어든 기업은 물론 일자리를 잃거나 임금을 삭감당한 노동자들에게도 전혀 반갑지 않은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게임의 법칙이었다. 국내경제의 안정과 높은 고용률이라는 목적이 금 보유량을 방어한다는 목적보다 우위를 차지했더라면 금본위제 시스템은 도저히 살아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금본위제가 다시는 부활할 수 없었던 이유이다.

“이때가 빅토리아 여왕과 에드워드 7세의 시대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이라면 터져나왔을 법도 한 정치적 항의는 19세기 유럽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앗다. 비록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될 정도에 불과햇다. 심지어 경제학자들 사이에ㅐ서도 거시경제학적인 견해와 경기순환 분석은 주류 이론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햇다. 이러한 관심을 표현한 것은 맑스 같은 재야의 인물들 뿐이었다.”

정치가들이 그런 재야의 목소리를 무시하기 힘들어졌을 때 그리고 그런 목소리가 더 이상 재야에 머물지 않게 되었을 때 금본위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1차대전과 함께 금본위제의 조건들 대부분은 산산조각이 났다. “정치적 동맹, 정부의 재정, 대외채무, 세계금융에서 영국의 지도적인 위치, 산업 효율성의 상태 등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잇었다.”

그러나 “국제적인 금본위제는 마치 잃어버린 낙원의 추억처럼 과거 속에서 희미하게 반작이며 빅토리아 시대와 에드워드 시대의 안정, 조화, 우아함에 대한 모든 향수를 상징하고 있다. 이 향수에 덧붙여진 광채는 과거에 대한 헛된 환상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이었다.” 그 현실이 바로 눈앞에 있던 과거의 영광이었기에 금본위제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을 때도 사람들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1918년의 휴전 이후에도 금본위제는 너무나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1차 대전이라는 피투성이 전쟁이 가져온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진에 의해 금본위제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어버렷다는 생각을 감히 입 밖에 낸 사람은 없었다. 아니 이런 사실을 눈치챈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거의 모든 나라가 금본위제를 회복하기 위해 엄청난 정치적 위험을 감수햇다.”

그러나 금본위제를 되살리려는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대공황이라는 거대한 재난을 낳았고 금본위제는 자유주의 자본주의와 함께 사라지면서 벨르 에포크 시절의 첫번째 세계화는 막을 내린다.

“1930년대의 대공황은 1913년에 정점에 달했던 첫 번째 세계화의 종식을 가져왔다. (금본위제의 종말과 함께) 자본의 국제 이동은 사라졋고 국제무역을 위한 자금조달은 대단히 어려워졋으며 각국은 앞 다투어 보호주의 장벽을 구축햇다.” (아글리에타) 금본위제를 대체할 국제질서가 사라지면서 세계질서가 와해되었고 “다자주의는 종식되었으며 세계무역의 마비로 인해 금융위기로 초래된 경제위기는 더욱 심화되었을 뿐이다. 독일은 나치당의 지권과 더불어 경제 전반의 국가화를 선택햇다. 게인스식 해법을 채택한 미국은 뉴딜을 시행하고 대외 관세장벽을 더 높여 오로지 자국의 규칙에만 따르는 금융 시스템을 다시 구축했다. 다른 한편 프랑스가 주도하던 금 블록의 가맹국들은 디플레이션 함정에 빠졌다. 1929년의 위기는 세계경제의 완벽한 파멸, 국제관계ㅔ의 붕괴 및 각국의 민족주의로의 복귀로 귀착되엇다.” (아글리에타)

저자는 디즈레일리의 말을 인용하면서 금본위제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린다: “1895년 그는 글래스고 상인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영국이 상업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리며 번영할 수 있는 것이 금본위제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망상일 뿐이다. 금본위제는 우리가 이룩한 상업적 번영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라고 말했다. 인류 역사상 여러가지 상황들이 한데 합쳐져서 세계적인 경제 시스템이 사람들의 기대대로 기능할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면 바로 이 시기가 그런 시대였다.

금본위제로의 회귀를 위한 몸부림에 자극이 되엇던 것이 전쟁 이전 시대에 대한 향수였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화폐의 역사에서 그 단순함과 우아함이 단연 돋보이는 시스템에 대한 욕망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금이 모든 것을 제대로 된 모습으로 되돌려줄 것이라는 생각은 앞뒤가 바뀐 생각이엇다. 금이 모든 것을 제대로 된 모습으로 되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애당초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고 잇을 때만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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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뇌 - 하버드대 뇌과학자의 뇌졸중 체험기
질 볼트 테일러 지음, 장호연 옮김 / 윌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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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저자의 뇌졸증 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뇌졸증은 드문 것도 아니고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나 “뇌졸증을 겪은 뇌과학자라니, 얼마나 기막힌 처지인지.” 바로 그 기막힌 처지 때문에 이책은 특별하다. “내가 알기로 신경해부학자가 직접 중증 뇌출혉을 겪었다가 나은 사연을 기록한 책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사연은 뇌를 다룬 개론서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뇌졸증으로 좌뇌가 망가진 저자는 언어능력을 잃어버리고 계산능력도 시간감각도 자아정체성도 잃어버린다. 끔찍한 일이다. 한 때 잘 나가는 하버드대의 학자가 세상과 소통할 수단을 모두 잃어버리고 아기만도 못하게 되다니.

“여러분의 타고난 능력이 체계적으로 하나씩 의식에서 사자져 가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보라.

먼저 여러분의 귀로 들어오는 소리를 분간하는 능력이 사라졌다고 생각해보자. 귀가 들리지 않는 게 아니다. 그저 소리가 혼돈스러운 소음으로 들리는 것뿐이다. 둘째로 눈앞의 대상의 명확한 형태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지워보자. 눈이 먼 게 아니라 3차원으로 보거나 색을 알아보는 능력이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움직이는 대상을 따라가거나 대상들 사이의 명확한 경계를 구분하는 능력 또한 사라진다. 게다가 보통 때라면 그냥 지나칠 만한 냄새가 증폭되어 여러분을 압도하기 때문에 숨을 쉬기조차 어려워진다.”

“읽는 법을 다시 배우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도 힘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전에 읽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S를 보여주며 ‘이것은 S야’라고 말햇던 기억이 난다. ‘아니야, 엄마, 그건 그냥 꼬불꼬불 쓴 거잖아.’ 그러자 엄마는 ‘이 꼬불꼬불한 글자가 S야. 스으으라고 소리나지’라고 했다. 나는 어머니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냥 꼬불꼬불한 그림일 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앗다.”

“깨끗한 접시를 선반에 차곡차곡 정렬하려면 놀랍게도 계산 능력이 필요했다. 나는 접시를 깨끗이 씻는 일은 해냈다. 그러나 다 씻은 접시들을 작은 선반에 말끔하게 집어넣으려고 계산을 시작하자 아찔하리만큼 머릿속이 복잡해졋다. 그 방법을 알아내는데 거의 1년이 걸렸다.’

“흥미로운 것은 내가 글자를 타이핑하고 나서(우뇌) 방금 쓴 것을 읽지 못한다는 점(좌뇌)이엇다.”

“사람들이 내 박사학위를 빼앗아갈까? 해부학에 대해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아!”

이후 예전처럼 회복되기까지 저자는 8년을 소비해야 했다. 뇌출혈로 죽은 뉴럼은 거의 없었다. 단지 뉴런들의 네트웤이 교란된 상태엿고 다시 네트웤을 잇기 위해 자극을 주면 되는 일이었다. 물론 말은 간단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다시 유아기로 돌아가 사실상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할 판이었다. 나는 완전히 기본으로 돌아갔다. 걷는 법, 말하는 법, 읽는 법, 쓰는 법, 퍼즐을 맞추는 법을 배웠다. 신체의 회복 과정은 정상적인 발달 단계와 비슷했다. 각각의 단계를 익혀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식이엇다.”

8년 동안 저자는 하나씩 예전 기억들과 능력들을 되살릴 수 있었고 다시 유능한 학자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8년이 지나고 나서도 수리능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뇌출혈로 수리를 담당하는 뇌세포들이 파괴된 것이다. “4년째에 접어들자 뇌가 덧셈에 다시 반응을 보였다. 6개월 정도 더 지나자 뺄셈과 곱셈이 가능해졌다. 나눗셈은 5년차가 될 때까지도 힘들었다.”

그러나 저자는 좌뇌가 망가진 끔찍한 상황에서도 예전처럼 돌아가야 하는지 망설여 졌다고 말한다. “회복하기로 마음먹는 것은 쉽지 않은 인지적 결단이었다. 나는 영원한 우주의 흐름에 몸을 맡긴채 더 없는 희열을 느끼는 것이 좋았다. 누군들 안 그랫겠는가? 그곳은 아름다웠다.. 내 영혼이 자유롭고 거대하고 평화롭게 빛났다. 나를 집어삼킨 희열에 빠져 회복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질문해야 했다.”

거의 예전으로 회복되었을 때 “마침내 내 몸에 대한 자각이 유동체에서 고체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 자신이 유동체로 지각되던 때가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 자신이 유동체여서 좋았다. 내 영혼이 우주와 하나이며 주위의 모든 것과 함게 흘러가는 것이 황홀햇다.”

저자가 느낀 황홀함을 요가학파들은 ‘자나(황홀경)’라 부른다.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만큼 내적인 영성을 철저하게 추구한 경우는 없었다. “축의 시대의 중요한 통찰들 가운데 하나는 ‘성스러움’이 단순히 ‘저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바닥에 내재한다는 것이었다.”(카렌 암스트롱) 이러한 깨달음은 브라만과 아트만이 같다는 ‘범아일여’로 정식화된다.

그러나 범아일여를 깨닫기 위해선 폭력이 필요햇다. 저자가 뇌출혈로 좌뇌가 마비된 것과 비교될 만한 폭력이. 범아일여를 깨닫기 위해서는 “성스러운 것과 자기를 보호하려는 의식적인 자아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불연속성”을 깨야 했다. “거룩한 존재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끔 문명화된 개인의 정상적인 반응을 부정하고 세속적인 자아에 폭력을 휘둘러야 했다.

요가 수행자들은 정상적인 사고 과정을 파괴하고 사고와 감정을 없애소 깨달음에 저항하며 버티는 무의식적인 바사나를 제거할 때에만 ‘자아’가 해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카렌 암스트롱)

우리가 아는 요가는 건강체조에 가깝다. 그러나 요가의 목적은 건강을 위해서도 아니고 내공을 쌓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을 부수기 위한 기술로 개발된 것이다.

요가 수행의 초기단계에서 “수행자는 음악, 특히 스스로 연주하는 음악을 듣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웅장하고 고아대하며 차분하면서도 고상한 영역에 들어선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마치 자신의 몸을 소유한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러한 느낌이 아마도 저자의 좌뇌가 무너졌을 때 느낌일 것이다.

요가 수행 최고의 경지는 이렇게 묘사된다. “수행자가 정말로 능숙하면 자나의 단계들을 넘어서 네 개의 아야타나(四空處)에 들어갈 수 있다. 이 상태는 매우 강렬해서 초기의 요가 수행자들은 자신이 신들이 사는 영역에 들어왔다고 느꼈다. 요가 수행자는 네 개의 정신 상태를 차례로 경험하면서 존재의 새로운 양식에 진입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는 무한에 대한 느낌(空無邊處)이다. 두 번째는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순수한 의식(識無邊處)이다. 세 번째는 부재에 대한 인식(무소유처(無所有處)이며 이것은 역설적으로 풍요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오직 재능이 뛰어난 요가 수행자만이 이 세 번째 아야타나에 이를 수 있었다. 이 단계는 ‘무(또는 空)’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세속적으로 경험하는 존재의 형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다른 존재가 아니다. 이것을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말이나 개념은 없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무’라고 부른 ㄴ 것이 더 정확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방 안에 걸어들어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묘사한다. 그럴 때 우리는 공허, 공간, 자유를 느끼게 된다.

일신교에서도 신을 경험하는 일에 대해 비슷한 언급을 햇다.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인간의식에서 거룩한 것의 가장 고양된 방출상태를 ‘무’라고 했다. 신은 단지 또 다른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나 거룩함과 마주치는 것은 말로는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한 경험이기 때문에 언어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신비주의자들은 그 ‘다름’을 강조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이런 종류의 부정적 용어법을 채택했다. 요가 수행자들은 그들의 존재의 핵심에 자리잡고 잇는 무한한 ‘자아’를 마침내 경험하게 되었다고 상상했을 것이다.” (카렌 암스트롱)

저자가 느낀 평화와 기쁨, 행복, 우주와의 일체감은 영적 체험의 느낌과 거의 일치한다. 물론 저자가 요가의 최고 경지를 느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경험은 영적 체험이 신경학적인 근거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체험은 뇌과학 서적에서 종교적 체험을 설명할 때 거론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종교적 혹은 영적 경험의 밑바탕에 있는 신경해부 구조가 확인되었다. 우리가 개인의 존재에서 벗어나 우주(신, 열반, 극도의 행복감)와 하나가 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 뇌의 어느 부위가 관여하는지 확인된 것이다.

티벳 수도승과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녀들을 불러 SPECT 기계 안에 들어가 명상을 하거나 기도를 올리게 햇다. 이어 명상이 절정에 달하거나 신과의 합일을 느끼는 순간, 실을 잡아당시도록 했다. 이 실럼을 통해 뇌의 특정 부위의 신경 활동이 달라지는 것이 확인되었다.” 좌뇌의 언어중추와 공간지각, 자아중추가 침묵한 것이다.

이때의 경험은 저자의 좌뇌가 마비되고 우뇌가 의식을 지배할 때와 비슷한 상태이다. 저자가 “몸을 고체가 아니라 유동체로 지각하고 우주와 하나가 되는 기분을 느낀 것”이 신경학적으로 설명 가능해진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세상 모든 번뇌로부터의 해방감”이라 말하며 “열반과 같은 느낌일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책에서 자신의 체험을 종교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단지 자신의 체험을 삶에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교훈으로 받아들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뇌졸증 경험으로 축복에 가까운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누구든 언제라도 깊은 마음의 평화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열반과도 같은 경험이 우뇌의 의식 속에 존재하며 언제라도 스스로 뇌의 그 부분에 접속할 수 있다고 믿는다.”

“뇌졸증이 나에게 가르쳐준 최고의 것은 감정을 몸으로 느끼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기쁨의 감정이 내 안에 있었다. 평화의 감정이 내 안에 있었다.” 그러나 좌뇌의 힘이 점차 강해지면서 예전의 감정이 돌아왔다. “판단은 몸이 어떻게 느끼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분노, 좌절, 공포 같은 감정이 몸 안에 차오르면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어떤 감정 프로그램을 되찾고 싶고 어떤 감정 프로그램(조바심, 비난, 불친절)에 발언권을 부여하고 싶지 않은지 무척 까다롭게 골랐다. 뇌졸증은 내가 세상에서 누구이고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지 선택할 수 있게 해준 놀라운 선물이었다. 사고 이후 나는 내게 선택의 권리가 있다는 걸 실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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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지배 - 세계 금융사 이야기
니얼 퍼거슨 지음, 김선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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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초판은 꽤 전에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이책은 2008년에 쓰여진 개정판이다. 초판을 보지 못햇기 때문에 내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겟지만 아마 글로벌 금융위기와 차이메리카를 반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저명한 금융사학자인 저자의 책인 만큼 이책은 상당히 잘 쓰여져 있다. 금융제도가 태어난 순서에 따라 은행, 채권, 주식, 보험, 부동산 그리고 세계금융시스템을 차례대로 다룬다. 이 모든 제도를 300페이지 조금 넘는 분량에 담는다고 하면 의아할 것이다. 너무 적지 않은가?

적기는 적다. 그러나 저자의 금융사 학부강의 역시 한학기에 그 제도들을 다 다루기에는 너무 잛은 것은 다를 것이 없다. 짧은 분량에 그 많은 내용을 담기 위해 저자는 그 제도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경로를 거치면서 진화했는지를 압축적으로 요령있게 요약해 보여주면서 챕터의 끝에서는 오늘날 그 제도가 어떤 모습인가를 자신이 직접 발로 뛰며 본 실제 사례를 들면서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끝난다.

말하자면 학부 금융사 강의 노트라 할 수 있다. 물론 학부 강의에서는 느끼기 힘든 생생함이 있고 역사학자인 만큼 재미있는 스토리들로 채워진다. 잘은 모르지만 저자의 다른 책들처럼 방송 다큐멘터리용 대본으로 만든 책으로 보인다. 이책의 분위기는 그러니까 강의록보다는 방송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같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방송 프로그램처럼 생생하고 장면 전환이 빠르다고 보면 된다.

강의록이든 방송대본이든 이책은 전문가를 위한 책이 아니다. 에필로그에는 금융사학자로서 행동경제학과 진화론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적기는 하지만 이책은 전문가를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

그러면 저명한 학자가 이런 책을 쓸 이유가 있는가? 이유가 잇다. 다른 금융사 입문서들과 이책의 내용은 그리 차이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대중적으로 쉽게 쓰였기 때문에 이책의 내용이 더 소략할 것이다. 그러나 그 간략하게 줄여진 내용을 재미있게 만들고 그러면서 왠만한 금융사 서적들보다 깊이가 부족하지 않게 만드는 솜씨는 분명 거물의 솜씨이다.

예를 들어 금융사에 자주 거론되는 스페인 제국의 몰락,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하이퍼인플레이션, 미시시피 버블, 로스차일드 가문, 복지국가의 해체 등의 이야기는 새삼스러울 것이 전혀 없는 이 장르의 클리셰이다. 그러나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이책은 유감없이 보여준다. 재미있게 이야기를 재구성하면서 더해진 자신만의 해석은 쉬운 책일수록 쓰기 어렵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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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전후 유럽경제
찰스 페인스틴 & 피터 테민 외 1인 지음, 양동휴 외 2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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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1차대전의 충격 때문이엇다고 이책의 저자들은 말한다. 두 번의 대전 모두 전비지출이 GDP의 반 이상이었고 막대한 파괴가 있었다. 그러나 2차대전의 충격은 더 컸는데 왜 2차대전 이후엔 전무후무한 황금기가 왔고 1차대전 이후엔 대공황이라는 재앙이 왔는가? 이책의 질문이다. 저자들은 전쟁의 충격에 대한 대응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사상최초의 총력전이었던 1차대전의 결과 세계경제의 수요와 공급 질서가 교란되었다. 먼저 전쟁준비로 동원된 산업의 생산설비가 폭증된 상태였다. 그러나 전쟁수요가 사라지면서 전시에 증설된 설비는 과잉설비가 된다.

또 다른 문제는 전쟁기간 동안 미국이나 일본과 같이 전장에서 비켜있던 나라들이 유럽의 시장을 잠식해들어가 전쟁이 끝났을 때는 시장 자체가 줄어 있었다.

그러나 전장에 대규모로 징집되었던 “남자들은 참호 속에서 전투하는 동안 전례 없던 다양한 종류의 대중선동에 노출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다수의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방법을 습득햇다. 종전 후 지배계급들이 대중운동의 실체를 무시하고 과거의 안이한 엘리트 정치로 복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햇다.” 그 결과 노동계급의 과격화, 노동운동의 확대가 있었다. 줄어든 수요에 공급이 조정되기는 어려웠다는 말이다.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예산의 폭증이었다. 급진화된 요구에 따라 사회보장비, 실업수당이 예산에 더해진데다 전후복구비용이 얹혀졌지만 세입이 늘어날 길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전시예산으로 풀린 막대한 통화량에 적자예산이 더해졌다.

예를 들어 전후 독일을 초토화시킨 초인플레이션을 촉발한 것은 지폐의 과잉발행이엇고 그 이면에는 거액의 재정적자가 있었다. “문제의 핵심은 정부지출의 대폭 증가에 있었다. 그리고 정부지출 증가는 전쟁 기간 동안 차입에 크게 의존한 것과 전후 경제, 사회적 프로그램들이 커다란 규모의 지출을 필요로 한데서 비롯되었다. 정당들은 힘이 약했기 때문에 이러한 지출 압력을 막아낼 수 없었다. 양쪽 이해당사자들은 완전히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출에 필요한 세금 부담이 노동과 자본에 어떻게 할당되어야 하느냐에 대해 어떤 합의도 이룰 수 없었다. 따라서 지폐를 인쇄하는 것만이 그런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적어도 처음에는 많은 대립적 사회집단들이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비용보다는 이익이 더 크다고 주장 할 수 있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패전국의 초인플레이션은 극단적인 예이지만 당시 전쟁을 치룬 모든 나라에서 인플레이션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본위제로 돌아간 것이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금본위제로 복귀한다는 결정은 통화를 안정시켜 인플레이션을 잡으면서 환율도 안정시켜 전전처럼 무역질서를 회복하여 전전의 번영으로 돌아가려는 의도였다.

“19세기말은 금본위제를 바탕으로 하는 국제지불체계가 상대적으로 제 구실을 하던 시키였다. 런던은 안정화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필요한 경우 서로 협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노동과 자본이 대규모로 이동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생산요소는 국제적으로 거의 완전히 자유롭게 이동하였다. 이것이 19세기의 국제경제질서였다.”

금본위제로 인플레는 잡힌다. 문제는 금본위제가 전쟁의 충격을 증폭했다는 것이다. 20년대 전반기의 불황은 인플레 때문만이 아니라 전쟁의 충격으로 공급 초과상태인 시장상황 덕분이기도 했다. 금본위제는 공급초과로 인한 디플레이션 상태를 더 악화시켜 부족한 수요를 더 줄여버렸다.

“전전 평가 수준에서 금본위제로 조기 복귀하기 위해 디플레이션 조치를 위했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성장이 제한되었다. 그러한 정책을 달성하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높은 이자율은 투자를 위축시키고 생산확대를 방해했다. 그리고 통화의 과대평사로 수입품은 더욱 저렴해지고 수출품의 경쟁력은 약화되었다ㅓ. 물가 하락으로 전시와 전쟁 직후 정부와 민간 기업이 진 대규모 부채의 이자부담은 온전히 유지되었다.”

“1920년대 말부터 유럽과 세계 대부분 지역은 더욱 빠르게 대공황의 수렁으로 빠져 들었다. 계속되는 은행위기, 팔리지 않는 식료품재고의 증가, 수출시장의 붕괴, 버려진 공장, 그리고 일자리나 구호자금을 절망적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의 점점 길어지는 행렬 앞에서 은행가, 정치가, 기업인, 농민 모두 무기력하게만 보였다.”

저자들은 공황으로부터 탈출하려면 금본위제의 포기만이 유일했다고 말한다. 금본위제를 일찌기감치 포기한 영국은 가장 먼저 공황에서 탈출했다. 금본위제에서 어느정도 벗어났느냐에 따라 회복속도와 정도가 결정되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저자들은 전후의 디플레이션이 대공황으로 악화된 원인을 4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가장 근본적으로 전쟁의 충격이 세계시장에 구조적 불균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구조적 불균형은 전전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시절에는 제대로 작동했던 금본위제와는 맞지 않는 환경을 만들었다.

둘째 금본위제는 본질적으로 국제시스템이다. 그러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시스템의 지휘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전후 “런던은 더 이상 아니며 워싱턴은 아직 멀었다.” 말처럼 영국은 전전과 같은 헤게몬의 역할을 맡을 능력이 없었고 그런 능력이 되는 미국은 그럴 의지가 없었다. “리더십 부족의 구체적인 경제적인 함의는 국제적 최종대부자로 행동함으로써 전세계 금융환경을 안정시킬 의사와 능력을 함께 갖춘 나라가 없었다는 것이다.”

셋째 미국, 양국, 프랑스, 독일이 국제적으로 협력하지도 않았고 그들간에 정책 조정에도 실패햇다. 서로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며 제한된 양의 통화용 금을 확보하려 했기 때문에 국제수지가 적자인 나라 뿐 아니라 흑자인 나라까지 통화긴축정책을 쓰게 만들었고 그 결과 디플레이션 압력이 가중되었다. 이기적인 협력 부재는 대공황이 터지고 나서도 사태를 더욱 악화시켜 국제통화체계를 해체시켰고 무역이 붕괴되면서 대공황을 더욱 심화시키고 장기화시켯다.

넷째 전후의 구조적 불균형과는 어울리지 않는 금분위제에 집착한 금융 이데올로기를 지적한다.

그러면 왜 2차대전의 결과는 1차대전과 달랐는가? 저자들은 대공황의 교훈이 위에서 열거한 4가지 조건을 뒤집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2차대전의 전후 처리 가운데 국제적 부분은 전간기를 지배햇던 조건들을 뒤집으려는 미국과 영국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1930년대의 쓰라린 교훈이 생생히 기억되엇다. 이 때의 목표는 완전히 다른 국제경제관계의 틀, 즉 각국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상호 이익을 위해 협조적으로 무역과 투자활동을 하도록 함으로써 국내 경제활동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틀을 만드는 것이엇다. 그러한 협력으로 얻을 경제적 이익은 세계평화 증진에도 기여하리라는 믿음에 의해 증폭되엇다.”

“미국은 현명하게도 베르사이유 이후 자신들이 견지했던 태도에서 벗어나 번영에 이를 다리 역할을 할 책임을 스스로 인식햇다. 원조와 차관 제공 조건에 관한 협상에서 약간의 마찰은 불가피햇다. 그러나 전시채무와 배상금에 관해 1918년 이후에 겪었던 갈등과는 엄청난 대조를 이루었다.”

“20세기 유럽경제사에 관한 우리의 연구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 중의 하나는 성장과 번영은 다자간 무역, 조절된 호나율의 유연성, 국제금융협력의 환경이 존재하는 시기에 달성되지 반대로 관세장벽, 무역전쟁, 금융의 경직성, 갈등적 통화지역 등이 존재할 때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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